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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 농성
구시키 리우 지음, 김은모 옮김 / 블루홀식스(블루홀6) / 2025년 7월
평점 :
*출판사에서 제공받은 도서입니다.
옛날 분위기가 남아 있는 온천거리 도로코베에서 참혹하게 살해된 어린 소년의 시신이 발견됩니다. 경찰은 목격진술을 토대로 악명 높은 15세 불량소년 마세 도마를 용의자로 지목하지만 뜻하지 않은 상황에 처하고 맙니다. 도마가 ‘똘마니’ 게이타로와 함께 경찰을 습격해서 총을 빼앗은 뒤 한 식당에서 인질극을 벌였기 때문입니다. 가난한 온천거리 아이들에게 식사를 제공해온 야기라 식당의 젊은 사장 쓰카사는 마침 식당에 와있던 소년, 소녀들과 함께 인질이 된 채 공포에 사로잡힙니다. 총과 칼로 무장한 도마와 게이타로는 15세답지 않은 잔혹한 성정을 내보이며 경찰에 요구조건을 전달합니다. 자신은 살인범이 아니며, 경찰이 진범을 잡아 방송에 공개하기 전까진 결코 농성을 풀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잔혹함의 끝을 보여주는 엽기적인 살인과 피도 눈물도 없는 15세 소년이 벌이는 가공할 인질극이라는 꽤 선정적이고 자극적인 설정이 눈길을 끌었지만, ‘소년 농성’은 그런 설정에 대한 선입견을 여지없이 뒤집어버리는 ‘사회파’ 서스펜스 미스터리입니다. 야기라 식당을 무대로 한 전대미문의 인질극이 숨 가쁜 서스펜스를 그려냈다면, 인질극을 종료시키기 위해 진범을 추적하는 경찰의 지난한 분투는 반전을 거듭하는 미스터리를 펼쳐 보이는데, 이 작품의 중심서사이자 서스펜스와 미스터리의 토대는 실은 거소불명 아동(서류상 존재하지 않거나 거주지가 불분명한 아이)과 빈곤 아동의 문제라는 사회적 이슈이기 때문입니다.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화자는 인질이 된 식당 사장 쓰카사와 그의 절친인 경찰 이쿠야지만, 실질적인 주인공은 9~15세에 불과한 인질범과 인질들입니다. 그들은 오랜 세월 도로코베에 만연해 온 아동 문제의 피해자들입니다. 폭력과 빚에 쫓겨 자식과 함께 도로코베에 몸을 숨긴 여성들은 온천거리의 업소에서 신분을 숨긴 채 일을 하느라 자식들을 방치합니다. 무책임하고 폭력적인 남성들은 자신의 손아귀를 벗어난 아내를 증오하며 역시 자식들을 내팽개칩니다. 그 결과 거리를 배회하게 된 아이들은 때론 어른이나 또래의 사냥감이 되거나 거꾸로 사냥꾼으로 성장할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쓰카사나 이쿠야처럼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올곧게 성장한 경우도 있지만, 인질범 마도와 게이타로처럼 그 반대의 가능성이 훨씬 더 높은 것이 (사건이 해결된 뒤 한 댓글에서 “무슨 쇼와시대 중기도 아니고, 그딴 동네가 있다는 게 말이 돼?”라는 비난을 받은) 온천거리 도로코베의 현실이기 때문입니다.
사연 많은 부모가 자식과 함께 야반도주하는 일이 밥 먹듯 벌어지고, 때론 자식만 남겨둔 채 부모가 도망치거나 거꾸로 부모를 버리고 가출하는 자식이 비일비재하다 보니 도로코베에서 소년, 소녀가 종적을 감추는 일은 그 누구의 이목도 끌지 못합니다. 경찰에 신고하는 부모도 없고, 신고를 진심으로 접수해주는 경찰도 없습니다. 야기라 식당에서 벌어진 인질극은 이런 비극적인 사연들이 오랜 세월 쌓인 끝에 벌어진 예고된 참극이었던 것입니다.
한편 인질범 도마의 요구대로 소년 살해범을 쫓던 수사본부는 사건현장 인근에서 또 다른 어린이 시신들이 발견되자 수사방향을 급선회합니다. 무엇보다 피해자의 신원을 파악하는 게 중요한데, 가출과 잠적과 실종이 빈발했던 도로코베에서 그것은 ‘모래사장에서 바늘 찾기’보다 더 어려운 일일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그만큼 지난한 미션이기에 막판에 미스터리가 해결되는 대목에서 독자는 평범한 반전 이상의 놀라움을 맛보게 되는데, 아무래도 소년, 소녀들이 연루된 끔찍한 사건이다 보니 개운함이나 통쾌함보다는 가슴에 누름돌이 얹힌 듯한 먹먹함에 잠식될 수밖에 없습니다.

구시키 리우의 전작인 ‘타이거(Tiger)’가 엔터테인먼트 미스터리에 가까웠다면, ‘소년 농성’은 인질극과 진범 찾기가 병행되는 서스펜스 미스터리의 묘미에 빈곤과 아동 문제를 정면으로 다룬 사회파 서사의 묵직함까지 함께 만끽할 수 있어서 오랫동안 여운이 남을 것 같은 작품입니다. 덕분에 아직 읽지 못한 구시키 리우의 첫 한국 출간작 ‘사형에 이르는 병’에 대한 관심도 높아졌는데, 동시에 다작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일본에서 왕성하게 펴낸 그의 장단편 미스터리에 대한 기대감도 높아진 게 사실입니다. 이제는 신작 소식이 기다려지는 일본작가 목록에 구시키 리우를 올려놓아도 괜찮겠다는 생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