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인의 예술
레이먼드 챈들러 지음, 정윤희 옮김 / 레인보우퍼블릭북스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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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립 말로 시리즈가 제 책장에 꽂힌 건 꽤 오래 전 일이지만, 앞선 두 편만 읽은 뒤로 거의 방치해온 게 사실입니다. 레이먼드 챈들러의 하드보일드 스타일이 제 취향과 잘 안 맞은 탓에 흠뻑 빠져들지 못한 걸로 기억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젠가는 꼭 한 번 재도전하고 싶은 시리즈 중 하나이기도 합니다. 그래서인지 레이먼드 챈들러의 단편집이 출간됐다는 소식에 색다른 기대감이 들었던 건데, ‘살인의 예술1934~1944년 사이에 발표된 그의 단편 가운데 다섯 편을 수록한 작품입니다.

 

다섯 편 모두 제각각의 (전현직) 사립탐정이 주인공으로 등장하고 복수와 탐욕에서 비롯된 살인사건부터 유쾌한 블랙코미디를 연상시키는 절도사건까지 다양한 이야기들이 포진돼있습니다. 무미건조까지는 아니어도 대부분의 주인공들은 전형적인 하드보일드 캐릭터로 설정돼있는데, 심성과 관계없이 대체로 딱딱하거나 차갑거나 혹은 훈훈한 캐릭터라 해도 타인과의 거리감을 확실하게 두는 인물들이라 나름 독특한 매력들을 지니고 있습니다. 물론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감정도 상처도 풍부한 주인공과는 거리가 멀지만, 영화에서나 맛볼 수 있는 1930~40년대 미국 대도시의 아날로그 감성과 잘 맞아 떨어지는 인물들이라 흥미롭게 지켜볼 수 있었습니다.

 

다만, 단편임에도 불구하고 등장인물도 적지 않고 사건의 배경 역시 꽤 복잡하게 설정돼있어서 대충 숲은 보이는데 그 안의 나무들을 제대로 파악할 수 없는난감한 상황들과 종종 마주치곤 합니다. 두 번째, 다섯 번째 수록작인 영리한 살인자시라노 클럽 총격 사건이 대표적인 경우인데, 이리저리 복잡하게 꼬인 설정들 때문에 범인의 동기나 사립탐정의 행보가 한눈에 들어오지 않았고, 마지막 페이지에 이르러서도 깔끔한 마무리를 맛볼 수 없었습니다. 빠르고 독한 이야기와 확실하고 선명한 구도를 선호하는 요즘의 스릴러 독자에겐 (레이먼드 챈들러가 20세기 초중반에 활약한 작가라는 점과 관계없이) 조금은 버거운 느낌이 들 수도 있겠다는 생각입니다. 개인적으론 다소 평범한 구도이긴 해도 의외의 범인이 폭로된 황금 옷을 입은 왕과 블랙코미디의 미덕이 빛났던 사라진 진주 목걸이가 가장 마음에 들었습니다.

 

편집에 관해 몇 마디 꼭 보태고 싶은 점들이 있는데, 우선 책날개에 인쇄된 레이먼드 챈들러에 대한 소개가 너무 부실합니다. 그가 활약했던 시대에 대한 언급 하나 없이 마치 최근까지 활동한 작가처럼 보이게 만든 점도, 또 그의 대명사나 다름없는 하드보일드에 대한 설명 하나 없던 점도 아쉬웠습니다. , 번역제목을 살인의 예술로 삼았고 원제를 ‘The Simple Art of Murder’로 소개했지만, 레이먼드 챈들러가 기존의 추리소설 작가들의 작품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밝힌 짧은 에세이 ‘The Simple Art of Murder’는 수록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말하자면 제목만 빌려오고 정작 그 에세이는 빠진 셈입니다. 더불어, 각 단편마다 각주로 원제를 표기해줬더라면 좋았을 거란 아쉬움도 함께 들었습니다. 마지막으로, 간혹 두세 번 되읽어도 애매모호했던 번역의 문제를 빼놓을 수 없는데, 원작 자체가 그런가보다, 하고 넘어갈 때도 있었지만 앞뒤 맥락이 안 맞거나 비문처럼 읽힌 경우도 분명히 있었습니다.

