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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골의 도시 ㅣ RHK 형사 해리 보슈 시리즈 8
마이클 코넬리 지음, 한정아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5년 1월
평점 :
‘해리 보슈 시리즈’ 8편인 ‘유골의 도시’는 제목이 상징하는 바가 많은 작품입니다.
우선, 보슈가 맡은 사건은 숲속에서 20년 전 죽은 소년의 유골이 발견되면서 시작됩니다.
모두가 피하고 싶은 어린 피해자의 사건이며 해결 가능성이 지극히 낮은 사건이기도 합니다.
또, LA는 9천 년 전 살해당한 인류의 유골이 발견되는 우울하고 음산한 도시로 묘사됩니다.
그 유골은 동일한 수법의 연쇄살인범에게 살해된 ‘9천 년 된 영구미제 사건’인 셈입니다.
그리고 죽은 자의 뼈와 영혼 곁을 맴도는 일을 천직으로 아는 보슈에게 위기가 닥칩니다.
피해자보다 조직의 안위를 앞세워 부당한 결정을 내리는 경찰에 대한 반감은 극에 달하고,
자신을 향해 끝없이 날아드는 비극과 불행에 대한 인내심은 바닥을 드러내고 맙니다.
그 모든 것들은 소년의 유골 사건을 수사하는 보슈에게 고통스럽고도 무거운 짐을 지웁니다.
이런 서사들 때문에 ‘유골의 도시’는 ‘해리 보슈 시리즈’의 커다란 분기점이 되는 작품인데,
특히 마지막 몇 페이지에 걸쳐 독자를 충격에 빠뜨리는 엄청난 반전은
25년 넘게 유골의 도시 LA에서 경찰로 살아온 보슈의 고뇌가 얼마나 큰 것이었는지,
또 한 손엔 열정을, 다른 한 손엔 허무주의를 든 그의 모순된 내면이 얼마나 고통스러웠는지
독자로 하여금 새삼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만드는 계기를 던져주기도 합니다.
보슈가 맡은 사건 자체는 난이도는 무척 높지만 그 얼개는 꽤 단순한 편입니다.
20년 만에 세상의 빛을 본 유골의 주인을 찾는 일부터 막다른 벽에 다다를 수밖에 없고
설령 유골의 주인을 찾는다고 해도 범인을 특정할 단서는 모조리 부패했거나 사라진 뒤라
보슈로서는 그저 행운이 따라주기를 바랄 수밖에 없습니다.
결국 몇 차례의 오류를 겪으면서 범인을 특정하긴 하지만
다 읽고 복기해보면 CSI 한 회 정도의 서사에 불과할 정도로 이야기는 단순합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보슈는 추악한 가족사와 어처구니없는 실상을 목격하게 되고,
일어나선 안 될 비극적인 죽음들을 수사 도중 눈앞에서 지켜봐야 했던 것은 물론,
거듭된 경찰 조직의 부당한 처사에 휘말려 전출 또는 퇴직의 압력을 받기에 이릅니다.
누구도 맡기 싫어하는, 또 해결하더라도 결코 승리감을 만끽할 수 없는 ‘소년 유골 사건’은
어쩌면 보슈를 옴짝달싹할 수 없는 낭떠러지 끝에 매달기 위해,
또 그의 열정을 꺾어버리고 허무주의를 극단으로 몰기 위한 의도적인 설정인지도 모릅니다.
여느 때보다 충돌의 강도나 빈도가 심했던 경찰 조직과의 대립도,
굳이 수사 과정에서 무고한 목숨들이 어이없이 스러진 것도 모두 같은 맥락일 수 있습니다.
작가 입장에서는 여덟 번째 작품에 이른 ‘보슈 시리즈’의 국면 전환을 위한 선택이었겠지만,
활약 못잖게 보슈의 상처를 지켜봐온 독자에겐 꽤나 힘들고 벅찬 시간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는 항상 형사라는 직업과 경찰배지와 임무가 없으면 자신은 길을 잃을 것이라 생각했었다.
그런데 이제는 그 모든 것이 있어도 마찬가지로 길을 잃을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니 그 모든 것 때문에 길을 잃을 것 같았다.” (p486)
사건 자체도 그렇고 보슈의 심리적 변화 부분 역시 스포일러가 될 장면들이 많다 보니
정작 작품 내용에 대해서는 별로 언급하지 못한 서평이 되고 말았습니다.
출판사의 소개글이라도 인용할까 했지만 초반부의 스포일러가 담겨 있어 그만뒀는데,
가능하면 아무 정보 없이 이 작품을 읽을 것을 권하고 싶습니다.
보슈의 열정과 허무주의를 이해해야 이 작품의 참맛을 만끽할 수 있을 텐데,
그러려면 이전 작품들이 ‘선행필수’가 돼야 하는 게 사실이긴 합니다.
(아닌 경우도 있긴 하지만) 따로 읽어도 무방한 다른 작품들과 달리
‘유골의 도시’는 보슈에게 굉장히 큰 변화를 가져오는 이야기를 담고 있기 때문인데,
보슈를 처음 만나는 독자라면 ‘라스트 코요테’ 정도는 먼저 읽어볼 것을 권하고 싶습니다.
꽤 중요하고 의미 있는 작품이라고 동어반복처럼 서평을 썼지만
정작 ‘보슈 시리즈’ 가운데 처음으로 별 4개를 준 작품이 되고 말았습니다.
(보슈의 허무를 그리기 위해 의도적으로 설정된 것으로 보이는) 사건 자체가 너무 단순했고,
그 탓에 보슈의 매력과 미덕이 상대적으로 미약하게 보였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도 막판 반전이 너무 갑작스럽고 공감하기 어렵게 그려졌기 때문인데,
극단적인 보슈의 심경의 변화는 적어도 10페이지 정도의 묘사는 더 필요했다는 생각입니다.
“나라도 보슈처럼 행동했을 것”이라는 공감을 얻지 못한 막판 반전은
다음 작품인 ‘로스트 라이트’에서의 보슈를 이해하는데도 꽤 큰 걸림돌이 될 것 같은데,
오래 전에 읽은 기억에 따르면 ‘로스트 라이트’ 역시 아쉬움이 많았던 작품이라
어쩌면 ‘유골의 도시’이 남긴 후유증 때문이 아니었을까, 조심스레 추정해보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