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인자와 렌
엘레이나 어커트 지음, 박상미 옮김 / &(앤드)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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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지애나의 법의병리학 박사이자 검시관인 렌 멀러는 연이어 발견된 젊은 여성들의 시신을 조사하던 중 동일범에 의한 연쇄살인임을 확신합니다. 파트너나 다름없는 형사 존 르루 역시 렌의 의견에 동의하지만 좀처럼 단서를 찾지 못해 곤경에 빠집니다. 그러던 중 렌은 범인이 남긴 메시지를 해독해내곤 다음 범행의 윤곽을 예측하기에 이릅니다. 한편 납치한 희생자들을 상대로 루이지애나의 늪지대에서 사냥놀이를 즐기며 그들이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에서 쾌감을 느끼는 사이코패스 제러미는 평소 점찍어 온 여성을 납치하는데 성공하지만 사냥 도중 뜻하지 않은 일이 벌어지면서 큰 충격에 빠집니다.

 


스릴러 속 여성 법의학자 가운데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적인 캐릭터는 퍼트리샤 콘웰이 창조한 버지니아 주 법의국장 케이 스카페타와 테스 게리첸이 창조한 법의관 마우라 아일스입니다. 두 사람 모두 법의학자이자 형사 못잖은 능력을 발휘하며 극강의 사이코패스와 위험천만한 맞대결을 펼치곤 하는데, 이 작품의 주인공 렌 멀러 역시 비슷한 캐릭터와 재능을 가진 인물입니다.

렌의 상대인 사이코패스 제러미는 성장과정만 놓고 보면 덱스터를 연상시키지만, 그가 희생자들을 사냥하고 학살하는 방식은 여느 사이코패스보다도 잔인하고 끔찍해서 독자의 속을 수시로 뒤집어놓곤 합니다. 덧붙여 어둡고 음습한 루이지애나의 늪지대를 무대로 한 범행은 마치 영화를 보는 듯 생생하게 묘사돼서 제러미의 사이코패스 기질을 더욱 서늘하게 만듭니다.

 

340페이지라는 분량답게 이야기 구도는 비교적 단선적입니다. 미스터리 코드는 거의 없는 편이고, 성실하고 유능한 법의학자 렌이 형사 존 르루와의 협업을 통해 가공할 사이코패스 제러미의 정체를 밝히고 추적하는 심플한 스릴러 서사로 채워져 있습니다.

다만 구성의 맛이 독특한 작품인데, 중반부 조금 넘어 시작되는 ‘Part 2’에서 한차례 반전과 함께 렌과 제러미의 대결이 완전히 다른 양상을 띠기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처음엔 뭐지?”하고 어리둥절했지만 이내 반전의 의미를 깨닫자마자 앞서 읽은 ‘Part 1’에 작가의 계략(?)이 숨어있음을 눈치 챌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다 읽고 검색해보니 이 반전이 인터넷서점의 소개글에 적나라하게 공개돼있었습니다. 개인적으론 이 작품에서 가장 흥미로운 대목이자 독자의 뒤통수를 치는 설정이란 생각인데, 왜 이런 셀프 스포일러가 노출된 건지 아쉬울 뿐입니다.)

 

한 번에 마지막 페이지까지 달릴 정도로 속도감도 빠르고 사이코패스 스릴러의 미덕도 갖춘 작품이지만, 기대 대비 만족감은 다소 떨어졌습니다. 무엇보다 법의학자와 사이코패스의 대결이라는 구도에 비해 사건과 캐릭터 모두 소소하다는 느낌이 강했기 때문입니다. 제러미의 사냥과 학살은 잔인하긴 해도 중심사건으로서의 무게감이나 긴장감은 인상적이지 못했습니다. 루이지애나를 떠들썩하게 만들지도 못했고, 경찰의 대응도 고만고만해 보였습니다. 그러다 보니 제러미가 아무리 미쳐 날뛴다 해도 결국 법의학자 렌과 형사 르루만이 관심을 갖는 개인적인 차원의 사건처럼 느껴질 정도였습니다.