 

책장에 방치된 필립 말로 시리즈를 볼 때마다 마무리 짓지 못한 숙제처럼 늘 찜찜함을 느끼곤 했는데, 이 작품을 계기로 재도전해보려는 욕심을 가져본 게 사실입니다. 절반쯤은 여전히 그 욕심이 꿈틀대지만, 절반쯤은 역시 나랑은 잘 안 맞나?”라는 회의가 들기도 하는데, 머잖아 시리즈 첫 편인 빅 슬립을 통해 결단(?)을 내려 보려고 합니다. 오래 전 기억과 달리 어쩌면 레이먼드 챈들러의 진짜 매력을 발견할 수도 있다는 기대와 함께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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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임 워칭 유
테레사 드리스콜 지음, 유혜인 옮김 / 마시멜로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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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행 기차를 탄 중년여성 엘라는 교도소에서 막 출소한 20대 남자들이 런던이 초행인 10대 소녀들을 유혹하는 위험한 상황을 목격합니다. 하지만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지면서 엘라는 소녀들을 도우려던 생각을 접습니다. 다음 날 소녀들 중 한 명인 애나 밸러드가 실종됐다는 뉴스를 본 엘라는 충격에 빠집니다. 더구나 목격 증언을 한 뒤로 엘라는 기차에서 애나를 돕지 않았다며 언론과 여론으로부터 맹비난을 받는 처지가 됩니다. 사건 1주년 특별방송 즈음, 엘라를 비롯하여 애나 주위의 사람들은 동요하기 시작합니다.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는 자신만의 비밀이 혹시라도 애나의 실종과 이어져 있을까봐 두렵기 때문입니다. 한편 엘라는 익명의 검은 엽서를 받는데, 거기엔 1년 전 그녀의 실수를 비난하는 협박 메시지가 적혀있습니다.

 

1년 전 실종된 애나를 찾는 이야기(누가 애나를 납치했나?)와 현재 엘라에게 협박 엽서를 보내는 자가 누구인지를 찾는 미스터리가 핵심이지만, 오히려 애나의 실종과 관련된 주변 인물들의 비밀과 두려움을 다룬 심리 스릴러의 성격이 더 강한 작품입니다.

기차에서 애나를 돕지 않은 일 때문에 사회적인 비난은 물론 그녀 스스로 죄책감에 사로잡혀있던 엘라는 1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일과 가정의 뿌리까지 뒤흔들리는 괴로움을 겪고 있습니다. 실종 당일 애나와 동행했던 세라는 혹시 자신의 무모한 행동 때문에 애나가 끔찍한 짓을 당한 게 아닐지 두려워합니다. 애나의 아버지 헨리는 실종 당일 애나가 자신에게 실망하며 격분했던 일도 걱정되지만, 그날 자신의 행적을 거짓으로 진술했던 일 때문에 더욱 전전긍긍합니다. 엘라에게 고용된 전직 경찰이자 사설탐정인 매슈는 검은 엽서의 발신자를 찾기 위해 애쓰면서 동시에 애나 실종사건의 실마리를 잡으려는 노력도 병행합니다.

 

엘라를 포함하여 심리적으로 동요하는 여러 명의 화자가 번갈아 챕터를 이끌어 가는데, 덕분에 애나 실종사건의 이면에 얽힌 여러 인물들의 복잡한 사정이 사건 자체보다 더 눈길을 끕니다. 이런 설정은 사건의 단순성을 극복하는 힘을 갖고 있긴 하지만, 동시에 사건 자체를 덜 흥미롭게 만드는 약점도 갖고 있습니다.

애나 실종사건 자체와 별 관계없는, 그러니까 어차피 벌어졌을 일들이 꽤 많은 분량과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는 뜻인데, 실종사건과 무관하게 별거에 이를 수밖에 없었던 애나 부모의 사정이라든가, 애나의 실종에 가장 큰 죄책감을 갖고 있는 세라의 끔찍한 가족사, 경찰을 그만두고 탐정의 길을 택한 매슈의 개인적인 사정 등이 그것입니다. 각각의 에피소드는 모두 흥미롭긴 하지만, 정작 중심 사건인 애나의 실종에 대한 몰입을 방해하는 역할도 맡고 있습니다.

