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백 ㅣ 미야베 월드 2막
미야베 미유키 지음, 김소연 옮김 / 북스피어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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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야베 월드 2막 중 한 작품으로 일본에서 2008년에 출간된 ‘흑백’은

17세 소녀 오치카가 주인공인 ‘미시마야 변조괴담 시리즈’의 첫 편입니다.

이후 ‘안주’, ‘피리술사’, ‘삼귀’까지 모두 네 편이 이어지는데,

미야베 월드 2막의 포문을 연 ‘오하쓰 시리즈’가 사이코메트리 소녀 오하쓰를 앞세웠다면,

이 작품의 주인공 오치카는 ‘남의 이야기, 특히 괴담을 경청하는 평범한 소녀’에 불과합니다.

 

말하자면 주인공 본인이 직접 나서서 뭔가 해결하는 서사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 겪은 기괴하거나 참담한 이야기를 들어줌으로써 그들의 상처를 치유해주고

동시에 자신도 그를 통해 정화되고 위로를 받는다는 식의 이야기 구조를 갖고 있습니다.

얼핏 큰 얼개만 보면 다소 심심하지 않을까, 라는 선입견을 가질 수도 있지만,

오치카의 이야기가 네 작품이나 나온 걸 보면

잔잔하고 평이해 보이는 구조 속에 더 극적인 이야기가 들어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고향에서 겪은 끔찍한 사건 때문에 에도에 사는 숙부의 가게 미시마야에 머물게 된 오치카는

우연히 숙부 대신 접대한 손님의 어두운 과거를 들어준 일로 인해 뜻밖의 미션을 맡게 됩니다.

바로 숙부가 손님과 바둑을 두던 ‘흑백의 방’에서 낯선 이들의 괴담을 경청하는 것입니다.

숙부 이헤에는 오치카에게 ‘남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특별한 능력’이 있다고 판단한 것은 물론

그 이야기를 들음으로써 그녀가 고향에서 겪은 상처도 치유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일부러 저자거리에 “괴담 대회를 열겠으니 자신의 가게로 찾아오라.”는 소문을 냈고,

이후 오치카는 몇몇 손님들을 만나 잔혹하거나 기괴한 이야기들을 듣게 됩니다.

 

범죄자가 된 형을 외면하던 동생이 형의 죽음 이후 뒤늦은 회한에 빠지는 이야기(‘만주사화’),

사람의 혼을 끌어들이는 기괴한 저택의 이야기(‘흉가’),

오치카의 마음에 지워지지 않을 큰 상처를 남긴, 고향에서 겪은 참혹한 죽음의 이야기(‘사련’),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 남긴 크나큰 저주에 대한 이야기(‘마경’),

그리고 앞선 이야기들의 종합편이자 오치카의 상처를 치유하는 대단원(‘이에나리’) 등

모두 다섯 편의 이야기가 실려 있습니다.

 

오치카의 미션은 사실 자신을 찾아온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게 전부입니다.

사이코메트리 능력을 지닌 오하쓰처럼 직접 사건을 해결하고 원혼을 달래려 나서는 게 아니라

추억, 상처, 회한 등 쉽게 털어놓을 수 없는 내밀한 사연을 지닌 상대방으로 하여금

모든 것을 털어놓고 마음의 짐을 내려놓게 만드는 ‘특별한 능력’을 발휘하는 것입니다.

물론 대단원인 ‘이에나리’에서 오치카는 이승과 저승 사이에 뛰어들어

자신은 물론 자신에게 이야기를 털어놓은 자들이 연루된 죽음의 진실에 직접 관여하기도 하지만,

어쨌든 오치카의 매력은 “이 사람이라면 뭐라도 털어놓을 수 있을 것 같다.”는,

일종의 믿음과 안도감을 느끼게 한다는 점입니다.