또 한 가지 아쉬움은 법의학자이자 형사 역할까지 떠맡은 렌의 캐릭터가 폭발력이 없었다는 점입니다. 형사 르루 외에는 딱히 그녀와 접점을 갖는 인물이 없다 보니 법의학자로서 어느 정도 레벨에 있는 건지, 어떤 평가를 받고 있는 건지도 잘 모르겠고, 또 그녀를 방해하거나 적대적으로 대하는 인물조차 없어서 입체감이 떨어진다는 생각이 수시로 들곤 했습니다. 형사로서의 렌 역시 딱히 눈에 띄는 활약을 보이지 못했는데, 뒷표지 카피에 실린 폭풍 같은 두뇌 게임이란 문구와 달리 렌의 역할은 정공법에서 거의 벗어나지 못한 게 사실입니다. 요약하자면 포장에 비해 내실이 부족한 주인공이라고 할까요?

 

미국에선 주인공 렌을 앞세운 후속작 ‘The Butcher Game’2024년에 출간됐습니다. 굿리즈 평점이 전작보다 조금 높게 나온 걸 보면 나름 독자들에게 어필하는 데 성공한 것으로 보이는데, 첫 만남이 좀 아쉽긴 했지만 한국에서도 후속작이 출간된다면 한번쯤은 더 만나볼 생각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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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 농성
구시키 리우 지음, 김은모 옮김 / 블루홀식스(블루홀6) / 202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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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에서 제공받은 도서입니다.

 

옛날 분위기가 남아 있는 온천거리 도로코베에서 참혹하게 살해된 어린 소년의 시신이 발견됩니다. 경찰은 목격진술을 토대로 악명 높은 15세 불량소년 마세 도마를 용의자로 지목하지만 뜻하지 않은 상황에 처하고 맙니다. 도마가 똘마니게이타로와 함께 경찰을 습격해서 총을 빼앗은 뒤 한 식당에서 인질극을 벌였기 때문입니다. 가난한 온천거리 아이들에게 식사를 제공해온 야기라 식당의 젊은 사장 쓰카사는 마침 식당에 와있던 소년, 소녀들과 함께 인질이 된 채 공포에 사로잡힙니다. 총과 칼로 무장한 도마와 게이타로는 15세답지 않은 잔혹한 성정을 내보이며 경찰에 요구조건을 전달합니다. 자신은 살인범이 아니며, 경찰이 진범을 잡아 방송에 공개하기 전까진 결코 농성을 풀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잔혹함의 끝을 보여주는 엽기적인 살인과 피도 눈물도 없는 15세 소년이 벌이는 가공할 인질극이라는 꽤 선정적이고 자극적인 설정이 눈길을 끌었지만, ‘소년 농성은 그런 설정에 대한 선입견을 여지없이 뒤집어버리는 사회파서스펜스 미스터리입니다. 야기라 식당을 무대로 한 전대미문의 인질극이 숨 가쁜 서스펜스를 그려냈다면, 인질극을 종료시키기 위해 진범을 추적하는 경찰의 지난한 분투는 반전을 거듭하는 미스터리를 펼쳐 보이는데, 이 작품의 중심서사이자 서스펜스와 미스터리의 토대는 실은 거소불명 아동(서류상 존재하지 않거나 거주지가 불분명한 아이)과 빈곤 아동의 문제라는 사회적 이슈이기 때문입니다.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화자는 인질이 된 식당 사장 쓰카사와 그의 절친인 경찰 이쿠야지만, 실질적인 주인공은 9~15세에 불과한 인질범과 인질들입니다. 그들은 오랜 세월 도로코베에 만연해 온 아동 문제의 피해자들입니다. 폭력과 빚에 쫓겨 자식과 함께 도로코베에 몸을 숨긴 여성들은 온천거리의 업소에서 신분을 숨긴 채 일을 하느라 자식들을 방치합니다. 무책임하고 폭력적인 남성들은 자신의 손아귀를 벗어난 아내를 증오하며 역시 자식들을 내팽개칩니다. 그 결과 거리를 배회하게 된 아이들은 때론 어른이나 또래의 사냥감이 되거나 거꾸로 사냥꾼으로 성장할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쓰카사나 이쿠야처럼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올곧게 성장한 경우도 있지만, 인질범 마도와 게이타로처럼 그 반대의 가능성이 훨씬 더 높은 것이 (사건이 해결된 뒤 한 댓글에서 무슨 쇼와시대 중기도 아니고, 그딴 동네가 있다는 게 말이 돼?”라는 비난을 받은) 온천거리 도로코베의 현실이기 때문입니다.

