유리 빛이 우리를 비추면
사라 피어스 지음, 이경아 옮김 / 밝은세상 / 202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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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생 아이작의 약혼파티에 초대받은 영국 데번 경찰서의 강력계 형사 엘린은 남자친구 윌과 함께 알프스 고지대에 위치한 르 소메 호텔을 방문합니다. 그런데 다음날 아이작의 약혼녀이자 호텔 부지배인인 로라가 실종됩니다. 안 그래도 객실직원 아델이 종적을 감춘 직후라 모두들 불안해하는데 공교롭게도 폭설과 함께 눈사태 예보가 발표되고 대피령이 내려지면서 호텔엔 미처 피신 못한 일부 직원과 투숙객만 남게 됩니다. 경찰은 물론 헬기의 접근마저 통제된 와중에 수 년 전 실종됐던 인물의 사체가 발견되고 또 다른 실종자가 발생하자 엘린은 현지 경찰과 검찰의 허가를 받아 단독 수사에 나섭니다. 



알프스의 풍광을 조망할 수 있는 넓은 통유리와 극단적인 미니멀리즘을 구현한 인테리어로 유명한 5성급 호텔이 폭설과 눈사태로 고립된 뒤 끔찍한 연쇄살인의 현장으로 돌변한다는 설정은 곧장 애거서 크리스티의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를 떠올리게 합니다. 출판사 소개글은 알프레드 히치콕의 ‘싸이코’와 스티븐 킹의 ‘샤이닝’까지 소환했고, 해외에서의 성과와 실적도 꽤 뛰어났음을 강조합니다. 외형만 보면 구미가 당기지 않을 수 없는데, 520여 페이지의 분량에 미스터리와 서스펜스에 심리 스릴러 서사까지 골고루 버무려놓았지만 결론부터 말하면 기대 대비 아쉬움이 크게 남은 작품입니다.


작가는 사건의 무대인 르 소메 호텔과 주요 인물들의 ‘과거’와 ‘비극’에 큰 공을 들였습니다. 지금은 화려한 5성급 호텔로 탈바꿈했지만 과거 결핵 환자를 위한 요양원이었던 곳에서 엽기적인 연쇄살인이 벌어진다는 점은 초반부터 독자의 호기심을 사로잡습니다. 첫 챕터부터 호텔로 개축되기 전, 폐허나 다름없던 요양원에서 기괴한 인물이 벌이는 살인 장면이 호러물 스타일로 그려지는데, 덕분에 독자는 ‘호텔의 과거’에 주목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 작품의 원제 ‘The Sanatorium’은 요양원이란 뜻입니다)

또한 사방이 고립된 상황에서 단독수사에 나선 영국 형사 엘린을 비롯하여 주요 인물들 모두 유년기 혹은 청년기에 겪은 사건으로 인해 지금도 참혹한 악몽에 시달리는 것으로 설정됐는데, 그로 인해 “엽기적인 연쇄살인범은 누구?”라는 의문 못잖게 그들의 과거사에 시선이 쏠릴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과유불급이란 말이 여러 번 떠오를 정도로 작가는 무대와 인물들의 과거에 지나치게 집착하는데, 다 읽고 돌이켜보면 그럴 수밖에 없었다고 이해되는 대목이 일부 있긴 하지만, 대부분은 오히려 리얼리티를 떨어뜨리거나 책읽기를 지루하게 만들어서 역효과만 일으켰다는 생각입니다. 특히 20여 년 전, 8살에 세상을 떠난 막내동생의 죽음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엘린의 트라우마는 작가가 가장 공을 들인 설정임에도 불구하고 동어반복에다 공감하기도, 이입하기도 어려워서 내내 방해물처럼 여겨지기만 했습니다.


주요 인물들이 용의선상에 오르내리기를 반복하며 긴장감을 높이긴 하지만, 메인 사건 역시 물 흐르듯 이어진다기보다는 억지로 갖다 붙이거나 ‘뒷북 설명’식으로 전개되는 경우가 많았고, “범인이 굳이 그렇게 난해한 살인방식을 선택할 이유가 있었나?” 또는 “굳이 고립된 5성급 호텔이라는 공간이 필요했나?”라는 의문이 들기도 했습니다. 막판에 밝혀지는 범인의 동기 역시 작가가 독자를 설득하기 위해 부연설명을 여러 차례 ‘덧칠’한 느낌이 든 게 사실입니다.