 

특히 막판에 밝혀진 애나 실종사건의 진실과 범인의 정체는 반전이라기보다는 조금은 뜬금없기도 하고 반전을 위한 반전처럼 억지스럽게 보여서 이 작품의 정체성을 모호하게 만들기도 했습니다. 실종 미스터리는 지나치게 단순하고, 그렇다고 심리스릴러로 보기에는 각 인물의 에피소드가 독립성이 너무 강해서 중심사건과 무관한 따로국밥처럼 보였기 때문입니다. 실종사건에 연루된 주변 인물들의 내밀한 비밀은 그 자체로 무척 매력적인 소재이긴 하지만, 뭔가 있어 보이게 포장됐던 실종 미스터리가 너무 맥없이 풀리는 바람에 이도저도 아닌 애매한 엔딩이 되고 말았다고 할까요? 마지막 장을 덮은 지 만 하루도 지나지 않았지만 어떤 이야기를 읽은 건지 한 줄로 정리되지 않는 건 아마도 이런 이유 때문인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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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범 협박 시 주의사항 - JM북스
후지타 요시나가 지음, 이나라 옮김 / 제우미디어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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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문예편집자를 꿈꾸는 여대생 오카노 케이코는 스스로 학비와 생활비를 마련해야 하는 처지 때문에 호스티스 아르바이트를 하는 중입니다. 하루 빨리 호스티스 생활을 청산하고 싶지만 취업은 요원하고 대출금은 무섭게 불어나는 탓에 극도의 스트레스를 받던 케이코는 어느 날 집 인근에서 단골손님 쿠니에다를 목격합니다. 문제는 그가 뛰쳐나온 맨션에서 피살자가 발견됐고, 사망추정시간 역시 케이코가 그를 발견한 시간과 일치한다는 점입니다. 케이코는 그날 이후 마음속에 피어오르는 악의 때문에 갈등에 빠집니다. 고급인력 파견업체 사장인데다 젠틀하고 온화한 성격을 가진 쿠니에다라면 쉽게 협박에 응해 적잖은 돈을 내놓을 것 같기 때문입니다. 고민 끝에 당신이 살인범임을 알고 있다.”는 익명의 협박 편지를 보낸 케이코. 하지만 사태는 엉뚱한 방향으로 치닫기 시작합니다.

 

낯선 이름이라 당연히 신인작가라고 여겼지만 다 읽은 뒤 후반에 실린 해설을 보니 1950년생으로 일본 추리작가협회상, 나오키상, 요시카와 에이지 문학상 등을 수상했으며, 이 작품을 유작으로 2020년 세상을 떠난 베테랑 작가였습니다. 이전에 한국에 소개된 작품은 2008텐텐’()이 유일했는데, 경력에 비하면 고개가 갸웃거릴 정도로 덜 알려진 작가입니다.

 

이 작품의 원제는 彼女恐喝’, 직역하면 그녀의 공갈입니다. 나름 센스 있는 번역 제목 때문에 눈길이 확 끌렸는데, 얼핏 가벼운 톤의 미스터리로 오해할 여지가 있지만 실은 인물이나 사건 모두 꽤 묵직한 무게감을 지니고 있어서 페이지를 넘길수록 살인범을 협박했다가 예상치 못한 사태에 휘말리는 주인공의 이야기가 어떻게 마무리될지 무척 궁금해졌습니다.

다만, 케이코가 단골손님이자 살인범인 쿠니에다를 협박하는 이야기는 대략 1/3지점에서 마무리되고 이 작품의 진짜 알맹이는 그 이후부터 전개되는데, 그 내용을 설명하려면 스포일러를 피할 방법이 없어서 대략적인 인상비평 이상의 서평을 쓰기가 불가능한 작품입니다. 출판사의 소개글이 딱 그 대목까지만 간략하게 언급한 것도 같은 이유 때문입니다.

 

이 작품에서 가장 흥미로운 설정은 협박범 케이코와 살인범 쿠니에다의 관계입니다. 20대 호스티스와 50대 손님이라는 통속적인 관계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서로에게 호감을 느낍니다. 케이코로서는 호스티스인 자신을 늘 정중하고 젠틀하게 자신을 대해준 쿠니에다가 살인범이란 사실 자체도 믿기지 않았지만 그를 상대로 공갈 협박을 저질러도 되는지를 놓고 깊은 고민에 빠집니다. 말 못할 사연을 지닌 듯한 쿠니에다는 어떻게든 스스로 앞길을 개척하려 애쓰는 자신을 대견히 여기는 것은 물론 플라토닉한 관계에 만족하면서도 물심양면으로 돕는 키다리 아저씨 같은 역할을 자처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두 사람이 협박범과 살인범으로 엮였으니 이야기는 살얼음판을 걷듯 아슬아슬하고 긴장감 넘치게 전개될 수밖에 없습니다.

