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인자의 쇼핑몰 - 디즈니플러스 오리지널 시리즈 <킬러들의 쇼핑몰> 원작 소설 ㅣ 새소설 5
강지영 지음 / 자음과모음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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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집 ‘개들이 식사할 시간’으로 처음 만난 강지영의 첫 인상은 무척 매력적이었습니다.

편혜영의 ‘아오이 가든’, 히라야마 유메아키의 ‘남의 일’, 오츠이치의 ‘ZOO’가 떠오를 정도로

수록된 단편 모두 호러와 판타지의 기운이 강한 작품들이었는데,

의도된 불쾌감이 끈적끈적 묻어나면서도 재미나 주제 면에서도 흥미로웠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 다음에 만난 ‘페로몬 부티크’는 중간도 못 가서 포기했는데,

정확한 기억은 아니지만 너무 가벼워보였던 이야기와 문장들에 실망했던 것 같습니다.

혹시 ‘개들이 식사할 시간’의 강지영과 동명이인인가,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말이죠.

 

그런 탓에 강지영의 작품을 멀리 했던 게 사실인데,

2020년에 출간된 장르물 중 못 읽은 작품들을 찾다가 눈에 띈 게 ‘살인자의 쇼핑몰’입니다.

일단 제목은 눈길을 확 끌었지만 ‘페로몬 부티크’의 전철을 밟을까봐 주저했던 작품인데,

분량도 짧고 해서 일단 시도는 해봐야겠다는 생각에 큰 부담 없이 읽기 시작했습니다.

 

은밀하고 조직된 무자비한 킬러들, 또 그들에게 일감과 무기를 제공하는 베일에 싸인 배후,

그리고 탐욕에 찌든 사악한 인물들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 거침없이 살인을 저지른다는 설정은

권총 한 자루만 나와도 비현실적인 한국에선 어쩌면 판타지에 가까운 허무맹랑한 구도지만,

작가는 정교한 사건 설계와 생생한 캐릭터의 힘으로 꽤 그럴듯한 리얼리티를 구축합니다.

최대한 단순하게 요약하면 ‘킬러들의 밥그릇 싸움’ 같아 보이기도 하지만

실은 헤게모니와 이익 독식을 위한 킬러 조직 간의 잔혹한 전쟁 속에서

삼촌의 죽음의 진실을 찾아내고 복수하려는 여대생 정지안의 활약이 주된 이야기입니다.

 

킬러 조직과 연관됐던 삼촌과 그가 운영했던 비밀투성이 쇼핑몰의 정체,

그리고 늘 의문이었던 부모의 죽음의 진실에 대해 뒤늦게 알게 된 지안은

한편으론 놀랍고 기가 막혀 말이 안 나올 지경이지만

한편으론 그제야 부모의 죽음 이후 자신을 키운 삼촌의 일거수일투족이 이해되기도 합니다.

삼촌은 안 보이는 곳에서도 늘 자신을 지켰던 수호천사였고,

허허실실 그저 좋아 보이기만 하던 겉모습 역시 자신을 위한 튼튼한 방패였음을 깨닫습니다.

또 “잘 들어, 정지안.”이란 말로 시작하곤 했던 시시콜콜한 잔소리와 가르침들은

지안이 험한 세상에서 살아남을 수 있도록 철저히 계산된 매뉴얼이었다는 것도 알게 됩니다.

그런 삼촌의 죽음이 무자비한 범죄조직에 의한 것임을 알게 된 지안은

삼촌에 의해 몸과 마음에 깊게 새겨진 본능을 일깨워 목숨을 건 전쟁에 나섭니다.

 

짧은 분량이지만 속도감, 재미, 반전 등 킬러 액션 스릴러의 미덕을 고루 갖춘 작품입니다.

비록 한국에 어울리는 현실적인 설정은 아니지만

영화로도 보고 싶을 만큼 서사와 비주얼 모두 매력적으로 그려졌습니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이라면 50~100페이지 정도 더 있었으면 좋았겠다, 는 점인데,

캐릭터나 사건 모두 정신없이 빠르게 묘사된 탓에 마치 요약본처럼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킬러 액션 스릴러인 방진호의 ‘방의강 시리즈’ 이후

모처럼 짜릿한 이야기를 만날 수 있어 반가운 시간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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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밀밭의 파수꾼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7
J.D. 샐린저 지음, 공경희 옮김 / 민음사 / 200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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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백하면, 이 작품을 읽겠다고 처음 마음먹은 건 치기로 가득했던 까마득한 옛날의 일입니다.