엘린의 수사는 딱히 단서에 집중하는 것도 아니고 ‘형사의 감’에 의존하는 것도 아닌, 시종 모호한 태도를 취해서 마지막 순간에 범인을 특정하는 단계까지 좀처럼 따라가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또한 아마추어보다는 뛰어나지만 프로라고 하기엔 어딘가 어설퍼 보이는 캐릭터와 과도하게 강조된 막내동생에 관한 트라우마는 주인공으로서의 그녀의 매력을 감소시킨 주요 원인입니다.


내용에 관해선 거의 언급을 하지 못했는데, 인물과 사건 모두 꽤 복잡하게 설정된 데다 조금만 공개해도 스포일러가 될 대목들이 워낙 많기 때문입니다. 

꽤 혹평에 가까운 서평이 되고 말았지만, 독자에 따라 높은 평점을 주는 경우도 적잖을 거란 생각입니다. 이 작품이 해외에서 거둔 성과와 실적이 괜한 것은 아닐 테니 관심 있는 독자라면 다른 분들의 서평도 꼭 참고해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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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기 전에 벌한다
야쿠마루 가쿠 지음, 권하영 옮김 / 북플라자 / 202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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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시청 5계의 사냥개’라 불리는 아오이 료는 재발된 위암으로 시한부 선고를 받지만, 여성만을 노리는 연쇄살인범을 잡기 위해 악전고투합니다. 한편, 오래 전부터 불쑥불쑥 폭발하곤 하는 살인 욕구를 가까스로 억제해온 사카키 신이치는 8년 만에 재회한 옛사랑 스미노에게마저 살의를 느끼자 무엇이 자신을 이렇게 만든 건지 알 수 없어 혼란에 빠집니다. 그러던 중 말기암 선고를 받고 절망한 신이치는 죽기 전에 자신의 욕구를 마음껏 터뜨리기로 결심합니다. 유년기의 신이치를 완전히 망가뜨려놓은 사건의 당사자이기도 한 스미노는 죽음을 앞둔 그의 곁을 지키려 하지만, 한편으론 과거의 끔찍한 기억 때문에 두려움을 느끼기도 합니다.



일본에서 2012년에 출간된 이 작품은 한국에선 2019년 ‘데스 미션’(민경욱 옮김, 크로스로드)이란 제목으로 출간된 적 있습니다. 원제는 사명(死命)인데, 사전적 의미는 ‘죽게 된 목숨’으로, 시한부 선고를 받은 두 주인공 아오이 료와 사카키 신이치의 안타까운 운명을 가리키기도 하지만, 동시에 사명(使命), 즉 ‘반드시 이뤄야 할 임무’를 뜻하기도 합니다. 료에게는 여성만을 노려 목 졸라 죽이는 잔혹한 연쇄살인범을 잡는 일이고, 신이치에게는 자신을 망가뜨리고 통제할 수 없는 살의를 심어놓은 ‘누군가’에게 복수하는 일입니다. 두 사람 모두 채 반 년도 안 남은 생명이 꺼지기 전에 스스로 부여한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 고통스러운 폭주를 감행합니다. 여기에 덧붙여 료의 안타깝고 비극적인 가족사와 신이치의 유년기를 망가뜨린 참담한 사건이 메인 스토리와 나란히 병행됩니다.


처음부터 범인을 공개한 탓에 엉뚱한 곳에서 연쇄살인범을 추적하는 료의 ‘헛발질’이 살짝 지루하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하루가 다르게 망가지는 몸을 이끌고 한발씩 신이치에게 다가가는 료의 집요함은 간혹 울컥함을 자아내곤 합니다. 사실 사건의 단서를 찾아내는 천부적인 후각과 범인을 잡고자 하는 집념에 사로잡힌 ‘5계의 사냥개’라는 경찰로서의 캐릭터도, 또 가족들과 불화에 빠진 가장으로서의 캐릭터도 다소 상투적이긴 하지만, 야쿠마루 가쿠 특유의 진정성 있는 묘사 덕분에 그 정도 상투성은 충분히 독자의 ‘용서’를 받을 수 있을 거란 생각입니다. 또 상부든 동료든 그의 추리에 반박하며 “왜?”냐고 물을 때마다 “형사의 감이다!”라고 자신 있게 주장하는 료는 어쩌면 한물 간 옛날 경찰의 마지막 세대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그의 ‘감’은 결코 막연하고 추상적인 게 아니라 분명한 근거와 단서를 갖고 있어서 그 어느 전형적인 경시청 수사1과 형사 캐릭터보다 매력적으로 다가옵니다.