사연 많은 부모가 자식과 함께 야반도주하는 일이 밥 먹듯 벌어지고, 때론 자식만 남겨둔 채 부모가 도망치거나 거꾸로 부모를 버리고 가출하는 자식이 비일비재하다 보니 도로코베에서 소년, 소녀가 종적을 감추는 일은 그 누구의 이목도 끌지 못합니다. 경찰에 신고하는 부모도 없고, 신고를 진심으로 접수해주는 경찰도 없습니다. 야기라 식당에서 벌어진 인질극은 이런 비극적인 사연들이 오랜 세월 쌓인 끝에 벌어진 예고된 참극이었던 것입니다.

 

한편 인질범 도마의 요구대로 소년 살해범을 쫓던 수사본부는 사건현장 인근에서 또 다른 어린이 시신들이 발견되자 수사방향을 급선회합니다. 무엇보다 피해자의 신원을 파악하는 게 중요한데, 가출과 잠적과 실종이 빈발했던 도로코베에서 그것은 모래사장에서 바늘 찾기보다 더 어려운 일일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그만큼 지난한 미션이기에 막판에 미스터리가 해결되는 대목에서 독자는 평범한 반전 이상의 놀라움을 맛보게 되는데, 아무래도 소년, 소녀들이 연루된 끔찍한 사건이다 보니 개운함이나 통쾌함보다는 가슴에 누름돌이 얹힌 듯한 먹먹함에 잠식될 수밖에 없습니다.

 


구시키 리우의 전작인 타이거(Tiger)’가 엔터테인먼트 미스터리에 가까웠다면, ‘소년 농성은 인질극과 진범 찾기가 병행되는 서스펜스 미스터리의 묘미에 빈곤과 아동 문제를 정면으로 다룬 사회파 서사의 묵직함까지 함께 만끽할 수 있어서 오랫동안 여운이 남을 것 같은 작품입니다. 덕분에 아직 읽지 못한 구시키 리우의 첫 한국 출간작 사형에 이르는 병에 대한 관심도 높아졌는데, 동시에 다작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일본에서 왕성하게 펴낸 그의 장단편 미스터리에 대한 기대감도 높아진 게 사실입니다. 이제는 신작 소식이 기다려지는 일본작가 목록에 구시키 리우를 올려놓아도 괜찮겠다는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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흉가 - 개정판 스토리콜렉터 40
미쓰다 신조 지음, 현정수 옮김 / 북로드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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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전근으로 도쿄에서 나라(奈良)의 나가하시 마을로 이사한 초등학교 4학년 쇼타는 산중턱에 자리한 2층 주택에서 불길한 느낌을 받습니다. 집 뒤편의 웅크린 뱀 모양을 한 도도산()과 그 정상부의 어두운 숲길은 보는 것만으로도 공포를 자아냈고, 다른 가족들 눈에는 안 보이는 기이한 형체들이 쇼타 앞에 수시로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여동생 모모미가 요괴임에 분명한 존재들을 봤다고 말하자 쇼타의 두려움은 극에 달합니다. 최근 3년 동안 여러 가족이 이 주택을 거쳐 간 사실을 알게 된 쇼타는 분명 그들에게 일어난 어떤 사건이 괴현상의 원인이라 여기곤 유일하게 사귄 친구 코헤이와 함께 나가하시 마을에 대해 조사합니다.

 


