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기종료 - 판타스틱 픽션 블랙 BLACK 7-1 판타스틱 픽션 블랙 Black 7
빈스 플린 지음, 김승욱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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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븐스 대통령의 재선을 좌지우지할 예산안 의결을 앞두고 최측근인 비서실장 스투 개럿과 국가안보보좌관 마이크 낸스는 찬성표를 확보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의원들을 압박합니다. 이상주의를 꿈꾸던 하원의원 마이클 오루크는 미국을 파탄에 빠지게 할 예산안을 지켜보며 워싱턴 정가의 탐욕과 위선에 환멸을 느낍니다. 의결일 당일, 대통령과 그 측근들은 예정된 승리에 도취돼 흥분하지만 이른 새벽에 벌어진 원로 정치인 세 명의 암살 소식에 큰 충격을 받습니다. 암살범들은 예산안의 전면수정과 개혁을 요구하는 메시지를 언론을 통해 발표합니다. 오루크는 살해된 정치인들이 하나같이 기득권과 사익을 위해 농단을 부려온 자들이라 일말의 동정심도 들지 않지만, 왠지 이 충격적인 암살사건이 자신이 1년 전 만났던 누군가와 연관돼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당혹감을 감추지 못합니다.

 

임기종료CIA 비밀암살요원의 활약을 그린 미치 랩 시리즈의 작가 빈스 플린의 데뷔작입니다. 미치 랩이 등장하진 않지만 미치 랩 시리즈에 등장하는 주요 인물들이 대거 등장하고 있어서, 개인적으론 시리즈 프리퀄을 읽는 듯한 기분 좋은 책읽기가 됐습니다. 정의로운 이상주의 정치가인 하원의원 마이클 오루크는 미치 랩 시리즈에서는 단역급 카메오 정도로만 간간이 등장할 뿐이지만, 주인공을 맡은 임기종료에서는 대단한 카리스마를 내뿜으며 맹활약합니다. 또한 전직 네이비실(Navy SEAL)이자 미치 랩의 영원한 동료인 스콧 콜먼을 비롯하여 CIA 국장 토머스 스탠스필드, 대 테러센터 본부장 아이린 케네디, FBI 특수요원 스킵 맥마흔, 대통령 경호요원 잭 워치 등 낯익은 인물들의 초기 모습은 그저 반가울 따름이었습니다.

 

예산안 의결을 놓고 벌어지는 정치적 갈등은 한국에서도 낯익은 모습이지만 그것이 노회한 정치인들을 향한 대량 암살로까지 번지는 설정은 다소 고개가 갸웃거려질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예산안 의결이 현직 대통령의 재선을 가늠할 수 있는 예비선거의 성격을 띠고 있고, 예산안 자체가 탐욕스런 정치인들의 야합의 결과이며 장차 미국을 파산으로까지 이끌 수 있는 위험천만한 덫이라는 설정 때문에 큰 위화감 없이 초반부 시퀀스를 받아들일 수 있었습니다.

 

갈등의 주체들은 크게 넷입니다. 예산안 수정과 전면적인 개혁을 요구하며 연이어 암살을 자행하는 범인들, 암살범들의 메시지에 동의하면서도 살인과 폭력이 옳은 방법인지 고민에 빠지는 하원의원 오루크, 암살범들을 쫓는 FBICIA, 그리고 예산안 통과를 목전에 뒀다가 암살범들 때문에 궁지에 몰리자 위험한 음모를 꾸미는 대통령의 측근들이 그들입니다.

주로 중동 테러리스트를 주적으로 삼은 미치 랩 시리즈와 달리 내부의 적, 즉 사익과 기득권에 눈먼 탐욕스런 정치인들이 악당으로 등장하는 가운데, 민주적 절차인 투표를 통해 개혁을 이뤄야 한다는 논리와 폭력 역시 개혁을 위한 한 가지 방법이라는 논리가 팽팽하게 맞섭니다. 이 당혹스런 상황의 한복판에 내던져진 하원의원 오루크는 숱한 고민과 갈등 끝에 전직 해병대로서의 능력을 발휘하며 야합과 이기심이 판치는 워싱턴 정가와의 전면전을 결심합니다.