그래서인지 이 작품은 에도시대를 배경으로 한 판타지 괴담이기도 하지만

출판사 소개글대로 ‘상처와 치유의 이야기’라고 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이야기를 들어주는 소녀’인 오치카 본인 역시 고통스러운 상처를 갖고 있는데,

이 상처가 타인의 참혹한 이야기를 들어줌으로써 조금씩 치유된다는 점은

무척 아이러니하면서도 충분히 이해되고 납득되는 설정이기도 합니다.

“나는 다른 사람의 불행한 이야기를 들음으로써 내가 뭘 무서워하는지 알아 가고 있는 거야.

정체도 모르면서 두렵다고 도망쳐 다니기보다는 그 편이 낫다는 사실을 깨달은 거지.”라는,

오치카 본인의 고백은 이런 설정을 잘 함축하고 있습니다.

 

이승과 저승의 경계, 영혼이 갇힌 거울, 죽음의 꽃무더기 사이로 언뜻 보이는 얼굴 등

‘흑백’에 담긴 판타지는 은근하면서도 동시에 세고 독한 코드들을 담고 있는데,

그래서인지 신비한 능력을 지닌 소녀 오하쓰 이야기 못잖게 흥미롭고 재미있게 읽혔습니다.

독자에 따라 수록작 전체에 깔려있는 판타지 설정에 대한 호불호가 다를 수도 있지만,

‘미야베 월드 2막’은 바로 그런 판타지 때문에 최고의 매력을 지녔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미야베 미유키의 명성에 걸맞은 대단한 미스터리나 반전이 있는 건 아니지만,

에도 시대라는 특별한 배경 속에서 전개되는 판타지 괴담은

여느 미스터리나 호러물과도 차별화된 서사의 힘과 재미를 갖고 있습니다.

 

어느 정도 자신의 상처를 치유하고 위로받은 오치카가

이어지는 작품들에서는 누구의, 어떤 이야기를 듣게 될지 무척 기대가 됩니다.

다음 작품인 ‘안주’는 오래 전에 읽은 기억대로라면 ‘흑백’과는 사뭇 다른 톤이었던 것 같은데

어쩌면 작가가 오치카에게 휴식을 주고 싶어 좀 가벼운 이야기를 다룬 걸지도 모르겠습니다.

부디 제 기억대로 ‘안주’에서는 오치카가 더는 가슴 아픈 사연을 듣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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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열대어 ㅣ 케이스릴러
김나영 지음 / 고즈넉이엔티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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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쇄살인사건의 용의자인 한태현과 그의 아내 이서린은 2년 전 추락사고로 현재 코마 상태.

그 중 이서린이 기적적으로 깨어나지만 최근 4년의 일을 전혀 기억하지 못한다.

경찰로부터 남편이 연쇄살인 용의자라는 말을 들은 서린은 도무지 그 말을 믿을 수 없었고,

시동생이자 오랜 친구인 정호의 도움으로 퇴원한 뒤 남편의 진실을 추적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자신의 기대와 달리 남편에겐 ‘또 다른 모습’이 있었고 이에 서린은 충격을 받는다.

그 무렵, 2년 전 연쇄살인과 똑같은 수법의 사건이 터지자 경찰은 부랴부랴 재수사에 나서고,

조금씩 기억이 돌아오기 시작한 서린 앞에 예상치 못한 인물들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 ● ●

 

그리 길지 않은 분량임에도 꽤 여러 겹의 이야기가 층층이 쌓여 있는 작품입니다.

코마상태에 빠져 있는 남편의 진실을 찾아가는 아내,

10여 년 전의 끔찍한 기억에서 여전히 벗어나지 못한 채 복수의 순간만 기다리는 한 여자,

타고난 기질과 습득된 잔혹함으로 중무장한 사이코패스,

죄책감과 분노와 약물에 찌든 통제 불능의 조현병 환자 등

다양한 캐릭터가 등장하는 것은 물론 그만큼 다양한 이야기가 한꺼번에 전개됩니다.