이 작품의 마지막이자 가장 큰 미스터리는 “신이치의 유년기를 망가뜨린 사건은 무엇이며, 누가 ‘범인’인가?”입니다. 유년기의 한 시절이 기억에서 뭉텅 사라져버린 신이치는 살인을 저지를 때마다 그 시절에 관한 기억을 단편적으로 되찾곤 하는데, 눈치 빠른 독자라면 중반부쯤 그 기억의 전말과 ‘범인’의 정체를 예상할 수도 있겠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마지막 40여 페이지에 걸쳐 그려지는 신이치의 잃어버린 유년기의 비극을 읽을 때면 그 참혹함에 저절로 눈을 감고 싶어지는 경험을 하게 될 겁니다.

신이치의 범행은 용서받을 수도, 이해될 수도 없는 흉악함 그 자체지만, 단순한 쾌락살인마가 아님을 초반부터 인지한 채 책장을 넘기다 보면 어느 순간 그가 또 다른 살인을 저지르기 전에, 또 병마에 목숨을 잃기 전에 어떻게든 자신의 기억을 되찾고 폭주를 멈추기를 바라게 되는, 아이러니한 안타까움을 느끼게 됩니다.


‘데스 미션’이란 제목으로 이미 읽은 적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허술한 기억력 덕분에 거의 처음 읽는 기분으로 마지막 장까지 긴장감을 만끽할 수 있었습니다. 야쿠마루 가쿠의 팬으로서 신작이 아니라는 점이 무척 아쉽긴 했지만, 오랜만에 명품과 재회할 수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스런 책읽기가 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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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궐 - 제171회 나오키상 수상작
이치호 미치 지음, 민경욱 옮김 / 비채 / 202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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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그 이름을 들어본 작가지만 이 작품에 눈길이 끌린 몇 가지 이유가 있는데, 우선 ‘창궐’이라는 제목과 함께 “이것 봐, 세상은 한 꺼풀만 벗겨내면 추악해.”라는 띠지 카피가 잔혹하고 음울한 호러 액션물의 분위기를 물씬 풍겼기 때문입니다. 또한 출판사 소개글 첫 머리에 적힌 ‘코로나’와 ‘팬데믹’이라는 두 단어와 ‘제171회 나오키상 수상작’이란 타이틀 역시 기대감을 높인 이유들입니다. 다만 제가 예상한 서사와 ‘나오키상’이 잘 매치가 되지 않아서 과연 어떤 이야기가 펼쳐질지 무척 궁금했습니다. (출판사 소개글의 첫 머리와 굵은 글씨의 카피만 슬쩍 볼 뿐 상세한 소개글은 읽지 않다 보니 이 작품이 단편집이란 점도 모르고 읽기 시작했습니다)



결론부터 말하면 여섯 편의 단편으로 이뤄진 이 작품은 호러 액션물도 아니고, 코로나와 팬데믹 역시 한두 수록작을 제외하곤 ‘배경’ 정도의 역할만 할뿐 직접적인 소재로 등장하진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죄(罪,つみ)와 팬데믹(Pandemic)을 합성한 ‘ツミデミック’라는 원제가 붙은 건 코로나 자체 또는 코로나로 인해 망가진 사회가 (직접적으로든 간접적으로든) 부추긴 크고 작은 죄를 다양한 장르와 인물들을 통해 그려냈기 때문입니다.


수록작 가운데 절반은 호러, 판타지, 미스터리, 서스펜스 등 장르물의 성격이 강한 반면, 나머지 절반은 (‘옮긴이의 말’을 인용하면) “알 수 없는 공포에서 시작하지만 최악의 시간을 견뎌내고 아주 사소한 희망의 불씨를 찾아 돌아온다.”는 내용의 온기를 품은 휴먼 드라마입니다.