그 무렵엔 존 레논 암살범인 채프먼이 이 작품에 탐닉했다는 사실도 몰랐고,

미국 대통령 암살 또는 저격사건에 이 작품에 대한 소문이 떠돌았다는 사실조차 몰랐습니다.

다만, 어디서 주워들은 건 있어서 꼭 읽어야 할 필독서처럼 여겼던 것 같은데,

이런저런 게으름 탓에 한참의 세월이 지나 이른바 ‘꼰대’가 돼서야

더는 미룰 수 없는 숙제처럼 책장 속에 파묻혀 있던 ‘호밀밭의 파수꾼’을 꺼내 읽게 됐습니다.

 

출판사의 줄거리 소개를 살짝 요약해보면,

사립학교 펜시의 재학생인 16살 홀든 콜필드는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퇴학을 통보받습니다.

표면적인 이유는 낙제였지만, 그 이면엔 소년의 성장기의 혼란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부유한 환경에서 자랐지만 홀든은 기성세대의 속물근성과 위선에 염증을 느낍니다.

그런 그에게 사립학교 펜시는 외부의 평가와 달리 치기 어린 동급생들이 분위기를 주도하고

학부모의 지위에 따라 학생들을 차별하는 견딜 수 없는 곳이었습니다.

홀든은 퇴학을 통고하는 편지가 집에 도착할 때까지 뉴욕 거리를 헤매기로 마음먹습니다.

 

딱히 기승전결이라고 할 것도 없는 홀든의 며칠간의 ‘방황’이 이야기의 전부입니다.

16살이지만 이미 술과 담배에 익숙해진 홀든은 방황의 와중에 꽤 많은 사람들을 만납니다.

친구, 선배, 선생 등 알고 지냈던 사람들은 물론

클럽에서 만난 천박한 여자들, 다혈질의 택시기사, 폭력적인 포주와 창녀, 겸손한 수녀 등

극과 극의 사람들과 만나거나 충돌하면서 그만큼의 다채로운 감정에 사로잡히곤 합니다.

풀어버릴 데 없는 격정은 그의 몸과 마음 안에서 제멋대로 날뛰었고,

그를 상대한 사람들 대부분은 그의 격정이 지닌 위험한 분위기에 이내 뒤로 물러서곤 합니다.

 

다 읽은 후에 가장 먼저 떠오른 생각은

홀든이 참 많은 것(사람)을 싫어했고 끔찍하게 여겼고 역겨워했구나, 라는 것이었습니다.

세상의 부조리함과 위선자의 거들먹거림을 증오했고 자기혐오 역시 임계점을 들락거립니다.

그런 와중에도 그는 한겨울 얼어붙은 공원 호수의 오리들의 안위를 궁금해 하고,

꼭 한 번 만나고 싶은 옛 연인에게 전화를 걸기 위해 공중전화 앞에서 전전긍긍하기도 하고,

사랑하는 동생 피비에 대한 한없는 애정을 감추지 않기도 합니다.

그 무엇도 홀든의 ‘삐딱함’을 달랠 수 없을 것 같아 보이지만,

동시에 “장래에 호밀밭의 파수꾼이 되어 아이들을 지키고 싶다.”는

다소 황당하지만 순수한 미래를 꿈꾸는 그의 태도는 딱 16살에 어울리는 모습이기도 합니다.

그야말로 어디로 튈지 모르는 럭비공 같은 ‘질풍노도’의 상징인 셈입니다.

 

다만, 어울리지 않는 나이에 이 작품을 만난 저로서는 쉽게 홀든에게 이입하기 어려웠습니다.