 

어쩌면 다들 평범하고 무해한 삶을 살 수도 있었던 인물들이지만

누군가는 추악한 욕망을 억누르지 못해서 스스로 괴물이 되기도 했고,

누군가는 타고난 기질에 더해 후천적인 학습에 의해 괴물이 되기도 했고,

누군가는 하필 자신을 찾아온 운명 같은 저주 때문에 본의 아니게 괴물이 되기도 했습니다.

또, 누군가는 그 괴물들로 인해 인생의 경로가 엉망진창이 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아무 죄도 없이 단지 자신이 선택하고 사랑한 남자 때문에

끔찍한 괴물들이 들끓는 세상으로 끌려들어간 이도 있습니다.

 

기본적으로 연쇄살인사건의 진범을 찾는 이야기이긴 하지만,

거기에 덧붙여 10여 년 전의 끔찍한 사건이 곁들여지면서 이야기는 제법 풍성해집니다.

무관한 듯 보였던 인물들이 운명처럼 한자리에 모이게 되고,

2년 만에 동일한 방식의 새로운 살인사건이 벌어지면서 이야기는 파국을 향해 달려갑니다.

그리고 서울 외곽의 신흥도시에서 벌어진 연쇄살인사건의 진실은

우연과 운명이 직조해낸 끔찍하고도 어처구니없는 비극으로 밝혀집니다.

 

일단 이야기도 독하고 캐릭터도 워낙 강렬해서 잘 읽히는 작품입니다.

여러 겹의 사건과 적잖은 인물들이 등장하지만 혼란스럽지 않게 잘 설계돼있기도 합니다.

하지만 몇몇 대목에서 작가가 이야기를 너무 급하게 또는 의도적으로 끌고 가기 위해

다소 무리하거나 개연성 없는 상황을 만든 점은 무척 아쉬웠습니다.

가령, 2년 만에 코마상태에서 깨어난 상태에서 기억을 잃어버린 서린을 찾아온 형사는

(독자에게 정보를 설명하기 위한 목적으로) 다짜고짜 서린을 취조하듯 몰아붙입니다.

또, 아직 코마상태에 빠져있는 남편의 동생인 정호는 (서린이 진실찾기에 나서게 하기 위해)

아직 근육에 힘도 붙지 않았고 영양상태도 양호하지 않은 서린을 급하게 퇴원시킵니다.

그래놓곤 (또 다른 주요 인물인 희주를 투입하기 위해) 자신의 여친 희주에게

‘시동생과 서로 이름을 부르는 묘한 사이인 형수 서린’의 간호를 부탁합니다.

또, 자해와 폭력성이 위험한 수준인 조현병 환자가 가족의 요청으로 손쉽게 퇴원하는가 하면,

특별한 역할도 없는 형사에겐 무슨 이유에선지 가슴 아픈 가족사를 부여하기도 합니다.

 

인물들을 빨리 한자리에 모으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과정들은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대체로 상식적이지 못해 보였고,

일부 인물들은 어떻게든 극단적으로, 독하고 세게, 그래서 독자의 관심을 끌도록 그리기 위해

다소 이입하기 어려운 비현실적 캐릭터로 만들어졌습니다.

복수, 기억상실, 연쇄살인, 소시오패스 등 잔혹한 코드들이 독자에게 현실감을 획득하려면

사건이나 상황이나 캐릭터가 정말 그럴 듯 해보여야 하는데,

작가의 욕심(?)이 과해서였는지 몇몇 대목에서 허술하거나 극단적인 설정이 눈에 띄었고

그 덕분에 수시로 덜컹거리는 느낌이 들었던 건 무척 아쉬운 일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능 있는 한국 장르물 신인작가와의 만남은 무척 반가웠고,

다음 작품에서는 겉으로 보이는 화려한 포장보다는 현실감과 서사의 깊이에 더 방점을 찍은,

그래서 단단하고 내실 있는 이야기로 다시 만날 수 있기를 기대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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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묻힌 거짓말 ㅣ 마틴 베너 시리즈
크리스티나 올손 지음, 장여정 옮김 / 북레시피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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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소 직설적인 의견이 포함돼있으니 아직 안 읽으신 분들은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마틴 베너는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여자를 꼬여낼 수 있는 바람둥이 변호사.

