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덕 위의 빨간 지붕
마리 유키코 지음, 김은모 옮김 / 나무옆의자 / 202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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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부유한 의사 부부를 살해한 18살 친딸 아오타 사야코와 그녀의 연인 오부치 히데유키가 각각 무기징역과 사형을 선고받았습니다. 일명 ‘분쿄구 부모 살인사건’으로 불린 이 참사가 2018년, 대형출판사의 주간지를 통해 논픽션 소설로 연재되기 시작합니다. 신인이나 다름없는 젊은 작가가 심혈을 기울인 기획이었지만, 소설의 구성과 전개는 편집자에 의해 좌지우지됩니다. 그런데 인터뷰와 자료조사 과정에서 놀라운 사실들이 드러나고, 의외의 인물들이 등장하면서 18년 전 사건의 진상 자체가 흔들리기 시작합니다.



‘언덕 위의 빨간 지붕’까지 한국에 출간된 마리 유키코의 모든 작품을 읽어낸 걸 보면 저는 그녀의 ‘이야미스(イヤミス, 불쾌한 기분이 남는 미스터리)’에 제대로 중독된 게 분명합니다. 잔혹하고 폭력적이며 선정적인 서사는 특별하달 게 없지만, 읽는 내내 불쾌감과 찜찜함을 피하지 못하게 만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어이 끝까지 읽게 한 뒤 결국 시커먼 어둠을 뒤집어쓴 듯한 기분으로 책을 덮게 만드는 그녀의 이야미스는 그야말로 독보적이라고밖에 할 수 없습니다. 매번 높은 평점을 주고 싶다가도 서평을 쓰는 동안 다시금 스멀스멀 떠오르는 불쾌감 때문에 평균 4~4.5점에 그치고 말았지만, 사실 저의 속내는 (한두 작품을 제외하곤) 만점을 주고 싶었는지도 모릅니다. 


‘언덕 위의 빨간 지붕’은 18년 전의 살인사건에 관련된 인물들이 펼치는 ‘진실 찾기’ 미스터리이자 그로테스크한 심리 스릴러입니다. 슬럼프에 빠졌던 한 젊은 작가가 ‘분쿄구 부모 살인사건’을 논픽션 소설로 기획한 이유는 두 공범 가운데 누가 주범이고 누가 종범인지를 명확히 하고 싶었던 것이지만, 특종과 대박을 노린 대형출판사의 탐욕 탓에 예기치 못한 사태가 연이어 발생합니다. 또 사건에 연루된 뜻밖의 인물이 뒤늦게 나타나는가 하면, 사형수 오부치와 옥중결혼을 한 여성이 재심을 청구한 사실이 드러나고, 수감 중인 사야코의 신변에 모종의 사태까지 벌어지자 젊은 작가와 편집자는 점차 혼란에 빠집니다.

거기다가 인터뷰에 응한 자들의 진술이 엇갈리면서 과거 언론에 공개됐던 두 공범의 인물상마저 흔들리는데, 누군가는 당시 청순한 여고생으로 보도됐던 친딸 사야코가 실은 희대의 색녀라고 주장했고, 공범 오부치의 경우 누군가는 위험한 사이코패스로, 누군가는 사야코에게 휘둘린 불쌍한 종범이라고 주장했기 때문입니다.


‘진실 찾기’ 미스터리 못잖게 이야미스의 농도를 진하게 만든 건 등장인물들의 어둡고 일그러진 속내를 집요하게 묘사한 심리 스릴러 서사입니다. 갑자기 기획을 중단하고 싶어진 젊은 작가, 소설의 구성과 전개를 좌지우지하면서도 정작 젊은 작가에게는 뭔가를 숨기는 듯한 편집자, 자신만이 아는 비밀을 내세우며 이번 기획에서 단단히 한몫을 챙기려는 노회한 프리랜서, 그리고 옥중결혼한 오부치에게 조종당하며 위험천만한 행보를 거듭하는 중년여성 등 등장인물 대부분 음험한 가면을 썼거나 언제 폭발할지 모르는 시한폭탄 같은 캐릭터로 그려집니다. 또한 챕터에 따라 1인칭 화자가 바뀌기도 하고, 갑자기 3인칭 시점으로 변주되기도 하는데, 그 때문에 인물들의 심리를 좇는 독자들의 불안감과 위화감은 더욱 커질 수밖에 없습니다.


막판에 이르러 모든 진상이 드러나긴 하지만 이야미스의 특성 상 깔끔하고 명쾌한 설명이라기보다는 어딘가 찜찜한 구석이 남는, 그래서 인쇄된 글자들을 액면대로 믿어야 할지, 아니면 독자가 알아서 상상해야 하는 건지 불분명한, 그런 엔딩과 마주해야 됩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도 저도 아닌 오픈된 엔딩이라든가 말도 안 되는 황당한 엔딩이란 뜻은 아닙니다. 개인적으론 오히려 이야미스에 어울리는 매력적인 엔딩으로 읽혔는데, 이 작품으로 마리 유키코를 처음 접한 독자라면 다소 당황스러울 수도 있습니다. 그런 독자 가운데 마리 유키코의 이야미스에 관심이 생겼다면 ‘고충증’, ‘1961 도쿄 하우스’, ‘살인귀 후지코의 충동’ 순으로 읽어볼 것을 권하고 싶습니다.


사족으로... 일본에서 출간된 마리 유키코의 작품은 (에세이와 앤솔로지를 제외하고) 40편이 넘습니다. 그 가운데 단 8편만 한국에 소개됐는데, 특이한 건 같은 출판사에서 두 편 이상 출간된 적이 없다는 점입니다. 이야미스가 워낙 취향을 타는 장르라서 그런 것 같은데, 저 같은 중독환자 입장에선 어느 출판사든 마리 유키코의 작품을 꾸준히 내주기를 바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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