 

사실, 케이코의 협박이 마무리되는 1/3지점까지는 전체적으로 너무 가볍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습니다. 문장은 지나치게 짧고 간결하고, 내용 역시 진중한 구석 하나 없이 숭덩숭덩 흘러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쿠니에다의 비하인드 스토리가 공개되는 두 번째 챕터가 시작되면서 전혀 다른 톤의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그리고 케이코의 협박장이 초래한 의외의 사태들이 롤러코스터처럼 전개되기 시작합니다. 초반의 가벼움만 견뎌낸다면 꽤 흥미로운 이야기를 만날 수 있으니 성급한 독자라면 조금만 인내심을 갖기를 권하고 싶습니다.

 

조금 긴 사족으로 번역 혹은 편집에 대한 아쉬움을 지적하고 싶은데, 자잘한 오타 정도는 몰라도 간혹 인물의 이름을 오기하거나(아야나 아야네, 미노베 미노부, 요코타 료코 요코타 요시코), 시제나 표현의 오류를 발견했을 땐 한숨이 나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또 마지막 페이지에 실린 작가 약력에도 오류가 있었는데, “2017년에는 폭설 이야기로 제51회 후루카와 에이지 문학상을 수상이라고 돼있지만, 한국에 소개되지 않은 그 작품의 원제는 大雪物語이며, 그 작품이 수상한 상은 요시카와 에이지 문학상’(吉川英治文学賞)입니다. 역자나 편집자라면 충분히 걸러낼 수 있는 오류들이라 아쉬움이 더 컸는데, 매번 오역이나 오타를 발견할 때마다 느끼는 점이지만 인쇄하기 전 한번만 더 자신들의 작품을 성의 있게 살펴볼 수는 없는 건지, 하다못해 가제본 서평단이라도 꾸려서 체크해볼 수는 없는 건지 궁금할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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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이여 오라 - 제9회 제주 4·3평화문학상 수상작
이성아 지음 / 은행나무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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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대를 바라보는 독일어 번역가 조한나의 본명은 변이숙입니다. 제주 4.3사건과 빨갱이낙인은 수십 년에 걸쳐 그녀의 가족을 산산조각 냈고, 20대에 이른 그녀는 결국 한국을 떠나 독일 유학길에 오릅니다. 이름까지 바꾸며 과거와의 단절을 바랐지만, 얼마 못가 어처구니없는 누명과 함께 또다시 조국의 잔혹한 폭력에 짓밟히고 맙니다. 악몽과 착란에 시달리며 20여년을 지낸 조한나는 2015, 다시 한 번 한국을 떠나고 싶은 간절함에 사로잡힙니다. 가까스로 봉인했던 공포와 분노를 되살아나게 만들 가당찮은 상황이 벌어졌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번역한 소설의 원작자인 마르코 라디치의 초대를 받은 조한나는 멀고도 먼 발칸반도를 향해 먹먹한 여정을 떠납니다. 하지만 그곳에서 그녀가 마주친 것은 너무도 낯익은 상처들입니다.

 

내전과 인종청소로 얼룩진 발칸반도의 비극과 대량학살의 상처가 아직도 아물지 않은 제주 4.3사건을 주된 화두로 삼고 있지만, ‘밤이여 오라는 실은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형태의 폭력에 대한 고발장입니다. 특히 이념, 민족주의, 종교를 앞세운 국가(혹은 그에 준하는 권위)에 의한 거대한 폭력이 어떻게 개개인의 삶을 궤멸시키는지, 또 수십 년이 흘러도 결코 아물지 않을 깊은 상처를 남기는지를 집요하면서도 차분하고 명징한 태도로 독자에게 들려줍니다.

 

중심 이야기는 20여 년 전 참혹한 내전과 인종청소가 벌어졌던 발칸반도 곳곳을 여행하는 조한나의 여정입니다. 자그레브, 비셰그라드, 부코바르 등 가는 곳마다 추모비가 이정표처럼 세워져있는 발칸반도는 거대한 무덤과도 같은 분위기를 자아냅니다. 공교롭게도 같은 시기, 한국에서 국가폭력에 의해 심신이 완전히 파괴됐던 조한나에게는 발칸반도의 상처들이 낯설지 않게 다가옵니다. 또한 자신의 가족을 붕괴시킨 제주 4.3사건과 빨갱이낙인을 상기시키는 닮은꼴의 흔적들을 발칸반도 곳곳에서 목격합니다.