하지만 가족 모두 책임을 회피한, 죽은 여동생의 딸을 키우는 가슴 따뜻한 남자이기도 하다.

이 작품은 마틴 베너가 피의자의 자살로 이미 종결된 사건의 전말을 파헤치기 시작하면서

자신까지 용의자로 몰리는 등 걷잡을 수 없는 혼돈으로 빠져드는 하드보일드 드라마이다.

(출판사의 소개글을 일부 수정, 인용했습니다.)

 

● ● ●

 

스웨덴 작품이지만 지금까지 읽은 북유럽 스릴러와는 사뭇 분위기가 많이 다른 작품입니다.

수시로 내리는 비 외에는 딱히 북유럽의 풍광을 느끼기도 어려운데다

서사 역시 대중성과 오락성이 강한 영미권 작품을 연상시키기 때문입니다.

특히 주인공인 변호사 마틴 베너의 캐릭터가 이런 인상을 더욱 강하게 만드는데,

다분히 세속적이고 이기적인데다 물질과 욕망에 충실한 할리우드 주인공 같기 때문입니다.

그는 전 애인이자 현재는 친구이며 언제든 잠자리를 함께 하는 변호사 루시와 동업 중입니다.

두 사람은 (들키지만 않는다면) 서로 다른 사람과의 잠자리를 허용하는 이상한 관계지만,

그런 이유 때문에 언제든 애정과 긴장을 공유하기도 합니다.

 

마틴 베너가 의뢰받은 사건은 좀 특이합니다.

다섯 건의 연쇄살인을 자백한 것은 물론 범인만 아는 단서들까지 진술했던 여자가

공판 하루 전날 갑자기 강물에 뛰어들어 자살했는데,

그 오빠라는 남자가 찾아와 동생의 무고함을 밝히고 사라진 조카를 찾아달라고 한 것입니다.

범행을 자백하고 자살한 여자라면 더는 사건성도, 파헤칠 것도 없다고 마틴은 판단했지만

자료들을 훑어보던 중 미심쩍은 부분들을 발견하곤 다소 무모해 보이는 조사를 시작합니다.

마틴의 조사는 스웨덴은 물론 여자가 첫 두 건의 살인을 저지른 미국 텍사스까지 확대되는데,

그 과정에서 마틴은 오히려 살인사건의 용의자로 몰리기도 하고,

그의 말대로 ‘영화에나 나올 법한’ 엄청난 범죄조직과 맞닥뜨리기도 합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작품의 초반 1/3은 별 5개가 충분한 매력적인 전개를 보이지만,

그 뒤로 점점 매력이 떨어지면서 엔딩에서는 아쉬움과 실망감이 더 크게 느껴졌습니다.

반전의 가능성이 낮은 어려운 사건을 맡은 마틴이 의욕적인 출발을 하는 지점까지는

‘마틴 베너 시리즈’가 새로운 필독 목록이 되겠구나,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흥미롭습니다.

 

하지만 사건의 실체가 드러나면 드러날수록 왠지 이야기가 산으로 간다는 느낌과 함께,

작가가 꼬아놓은 복잡한 설정들이 점점 억지스럽게 느껴지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클라이맥스 이후에 설명되는 ‘사건의 실체’는 좀처럼 이해하기 어려웠고,

스케일과 볼륨감을 키우기 위해 동원된 거대 범죄조직은 현실감이 부족해 보였으며,

‘범행을 고백하고 자살한 여자’의 사연 역시 예상치를 전혀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뭐랄까.. 알고 보면 단순한 구도인데 복잡하게 보이게끔 억지로 꼬아놓은 느낌이랄까요?

