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궐 - 제171회 나오키상 수상작
이치호 미치 지음, 민경욱 옮김 / 비채 / 202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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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그 이름을 들어본 작가지만 이 작품에 눈길이 끌린 몇 가지 이유가 있는데, 우선 ‘창궐’이라는 제목과 함께 “이것 봐, 세상은 한 꺼풀만 벗겨내면 추악해.”라는 띠지 카피가 잔혹하고 음울한 호러 액션물의 분위기를 물씬 풍겼기 때문입니다. 또한 출판사 소개글 첫 머리에 적힌 ‘코로나’와 ‘팬데믹’이라는 두 단어와 ‘제171회 나오키상 수상작’이란 타이틀 역시 기대감을 높인 이유들입니다. 다만 제가 예상한 서사와 ‘나오키상’이 잘 매치가 되지 않아서 과연 어떤 이야기가 펼쳐질지 무척 궁금했습니다. (출판사 소개글의 첫 머리와 굵은 글씨의 카피만 슬쩍 볼 뿐 상세한 소개글은 읽지 않다 보니 이 작품이 단편집이란 점도 모르고 읽기 시작했습니다)



결론부터 말하면 여섯 편의 단편으로 이뤄진 이 작품은 호러 액션물도 아니고, 코로나와 팬데믹 역시 한두 수록작을 제외하곤 ‘배경’ 정도의 역할만 할뿐 직접적인 소재로 등장하진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죄(罪,つみ)와 팬데믹(Pandemic)을 합성한 ‘ツミデミック’라는 원제가 붙은 건 코로나 자체 또는 코로나로 인해 망가진 사회가 (직접적으로든 간접적으로든) 부추긴 크고 작은 죄를 다양한 장르와 인물들을 통해 그려냈기 때문입니다.


수록작 가운데 절반은 호러, 판타지, 미스터리, 서스펜스 등 장르물의 성격이 강한 반면, 나머지 절반은 (‘옮긴이의 말’을 인용하면) “알 수 없는 공포에서 시작하지만 최악의 시간을 견뎌내고 아주 사소한 희망의 불씨를 찾아 돌아온다.”는 내용의 온기를 품은 휴먼 드라마입니다.

즉석 술자리를 가진 여성의 실체를 알곤 패닉에 빠지는 스무살 청년, 아이돌을 닮은 라이더와의 재회를 고대하며 배달앱에 중독된 아이엄마, 15년 전 자신이 죽음에 이르게 된 진상을 목격하게 된 유령의 이야기가 전자라면, 독거노인의 돈을 노린 소박한(?) 죄를 저지르다가 뜻밖의 상황에 놓이고 마는 남자, 여고생 딸의 임신과 옆집 여자의 출산과 자신의 출생의 비밀이라는 거듭된 충격에 당황하는 중년남자, 그리고 동반자살을 모의했다가 아이러니한 엔딩을 맞이하는 일행의 이야기가 후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실 대부분의 수록작은 코로나 또는 팬데믹이라는 배경이 없더라도 무방한 이야기들이지만, 그런 배경이 설정된 덕분에 리얼리티와 몰입감이 훨씬 더 강렬해졌습니다. 짧은 단편들임에도 불구하고 읽다 보면 마스크 없이는 외출할 수 없었던 그 시절이 생각나면서 바이러스 자체보다 팬데믹에 휘말린 사회가 내뿜는 악의와, 그 악의에 전염된 끝에 본연의 인격을 상실한 사람들의 일그러진 언행이 더 무서웠다는 걸 새삼 깨닫게 되는데, 등장인물들 모두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그래, 그 시절엔 그런 사람도 있었지.”라는 생각이 저절로 떠오르게 만드는 캐릭터를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개인적으론 장르물 서사를 품은 앞의 세 편이 인상적이었는데, 일본 드라마 ‘기묘한 이야기’ 같은 짧은 호러 영상물에 잘 어울리는 내용들이라 영화나 드라마로 만들어진다면 원작 못잖은 서늘함을 만끽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휴먼 드라마 스타일의 나머지 세 편도 팬데믹의 시간들을 돌이켜보며 읽는다면 단순히 평범하고 따뜻한 이야기 이상의 특별한 미덕을 즐길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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