나이뿐 아니라 한국과 미국의 문화적 차이 때문일 수도 있고,

홀든의 일상을 나열했을 뿐인 서사 자체에 몰입하기 힘들었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어떤 이유든 너무 기대가 컸던 탓에 아쉬움이나 실망감이 더 컸던 것 같은데,

만일 제가 10~20대에 이 작품을 읽었다면 어떤 느낌을 받았을지도 궁금하고,

지금의 10~20대가 이 작품을 읽는다면 어떤 느낌을 받게 될지도 무척 궁금합니다.

가장 궁금한 건, 왜 현실의 암살범들이나 영미권 스릴러 속 연쇄살인마들이

‘호밀밭의 파수꾼’에 큰 영향을 받았거나 영감을 얻었을까, 라는 의문인데,

그에 대한 답변을 찾기 위해서라도 다른 독자들의 서평을 찾아봐야겠다는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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츠나구 - 죽은 자와 산 자의 고리
츠지무라 미즈키 지음, 김선영 옮김 / 문학사상사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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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고백하면, ‘츠나구’는 몇 년 전쯤 읽다가 중도 포기했던 작품입니다.

다시 읽으면서 다섯 편의 수록작 가운데 세 번째 작품까지만 읽고 그만둔 걸 알게 됐는데,

그때 포기했던 가장 큰 이유는 주제나 소재에 비해 이야기가 가벼워 보였기 때문입니다.

덧붙여, 교훈이나 감동을 목적으로 한 ‘어른들을 위한 동화’처럼 읽혔다고 할까요?

그러다가, ‘츠나구’를 포기했던 일을 모 카페 댓글에 짧게 언급한 적이 있는데,

“제일 좋아하는 작품인데 읽다가 포기하셨다 하시니 살짝 맘이 아픕니다!”라는 답글을 보곤

기회가 닿으면 다시 한 번 도전해봐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결론부터 말하면, 여전히 ‘어른들을 위한 동화’라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지만,

제가 읽지 않은 두 편의 수록작이 ‘츠나구’의 진면목이란 점,

그리고 이야기가 주제나 소재에 비해 가볍다고 예단한 건 실수였다는 점을 깨닫게 됐습니다.

 

“츠나구(つなぐ)”

- 사전적 의미는 ‘연결하다’, ‘이어주다’라는 뜻의 동사

- 죽은 자와 산 자의 고리 또는 사자(使者). 즉 둘을 만나게 해주는 ‘면담 중개인’

 

“츠나구의 규칙”

- 면담의 기회는 산 자와 죽은 자 모두 단 한 번. 즉 평생 단 한 명밖에 만날 수 없음.

- 의뢰는 산 자만 가능. 죽은 자는 의뢰할 수 없으며 누군가 의뢰해주길 기다려야 함.

- 면담 시간은 하룻밤뿐이며, 죽은 자의 영혼은 그 하룻밤동안 진짜 육체를 갖게 됨.

 

예상과 달리 이 판타지 같은 만남의 ‘중개인’은 10대 고교생 시부야 아유미입니다.

어딘가 아마추어 같은 냄새까지 폴폴 풍기는 탓에

안 그래도 죽은 자를 만나게 해준다는 것 자체를 사기나 속임수로 여긴 사람들은

대부분 중개인인 아유미에게 의혹을 눈길을 보내는데,

실제로 죽은 자들을 만난 후에야 그들의 의혹은 고마움 또는 원망의 감정으로 바뀝니다.

 

제대로 아는 사이도 아니었지만 살아갈 용기를 줬던 예능 탤런트를 만나려는 회사원,

장남이라는 굴레 때문에 평생 좌충우돌하며 살아온 남자가 어머니를 만나고 싶어 하는 사연,

고의는 아니었지만 결국 단짝을 죽이고 말았다는 자책감에 시달리던 한 여학생의 의뢰,

그리고 갑자기 실종된 후 7년간 무소식이던 연인의 죽음을 확인해야 하는 한 남자의 사연 등

제각기 안타깝거나 애틋한 인연을 만나려는 네 사람의 사연들이 펼쳐집니다.

 

마지막 수록작에서는 살짝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아유미에게 츠나구 자리를 물려주려는 할머니의 이야기가 ‘세미 프리퀄’처럼 펼쳐집니다.

또 아유미가 어릴 때 세상을 떠난 부모님의 죽음의 진실이 그려집니다.

