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진 소녀들
팜 제노프 지음, 정윤희 옮김 / 잔(도서출판) / 2021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1946년 뉴욕. 작은 법률사무소의 사무원인 그레이스 힐리는 기차역 벤치에 버려진 여행가방에서 10여 장에 가까운 젊은 여자들의 독사진을 발견합니다. 아무리 기다려도 가방 주인이 나타나지 않자 그레이스는 알 수 없는 호기심에 사진들을 갖고 옵니다. 그리고 얼마 후 가방 주인인 엘레노어 트리그라는 여자가 2차 세계대전 중 창설된 영국 특수작전국 요원임을 알아내곤 그녀와 사진 속 젊은 여자들의 사연을 조사하기로 결심합니다.

1944년 런던과 파리. 영국 특수작전국장의 비서였던 엘레노어 트리그는 국장의 전격적인 결정에 의해 여자 특수요원들을 발굴하고 훈련시키는 일을 맡습니다. 엘레노어에 의해 발굴된 요원 중 한 명은 홀로 5살 딸을 키우던 마리입니다. 프랑스어에 능통하지만 특수요원으로서의 재능이라곤 전혀 없었던 마리는 파리에 투입된 이후 위험한 작전들을 무사히 수행합니다. 하지만 전쟁 막바지 파리의 비밀조직과 특수요원들이 독일군에게 일망타진됩니다. 누군가의 배신이 아니고선 절대 벌어질 수 없었던 대참극에 엘레노어와 마리는 큰 충격을 받습니다.

 

2차 대전을 배경으로 한 미스터리나 스릴러는 무려 80여 년 전을 배경으로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매력적인 서사와 진한 여운을 품고 있는 장르입니다. 올해(2021) 유독 2차 대전을 배경으로 하고 있거나 그 당시 사건이 현재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이야기를 많이 접했는데, 리스 보엔의 팔리 들판에서’, 에릭 앰블러의 공포로의 여행’, 헤더 모리스의 실카의 여행이 전자라면, 넬레 노이하우스의 깊은 상처는 후자에 해당하는 작품입니다.

 

사라진 소녀들은 공식 직함은커녕 아무런 기록조차 남기지 못하고 사라져간 여자 특수요원들의 활약과 비극을 한 축으로, 또 그녀들의 감춰진 진실을 좇는 긴박한 미스터리를 다른 한 축으로 삼아 전쟁의 비극이라는 주제를 나름 독특한 관점에서 바라본 작품입니다. 엘레노어와 마리가 1943~1944년의 런던과 파리를 무대로 여자 특수요원들의 활약과 비극을 설명하고 있고, 전쟁 직후인 1946년을 무대로 우연히 엘레노어의 여행가방에서 젊은 여자들의 사진을 발견한 그레이스가 그녀들의 사연을 조사하며 누가 그녀들을 사지로 몰아넣었으며, 왜 엘레노어는 전쟁이 끝난 후 그녀들의 사진을 들고 뉴욕에 나타났나?”를 추적하는 역할을 맡습니다.

 

독일에게 점령당한 이후 젊은 남자들이 사라진 프랑스에서 영국의 남자 특수요원들이 속절없이 독일군에게 체포당하는 일이 벌어지자 그 대안으로 떠오른 것이 여자 특수요원이었습니다. 지극히 남성우월의식이 팽배해있던 시절인데다 군대라는 조직의 보수성은 더 극단적이어서 애초 여자 특수요원의 양성과 파견은 잘 해야 비웃음, 보통은 비아냥의 대상이었습니다.

하지만 엘레노너와 마리 등은 기대 이상의 성과를 냈고 불과 1년 만에 여자 특수요원을 없어서는 안 될 존재로 만들어냈습니다. 하지만 대의를 위해 소소한 희생은 불가피한 법이라는 전쟁의 딜레마 속에서 여자 특수요원들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거나 고문 후 살해당하는 비극을 맞이해야 했고, 1944년 런던의 엘레노어와 1946년 뉴욕의 그레이스는 그 진실을 알아내기 위해 동분서주합니다.

 

큰 틀만 놓고 보면 조국을 위해 싸웠지만 무참히 버려진 이름 없는 용사들의 진실을 좇는 이야기라는, 다소 낯익은 구조를 갖고 있지만, 엘레노어-마리-그레이스라는 세 명의 화자를 동원하여 과거와 현재의 이야기를 정교하게 병행시킨 덕분에 전혀 새로운 시각에서 전쟁의 비극을 바라볼 수 있었습니다. 특히 우연히 습득한 젊은 여자들의 사진에 마음을 빼앗겨 그녀들이 겪은 참상을 조사하는 그레이스의 챕터는 명탐정 미스터리 못잖은 긴장감과 매력을 지니고 있어서 전쟁 장르물 이상의 미덕을 만끽하게 만듭니다. 또 스스로 발굴하고 훈련시킨 특수요원들에게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를 알아내기 위해 전쟁 중에는 물론 전쟁이 끝난 후에도 집요하게 추적하는 엘레노어의 죄책감과 사명감은 비장한 느낌까지 들게 만듭니다.

 

전쟁 서사와 미스터리의 조합 자체가 드문 경우이긴 하지만 사라진 소녀들은 그 분야에 있어서 손에 꼽을 만한 작품이란 생각입니다. ‘2차 대전과 여자 특수요원이란 설정 때문에 자칫 선입견을 가질 독자도 적지 않을 것 같지만 사라진 소녀들은 분명 그 선입견 이상의 여운을 제공하는 작품임에 분명합니다. 개인적으론 영화나 드라마로 만들어지면 좋겠다는 바람이 들기도 했는데, 시공간은 물론 캐릭터들도 워낙 매력적이라 영상으로 만난다면 원작 이상의 감흥을 누릴 수 있을 것 같기 때문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