 

나는 발칸에서 제주를 보았고, 제주에서 다시 발칸을 보고 있었다. 발칸에서 나는 살아서 지옥을 배회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중략) 내가 정말 무서웠던 건 그토록 참혹한 비극이 도무지 낯설지가 않다는 것 때문이었다. (p207~208, ‘작가의 말)

 

발칸반도에서 조한나가 만난 사람들은 여전히 20년 전에 얻은 상흔에 갇혀있습니다. 아내와 딸을 잃고 폐인이 된 남자, 군인들의 윤간으로 태어난 자신의 운명을 저주하며 어떻게든 발칸반도를 떠나려는 청년, 내전의 피해자지만 비무장 상태의 적군을 죽인 일로 트라우마를 겪는 남자, 고향은 같지만 종교와 민족이 다르다는 이유로 가해자와 피해자의 운명을 물려받은 연인 등 살아서 지옥을 배회하고 있는사람들이 도처에 널려있습니다. 조한나는 때론 그들에게서 일란성 쌍둥이같은 동질감을 느끼기도 합니다. 자기 자신은 물론 철저히 망가진 가족과 연인을 떠올리게 만드는 공통점들이 너무나도 생생하게 들여다보였기 때문입니다. 그런 탓에 다시금 악몽과 착란에 시달리기 시작한 조한나는 오랫동안 봉인해둔 기억들이 제멋대로 날뛰는 것을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는 처지에 이릅니다.

 

다소 주제의식이 강한 작품인 건 맞지만, 선언적이지도 않고 교훈적이지도 않은 서사 때문에 오히려 깊은 인상과 여운을 음미할 수 있었습니다. 특히 조한나의 상처의 근원이 제주 4.3 사건을 비롯하여 한국에서 겪은 국가(혹은 그에 준하는 권위)에 의한 폭력임에도 불구하고, 닮은꼴의 상처를 지닌 발칸반도에서의 여정을 통해 간접적으로, 하지만 훨씬 더 피부에 와 닿게 그린 점은 이 작품만의 가장 특별한 미덕입니다. 또 발칸반도의 풍광을 손에 잡힐 듯 사실적으로 그려낸 문장들은 그곳의 비극과 대비되어 더 처연하게 느껴졌고, 흥분이 최고조에 이르는 대목에서조차 서늘함을 유지했던 차분하고 정갈한 문장들은 역설적으로 작품 속 인물들의 공포와 분노를 더 강렬하게 만들었는데, ‘9회 제주 4·3 평화문학상은 바로 이런 점들이 높이 평가받은 결과라는 생각입니다.

 

돌이킬 수 없는 비극을 들여다보는 것이 괴로워서 일부러 과거의 참혹한 이야기를 외면하는 독자도 있겠지만, ‘밤이여 오라는 고통스럽긴 해도 결코 외면해서는 안 되는, 그래서 더더욱 많은 사람들이 알아야만 하는 이야기를 다루고 있기에 좀더 다양한 계층의 많은 독자들이 관심을 가져줬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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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진 소녀들
팜 제노프 지음, 정윤희 옮김 / 잔(도서출판)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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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년 뉴욕. 작은 법률사무소의 사무원인 그레이스 힐리는 기차역 벤치에 버려진 여행가방에서 10여 장에 가까운 젊은 여자들의 독사진을 발견합니다. 아무리 기다려도 가방 주인이 나타나지 않자 그레이스는 알 수 없는 호기심에 사진들을 갖고 옵니다. 그리고 얼마 후 가방 주인인 엘레노어 트리그라는 여자가 2차 세계대전 중 창설된 영국 특수작전국 요원임을 알아내곤 그녀와 사진 속 젊은 여자들의 사연을 조사하기로 결심합니다.

1944년 런던과 파리. 영국 특수작전국장의 비서였던 엘레노어 트리그는 국장의 전격적인 결정에 의해 여자 특수요원들을 발굴하고 훈련시키는 일을 맡습니다. 엘레노어에 의해 발굴된 요원 중 한 명은 홀로 5살 딸을 키우던 마리입니다. 프랑스어에 능통하지만 특수요원으로서의 재능이라곤 전혀 없었던 마리는 파리에 투입된 이후 위험한 작전들을 무사히 수행합니다. 하지만 전쟁 막바지 파리의 비밀조직과 특수요원들이 독일군에게 일망타진됩니다. 누군가의 배신이 아니고선 절대 벌어질 수 없었던 대참극에 엘레노어와 마리는 큰 충격을 받습니다.