 

위선으로 가득 찬 비열한 정치인들을 응징하는 스토리는 중동 테러리스트를 상대로 한 액션 스릴러 이상의 쾌감과 흥분을 발산합니다. 비록 암살이라는 극단적인 폭력이 합리화되는 대목은 편하게 읽히지 않았지만, ‘미치 랩 시리즈에서 이미 그 진가를 맛봤던 빈스 플린 특유의 과격한 주장과 논리는 충분히 독자를 설득하고도 남았습니다. 무엇보다 사실적이고 디테일한 캐릭터의 힘이 그 주장과 논리를 탄탄히 밑받침하고 있는데, 악당들은 얄미울 정도로 똑똑한데다 몇 대 날려주고 싶을 정도로 야비했고, 암살범들의 고도의 전략과 작전수행능력은 몇 번이나 박수를 보내주고 싶을 만큼 뛰어났으며, 이상주의를 꿈꿨던 초보 정치인이 숱한 위기를 넘기면서 자신의 신념을 지키는 대목들은 단순한 영웅서사 이상의 매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딱 한 가지, 0.5개를 빼게 만들었던 아쉬움은 다소 과해 보였던 분량입니다. 데뷔작이라 욕심을 부려서 그런지 지나치게 디테일한 묘사들이 곳곳에서 템포를 처지게 만들었는데 그런 장면들이 쌓이다 보니 평균 450~550 페이지 정도였던 미치 랩 시리즈보다 훨씬 긴 650 페이지에 이르고 말았습니다. 물론 하루 안에 너끈히 마칠 수 있을 만큼 흥미진진했지만 아주 사소한 옥의 티처럼 여겨진 게 사실입니다.

 

순서대로라면 가장 먼저 읽었어야 할 임기종료지만, 개인적으론 오히려 미치 랩 시리즈를 마친 뒤에 읽은 것이 현명한 선택이었다는 생각입니다. 비록 미치 랩은 등장하지 않지만 이런 게 프리퀄의 재미!”라는 걸 잔뜩 만끽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마지막 장을 덮자마자 새삼 한국에 출간되지 않은 미치 랩 시리즈가 더 아쉽게 느껴지기도 했는데, 적어도 빈스 플린이 생전에 직접 집필했던 작품(‘The Last Man’, 2012, ‘미치 랩 시리즈’ 13)까지만이라도 한국 독자들에게 소개되기를 간절히 바랄 뿐입니다. (참고로 미국에서 2015년에 출간된 ‘The Survivor’부터 2021년 작 ‘Enemy at the Gates’까지는 Kyle Mills에 의해 집필된 미치 랩 시리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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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설공주에게 죽음을 스토리콜렉터 2
넬레 노이하우스 지음, 김진아 옮김 / 북로드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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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여자친구를 살해한 죄로 10년을 복역하고 출소한 토비아스는 자신 때문에 가족이 산산이 해체되고 가업이 몰락한 현실을 목도하곤 절망감과 분노에 사로잡힙니다. 사건 당시 술에 취해 아무 것도 기억나지 않는 상태에서 경찰이 들이민 정황 증거만으로 살인범 혐의를 썼던 토비아스는 뒤늦게라도 진실을 알아내려 하지만 폐쇄적인 고향마을 알텐하인 사람들은 그에게 철저히 등을 돌리고 혐오의 시선만 보낼 뿐입니다. 한편 베를린에 살다가 반강제로 따분한 시골마을 알텐하인에 머물게 된 18살 소녀 아멜리는 토비아스 사건에 관심을 갖게 된 이후 흥분에 사로잡혀 독자적인 조사를 시작합니다. 호프하임 경찰서 강력11팀의 피아와 보덴슈타인은 지하탱크에서 발견된 유골과 한 중년여성의 추락사고를 수사하던 중 토비아스 사건과의 연관성을 의심합니다. 그리고 곧 11년 전 경찰 수사에 심각한 오류가 있었음을 깨닫습니다.

 

백설공주에게 죽음을을 처음 읽은 건 꼭 10년 전의 일입니다. ‘타우누스 시리즈의 네 번째 작품이지만 한국에 가장 먼저 소개된 이유는 그만큼 재미와 완성도가 뛰어났기 때문인데, 10년 만에 다시 읽어도 역시 그 명성이 괜한 것이 아니었음을 몇 번이고 수긍할 수 있었습니다.

 

이야기의 큰 틀은 스스로 살인을 저질렀는지조차 모르는 상태에서 10년을 복역하고 출소한 토비아스가 지독히도 폐쇄적인 고향마을 알텐하인에서 과거의 진실을 파헤치는 여정입니다. 그 여정에는 따분한 일상에 질려있던 호기심 많은 18세 소녀 아멜리와 뛰어난 그림 재능을 갖고 있는 자폐증 환자 티스가 함께 합니다. 또한 다른 사건을 수사하다가 토비아스 사건에 의문을 품게 된 피아와 보덴슈타인이 거미줄처럼 복잡하게 얽힌 알텐하인 주민들의 비밀들을 차근차근 풀어가는 이야기가 또 하나의 큰 축을 맡고 있습니다.

