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이여 오라 - 제9회 제주 4·3평화문학상 수상작
이성아 지음 / 은행나무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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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대를 바라보는 독일어 번역가 조한나의 본명은 변이숙입니다. 제주 4.3사건과 빨갱이낙인은 수십 년에 걸쳐 그녀의 가족을 산산조각 냈고, 20대에 이른 그녀는 결국 한국을 떠나 독일 유학길에 오릅니다. 이름까지 바꾸며 과거와의 단절을 바랐지만, 얼마 못가 어처구니없는 누명과 함께 또다시 조국의 잔혹한 폭력에 짓밟히고 맙니다. 악몽과 착란에 시달리며 20여년을 지낸 조한나는 2015, 다시 한 번 한국을 떠나고 싶은 간절함에 사로잡힙니다. 가까스로 봉인했던 공포와 분노를 되살아나게 만들 가당찮은 상황이 벌어졌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번역한 소설의 원작자인 마르코 라디치의 초대를 받은 조한나는 멀고도 먼 발칸반도를 향해 먹먹한 여정을 떠납니다. 하지만 그곳에서 그녀가 마주친 것은 너무도 낯익은 상처들입니다.

 

내전과 인종청소로 얼룩진 발칸반도의 비극과 대량학살의 상처가 아직도 아물지 않은 제주 4.3사건을 주된 화두로 삼고 있지만, ‘밤이여 오라는 실은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형태의 폭력에 대한 고발장입니다. 특히 이념, 민족주의, 종교를 앞세운 국가(혹은 그에 준하는 권위)에 의한 거대한 폭력이 어떻게 개개인의 삶을 궤멸시키는지, 또 수십 년이 흘러도 결코 아물지 않을 깊은 상처를 남기는지를 집요하면서도 차분하고 명징한 태도로 독자에게 들려줍니다.

 

중심 이야기는 20여 년 전 참혹한 내전과 인종청소가 벌어졌던 발칸반도 곳곳을 여행하는 조한나의 여정입니다. 자그레브, 비셰그라드, 부코바르 등 가는 곳마다 추모비가 이정표처럼 세워져있는 발칸반도는 거대한 무덤과도 같은 분위기를 자아냅니다. 공교롭게도 같은 시기, 한국에서 국가폭력에 의해 심신이 완전히 파괴됐던 조한나에게는 발칸반도의 상처들이 낯설지 않게 다가옵니다. 또한 자신의 가족을 붕괴시킨 제주 4.3사건과 빨갱이낙인을 상기시키는 닮은꼴의 흔적들을 발칸반도 곳곳에서 목격합니다.

 

나는 발칸에서 제주를 보았고, 제주에서 다시 발칸을 보고 있었다. 발칸에서 나는 살아서 지옥을 배회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중략) 내가 정말 무서웠던 건 그토록 참혹한 비극이 도무지 낯설지가 않다는 것 때문이었다. (p207~208, ‘작가의 말)

 

발칸반도에서 조한나가 만난 사람들은 여전히 20년 전에 얻은 상흔에 갇혀있습니다. 아내와 딸을 잃고 폐인이 된 남자, 군인들의 윤간으로 태어난 자신의 운명을 저주하며 어떻게든 발칸반도를 떠나려는 청년, 내전의 피해자지만 비무장 상태의 적군을 죽인 일로 트라우마를 겪는 남자, 고향은 같지만 종교와 민족이 다르다는 이유로 가해자와 피해자의 운명을 물려받은 연인 등 살아서 지옥을 배회하고 있는사람들이 도처에 널려있습니다. 조한나는 때론 그들에게서 일란성 쌍둥이같은 동질감을 느끼기도 합니다. 자기 자신은 물론 철저히 망가진 가족과 연인을 떠올리게 만드는 공통점들이 너무나도 생생하게 들여다보였기 때문입니다. 그런 탓에 다시금 악몽과 착란에 시달리기 시작한 조한나는 오랫동안 봉인해둔 기억들이 제멋대로 날뛰는 것을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는 처지에 이릅니다.

 

다소 주제의식이 강한 작품인 건 맞지만, 선언적이지도 않고 교훈적이지도 않은 서사 때문에 오히려 깊은 인상과 여운을 음미할 수 있었습니다. 특히 조한나의 상처의 근원이 제주 4.3 사건을 비롯하여 한국에서 겪은 국가(혹은 그에 준하는 권위)에 의한 폭력임에도 불구하고, 닮은꼴의 상처를 지닌 발칸반도에서의 여정을 통해 간접적으로, 하지만 훨씬 더 피부에 와 닿게 그린 점은 이 작품만의 가장 특별한 미덕입니다. 또 발칸반도의 풍광을 손에 잡힐 듯 사실적으로 그려낸 문장들은 그곳의 비극과 대비되어 더 처연하게 느껴졌고, 흥분이 최고조에 이르는 대목에서조차 서늘함을 유지했던 차분하고 정갈한 문장들은 역설적으로 작품 속 인물들의 공포와 분노를 더 강렬하게 만들었는데, ‘9회 제주 4·3 평화문학상은 바로 이런 점들이 높이 평가받은 결과라는 생각입니다.

 

돌이킬 수 없는 비극을 들여다보는 것이 괴로워서 일부러 과거의 참혹한 이야기를 외면하는 독자도 있겠지만, ‘밤이여 오라는 고통스럽긴 해도 결코 외면해서는 안 되는, 그래서 더더욱 많은 사람들이 알아야만 하는 이야기를 다루고 있기에 좀더 다양한 계층의 많은 독자들이 관심을 가져줬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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