일본 기준으로 미쓰다 신조의 집 시리즈화가’(禍家,2007) - ‘흉가’(凶宅,2008) - ‘마가’(魔邸,2017) 순으로 출간됐는데, 등장인물이나 스토리에 연관성은 전혀 없지만 어린 주인공이 낯선 곳에 살게 된 뒤 괴이 현상을 겪는 이야기라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습니다. 부모가 교통사고로 사망한 뒤 할머니와 함께 도교 외곽에 살게 된 코타로가 괴물체를 비롯한 기괴한 일들을 겪는 이야기(‘화가’), 삼촌과 함께 숲속 별장에 살게 된 유마가 숲과 별장에서 불길한 기운을 느끼다가 끔찍한 일에 휘말리는 이야기(‘마가’)에 이어 흉가역시 이제 10살이 된 쇼타가 도도산() 중턱의 2층 주택에서 도저히 현실의 일이라 믿을 수 없는 괴이 현상을 목격하는 이야기를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세 작품의 또 하나의 공통점은 집 근처의 산과 숲입니다. 사람을 홀리는 듯한 음습한 기운을 발산하는가 하면 카미카쿠시(사람이 갑자기 행방불명되는 일)를 일으켰다는 무시무시한 소문의 근원지이기도 한 산과 숲은 호러의 주 무대이자 마치 살아있는 캐릭터처럼 이야기의 한 축을 담당합니다. 특히 흉가에 등장하는 도도산은 미쓰다 신조의 작가 시리즈의 대미를 장식한 사관장백사당에도 등장했던 곳으로, 뱀의 기운이 진하게 서려있는 마의 공간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래선지 사관장백사당을 읽은 독자라면 흉가의 공포를 더욱 농밀하게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주인공 쇼타의 눈에만 보이는 시커먼 사람의 형체, 여동생 모모미를 찾아오곤 하는 복수의 요괴들, 쇼타의 2층 주택을 제외하곤 제각각의 이유로 공사가 중단된 채 폐허로 남은 주택지, 도도산이 내뿜는 사악한 냉기와 그 일대에 거주하는 수상하고 기괴한 인물들, 그리고 쇼타 가족보다 앞서 2층 주택에 살다가 무슨 이유에선지 금세 떠나고 말았던 한 가족의 비밀 등 흉가는 다양한 호러와 미스터리 코드를 품고 있어서 같은 시리즈인 화가마가에 비해 훨씬 더 흥미롭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공간과 캐릭터 등 비주얼 요소도 뛰어나서 영상으로 만든다면 무척 매력적인 호러물이 되지 않았을까 싶은데, 특히 막판에 사람의 형체를 닮은 그것요괴의 정체가 밝혀지는 장면은 어느 정도 예상됐음에도 불구하고 소름 돋는 반전의 맛과 함께 영상으로 보고 싶다는 생각이 저절로 들게 만들었습니다.

 

화가의 서평에도 썼지만 집 시리즈는 미쓰다 신조의 다른 호러물에 비하면 단편영화 혹은 단막극 정도의 사이즈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호러의 농도나 깊이는 여전하지만 주인공이 모두 어린 소년들이다 보니 서사 자체가 어느 정도는 제한됐다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요즘처럼 무덥고 습한 날씨가 이어질 때 부담 없이 읽을 수 있는 호러물 한 편을 고른다면 미쓰다 신조의 작품이 제격일 것 같은데, ‘집 시리즈에 관심 있는 독자라면 흉가화가를 선택해도 괜찮겠다는 생각입니다. (개인적인 만족도로 따지면 흉가’ > ‘화가’ > ‘마가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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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번째 카드 - 판타스틱 픽션 블랙 BLACK 2-6 링컨 라임 시리즈 6
제프리 디버 지음, 유소영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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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 할렘 흑인박물관에서 자신의 조상에 관한 오래된 자료를 조사하던 16세 소녀 제네바가 한 남자의 습격을 받습니다. 당초 강간범으로 추정됐지만 남자는 제네바가 보던 오래된 자료를 탈취하여 종적을 감춘 것은 물론 그 뒤로도 제네바를 살해하려는 시도를 멈추지 않습니다. 전신마비 법과학자 링컨 라임과 이제 갓 형사로 승진한 아멜리아 색스는 범인이 남긴 몇 안 되는 단서를 통해 범행동기를 추리하지만 좀처럼 결과를 얻어내지 못합니다. 그러던 중 범인의 안전가옥을 발견하고 정체까지 알아낸 라임과 색스는 위험천만한 위기를 넘기며 사건을 해결한 듯 보였지만, 그 후로도 제네바를 향한 살해 시도가 계속 이어지자 이 끔찍한 범행의 최종 배후가 누구인지, 진짜 목적은 무엇인지 철저히 파헤치기로 결심합니다.

 


링컨 라임 시리즈의 여섯 번째 작품인 ‘12번째 카드는 전작들과는 사뭇 결이 다른 소재와 서사를 품고 있습니다. 법과학자 라임과 열혈경찰 색스가 잔혹하고 무자비한 연쇄살인마를 추적하는 액션 스릴러가 지금까지의 공통된 경향이었다면, ‘12번째 카드는 단 하나의 목적, 16세 소녀 제네바를 살해하려는 냉혹한 청부살인업자를 쫓는, 비교적 단선적인 구도를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제프리 디버는 사건 못잖게 풍성한 이야기와 다양한 서사를 담아냄으로써 오히려 전작들보다 훨씬 더 볼륨감이 느껴지는 매력적인 작품을 탄생시켰습니다. 지나치게 심플해 보이던 사건 역시 시간이 흐를수록 반전을 거듭하며 독자를 점점 더 미궁 속으로 몰아넣습니다.