특히 할머니와 부모님의 사연은 비극적인 미스터리 코드까지 담고 있어서

이 작품이 단순히 흥미로운 판타지만은 아니라는 걸 보여주는 매력적인 대목입니다.

 

산 자와 죽은 자를 매개하는 역할은 무거운 책임과 공포까지 떠안아야 하는 일입니다.

알고 싶지 않지만 알게 될 수밖에 없는 다른 사람의 삶과 죽음을 받아들여야 하고,

자칫 적잖은 후유증과 후회와 자책에 시달릴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아직 세상의 쓴맛이나 신맛을 제대로 맛보지 못한 아유미에게 무척 가혹한 일일 수도 있지만

그는 할머니의 진심 어린 부탁을 받아들이는 쪽으로 자신의 운명을 선택합니다.

 

이 작품이 일본에서 출간된 게 2010년이니

작가가 욕심이 있었다면 후속작으로 ‘완숙해진 츠나구 아유미’의 이야기를 냈을 법도 한데

한편으론 아쉽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론 현명한 선택이었다는 생각도 듭니다.

‘완숙해진 츠나구 아유미’라면 재미있는 판타지 이상의 서사가 쉽지 않을 것 같기 때문입니다.

다만, 츠지무라 미즈키라면 그게 불가능한 일은 아니겠다는 미련이 남긴 하지만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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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개츠비 (무선) ㅣ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7
F. 스콧 피츠제럴드 지음, 김영하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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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은 말할 것도 없고 영화와 뮤지컬로도 만들어져서 제목이라면 수만번쯤 들어본 작품이지만,

창피하게도 어떤 장르이며 무슨 이야기를 다루는지조차 모르는 상태에서

책장에서 너무 오래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던 ‘위대한 개츠비’를 꺼내 들었습니다.

고전이란 이유만으로 호기심, 의무감, 압박감을 느끼는 건 저만의 일은 아닐 텐데

그나마 벽돌 같은 두께도 아니고, 영화로도 만들어진데다 김영하의 번역이란 사실 덕분에

조금은 가벼운 마음으로 첫 페이지를 열었습니다.

 

증권맨이 되기 위해 미국 동부에 터전을 잡은 닉 캐러웨이의 이웃은 제이 개츠비입니다.

그는 바다가 보이는 호화로운 저택에 살며 주말마다 성대한 파티를 여는 엄청난 부자입니다.

어느 날 저택에 초대받은 닉은 개츠비의 첫사랑이 해안 맞은편에 사는 자신의 사촌 데이지이며

지금은 톰 뷰캐넌의 아내가 된 그녀를 개츠비가 아직도 잊지 못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됩니다.

한편, 남편 톰의 불륜을 알면서도 자신이 누리는 부(富)를 포기할 수 없어 갈등하던 데이지는

닉의 중재로 개츠비와 만나게 된 후로 복잡한 심정에 빠집니다.

개츠비와 데이지의 만남은 아슬아슬한 줄타기처럼 긴장감을 자아내기 시작하지만

예상치 못한 사고가 끼어들면서 비극적인 파국을 향해 치닫기 시작합니다.

 

일단 두 가지 사실 때문에 당혹스러웠는데,

하나는 주인공 개츠비를 수식하는 ‘위대한’이라는 단어가 왜 붙었는지 전혀 알 수 없었고,

또 하나는 “내가 읽은 건 분명 첫사랑에 얽힌 통속적이고도 비극적인 로맨스인데,

이 유명한 고전을 제대로 읽은 게 맞나? 다른 의미가 있는 건 아닌가?”라는 점이었습니다.

 

이 두 가지 의문에 대한 ‘해답’은 본문 뒤에 붙은 김영하의 해설에서 얻을 수 있었는데,

첫 의문인 ‘위대한’(Great)에 대해서는 아무래도 직접 읽은 뒤에 확인하는 게 좋을 것 같아

(스포일러까지는 아니지만) 이 서평에서는 언급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두 번째 의문에 대한 대답은 “제가 잘못 읽은 건 아니다.”인데,

이 작품이 분명 제가 읽은대로 통속적이고도 비극적인 로맨스인 건 맞지만

동시에 ‘1920년대 미국’이라는 시대적-사회적 의미가 짙게 깔려 있기도 해서

액면대로만 읽고 받아들여선 안 된다는 점을 뒤늦게나마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1차 대전과 대공황 사이인 1920년대는 출판사 소개글에 따르면

“화려한 재즈 시대를 배경 삼아 아메리칸 드림과 물질주의,

계급적 동경과 부에 대한 갈망 등”이 미국을 지배하던 시대입니다.