추악한 행적을 은폐하려는 악의, 피도 눈물도 없는 더러운 탐욕, 일그러진 애정에서 비롯된 시기와 질투, 그리고 이주해오는 사람도 없이 토착민들이 대를 이으며 살고 있는 알텐하인의 폐쇄성까지 뒤섞인 11년 전의 진실은 피아와 보덴슈타인, 아멜리와 티스에 의해 조금씩 그 실체를 드러내지만 거의 마지막 장까지 새로운 정보와 사실들이 연이어 터지는 탓에 독자 입장에선 쉽사리 긴장감을 내려놓을 수 없습니다.

 

앞선 타우누스 시리즈와 마찬가지로 등장인물도 워낙 많고 사건도 복잡하게 얽혀 있어서 짧게라도 내용을 소개하는 것이 불가능한 작품이지만, ‘백설공주에게 죽음을은 전작들과 달리 모든 요소들이 선명하게 전개되고 깔끔하게 정리돼서 조금의 불편함이나 두통을 겪지 않고 마지막 장까지 달릴 수 있었습니다. 물론 중간중간 인물관계도를 그리거나 메모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복잡한 대목들이 등장하긴 합니다. 11년 전에 벌어진 사건 자체는 단순했지만 그것을 은폐하고 조작했던 사람들의 머리수도 무척 많고 그들의 악의는 제각각 다른 모양새를 띠고 있는데다 그 뿌리부터 실타래처럼 뒤엉켜있어서 진실을 쫓는 모든 이들을 혼란에 빠뜨리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넬레 노이하우스는 (전작에서 다소 우왕좌왕했던 것과는 달리) 인물 하나하나, 단서 하나하나까지 잘 챙겨가며 자신이 짠 정교한 설계도에 따라 이야기를 매끄럽게 풀어나갑니다. 500페이지가 훌쩍 넘는 적잖은 분량에도 불구하고 조금도 지루할 새가 없었던 건 바로 이런 매력들 덕분입니다.

 

사건 자체만큼 독자의 눈길을 끈 건 보덴슈타인의 개인사, 26년을 함께 살아온 아내 코지마와의 갈등입니다. 거기다가 부하들의 잇단 일탈까지 겹치면서 보데슈타인은 일과 가정 모두를 상실한 듯한 자괴감과 절망감에 빠지는데, 늘 반듯하고 철두철미했던 보덴슈타인이 감정적으로 동요하며 수사에서도 흔들리는 모습을 보이는 건 타우누스 시리즈의 독자에겐 안타까우면서도 호기심을 자아내는 설정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한국 출간 기준으로) ‘잔혹한 어머니의 날까지 모두 아홉 편의 작품이 소개됐지만 역시 타우누스 시리즈의 정점을 찍은 작품은 백설공주에게 죽음을입니다. 물론 다른 작품들도 각각 특별한 매력과 미덕을 지니고 있긴 하지만, 모든 요소들이 골고루 빛을 발하며 마지막까지 흥분과 긴장을 만끽하게 만들었다는 점에서 백설공주에게 죽음을타우누스 시리즈뿐 아니라 스릴러 전체를 통틀어서도 열손가락 안에 꼽을 만한 작품이 분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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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황무지
S. A. 코스비 지음, 윤미선 옮김 / 네버모어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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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러가드 버그몽타주는 한때 범죄현장 도주차량 운전에 관한 한 최고의 명성을 날렸던 드라이버입니다. 과거를 청산한 뒤로 버지니아의 레드힐 카운티에서 자동차 정비소를 운영하며 가족과의 안온한 삶을 유지해왔지만, 인근에 대형 정비소가 들어선 이후로 보러가드는 치명적인 위기에 빠집니다. 은행 대출이 막혀 정비소의 존폐조차 위태로워진데다 10대 시절에 낳은 딸의 대학등록금, 어머니의 요양 병원비 단돈 1달러가 절실한 상황에 이른 것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예전에 함께 일했던 미치광이로니로부터 다이아몬드 탈취라는 솔깃한 제안을 받은 보러가드는 고민 끝에 딱 한 번만 과거로 돌아가기로 결심합니다. 하지만 사태는 급변하고 보러가드 본인은 물론 가족들까지 위험한 지경에 빠지고 맙니다.

