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인범 협박 시 주의사항 - JM북스
후지타 요시나가 지음, 이나라 옮김 / 제우미디어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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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예편집자를 꿈꾸는 여대생 오카노 케이코는 스스로 학비와 생활비를 마련해야 하는 처지 때문에 호스티스 아르바이트를 하는 중입니다. 하루 빨리 호스티스 생활을 청산하고 싶지만 취업은 요원하고 대출금은 무섭게 불어나는 탓에 극도의 스트레스를 받던 케이코는 어느 날 집 인근에서 단골손님 쿠니에다를 목격합니다. 문제는 그가 뛰쳐나온 맨션에서 피살자가 발견됐고, 사망추정시간 역시 케이코가 그를 발견한 시간과 일치한다는 점입니다. 케이코는 그날 이후 마음속에 피어오르는 악의 때문에 갈등에 빠집니다. 고급인력 파견업체 사장인데다 젠틀하고 온화한 성격을 가진 쿠니에다라면 쉽게 협박에 응해 적잖은 돈을 내놓을 것 같기 때문입니다. 고민 끝에 당신이 살인범임을 알고 있다.”는 익명의 협박 편지를 보낸 케이코. 하지만 사태는 엉뚱한 방향으로 치닫기 시작합니다.

 

낯선 이름이라 당연히 신인작가라고 여겼지만 다 읽은 뒤 후반에 실린 해설을 보니 1950년생으로 일본 추리작가협회상, 나오키상, 요시카와 에이지 문학상 등을 수상했으며, 이 작품을 유작으로 2020년 세상을 떠난 베테랑 작가였습니다. 이전에 한국에 소개된 작품은 2008텐텐’()이 유일했는데, 경력에 비하면 고개가 갸웃거릴 정도로 덜 알려진 작가입니다.

 

이 작품의 원제는 彼女恐喝’, 직역하면 그녀의 공갈입니다. 나름 센스 있는 번역 제목 때문에 눈길이 확 끌렸는데, 얼핏 가벼운 톤의 미스터리로 오해할 여지가 있지만 실은 인물이나 사건 모두 꽤 묵직한 무게감을 지니고 있어서 페이지를 넘길수록 살인범을 협박했다가 예상치 못한 사태에 휘말리는 주인공의 이야기가 어떻게 마무리될지 무척 궁금해졌습니다.

다만, 케이코가 단골손님이자 살인범인 쿠니에다를 협박하는 이야기는 대략 1/3지점에서 마무리되고 이 작품의 진짜 알맹이는 그 이후부터 전개되는데, 그 내용을 설명하려면 스포일러를 피할 방법이 없어서 대략적인 인상비평 이상의 서평을 쓰기가 불가능한 작품입니다. 출판사의 소개글이 딱 그 대목까지만 간략하게 언급한 것도 같은 이유 때문입니다.

 

이 작품에서 가장 흥미로운 설정은 협박범 케이코와 살인범 쿠니에다의 관계입니다. 20대 호스티스와 50대 손님이라는 통속적인 관계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서로에게 호감을 느낍니다. 케이코로서는 호스티스인 자신을 늘 정중하고 젠틀하게 자신을 대해준 쿠니에다가 살인범이란 사실 자체도 믿기지 않았지만 그를 상대로 공갈 협박을 저질러도 되는지를 놓고 깊은 고민에 빠집니다. 말 못할 사연을 지닌 듯한 쿠니에다는 어떻게든 스스로 앞길을 개척하려 애쓰는 자신을 대견히 여기는 것은 물론 플라토닉한 관계에 만족하면서도 물심양면으로 돕는 키다리 아저씨 같은 역할을 자처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두 사람이 협박범과 살인범으로 엮였으니 이야기는 살얼음판을 걷듯 아슬아슬하고 긴장감 넘치게 전개될 수밖에 없습니다.

 

사실, 케이코의 협박이 마무리되는 1/3지점까지는 전체적으로 너무 가볍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습니다. 문장은 지나치게 짧고 간결하고, 내용 역시 진중한 구석 하나 없이 숭덩숭덩 흘러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쿠니에다의 비하인드 스토리가 공개되는 두 번째 챕터가 시작되면서 전혀 다른 톤의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그리고 케이코의 협박장이 초래한 의외의 사태들이 롤러코스터처럼 전개되기 시작합니다. 초반의 가벼움만 견뎌낸다면 꽤 흥미로운 이야기를 만날 수 있으니 성급한 독자라면 조금만 인내심을 갖기를 권하고 싶습니다.

 

조금 긴 사족으로 번역 혹은 편집에 대한 아쉬움을 지적하고 싶은데, 자잘한 오타 정도는 몰라도 간혹 인물의 이름을 오기하거나(아야나 아야네, 미노베 미노부, 요코타 료코 요코타 요시코), 시제나 표현의 오류를 발견했을 땐 한숨이 나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또 마지막 페이지에 실린 작가 약력에도 오류가 있었는데, “2017년에는 폭설 이야기로 제51회 후루카와 에이지 문학상을 수상이라고 돼있지만, 한국에 소개되지 않은 그 작품의 원제는 大雪物語이며, 그 작품이 수상한 상은 요시카와 에이지 문학상’(吉川英治文学賞)입니다. 역자나 편집자라면 충분히 걸러낼 수 있는 오류들이라 아쉬움이 더 컸는데, 매번 오역이나 오타를 발견할 때마다 느끼는 점이지만 인쇄하기 전 한번만 더 자신들의 작품을 성의 있게 살펴볼 수는 없는 건지, 하다못해 가제본 서평단이라도 꾸려서 체크해볼 수는 없는 건지 궁금할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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