즉석 술자리를 가진 여성의 실체를 알곤 패닉에 빠지는 스무살 청년, 아이돌을 닮은 라이더와의 재회를 고대하며 배달앱에 중독된 아이엄마, 15년 전 자신이 죽음에 이르게 된 진상을 목격하게 된 유령의 이야기가 전자라면, 독거노인의 돈을 노린 소박한(?) 죄를 저지르다가 뜻밖의 상황에 놓이고 마는 남자, 여고생 딸의 임신과 옆집 여자의 출산과 자신의 출생의 비밀이라는 거듭된 충격에 당황하는 중년남자, 그리고 동반자살을 모의했다가 아이러니한 엔딩을 맞이하는 일행의 이야기가 후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실 대부분의 수록작은 코로나 또는 팬데믹이라는 배경이 없더라도 무방한 이야기들이지만, 그런 배경이 설정된 덕분에 리얼리티와 몰입감이 훨씬 더 강렬해졌습니다. 짧은 단편들임에도 불구하고 읽다 보면 마스크 없이는 외출할 수 없었던 그 시절이 생각나면서 바이러스 자체보다 팬데믹에 휘말린 사회가 내뿜는 악의와, 그 악의에 전염된 끝에 본연의 인격을 상실한 사람들의 일그러진 언행이 더 무서웠다는 걸 새삼 깨닫게 되는데, 등장인물들 모두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그래, 그 시절엔 그런 사람도 있었지.”라는 생각이 저절로 떠오르게 만드는 캐릭터를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개인적으론 장르물 서사를 품은 앞의 세 편이 인상적이었는데, 일본 드라마 ‘기묘한 이야기’ 같은 짧은 호러 영상물에 잘 어울리는 내용들이라 영화나 드라마로 만들어진다면 원작 못잖은 서늘함을 만끽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휴먼 드라마 스타일의 나머지 세 편도 팬데믹의 시간들을 돌이켜보며 읽는다면 단순히 평범하고 따뜻한 이야기 이상의 특별한 미덕을 즐길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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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리바이의 해부학
애슐리 엘스턴 지음, 엄일녀 옮김 / 문학동네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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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호사 남편 벤저민과 이혼하고 싶은 캐밀은 그의 가방에서 오브리라는 여자의 신상이 적힌 메모를 보곤 뷸륜을 의심하며 그녀를 찾아갑니다. 하지만 캐밀의 예상은 빗나갔고, 그 메모엔 벤저민이 은폐하려는 어떤 비밀이 담겨있음을 깨닫습니다. 한편 오브리는 캐밀과의 대화 도중 그녀의 남편 벤저민이 10년 전 부모를 죽게 만든 교통사고와 어떤 식으로든 연루돼있다고 믿게 됐고, 결국 두 사람은 ‘남편의 비밀’과 ‘부모의 죽음의 진상’을 알아내기 위해 손을 잡기로 합니다. 캐밀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는 벤저민의 눈길을 피하기 위해 12시간 동안 신분을 바꾼 두 사람. 하지만 그 사이에 벤저민이 살해당하면서 사태는 뜻밖의 방향으로 흘러갑니다.



‘알리바이의 해부학’은 도메스틱, 서스펜스, 스파이 등 다채로운 장르가 혼재된 스릴러 ‘첫 번째 거짓말이 중요하다’로 한국 독자와 처음 만났던 애슐리 엘스턴의 신작으로, 10년 전 교통사고의 진실을 추적하는 미스터리이자 살해당한 변호사 벤저민이 품고 있던 거대한 비밀을 파헤치는 스릴러 서사가 잘 배합돼있습니다. 특히 등장인물들의 알리바이를 미스터리의 핵심 고리로 내세운 정교한 설계가 돋보이는 작품입니다.


원한이나 치정에 기인한 사건으로 보이던 벤저민의 죽음은 실은 부와 권력을 거머쥔 한 가문의 부정과 부패에서 비롯된 비극이고, 오브리의 부모를 죽음으로 몰고 간 10년 전의 교통사고 역시 진실이 은폐됐다는 사실이 초반부터 공개되는데, 뒤늦게 이를 알게 된 캐밀과 오브리는 ‘신분 바꾸기’라는 알리바이 작전이 오히려 자신들을 옭아맬 덫이 되고 말았음을 깨닫습니다. 두 사람 모두 알리바이를 입증하려면 왜 ‘신분 바꾸기’를 공모했는지를 밝혀야 되는데, 그럴 경우 유력한 용의자로 몰릴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캐밀과 오브리 외에 경찰의 의심을 받는 인물은 얼마 전 벤저민으로부터 계약 해지를 통보받은 파트너 변호사 행크입니다. 벤저민의 죽음으로 현실적인 이익을 가장 많이 얻게 될 그에겐 알리바이라곤 전혀 없었기에 누구보다 앞장서서 진상을 알아내려 분투합니다.