또, 함께 조사에 나선 마틴과 루시는 탐문 이상의 역할을 할 수 없는 환경에 갇혀 있었고,

나름 예리한 추리를 하긴 해도 특별한 반전을 끌어낼 정도는 아닙니다.

기대했던 주인공이 무력한 모습 끝에 다소 애매하게 엔딩을 맞은 대목은 가장 아쉬웠습니다.

 

“마틴 베너 시리즈 2탄을 기대하게 하는 열린 결말”이라고 출판사가 공개적으로 소개했으니

이 작품의 엔딩이 깔끔하게 마무리되지 않는다고 언급해도 스포일러는 절대 아닙니다.

다만, ‘2탄’을 기대하게 만드는 긴장감 넘치는 결말이라기보다는

좀 허무하고 약간은 찜찜함까지 느껴지는 결말이라 과연 후속작을 읽게 될지 의문입니다.

오랜만에 매력적인 주인공을 만났지만 허술한 서사 탓에 그 매력을 만끽하지 못한 셈인데,

말 그대로 용두사미라는 표현이 적절해 보이는 작품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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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작부인
하스미 시게히코 지음, 김경원 옮김 / 문학동네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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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날로그와 에로틱이 뒤섞인 듯한 묘한 뉘앙스의 제목과 표지에 끌려 집어든 작품입니다.

기대한대로(?) 2차 대전이 한창이던 시기를 배경으로 무척 클래식한 만연체의 문장과 함께

‘19금’ 판정을 받아도 전혀 이상하지 않은 성적 담론으로 꽉 찬 작품입니다.

 

제국대학 입학을 목표로 하고 있는 풋내기 고교생 지로가

자신의 집 별채에 머물고 있는 백작부인과 함께 보낸 기기묘묘한 하루를 다루고 있고,

거기에 덧붙여 어디로 튈지 모르는 럭비공 같은 다양한 에피소드들이 끼어듭니다.

출판사 소개에 따르면 ‘한 가지 줄거리만으로 요약해낼 수 없는 압도적인 스펙트럼’을 지녔고,

‘옮긴이의 말’의 부제는 ‘이상한 나라의 지로’라고 할 만큼 줄거리 소개가 곤란한 작품입니다.

 

‘상하이에서 온 고급 창부’, ‘전쟁 스파이’, ‘지로 할아버지의 첩의 소생’ 등

다양하지만 무엇이 진짜인지 알 수 없는 괴소문에 휩싸인 정체불명의 백작부인은

지로와 함께 하루를 보내며 자신이 겪은 온갖 기상천외한 일들을 들려줍니다.

그녀는 ‘남자의 고환을 짓바수는’ 특기를 습득하게 된 사연과

전쟁의 참화 속에서 그 특기를 직접 실행했던 화려한 전력을 들려주기도 하고,

여자를 안기만 해도 사정해버리는 지로를 실컷 놀리거나 위로해주기도 합니다.

 

백작부인에 대한 호기심과 두려움을 함께 지닌 고교생 지로 역시 그로테스크하게 그려집니다.

곧 전쟁터로 끌려갈 자신의 운명과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세상의 균형에 대해 고민하면서도

그는 역시 미성년자인 사촌여동생 호코와 ‘이상한 관계’를 맺기도 합니다.

백작부인에 대한 호기심 중 성적인 부분이 전혀 없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그가 할아버지의 피를 이어받아 호색한처럼 망동을 부린다는 뜻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는 이 작품에서 내내 성기에 테러(?)를 당하는 참사를 겪는데,

이 언밸런스한 캐릭터 설정 때문에 독자는 수시로 예상치 못한 웃음을 짓게 됩니다.

 

이 작품에는 성과 성기에 관한 꽤나 노골적이고 직설적인 표현이 자주 등장합니다.

남자의 성기는 아주 폭력적이거나 거꾸로 무기력하게 파괴 또는 거세당하는 양면성을 보이고,

여자의 성기는 관찰의 대상 또는 성숙미라는 약간은 소극적인 대상으로 묘사됩니다.