 

첫 장이 끝나기도 전에 우리는 주인공 보러가드가 모는 머슬카에 탑승한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옮긴이의 말대로 읽는 내내 단 한순간도 쉬지 않고 급격하게 요동치는 탈선 직전의 롤러코스터를 타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이른바 하이스트 누아르, 즉 범죄의 계획과 실행과정을 상세히 묘사한 전형적인 엔터테인먼트 스릴러지만, ‘검은 황무지는 주인공 보러가드의 캐릭터와 그의 상처투성이 가족사 덕분에 혈관을 폭발시킬 것 같은 초긴장에 더해 묵직하고 애틋한 비극의 서사까지 맛볼 수 있는 매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마지막 딱 한 번!”이란 다짐으로 시작된 다이아몬드 탈취가 예상치 못한 곳에서 스파크를 일으키면서 보러가드는 말 그대로 지옥불에 빠지고 맙니다. 문제는 그 지옥불이 보러가드의 모든 것이기도 한 아내와 자식들에게까지 마수를 뻗친 점입니다. 결국 보러가드는 가족을 지키기 위해 피와 살이 난무하는 전쟁을 치르게 되고 돌이킬 수 없는 재난의 한복판으로 내동댕이쳐집니다. 과거를 청산하고 평범한 삶을 꿈꾸던 보러가드는 자신에게 내재된 또 하나의 자아, 즉 최고의 도주차량 드라이버였던 시절의 버그가 결국 모든 것을 망쳐버렸다고 자책합니다.

 

제 자아가 두 개라고 생각해왔어요. 보러가드에게는 와이프와 아이들이 있어요. 사업을 운영하고 아이들 학예회에 빠지지 않죠. 버그는 은행을 털고 급회전구간에서도 시속 160km로 차를 몰아요. 사촌을 죽인 놈들을 차 분쇄기에 넣고 갈아버리죠. 아빠가 옳았어요. 한 사람이 두 개의 삶을 살 수는 없어요. 결국엔 한 놈의 고삐가 풀려 다 망쳐버리죠.” (p342)

 

굉음을 내며 거침없이 폭주하는 머슬카와 함께 보러가드의 삶을 지배해온 건 품을 수도 버릴 수도 없는 아버지의 망령입니다. 특히 도주차량 드라이버의 완벽한 재능과 잔혹한 폭력성의 유전자까지 고스란히 물려준 아버지는 보러가드에게는 평생 애증의 대상이었습니다. 가족들을 버리고 홀연히 사라져버린 아버지를 원망하면서도, 동시에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영웅으로 여기며 그가 남긴 머슬카 더스터를 목숨만큼 아끼는 집착에 가까운 태도를 보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제 자기 자신도 아버지처럼 가족을 위기에 몰아넣고 어디론가 사라져야만 하는 처지가 되자 차라리 범죄자에 술주정뱅이에 나쁜 남편이었던 아버지가 더 솔직하고 당당했다는 자책에 빠지게 됩니다. ‘검은 황무지가 단순히 돈을 목적으로 한 주인공의 범행을 그린 하이스트 누아르 이상의 품격을 갖추게 된 것은 바로 이런 보러가드의 가족사 덕분입니다.

 

다이아몬드 탈취사건이 일으킨 나비효과와도 같은 피비린내 진동하는 살육전은 반전을 거듭하며 팽팽한 긴장감과 잔혹한 폭력성 이상의 흥분을 선사합니다. 때론 보러가드에 지나치게 이입한 나머지 마치 직접 총과 주먹을 휘두르는 듯한 쾌감에 빠지기도 하고, 때론 그가 처한 비참한 처지를 객관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며 안쓰러움과 애틋함에 푹 젖어들기도 합니다. 말하자면 검은 황무지라는 제목에 걸맞게 누아르를 읽으면서 만끽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실컷 즐기고도 남을 만큼 순도와 농도가 대단한 작품이란 뜻입니다.

