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흑백 ㅣ 미야베 월드 2막
미야베 미유키 지음, 김소연 옮김 / 북스피어 / 2012년 3월
평점 :
미야베 월드 2막 중 한 작품으로 일본에서 2008년에 출간된 ‘흑백’은
17세 소녀 오치카가 주인공인 ‘미시마야 변조괴담 시리즈’의 첫 편입니다.
이후 ‘안주’, ‘피리술사’, ‘삼귀’까지 모두 네 편이 이어지는데,
미야베 월드 2막의 포문을 연 ‘오하쓰 시리즈’가 사이코메트리 소녀 오하쓰를 앞세웠다면,
이 작품의 주인공 오치카는 ‘남의 이야기, 특히 괴담을 경청하는 평범한 소녀’에 불과합니다.
말하자면 주인공 본인이 직접 나서서 뭔가 해결하는 서사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 겪은 기괴하거나 참담한 이야기를 들어줌으로써 그들의 상처를 치유해주고
동시에 자신도 그를 통해 정화되고 위로를 받는다는 식의 이야기 구조를 갖고 있습니다.
얼핏 큰 얼개만 보면 다소 심심하지 않을까, 라는 선입견을 가질 수도 있지만,
오치카의 이야기가 네 작품이나 나온 걸 보면
잔잔하고 평이해 보이는 구조 속에 더 극적인 이야기가 들어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고향에서 겪은 끔찍한 사건 때문에 에도에 사는 숙부의 가게 미시마야에 머물게 된 오치카는
우연히 숙부 대신 접대한 손님의 어두운 과거를 들어준 일로 인해 뜻밖의 미션을 맡게 됩니다.
바로 숙부가 손님과 바둑을 두던 ‘흑백의 방’에서 낯선 이들의 괴담을 경청하는 것입니다.
숙부 이헤에는 오치카에게 ‘남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특별한 능력’이 있다고 판단한 것은 물론
그 이야기를 들음으로써 그녀가 고향에서 겪은 상처도 치유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일부러 저자거리에 “괴담 대회를 열겠으니 자신의 가게로 찾아오라.”는 소문을 냈고,
이후 오치카는 몇몇 손님들을 만나 잔혹하거나 기괴한 이야기들을 듣게 됩니다.
범죄자가 된 형을 외면하던 동생이 형의 죽음 이후 뒤늦은 회한에 빠지는 이야기(‘만주사화’),
사람의 혼을 끌어들이는 기괴한 저택의 이야기(‘흉가’),
오치카의 마음에 지워지지 않을 큰 상처를 남긴, 고향에서 겪은 참혹한 죽음의 이야기(‘사련’),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 남긴 크나큰 저주에 대한 이야기(‘마경’),
그리고 앞선 이야기들의 종합편이자 오치카의 상처를 치유하는 대단원(‘이에나리’) 등
모두 다섯 편의 이야기가 실려 있습니다.
오치카의 미션은 사실 자신을 찾아온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게 전부입니다.
사이코메트리 능력을 지닌 오하쓰처럼 직접 사건을 해결하고 원혼을 달래려 나서는 게 아니라
추억, 상처, 회한 등 쉽게 털어놓을 수 없는 내밀한 사연을 지닌 상대방으로 하여금
모든 것을 털어놓고 마음의 짐을 내려놓게 만드는 ‘특별한 능력’을 발휘하는 것입니다.
물론 대단원인 ‘이에나리’에서 오치카는 이승과 저승 사이에 뛰어들어
자신은 물론 자신에게 이야기를 털어놓은 자들이 연루된 죽음의 진실에 직접 관여하기도 하지만,
어쨌든 오치카의 매력은 “이 사람이라면 뭐라도 털어놓을 수 있을 것 같다.”는,
일종의 믿음과 안도감을 느끼게 한다는 점입니다.
그래서인지 이 작품은 에도시대를 배경으로 한 판타지 괴담이기도 하지만
출판사 소개글대로 ‘상처와 치유의 이야기’라고 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이야기를 들어주는 소녀’인 오치카 본인 역시 고통스러운 상처를 갖고 있는데,
이 상처가 타인의 참혹한 이야기를 들어줌으로써 조금씩 치유된다는 점은
무척 아이러니하면서도 충분히 이해되고 납득되는 설정이기도 합니다.
“나는 다른 사람의 불행한 이야기를 들음으로써 내가 뭘 무서워하는지 알아 가고 있는 거야.
정체도 모르면서 두렵다고 도망쳐 다니기보다는 그 편이 낫다는 사실을 깨달은 거지.”라는,
오치카 본인의 고백은 이런 설정을 잘 함축하고 있습니다.
이승과 저승의 경계, 영혼이 갇힌 거울, 죽음의 꽃무더기 사이로 언뜻 보이는 얼굴 등
‘흑백’에 담긴 판타지는 은근하면서도 동시에 세고 독한 코드들을 담고 있는데,
그래서인지 신비한 능력을 지닌 소녀 오하쓰 이야기 못잖게 흥미롭고 재미있게 읽혔습니다.
독자에 따라 수록작 전체에 깔려있는 판타지 설정에 대한 호불호가 다를 수도 있지만,
‘미야베 월드 2막’은 바로 그런 판타지 때문에 최고의 매력을 지녔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미야베 미유키의 명성에 걸맞은 대단한 미스터리나 반전이 있는 건 아니지만,
에도 시대라는 특별한 배경 속에서 전개되는 판타지 괴담은
여느 미스터리나 호러물과도 차별화된 서사의 힘과 재미를 갖고 있습니다.
어느 정도 자신의 상처를 치유하고 위로받은 오치카가
이어지는 작품들에서는 누구의, 어떤 이야기를 듣게 될지 무척 기대가 됩니다.
다음 작품인 ‘안주’는 오래 전에 읽은 기억대로라면 ‘흑백’과는 사뭇 다른 톤이었던 것 같은데
어쩌면 작가가 오치카에게 휴식을 주고 싶어 좀 가벼운 이야기를 다룬 걸지도 모르겠습니다.
부디 제 기억대로 ‘안주’에서는 오치카가 더는 가슴 아픈 사연을 듣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