첫사랑인 데이지를 되찾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부(富)를 축적한 개츠비와

그와는 반대로 사랑의 기준을 오로지 화려하고 부유한 삶에 맞춰놓은 데이지의 재회는

이런 시대적 배경 속에서 아이러니한 비극을 낳게 된다는 뜻인데,

전통적인 의미의 부자임에도 불구하고 하층 계급의 유부녀와 불륜에 빠진 데이지의 남편 톰은

개츠비와 데이지의 아이러니함과는 전혀 다른 색깔의 비극을 자아내서 눈길을 끌기도 합니다.

 

“영원히 잊지 못할 첫사랑의 신화, 그 찬란한 영광에 인생을 건 남자의 위대한 환상.”은

이 작품을 한 줄로 요약한 적확한 표현이라는 생각입니다.

그리고 이 한 줄의 요약을 제대로 맛보려면

이 작품을 고전으로 자리매김하게 만든 시대적 상황에 대한 이해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사실, 난해한 고전을 읽은 뒤 그에 대한 해설이나 ‘옮긴이의 말’을 읽다 보면

“꿈보다 해몽”이란 말이 저절로 떠오를 정도로 본 내용을 포장하고 미화하는 경우가 많지만,

이 작품의 경우엔 김영하의 해설이 무척 큰 도움이 됐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김영하의 해설을 읽은 뒤 다시 한 번 찬찬히 첫 페이지부터 읽어나간다면

행간에 숨어있던 이 작품의 참맛 하나하나까지 알차게 만끽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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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골의 도시 ㅣ RHK 형사 해리 보슈 시리즈 8
마이클 코넬리 지음, 한정아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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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리 보슈 시리즈’ 8편인 ‘유골의 도시’는 제목이 상징하는 바가 많은 작품입니다.

우선, 보슈가 맡은 사건은 숲속에서 20년 전 죽은 소년의 유골이 발견되면서 시작됩니다.

모두가 피하고 싶은 어린 피해자의 사건이며 해결 가능성이 지극히 낮은 사건이기도 합니다.

또, LA는 9천 년 전 살해당한 인류의 유골이 발견되는 우울하고 음산한 도시로 묘사됩니다.

그 유골은 동일한 수법의 연쇄살인범에게 살해된 ‘9천 년 된 영구미제 사건’인 셈입니다.

그리고 죽은 자의 뼈와 영혼 곁을 맴도는 일을 천직으로 아는 보슈에게 위기가 닥칩니다.

피해자보다 조직의 안위를 앞세워 부당한 결정을 내리는 경찰에 대한 반감은 극에 달하고,

자신을 향해 끝없이 날아드는 비극과 불행에 대한 인내심은 바닥을 드러내고 맙니다.

그 모든 것들은 소년의 유골 사건을 수사하는 보슈에게 고통스럽고도 무거운 짐을 지웁니다.

 

이런 서사들 때문에 ‘유골의 도시’는 ‘해리 보슈 시리즈’의 커다란 분기점이 되는 작품인데,

특히 마지막 몇 페이지에 걸쳐 독자를 충격에 빠뜨리는 엄청난 반전은

25년 넘게 유골의 도시 LA에서 경찰로 살아온 보슈의 고뇌가 얼마나 큰 것이었는지,

또 한 손엔 열정을, 다른 한 손엔 허무주의를 든 그의 모순된 내면이 얼마나 고통스러웠는지

독자로 하여금 새삼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만드는 계기를 던져주기도 합니다.

 

보슈가 맡은 사건 자체는 난이도는 무척 높지만 그 얼개는 꽤 단순한 편입니다.

