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기 전에 벌한다
야쿠마루 가쿠 지음, 권하영 옮김 / 북플라자 / 202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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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시청 5계의 사냥개’라 불리는 아오이 료는 재발된 위암으로 시한부 선고를 받지만, 여성만을 노리는 연쇄살인범을 잡기 위해 악전고투합니다. 한편, 오래 전부터 불쑥불쑥 폭발하곤 하는 살인 욕구를 가까스로 억제해온 사카키 신이치는 8년 만에 재회한 옛사랑 스미노에게마저 살의를 느끼자 무엇이 자신을 이렇게 만든 건지 알 수 없어 혼란에 빠집니다. 그러던 중 말기암 선고를 받고 절망한 신이치는 죽기 전에 자신의 욕구를 마음껏 터뜨리기로 결심합니다. 유년기의 신이치를 완전히 망가뜨려놓은 사건의 당사자이기도 한 스미노는 죽음을 앞둔 그의 곁을 지키려 하지만, 한편으론 과거의 끔찍한 기억 때문에 두려움을 느끼기도 합니다.



일본에서 2012년에 출간된 이 작품은 한국에선 2019년 ‘데스 미션’(민경욱 옮김, 크로스로드)이란 제목으로 출간된 적 있습니다. 원제는 사명(死命)인데, 사전적 의미는 ‘죽게 된 목숨’으로, 시한부 선고를 받은 두 주인공 아오이 료와 사카키 신이치의 안타까운 운명을 가리키기도 하지만, 동시에 사명(使命), 즉 ‘반드시 이뤄야 할 임무’를 뜻하기도 합니다. 료에게는 여성만을 노려 목 졸라 죽이는 잔혹한 연쇄살인범을 잡는 일이고, 신이치에게는 자신을 망가뜨리고 통제할 수 없는 살의를 심어놓은 ‘누군가’에게 복수하는 일입니다. 두 사람 모두 채 반 년도 안 남은 생명이 꺼지기 전에 스스로 부여한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 고통스러운 폭주를 감행합니다. 여기에 덧붙여 료의 안타깝고 비극적인 가족사와 신이치의 유년기를 망가뜨린 참담한 사건이 메인 스토리와 나란히 병행됩니다.


처음부터 범인을 공개한 탓에 엉뚱한 곳에서 연쇄살인범을 추적하는 료의 ‘헛발질’이 살짝 지루하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하루가 다르게 망가지는 몸을 이끌고 한발씩 신이치에게 다가가는 료의 집요함은 간혹 울컥함을 자아내곤 합니다. 사실 사건의 단서를 찾아내는 천부적인 후각과 범인을 잡고자 하는 집념에 사로잡힌 ‘5계의 사냥개’라는 경찰로서의 캐릭터도, 또 가족들과 불화에 빠진 가장으로서의 캐릭터도 다소 상투적이긴 하지만, 야쿠마루 가쿠 특유의 진정성 있는 묘사 덕분에 그 정도 상투성은 충분히 독자의 ‘용서’를 받을 수 있을 거란 생각입니다. 또 상부든 동료든 그의 추리에 반박하며 “왜?”냐고 물을 때마다 “형사의 감이다!”라고 자신 있게 주장하는 료는 어쩌면 한물 간 옛날 경찰의 마지막 세대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그의 ‘감’은 결코 막연하고 추상적인 게 아니라 분명한 근거와 단서를 갖고 있어서 그 어느 전형적인 경시청 수사1과 형사 캐릭터보다 매력적으로 다가옵니다.


이 작품의 마지막이자 가장 큰 미스터리는 “신이치의 유년기를 망가뜨린 사건은 무엇이며, 누가 ‘범인’인가?”입니다. 유년기의 한 시절이 기억에서 뭉텅 사라져버린 신이치는 살인을 저지를 때마다 그 시절에 관한 기억을 단편적으로 되찾곤 하는데, 눈치 빠른 독자라면 중반부쯤 그 기억의 전말과 ‘범인’의 정체를 예상할 수도 있겠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마지막 40여 페이지에 걸쳐 그려지는 신이치의 잃어버린 유년기의 비극을 읽을 때면 그 참혹함에 저절로 눈을 감고 싶어지는 경험을 하게 될 겁니다.

신이치의 범행은 용서받을 수도, 이해될 수도 없는 흉악함 그 자체지만, 단순한 쾌락살인마가 아님을 초반부터 인지한 채 책장을 넘기다 보면 어느 순간 그가 또 다른 살인을 저지르기 전에, 또 병마에 목숨을 잃기 전에 어떻게든 자신의 기억을 되찾고 폭주를 멈추기를 바라게 되는, 아이러니한 안타까움을 느끼게 됩니다.


‘데스 미션’이란 제목으로 이미 읽은 적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허술한 기억력 덕분에 거의 처음 읽는 기분으로 마지막 장까지 긴장감을 만끽할 수 있었습니다. 야쿠마루 가쿠의 팬으로서 신작이 아니라는 점이 무척 아쉽긴 했지만, 오랜만에 명품과 재회할 수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스런 책읽기가 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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