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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자와 렌
엘레이나 어커트 지음, 박상미 옮김 / &(앤드) / 2025년 6월
평점 :
루이지애나의 법의병리학 박사이자 검시관인 렌 멀러는 연이어 발견된 젊은 여성들의 시신을 조사하던 중 동일범에 의한 연쇄살인임을 확신합니다. 파트너나 다름없는 형사 존 르루 역시 렌의 의견에 동의하지만 좀처럼 단서를 찾지 못해 곤경에 빠집니다. 그러던 중 렌은 범인이 남긴 메시지를 해독해내곤 다음 범행의 윤곽을 예측하기에 이릅니다. 한편 납치한 희생자들을 상대로 루이지애나의 늪지대에서 ‘사냥놀이’를 즐기며 그들이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에서 쾌감을 느끼는 사이코패스 제러미는 평소 점찍어 온 여성을 납치하는데 성공하지만 사냥 도중 뜻하지 않은 일이 벌어지면서 큰 충격에 빠집니다.

스릴러 속 여성 법의학자 가운데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적인 캐릭터는 퍼트리샤 콘웰이 창조한 버지니아 주 법의국장 케이 스카페타와 테스 게리첸이 창조한 법의관 마우라 아일스입니다. 두 사람 모두 법의학자이자 형사 못잖은 능력을 발휘하며 극강의 사이코패스와 위험천만한 맞대결을 펼치곤 하는데, 이 작품의 주인공 렌 멀러 역시 비슷한 캐릭터와 재능을 가진 인물입니다.
렌의 상대인 사이코패스 제러미는 성장과정만 놓고 보면 ‘덱스터’를 연상시키지만, 그가 희생자들을 사냥하고 학살하는 방식은 여느 사이코패스보다도 잔인하고 끔찍해서 독자의 속을 수시로 뒤집어놓곤 합니다. 덧붙여 어둡고 음습한 루이지애나의 늪지대를 무대로 한 범행은 마치 영화를 보는 듯 생생하게 묘사돼서 제러미의 사이코패스 기질을 더욱 서늘하게 만듭니다.
340페이지라는 분량답게 이야기 구도는 비교적 단선적입니다. 미스터리 코드는 거의 없는 편이고, 성실하고 유능한 법의학자 렌이 형사 존 르루와의 협업을 통해 가공할 사이코패스 제러미의 정체를 밝히고 추적하는 심플한 스릴러 서사로 채워져 있습니다.
다만 구성의 맛이 독특한 작품인데, 중반부 조금 넘어 시작되는 ‘Part 2’에서 한차례 반전과 함께 렌과 제러미의 대결이 완전히 다른 양상을 띠기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처음엔 “뭐지?”하고 어리둥절했지만 이내 반전의 의미를 깨닫자마자 앞서 읽은 ‘Part 1’에 작가의 계략(?)이 숨어있음을 눈치 챌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다 읽고 검색해보니 이 반전이 인터넷서점의 소개글에 적나라하게 공개돼있었습니다. 개인적으론 이 작품에서 가장 흥미로운 대목이자 독자의 뒤통수를 치는 설정이란 생각인데, 왜 이런 셀프 스포일러가 노출된 건지 아쉬울 뿐입니다.)
한 번에 마지막 페이지까지 달릴 정도로 속도감도 빠르고 사이코패스 스릴러의 미덕도 갖춘 작품이지만, 기대 대비 만족감은 다소 떨어졌습니다. 무엇보다 법의학자와 사이코패스의 대결이라는 구도에 비해 사건과 캐릭터 모두 소소하다는 느낌이 강했기 때문입니다. 제러미의 사냥과 학살은 잔인하긴 해도 중심사건으로서의 무게감이나 긴장감은 인상적이지 못했습니다. 루이지애나를 떠들썩하게 만들지도 못했고, 경찰의 대응도 고만고만해 보였습니다. 그러다 보니 제러미가 아무리 미쳐 날뛴다 해도 결국 법의학자 렌과 형사 르루만이 관심을 갖는 개인적인 차원의 사건처럼 느껴질 정도였습니다.
또 한 가지 아쉬움은 법의학자이자 형사 역할까지 떠맡은 렌의 캐릭터가 폭발력이 없었다는 점입니다. 형사 르루 외에는 딱히 그녀와 접점을 갖는 인물이 없다 보니 법의학자로서 어느 정도 레벨에 있는 건지, 어떤 평가를 받고 있는 건지도 잘 모르겠고, 또 그녀를 방해하거나 적대적으로 대하는 인물조차 없어서 입체감이 떨어진다는 생각이 수시로 들곤 했습니다. 형사로서의 렌 역시 딱히 눈에 띄는 활약을 보이지 못했는데, 뒷표지 카피에 실린 “폭풍 같은 두뇌 게임”이란 문구와 달리 렌의 역할은 정공법에서 거의 벗어나지 못한 게 사실입니다. 요약하자면 포장에 비해 내실이 부족한 주인공이라고 할까요?
미국에선 주인공 렌을 앞세운 후속작 ‘The Butcher Game’이 2024년에 출간됐습니다. 굿리즈 평점이 전작보다 조금 높게 나온 걸 보면 나름 독자들에게 어필하는 데 성공한 것으로 보이는데, 첫 만남이 좀 아쉽긴 했지만 한국에서도 후속작이 출간된다면 한번쯤은 더 만나볼 생각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