20년 만에 세상의 빛을 본 유골의 주인을 찾는 일부터 막다른 벽에 다다를 수밖에 없고

설령 유골의 주인을 찾는다고 해도 범인을 특정할 단서는 모조리 부패했거나 사라진 뒤라

보슈로서는 그저 행운이 따라주기를 바랄 수밖에 없습니다.

결국 몇 차례의 오류를 겪으면서 범인을 특정하긴 하지만

다 읽고 복기해보면 CSI 한 회 정도의 서사에 불과할 정도로 이야기는 단순합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보슈는 추악한 가족사와 어처구니없는 실상을 목격하게 되고,

일어나선 안 될 비극적인 죽음들을 수사 도중 눈앞에서 지켜봐야 했던 것은 물론,

거듭된 경찰 조직의 부당한 처사에 휘말려 전출 또는 퇴직의 압력을 받기에 이릅니다.

 

누구도 맡기 싫어하는, 또 해결하더라도 결코 승리감을 만끽할 수 없는 ‘소년 유골 사건’은

어쩌면 보슈를 옴짝달싹할 수 없는 낭떠러지 끝에 매달기 위해,

또 그의 열정을 꺾어버리고 허무주의를 극단으로 몰기 위한 의도적인 설정인지도 모릅니다.

여느 때보다 충돌의 강도나 빈도가 심했던 경찰 조직과의 대립도,

굳이 수사 과정에서 무고한 목숨들이 어이없이 스러진 것도 모두 같은 맥락일 수 있습니다.

작가 입장에서는 여덟 번째 작품에 이른 ‘보슈 시리즈’의 국면 전환을 위한 선택이었겠지만,

활약 못잖게 보슈의 상처를 지켜봐온 독자에겐 꽤나 힘들고 벅찬 시간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는 항상 형사라는 직업과 경찰배지와 임무가 없으면 자신은 길을 잃을 것이라 생각했었다.

그런데 이제는 그 모든 것이 있어도 마찬가지로 길을 잃을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니 그 모든 것 때문에 길을 잃을 것 같았다.” (p486)

 

사건 자체도 그렇고 보슈의 심리적 변화 부분 역시 스포일러가 될 장면들이 많다 보니

정작 작품 내용에 대해서는 별로 언급하지 못한 서평이 되고 말았습니다.

출판사의 소개글이라도 인용할까 했지만 초반부의 스포일러가 담겨 있어 그만뒀는데,

가능하면 아무 정보 없이 이 작품을 읽을 것을 권하고 싶습니다.

 

보슈의 열정과 허무주의를 이해해야 이 작품의 참맛을 만끽할 수 있을 텐데,

그러려면 이전 작품들이 ‘선행필수’가 돼야 하는 게 사실이긴 합니다.

(아닌 경우도 있긴 하지만) 따로 읽어도 무방한 다른 작품들과 달리

‘유골의 도시’는 보슈에게 굉장히 큰 변화를 가져오는 이야기를 담고 있기 때문인데,

보슈를 처음 만나는 독자라면 ‘라스트 코요테’ 정도는 먼저 읽어볼 것을 권하고 싶습니다.

 

꽤 중요하고 의미 있는 작품이라고 동어반복처럼 서평을 썼지만

정작 ‘보슈 시리즈’ 가운데 처음으로 별 4개를 준 작품이 되고 말았습니다.

(보슈의 허무를 그리기 위해 의도적으로 설정된 것으로 보이는) 사건 자체가 너무 단순했고,

그 탓에 보슈의 매력과 미덕이 상대적으로 미약하게 보였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도 막판 반전이 너무 갑작스럽고 공감하기 어렵게 그려졌기 때문인데,

극단적인 보슈의 심경의 변화는 적어도 10페이지 정도의 묘사는 더 필요했다는 생각입니다.

“나라도 보슈처럼 행동했을 것”이라는 공감을 얻지 못한 막판 반전은

다음 작품인 ‘로스트 라이트’에서의 보슈를 이해하는데도 꽤 큰 걸림돌이 될 것 같은데,

오래 전에 읽은 기억에 따르면 ‘로스트 라이트’ 역시 아쉬움이 많았던 작품이라

어쩌면 ‘유골의 도시’이 남긴 후유증 때문이 아니었을까, 조심스레 추정해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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