이들 외에도 독자는 벤저민과 연관 있는 모든 인물을 의심할 수밖에 없게 되는데, 이야기가 전개될수록 벤저민은 말 그대로 ‘모두가 죽기를 바란 자’로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탄탄하게 구축된 미스터리 스릴러의 구조라든가 인물들의 심리와 사건 정황을 매끄럽게 묘사한 문장들은 전작 못잖게 눈길을 끌었지만, 사실 이 작품의 가장 큰 아쉬움은 몰입감을 수시로 끊어버리게 만든 ‘이야기의 구성 방식’입니다. 네 명의 화자(캐밀, 오브리, 행크, 벤저민)가 번갈아 1인칭 시점으로 이야기를 끌고 가는데다, 벤저민이 살해된 날과 그 앞뒤의 날들, 그리고 10년 전 교통사고가 난 날까지 과거와 현재가 짧은 템포로 뒤죽박죽에 가깝게 배치된 탓에 좀처럼 집중하기가 어려웠다는 뜻입니다. 대체로 이런 구성을 채택하는 이유는 긴장감을 고조시키고 반전의 강도를 높이기 위함인데, 이 작품의 경우 그런 장점보다는 부작용, 특히 각각의 등장인물이 어떤 정보를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가 독자에게 선명하게 전달되지 않아서 몇몇 결정적 장면들 외에는 시간의 흐름대로 구성하는 것이 더 효과적이었을 거란 생각을 거듭 들게 만들었습니다. 


‘벤저민의 비밀’과 ‘10년 전 교통사고의 진상’은 뜻밖의 반전과 함께 진상 및 진범이 폭로되면서 마무리됩니다. 작가가 설계한 미스터리와 스릴러 구조는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게 완성됐고, 클라이맥스와 엔딩에선 앞서 품었던 불만을 충분히 상쇄할 만한 쾌감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이야기의 구성이 조금만 더 친절하게 설정됐더라면 별 5개도 충분했을 작품인데, 그래선지 아쉬움이 더 크게 남은 게 사실입니다. 이 작품으로 애슐리 엘스턴을 처음 만난 독자라면, 그래서 100% 만족은 못 해도 관심이 생긴 독자라면 한국에 처음 소개된 그녀의 명품 ‘첫 번째 거짓말이 중요하다’를 읽어볼 것을 추천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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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덕 위의 빨간 지붕
마리 유키코 지음, 김은모 옮김 / 나무옆의자 / 202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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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부유한 의사 부부를 살해한 18살 친딸 아오타 사야코와 그녀의 연인 오부치 히데유키가 각각 무기징역과 사형을 선고받았습니다. 일명 ‘분쿄구 부모 살인사건’으로 불린 이 참사가 2018년, 대형출판사의 주간지를 통해 논픽션 소설로 연재되기 시작합니다. 신인이나 다름없는 젊은 작가가 심혈을 기울인 기획이었지만, 소설의 구성과 전개는 편집자에 의해 좌지우지됩니다. 그런데 인터뷰와 자료조사 과정에서 놀라운 사실들이 드러나고, 의외의 인물들이 등장하면서 18년 전 사건의 진상 자체가 흔들리기 시작합니다.



‘언덕 위의 빨간 지붕’까지 한국에 출간된 마리 유키코의 모든 작품을 읽어낸 걸 보면 저는 그녀의 ‘이야미스(イヤミス, 불쾌한 기분이 남는 미스터리)’에 제대로 중독된 게 분명합니다. 잔혹하고 폭력적이며 선정적인 서사는 특별하달 게 없지만, 읽는 내내 불쾌감과 찜찜함을 피하지 못하게 만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어이 끝까지 읽게 한 뒤 결국 시커먼 어둠을 뒤집어쓴 듯한 기분으로 책을 덮게 만드는 그녀의 이야미스는 그야말로 독보적이라고밖에 할 수 없습니다. 매번 높은 평점을 주고 싶다가도 서평을 쓰는 동안 다시금 스멀스멀 떠오르는 불쾌감 때문에 평균 4~4.5점에 그치고 말았지만, 사실 저의 속내는 (한두 작품을 제외하곤) 만점을 주고 싶었는지도 모릅니다. 