 

검은 황무지S. A. 코스비의 두 번째 작품입니다. 데뷔작인 ‘My Darkest Prayer’는 물론 세 번째 작품으로 영화화가 진행 중이라는 ‘Razorblade Tears’가 어떤 이야기를 담고 있을지 너무 궁금해졌는데, ‘검은 황무지가 좋은 성과를 내서 그의 작품들이 계속 한국에 출간됐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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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신
아시자와 요 지음, 김은모 옮김 / 하빌리스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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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백하자면 소년, 학생, 주부, 할머니, 바리스타 등 아마추어 탐정이 등장하는 미스터리와는 거리가 한참 먼 취향이라 초등학교 5학년 콤비가 주인공인 나의 신은 애초 관심목록에 올릴 작품이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읽게 된 유일한 이유는 아니 땐 굴뚝에 연기는’, ‘죄의 여백’, ‘용서는 바라지 않습니다2021년에만 세 편의 매력적인 미스터리를 한국에 출간한 아시자와 요의 작품이란 점 때문이었습니다.

 

교실 안팎에서 벌어지는 소소한 미스터리를 명쾌하게 해결하는 것은 물론 친구들의 난감한 상황을 깔끔하게 해결해주고 운동회 기마전 전략까지 완벽하게 짜내는 초등학교 5학년생 미즈타니는 동급생들로부터 이라 불리는 소년입니다. 거만하기는커녕 늘 고요한 호수 같은 성정까지 지녀 도무지 10대 초반으로 보이지 않는 애어른미즈타니지만 아무래도 접하는 사건은 그 또래에 걸맞은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할머니가 돌아가시기 전 마지막으로 만든 벚꽃절임이 담긴 병을 깼는데 할아버지에게 뭐라고 말하지? 이번 운동회 기마전에서 모자를 뺏기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 저주가 담긴 책을 다 읽고 나서부터 정말 이상한 일이 일어나는데 이거 정말 저주야? (출판사 소개글 )

 

4학년 때부터 미즈타니와 단짝이 된 사토하라는 화자의 역할과 함께 홈즈의 파트너 왓슨을 떠올리게 하는 인물인데, ‘이라 불리는 미즈타니에게 존경과 질투를 함께 느끼는 딱 그 또래의 소년 캐릭터입니다. 미즈타니가 다소 비현실적인 천재 소년 캐릭터라면 사토하라는 지극히 현실적이고 평범한 소년으로 적당한 균형추 노릇을 하고 있습니다.

나이가 나이인지라 미즈타니와 사토하라가 맡은 사건들은 대체로 소소한 규모의 일상 미스터리를 벗어나지 못하지만, 실은 연작단편인 이 작품에서 가장 핵심적인 사건은 여학생 가와카미가 연루된 꽤 섬뜩한 살해모의입니다. 학대, 연민, 우정, 질투 등 여러 코드가 뒤섞인 이 사건은 미즈타니와 사토하라의 성장소설의 재료로도 활용되는데, 만일 주인공이 중고생쯤 됐다면 아시자와 요 특유의 세고 독한 미스터리가 되고도 남았을 소재라 한편으론 아쉬움이 남기도 했습니다.

 

취향 상 아마추어 탐정 미스터리와 거리가 먼 이유는 아무래도 사건 자체가 다소 평이할 수밖에 없고 주인공들의 카리스마나 능력치 역시 어느 정도 한계가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물론 그렇지 않은 작품들도 분명히 있지만 역시 초등학교 5학년 주인공들의 이야기는 잔혹하거나 배배 꼬인 미스터리를 좋아하는 저에겐 특별한 간식이상의 흥미를 느끼게 하기엔 무리였다는 생각입니다. 하지만 소박한 일상 미스터리를 좋아하는 독자라면 아시자와 요가 그린 신으로 불리는 소년의 활약에서 의외의 재미를 만끽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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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의 대마초 여인
안네로르 케르 지음, 이상해 옮김 / 문학사상사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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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대 여성 파티앙스 포르트푀의 직함은 프랑스 법무부 소속 아랍어 통번역사지만, 실은 불규칙한 시간당 페이를 받을 뿐 사회보장도 연금도 못 받는 불법노동자입니다. 두 딸의 교육비와 어머니의 요양 병원비 때문에 25년 넘게 고된 삶을 살아온 파티앙스에게 어느 날 생각지도 못한 일이 벌어집니다. 워낙 어수룩한데다 순진함마저 엿보여 인간적인 호감까지 느꼈던 한 모로코 대마초 딜러의 통화 내역을 번역하던 파티앙스는 프랑스 경찰의 체포 계획을 눈치 채곤 엉겁결에 연락을 취해 당장 대마초를 버리고 신속히 피하라고 권합니다. 문제는 그 직후 복잡한 심경들이 파티앙스를 뒤흔들었다는 점입니다. 늘 돈에 쪼들려온 비루한 자신의 현실, 법을 지키지 않는 법무부의 이중성, 공공연한 마약 거래의 실상... 결국 파티앙스는 그 모든 지긋지긋한 현실을 증오하며 모로코 딜러가 버린 대마초를 빼돌리기로 결심합니다.