지로의 성기가 야구공이나 백작부인의 손에 의해 무참하게 테러를 당한 뒤

하녀, 사촌여동생, 친구의 엄마 등에게 간호와 조롱의 대상으로 전락하는 장면에선

혹시 이 작품이 (출판사 소개대로) 남근 조롱 또는 권력 전복의 메시지를 시사하는가 싶지만,

사실 딱히 그렇게만 읽힌다고 볼 수도 없습니다.

또, 연합군과의 대결을 앞둔 일본의 불안한 정세, 곧 전쟁터로 끌려갈 운명인 지로의 불안감,

백작부인의 과거사에 등장하는 유럽에서의 참혹한 전쟁 상황 등을 보면

이 작품이 언뜻 반전(反戰)을 다룬 것 같아 보이지만 역시 그렇다고 확신하긴 어렵습니다.

 

말하자면, 이 작품은 성애 소설도, 페미니즘 소설도, 반전(反戰) 소설도 아닙니다.

무엇보다 “기승전결 구성과 등장인물의 심리를 명확히 그리는 방식이 싫다.

독자들 마음대로 해석하고 재미있게 읽어주면 좋겠다.”는 작가의 인터뷰를 보면

전쟁이나 성적 담론에서 굳이 어떤 메시지를 찾는 건 무의미해 보이기 때문입니다.

또, 어딘가 비현실적인 느낌을 주는 공간 설정도 이 작품의 판타지적 매력을 더하는데,

특히 백작부인과 지로가 하루의 대부분을 함께 보내는 호텔은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공간들을 연상시킬 정도로 그로테스크한 느낌을 발산합니다.

아마 이런저런 이유로 ‘옮긴이의 말’의 부제가 ‘이상한 나라의 지로!’인지도 모르겠지만,

개인적으로는 이 작품을 한 줄로 함축한 가장 적절한 부제라는 생각입니다.

 

무척 흥미롭게 읽긴 했지만 남들에게 적극 추천하기도 애매한 작품입니다.

독자에 따라 흥미를 느낄 수도, (성적인) 혐오감을 느낄 수도 있는 이야기인데다,

장황하게 쓴 서평대로 이 작품의 미덕이나 주제를 한마디로 정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작가의 요구대로 ‘마음대로 해석하고 재미있게 읽는’ 것이 적절한 책읽기 방법이라면

이 작품의 미덕과 주제는 읽는 사람마다 전부 제각각일 수밖에 없다는 생각입니다.

그런 면에서 다른 독자들의 느낌과 해석이 무척 궁금해지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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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년 봄의 제사 - 무녀주의 살인사건
루추차 지음, 한수희 옮김 / 스핑크스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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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무제 원년, 옛 초나라 땅 운몽의 관씨 집안을 찾은 장안 호족의 딸이자 무녀 오릉규는

“초나라의 대부라 불리던 굴원이 실은 무녀였으며 일생 남장여자였다.”라는 대담한 학설로

한때 초나라 국가 제사를 맡았던 관씨 일가를 발칵 뒤집어놓는다.

안 그래도 제사를 얼마 앞두지 않은 시점이라 오릉규와 관씨 집안 사이에는 긴장감이 맴돈다.

그런데 다음 날 의문의 살인사건이 일어나고 이는 연쇄살인으로 이어지고 만다.

관씨 집안은 천재에 가까운 해박함을 지닌 오릉규에게 사건 조사를 부탁하지만,

관씨 집안의 막내딸이자 오릉규와 사사건건 충돌하던 노신은 오릉규를 범인으로 지목한다.

 

● ● ●

 

기원전 100년 한나라 무제 시절이라는 시대적 배경도 독특하지만

이 작품의 가장 큰 특징은 고대 중국의 다양한 시문과 경전, 예법과 문화가

방대한 분량에 걸쳐 등장한다는 점입니다.