 

‘12번째 카드에서 가장 인상적인 대목은 무려 140여 년 전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를 배경으로 한 흑인할렘에 관한 서사입니다. 두 서사 모두 청부살인업자의 표적인 16세 소녀 제네바가 이끄는데, 제네바는 140년 전, 해방 노예로서 당대 거물 정치인들과 함께 흑인 인권운동을 벌이다가 갑작스레 절도범으로 몰려 전 재산을 몰수당하고 유죄판결을 받았던 까마득한 조상 찰스 싱글턴의 진실을 알고 싶어 오래된 자료를 검색하는 등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강한 자부심을 갖고 있으면서도, 동시에 범죄와 마약과 혼란에 찌든 흑인들의 상징할렘을 탈출하기 위해 오로지 공부에만 매진하는 반항적인 모범생이기도 합니다. 말하자면 조상에 대한 자부심과 인종적 열패감을 함께 지닌 미묘한 캐릭터라고 할까요? 라임과 색스 역시 청부살인업자의 표적인 제네바를 보호하면서도 어떻게든 저주와도 같은 숙명을 벗어던지고 자신만의 세상을 구축하려는 그녀를 지켜보며 여러 가지 복잡한 감정을 겪게 됩니다.

 

‘16세 소녀 제네바 죽이기엔 주범인 청부살인업자 외에도 공범, 무기제공범, 사주범 등 꽤나 호화롭고(?) 요란한 범죄자들이 동원됩니다. 곤봉부터 독가스에 이르기까지 살해도구도 다채롭게 등장하는데, 너무 쉬운 표적에 비해 악당들을 과대포장한 게 아닌가 싶기도 했지만, 제프리 디버는 특유의 반전과 미스디렉션을 통해 단순해 보이던 사건을 흥미진진하게 발전시킵니다. 특히 마지막 페이지를 덮기 전엔 절대 끝나도 끝난 게 아니다!”라는, 제프리 디버의 트레이드마크는 이번에도 여지없이 독자를 희롱하곤 하는데, 양파껍질마냥 벗길 때마다 새롭게 드러나는 진실은 지금까지의 그 어떤 연속 반전보다도 재미와 흥분을 선사해줬습니다.

 

제네바의 캐릭터가 워낙 눈길을 끌어서인지 상대적으로 라임과 색스의 활약은 미미해 보인 게 사실입니다. 물론 라임은 미세증거를 통해 결정적인 단서를 확보했고, 색스는 몸을 아끼지 않는 열혈형사의 면모를 유감없이 보여줬지만 전작들에 비하면 다소 아쉽게 읽힐 수밖에 없던 게 사실입니다. 하지만 개인적으론 앞선 다섯 편의 작품에서 두 사람의 수사 방식이 살짝 반복된다는 인상과 함께 약간의 피로감마저 느꼈던 터라 오히려 ‘12번째 카드에서 보여준 라임과 색스의 인간적인 모습이 더 신선하게 읽혔습니다. 특히 라임은 평소 그답지 않게 범행동기에 꽤나 신경을 쓰는 것은 물론 제네바를 통해 크고 작은 깨달음과 성찰을 얻기도 합니다. 말하자면 시리즈 여섯 편째에 이르러 작은 변곡점이 마련된 듯한 느낌이라고 할까요?

 

서평이 길어져서 제대로 언급하지 못했지만, 지금껏 본 적 없는 청부살인업자의 독특한 캐릭터라든가 라임의 오랜 동료인 론 셀리토를 엄습한 위기, 또 제네바가 새롭게 알게 되는 할렘의 역사와 존재 의미 등 독자의 관심을 끌 만한 설정이 가득한 작품입니다. 저처럼 시리즈에 피로감을 느낀 독자라도 색다른 재미를 만끽할 수 있는 작품이니 나름 기대해도 괜찮을 거란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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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사이트 밀
요네자와 호노부 지음, 최고은 옮김 / 엘릭시르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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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생 유키 리쿠히코는 평균 시급의 100배에 달하는 엄청난 고액을 제시한 수상한 아르바이트 광고에 눈길이 끌립니다. 할 일이라곤 7일에 걸쳐 진행되는 인문과학적 실험의 피험자가 되어 24시간 내내 관찰당하는 게 전부. 의심스러우면서도 고액의 시급에 끌린 유키는 주최측의 안내에 따라 외진 숲속에 자리한 암귀관이라는 기괴한 지하 구조물에 발을 들입니다. 유키를 포함한 12명의 피험자는 주최측으로부터 각각 다른 흉기와 그에 관한 메모를 전달받곤 이 실험이 살인인간행동에 관한 것임을 알게 됩니다. 하지만 두려움보다는 고액 시급의 유혹이 더 컸고, 12명 모두 살인 같은 건 일어날 리 없다는 낙관론을 품습니다. 하지만 뜻밖의 첫 살인이 벌어지고 그때부터 암귀관은 잔혹한 데스 게임의 무대로 변합니다.