‘언덕 위의 빨간 지붕’은 18년 전의 살인사건에 관련된 인물들이 펼치는 ‘진실 찾기’ 미스터리이자 그로테스크한 심리 스릴러입니다. 슬럼프에 빠졌던 한 젊은 작가가 ‘분쿄구 부모 살인사건’을 논픽션 소설로 기획한 이유는 두 공범 가운데 누가 주범이고 누가 종범인지를 명확히 하고 싶었던 것이지만, 특종과 대박을 노린 대형출판사의 탐욕 탓에 예기치 못한 사태가 연이어 발생합니다. 또 사건에 연루된 뜻밖의 인물이 뒤늦게 나타나는가 하면, 사형수 오부치와 옥중결혼을 한 여성이 재심을 청구한 사실이 드러나고, 수감 중인 사야코의 신변에 모종의 사태까지 벌어지자 젊은 작가와 편집자는 점차 혼란에 빠집니다.

거기다가 인터뷰에 응한 자들의 진술이 엇갈리면서 과거 언론에 공개됐던 두 공범의 인물상마저 흔들리는데, 누군가는 당시 청순한 여고생으로 보도됐던 친딸 사야코가 실은 희대의 색녀라고 주장했고, 공범 오부치의 경우 누군가는 위험한 사이코패스로, 누군가는 사야코에게 휘둘린 불쌍한 종범이라고 주장했기 때문입니다.


‘진실 찾기’ 미스터리 못잖게 이야미스의 농도를 진하게 만든 건 등장인물들의 어둡고 일그러진 속내를 집요하게 묘사한 심리 스릴러 서사입니다. 갑자기 기획을 중단하고 싶어진 젊은 작가, 소설의 구성과 전개를 좌지우지하면서도 정작 젊은 작가에게는 뭔가를 숨기는 듯한 편집자, 자신만이 아는 비밀을 내세우며 이번 기획에서 단단히 한몫을 챙기려는 노회한 프리랜서, 그리고 옥중결혼한 오부치에게 조종당하며 위험천만한 행보를 거듭하는 중년여성 등 등장인물 대부분 음험한 가면을 썼거나 언제 폭발할지 모르는 시한폭탄 같은 캐릭터로 그려집니다. 또한 챕터에 따라 1인칭 화자가 바뀌기도 하고, 갑자기 3인칭 시점으로 변주되기도 하는데, 그 때문에 인물들의 심리를 좇는 독자들의 불안감과 위화감은 더욱 커질 수밖에 없습니다.


막판에 이르러 모든 진상이 드러나긴 하지만 이야미스의 특성 상 깔끔하고 명쾌한 설명이라기보다는 어딘가 찜찜한 구석이 남는, 그래서 인쇄된 글자들을 액면대로 믿어야 할지, 아니면 독자가 알아서 상상해야 하는 건지 불분명한, 그런 엔딩과 마주해야 됩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도 저도 아닌 오픈된 엔딩이라든가 말도 안 되는 황당한 엔딩이란 뜻은 아닙니다. 개인적으론 오히려 이야미스에 어울리는 매력적인 엔딩으로 읽혔는데, 이 작품으로 마리 유키코를 처음 접한 독자라면 다소 당황스러울 수도 있습니다. 그런 독자 가운데 마리 유키코의 이야미스에 관심이 생겼다면 ‘고충증’, ‘1961 도쿄 하우스’, ‘살인귀 후지코의 충동’ 순으로 읽어볼 것을 권하고 싶습니다.


사족으로... 일본에서 출간된 마리 유키코의 작품은 (에세이와 앤솔로지를 제외하고) 40편이 넘습니다. 그 가운데 단 8편만 한국에 소개됐는데, 특이한 건 같은 출판사에서 두 편 이상 출간된 적이 없다는 점입니다. 이야미스가 워낙 취향을 타는 장르라서 그런 것 같은데, 저 같은 중독환자 입장에선 어느 출판사든 마리 유키코의 작품을 꾸준히 내주기를 바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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