물론 기본적으로는 미스터리 작품이지만 다소 낯설고 복잡한 설명들이 곁들여진 탓에

독자에 따라 꽤 골치 아프거나 혼란스러운 책읽기가 될 수도 있는 작품입니다.

이런 성향 때문에 중국에서도 ‘현학 기서’ ‘현학 추리서’라는 별칭이 붙었다는데,

작가의 전공이 고전문헌학임을 감안하면 어느 정도 이해가 되긴 합니다.

 

이야기를 끌어가는 주요 인물 대부분이 10대 소녀라는 점도 눈에 띄는데,

호족의 딸이지만 장녀란 이유로 결혼도 못하고 무녀가 되어 제사를 주재해야 하는 오릉규,

옛 귀족 집안의 막내딸로 고향인 운몽을 벗어나 본 적 없이 소극적 삶을 살아온 관노신,

하인 신분이지만 주인인 오릉규보다 더 보수적이고 원론적인 가치관을 지닌 소휴,

4년 전 끔찍한 살인사건으로 가족을 잃은 뒤 피폐해진 채 목숨을 이어가는 관약영 등

기원전 100년이라는 시대가 무색할 정도로 버라이어티한 소녀 캐릭터들이 등장합니다.

이들은 무녀, 제사, 권력, 여성의 지위, 살인사건 등 다양한 코드들과 연관돼있는데,

막판에 밝혀지는 각각의 세계관이나 가치관은 캐릭터 이상으로 놀라움을 느끼게 만듭니다.

 

4년의 시차를 두고 관씨 집안에서 벌어진 두 개의 연쇄살인사건이 미스터리의 핵심인데,

기본적으로 오릉규와 관노신이 대립과 협력을 반복하며 진범 찾기에 나서는 구조입니다.

대부분 현장에서 발견된 증거와 단서, 알리바이나 목격담 등에 의존하긴 하지만,

이들의 추론은 비단 물질적인 증거나 단서에 국한되지 않고,

난해한 시문과 경전, 복잡다단한 제사예법과 문화, 무녀의 역할 등

꽤 고차원적이거나 추상적인 관념까지 동원하곤 합니다.

 

바로 이 대목에서 독자들의 호불호가 꽤 갈릴 수 있겠다는 생각인데,

안 그래도 복잡한 고대 중국의 명멸의 역사는 물론 각종 시문과 경전까지 끌어들인데다

정확히 어떤 개념인지 알 수 없는 ‘제사’와 ‘무녀’가 꽤 중요한 소재로 설정돼있어서

솔직히 말하면 절반도 채 이해하지 못한 채 미스터리만 쫓아다니기 급급했던 게 사실입니다.

무엇보다 이 작품에서 꽤 중요한 의미를 가진 인물 ‘굴원’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하다 보니

마치 기초 지식이 전혀 없는 상태에서 고난도의 시험문제를 접한 기분이 들기도 했습니다.

 

밀실에 가까운 상황에서 여러 희생자가 등장하면서 미스터리의 외연이 확대된 건 맞지만,

마지막에 드러난 진실 역시 앞서 언급한 난해한 소재들을 이해 못한 채 페이지를 넘겨왔다면

다소 난감하게 읽힐 수도 있다는 생각입니다.

작가 스스로도 “왕성한 지식욕을 자랑하기 위한 설정이 아니었다.”고 언급했지만,

역시 당대의 사회와 문화를 제대로 모르고선 제 맛을 만끽하기 쉬운 작품이 아닙니다.

 

중화권 미스터리는 접할 때마다 개성들이 워낙 강해서 무척 인상 깊게 남곤 하는데,

이 작품 역시 전례도 없고 다시 만나보기도 어려울 정도로 독특한 작품입니다.

절반도 이해하지 못한 당대의 역사적 배경에 대해 공부를 한 뒤 다시 읽어본다면

어쩌면 미처 생각지도 못한 지적 즐거움을 맛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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