 


일본에서 2007년에 출간된 인사이트 밀2008년 한국에 처음 소개됐고(학산문화사), 이어 2022년 엘릭시르에서 개정판을 낸 요네자와 호노부의 본격 미스터리입니다. 클로즈드 서클과 데스 게임에 본격 미스터리까지 가미된 버라이어티한 서사에다 황금기 고전 미스터리에 대한 다양한 오마주까지 곁들여져서 비슷한 구조의 작품들과는 조금은 다른 매력을 품고 있습니다. 특히 어마어마한 고액 시급은 기본이고 살인자, 피살자, 탐정, 조수 등 암귀관에서 벌어지는 살인사건의 주인공이 될 경우 몇 배의 보너스를 받을 수 있다는 설정 때문에 12명의 피험자들은 단순히 살아남는 것 이상의 목표를 품게 되는데, 이 잔혹하면서도 자극적인 설정 때문에 단순히 누가 범인인가?’를 밝히는 것보다 더 많은 궁금증과 기대감을 품게 만듭니다.

 

터무니없는 고액 시급에 끌려 위험천만한 아르바이트에 도전한 만큼 등장인물들의 캐릭터는 조금 별나고 독특하게 설정됐습니다. 리더를 자처하며 암귀관의 공포를 즐기는 자, 그런 리더의 곁에 빌붙어 목숨을 부지하려는 자, 위험한 분위기를 발산하며 언제라도 살인을 저지를 것 같은 자, 무슨 일이 벌어져도 상관없다는 듯 태연자약한 자 등 극과 극의 캐릭터들이 벌이는 갈등과 충돌은 살인사건 못잖게 흥미로운 요소입니다. 특히 각기 다른 방식으로 살해된 시신들이 연이어 발견되는 가운데 범인 자체도 오리무중이지만 범행에 이용된 살해 도구가 누구의 것인지, 즉 주최측으로부터 그 도구를 제공받은 자가 누구인지 알 수 없어 피험자들의 혼란과 불신은 더욱 가중됩니다.

 

이 다음부터는 부조리하고 비윤리적인 일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그래도 상관없으신 분만, 계속 앞으로 나아가십시오. 그렇지 않으신 분은 이곳에서 떠나시기를 권합니다. 하지만 그 위험에 걸맞은 대가는 준비되어 있습니다.” (p47~48)

 

재미있는 건 살해당하고 싶지 않다는 두려움도, 범인을 밝혀내고 싶다는 정의감도 하나같이 고액의 시급몇 배의 보너스라는 물질적인 동기에 의해 움직인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앞서 언급한대로 이 물질적인 동기는 인사이트 밀을 여느 클로즈드 서클 미스터리나 데스 게임 스릴러와도 차별화시키는 가장 중요한 요소로 작동합니다. ‘부조리하고 비윤리적인 일을 감수하고라도 위험에 걸맞은 대가를 손에 넣으려는 욕망이 암귀관의 공포를 더욱 생생하고 잔인하게 만든다고 할까요?

 

이 작품이 한국에 처음 출간된 2008년에 읽었다면 새로운 스타일의 클로즈드 서클 데스 게임 미스터리에 좀더 환호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 사이에 유사한 서사의 작품을 많이 접해온 터라 새로움과 신선함을 느낄 여지가 많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요네자와 호노부가 그려낸 차별화된 이야기는 충분히 재미와 긴장감을 만끽할 수 있었습니다. 유일한 아쉬움이라면 소재와 스토리에 비해 다소 과해 보인 분량 정도였는데, 속도감도 꽤 빠르고 인물들의 캐릭터도 매력적이라 지루함을 느낄 틈은 없었습니다.

마지막 에필로그에 후속편을 암시하는 메시지를 실어놓고도 요네자와 호노부가 지금까지 인사이트 밀 2을 출간하지 않은 건 이 작품을 읽은 모든 독자라면 누구나 서운하게 느끼는 바일 텐데, 어쩌면 출간 20주년을 기념하여 후속편이 나올 지도 모르니 나름 기대해봐도 괜찮겠다는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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