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년 봄의 제사 - 무녀주의 살인사건
루추차 지음, 한수희 옮김 / 스핑크스 / 2019년 3월
평점 :
절판


한무제 원년, 옛 초나라 땅 운몽의 관씨 집안을 찾은 장안 호족의 딸이자 무녀 오릉규는

초나라의 대부라 불리던 굴원이 실은 무녀였으며 일생 남장여자였다.”라는 대담한 학설로

한때 초나라 국가 제사를 맡았던 관씨 일가를 발칵 뒤집어놓는다.

안 그래도 제사를 얼마 앞두지 않은 시점이라 오릉규와 관씨 집안 사이에는 긴장감이 맴돈다.

그런데 다음 날 의문의 살인사건이 일어나고 이는 연쇄살인으로 이어지고 만다.

관씨 집안은 천재에 가까운 해박함을 지닌 오릉규에게 사건 조사를 부탁하지만,

관씨 집안의 막내딸이자 오릉규와 사사건건 충돌하던 노신은 오릉규를 범인으로 지목한다.

 

● ● ●

 

기원전 100년 한나라 무제 시절이라는 시대적 배경도 독특하지만

이 작품의 가장 큰 특징은 고대 중국의 다양한 시문과 경전, 예법과 문화가

방대한 분량에 걸쳐 등장한다는 점입니다.

물론 기본적으로는 미스터리 작품이지만 다소 낯설고 복잡한 설명들이 곁들여진 탓에

독자에 따라 꽤 골치 아프거나 혼란스러운 책읽기가 될 수도 있는 작품입니다.

이런 성향 때문에 중국에서도 현학 기서’ ‘현학 추리서라는 별칭이 붙었다는데,

작가의 전공이 고전문헌학임을 감안하면 어느 정도 이해가 되긴 합니다.

 

이야기를 끌어가는 주요 인물 대부분이 10대 소녀라는 점도 눈에 띄는데,

호족의 딸이지만 장녀란 이유로 결혼도 못하고 무녀가 되어 제사를 주재해야 하는 오릉규,

옛 귀족 집안의 막내딸로 고향인 운몽을 벗어나 본 적 없이 소극적 삶을 살아온 관노신,

하인 신분이지만 주인인 오릉규보다 더 보수적이고 원론적인 가치관을 지닌 소휴,

4년 전 끔찍한 살인사건으로 가족을 잃은 뒤 피폐해진 채 목숨을 이어가는 관약영 등

기원전 100년이라는 시대가 무색할 정도로 버라이어티한 소녀 캐릭터들이 등장합니다.

이들은 무녀, 제사, 권력, 여성의 지위, 살인사건 등 다양한 코드들과 연관돼있는데,

막판에 밝혀지는 각각의 세계관이나 가치관은 캐릭터 이상으로 놀라움을 느끼게 만듭니다.

 

4년의 시차를 두고 관씨 집안에서 벌어진 두 개의 연쇄살인사건이 미스터리의 핵심인데,

기본적으로 오릉규와 관노신이 대립과 협력을 반복하며 진범 찾기에 나서는 구조입니다.

대부분 현장에서 발견된 증거와 단서, 알리바이나 목격담 등에 의존하긴 하지만,

이들의 추론은 비단 물질적인 증거나 단서에 국한되지 않고,

난해한 시문과 경전, 복잡다단한 제사예법과 문화, 무녀의 역할 등

꽤 고차원적이거나 추상적인 관념까지 동원하곤 합니다.

 

바로 이 대목에서 독자들의 호불호가 꽤 갈릴 수 있겠다는 생각인데,

안 그래도 복잡한 고대 중국의 명멸의 역사는 물론 각종 시문과 경전까지 끌어들인데다

정확히 어떤 개념인지 알 수 없는 제사무녀가 꽤 중요한 소재로 설정돼있어서

솔직히 말하면 절반도 채 이해하지 못한 채 미스터리만 쫓아다니기 급급했던 게 사실입니다.

무엇보다 이 작품에서 꽤 중요한 의미를 가진 인물 굴원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하다 보니

마치 기초 지식이 전혀 없는 상태에서 고난도의 시험문제를 접한 기분이 들기도 했습니다.

 

밀실에 가까운 상황에서 여러 희생자가 등장하면서 미스터리의 외연이 확대된 건 맞지만,

마지막에 드러난 진실 역시 앞서 언급한 난해한 소재들을 이해 못한 채 페이지를 넘겨왔다면

다소 난감하게 읽힐 수도 있다는 생각입니다.

작가 스스로도 왕성한 지식욕을 자랑하기 위한 설정이 아니었다.”고 언급했지만,

역시 당대의 사회와 문화를 제대로 모르고선 제 맛을 만끽하기 쉬운 작품이 아닙니다.

 

중화권 미스터리는 접할 때마다 개성들이 워낙 강해서 무척 인상 깊게 남곤 하는데,

이 작품 역시 전례도 없고 다시 만나보기도 어려울 정도로 독특한 작품입니다.

절반도 이해하지 못한 당대의 역사적 배경에 대해 공부를 한 뒤 다시 읽어본다면

어쩌면 미처 생각지도 못한 지적 즐거움을 맛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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