 

2차 대전을 배경으로 한 미스터리나 스릴러는 무려 80여 년 전을 배경으로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매력적인 서사와 진한 여운을 품고 있는 장르입니다. 올해(2021) 유독 2차 대전을 배경으로 하고 있거나 그 당시 사건이 현재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이야기를 많이 접했는데, 리스 보엔의 팔리 들판에서’, 에릭 앰블러의 공포로의 여행’, 헤더 모리스의 실카의 여행이 전자라면, 넬레 노이하우스의 깊은 상처는 후자에 해당하는 작품입니다.

 

사라진 소녀들은 공식 직함은커녕 아무런 기록조차 남기지 못하고 사라져간 여자 특수요원들의 활약과 비극을 한 축으로, 또 그녀들의 감춰진 진실을 좇는 긴박한 미스터리를 다른 한 축으로 삼아 전쟁의 비극이라는 주제를 나름 독특한 관점에서 바라본 작품입니다. 엘레노어와 마리가 1943~1944년의 런던과 파리를 무대로 여자 특수요원들의 활약과 비극을 설명하고 있고, 전쟁 직후인 1946년을 무대로 우연히 엘레노어의 여행가방에서 젊은 여자들의 사진을 발견한 그레이스가 그녀들의 사연을 조사하며 누가 그녀들을 사지로 몰아넣었으며, 왜 엘레노어는 전쟁이 끝난 후 그녀들의 사진을 들고 뉴욕에 나타났나?”를 추적하는 역할을 맡습니다.

 

독일에게 점령당한 이후 젊은 남자들이 사라진 프랑스에서 영국의 남자 특수요원들이 속절없이 독일군에게 체포당하는 일이 벌어지자 그 대안으로 떠오른 것이 여자 특수요원이었습니다. 지극히 남성우월의식이 팽배해있던 시절인데다 군대라는 조직의 보수성은 더 극단적이어서 애초 여자 특수요원의 양성과 파견은 잘 해야 비웃음, 보통은 비아냥의 대상이었습니다.

하지만 엘레노너와 마리 등은 기대 이상의 성과를 냈고 불과 1년 만에 여자 특수요원을 없어서는 안 될 존재로 만들어냈습니다. 하지만 대의를 위해 소소한 희생은 불가피한 법이라는 전쟁의 딜레마 속에서 여자 특수요원들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거나 고문 후 살해당하는 비극을 맞이해야 했고, 1944년 런던의 엘레노어와 1946년 뉴욕의 그레이스는 그 진실을 알아내기 위해 동분서주합니다.

 

큰 틀만 놓고 보면 조국을 위해 싸웠지만 무참히 버려진 이름 없는 용사들의 진실을 좇는 이야기라는, 다소 낯익은 구조를 갖고 있지만, 엘레노어-마리-그레이스라는 세 명의 화자를 동원하여 과거와 현재의 이야기를 정교하게 병행시킨 덕분에 전혀 새로운 시각에서 전쟁의 비극을 바라볼 수 있었습니다. 특히 우연히 습득한 젊은 여자들의 사진에 마음을 빼앗겨 그녀들이 겪은 참상을 조사하는 그레이스의 챕터는 명탐정 미스터리 못잖은 긴장감과 매력을 지니고 있어서 전쟁 장르물 이상의 미덕을 만끽하게 만듭니다. 또 스스로 발굴하고 훈련시킨 특수요원들에게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를 알아내기 위해 전쟁 중에는 물론 전쟁이 끝난 후에도 집요하게 추적하는 엘레노어의 죄책감과 사명감은 비장한 느낌까지 들게 만듭니다.

 

전쟁 서사와 미스터리의 조합 자체가 드문 경우이긴 하지만 사라진 소녀들은 그 분야에 있어서 손에 꼽을 만한 작품이란 생각입니다. ‘2차 대전과 여자 특수요원이란 설정 때문에 자칫 선입견을 가질 독자도 적지 않을 것 같지만 사라진 소녀들은 분명 그 선입견 이상의 여운을 제공하는 작품임에 분명합니다. 개인적으론 영화나 드라마로 만들어지면 좋겠다는 바람이 들기도 했는데, 시공간은 물론 캐릭터들도 워낙 매력적이라 영상으로 만난다면 원작 이상의 감흥을 누릴 수 있을 것 같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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