 

파리의 대마초 여인은 처음부터 끝까지 롤러코스터처럼 급상승과 급하강을 쉴 새 없이 반복하는 흥미진진한 작품입니다. 아랍권 범죄자의 통화 도청내역을 번역하던 일종의 감시자였던 평범한 여성이 감시대상이던 대마초 딜러를 도우려다가 오히려 대량의 대마초를 손에 넣은 뒤 중간도매상으로 맹활약한다는 설정 자체만 봐도 이야기의 굴곡이 얼마나 크고 급격할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돈은 모든 것이다’(1), ‘겁대가리 없는 유대인 여자에게 불가능이란 없다’(3)라는 소제목들은 주인공 파티앙스가 어떤 캐릭터의 여성인지 잘 대변하고 있는데, 실제 이야기 속의 파티앙스는 그 이상의 카리스마와 매력을 내뿜으며 거침없는 광폭행보를 내딛습니다.

 

하지만 대마초 중간도매상파티앙스의 석세스 스토리만 그려졌다면 아마 단순한 할리우드 액션 스릴러 이상의 미덕을 찾아보긴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에 못잖게 독자의 눈길을 끈 대목은 현실에 분노하고 환멸을 품을 수밖에 없게 된 그녀의 기구한 성장기와 가족사입니다.

어린 시절, 불법적인 사업으로 큰돈을 거머쥔 부모 덕분에 파티앙스는 평생 전 세계의 여름을 찾아다니며 불꽃놀이를 수집하겠다는 꿈을 품기도 했지만, 한순간 인생 경로가 나락으로 내팽개쳐진 뒤로 밑바닥 생활을 전전해왔습니다. 하루 종일 중국인들의 고함소리가 날뛰는 낡은 아파트는 지긋지긋했고, 딸들과 어머니에게 들어가는 돈은 한도 끝도 없었으며, 무엇보다 범죄를 막기 위해 자신의 아랍어 재능을 쥐어짜내면서도 결코 정규직으로 인정하지 않는 프랑스에 대한 혐오는 극에 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런 현실들에 치인 나머지 언젠가부터 자신이 감시하는 일부 아랍인 범죄자들에게 차별받는 약자라는 연대감과 함께 동정과 연민을 보내온 파티앙스로서는 엉겁결이긴 해도 어수룩한 모로코 대마초 딜러를 돕는 것이 그리 놀라운 결정은 아니었습니다. 물론 이후 자신이 다론’(엄마를 뜻하는 은어)이라는 별명까지 얻어가며 대마초 도매상으로 맹활약할 거라곤 전혀 예측하지 못했지만 말입니다.

 

대마초 딜러를 도망치게 돕고, 그의 대마초를 불법적으로 손에 넣은 뒤 큰돈을 거머쥐는 파티앙스의 행동은 올바름과는 거리가 먼 행동들이지만, 파티앙스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그녀가 혐오한 프랑스의 현실이 설득력 있게 설정된 덕분에 옮긴이의 말대로 일종의 후련함마저 느낄 수 있는 중년여성의 분투기 혹은 판타지로 읽힌 게 사실입니다.

파티앙스의 여정은 그저 돈으로 처바른 즐거움에서 그치지 않습니다. 또 경찰의 주요 목표물이 된 대마초 도매상 다론파티앙스의 행보 역시 결코 순탄하게만 전개되지 않습니다. 300페이지도 채 안 되는 짧은 분량이지만 독자는 마지막 페이지까지 쉽사리 마음을 놓을 수 없는 짜릿한 롤러코스터를 경험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족으로... 올해(2021) 프랑스 미스터리-스릴러를 세 편 읽었는데, ‘프랑스 소설하면 떠오르는 어쩔 수 없는 편견을 저 역시 어느 정도 갖고 있었지만, ‘파리의 대마초 여인을 비롯하여 포커 플레이어 그녀’(브누아 필리퐁)마리에게 생긴 일’(이네스 바야르) 모두 독특한 매력과 여운을 만끽할 수 있어서 스스로 무척 놀란 게 사실입니다. 영미권과 북유럽 스릴러와는 사뭇 다른 프랑스 장르물만의 스타일과 힘을 새롭게 발견한 한 해라고 할까요? 내년에도 이런 즐거운 발견이 계속 이어지기를 기대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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