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는 망자, ‘괴민연’에서의 기록과 추리
미쓰다 신조 지음, 김은모 옮김 / 리드비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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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무척 좋아하는 작품 중 하나가 미쓰다 신조의 도조 겐야 시리즈입니다. 패전 직후 혼란에 빠진 근현대 일본을 배경으로 민속학과 호러와 본격 미스터리가 혼재된 독특한 장르를 맛볼 수 있는 시리즈인데, 일본에서는 2021년까지 모두 11편의 작품이 출간됐지만, 아쉽게도 한국에선 2013년에 출간된 미즈치처럼 가라앉는 것을 끝으로(모두 4편 출간) 신간 소식이 끊겼습니다.

그런 점에서 걷는 망자는 저와 같은 도조 겐야 팬에게는 무척 반가운 작품인데, ‘도조 겐야 시리즈의 스핀 오프라 할 수 있는 연작단편집이기 때문입니다. 주인공은 도조 겐야의 조수인 젊은 남녀지만, 전국을 떠돌며 괴담을 수집하는 도조 겐야의 행적이 간간이 그려지고 있어서 아쉬운 대로 도조 겐야 시리즈의 정취를 만끽할 수 있습니다.

 

도쇼 아이는 어릴 적 고향 인근에서 벌어진 사건 때문에 도조 겐야와 간접적으로 인연을 맺은 바 있고, 그 덕분에 대학생이 된 현재 학교 도서관 지하에 자리 한 괴이 민속학 연구실’, 통칭 괴민연으로 불리는 도조 겐야의 연구실 겸 장서 보관실에 드나들게 됩니다. 홀로 괴민연을 지키고 있던 건 도조 겐야의 조수이자 대학원생인 덴큐 마히토입니다. 두 사람은 도조 겐야가 수집해서 보내온 괴담의 진상을 토론하고 미스터리를 추리하여 합리적인 결론을 도출하곤 합니다. 재미있는 건 격세유전을 통해 외할머니의 영매 재능을 물려받은 도쇼 아이가 괴이 현상을 실재하는 것으로 받아들이는 반면, 덴큐 마히토는 소심할 정도로 괴담 공포증을 가진 인물로, 괴이란 모두 망상이며 합리적인 추리가 가능하다고 믿는다는 점입니다.

 

도조 겐야가 30대 초반으로 나오는 이 작품의 시대적 배경은 1950년대 중반입니다. 외지고 작은 마을이라면 여전히 근대적 풍습과 전설이 잔존해있던 시절로, 도조 겐야가 수집한 괴담들은 하나 같이 현지인들에게는 생생한 공포이자 무시할 수 없는 금기를 담고 있습니다. 물에 빠져 죽은 자의 망령이 돌아다니는 바닷가(‘걷는 망자’), 400여 년 전부터 내려오는 머리 없는 여자의 저주(‘다가오는 머리 없는 여자’), 완벽한 밀실인 곰덫 안에서 내장이 파헤쳐진 채 발견되는 어린이의 시신과 시간이 갈수록 작아지는 깊은 산속 서양식 저택의 비밀(‘배를 가르는 호귀와 작아지는 두꺼비집’), 요괴를 체험하기 위해 스스로를 밀실에 가둔 요괴연구회 멤버가 겪은 의문의 사건(‘봉인지가 붙여진 방의 자시키 할멈’), 그리고 풍토병이 불러온 끔찍한 앙화와 참극(‘서 있는 쿠치바온나’) 등 모두 다섯 편이 실려 있습니다.

 

도조 겐야가 수집한 괴담의 내용이 먼저 소개되고, 괴민연 책상에 마주앉은 도쇼 아이와 덴큐 마히토가 괴담 속 미스터리를 추리하는 형식으로 이뤄져있습니다. 말하자면 추리 과정 자체는 안락탐정 미스터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앞부분의 괴담이 미쓰다 신조 특유의 민속학과 호러가 접목된 으슬으슬한 내용을 담고 있다면, 이어지는 두 안락탐정의 추리는 로맨틱 코미디 기운이 깃든 코지 미스터리에 가까워서 전혀 다른 분위기를 풍깁니다. 남들이 볼 수 없는 것을 볼 줄 아는 영매의 재능을 가진 도쇼 아이와 괴이 현상 자체를 부정하며 어떻게든 합리적인 추리를 도출해내려는 덴큐 마히토가 괴담의 실체에 다가가는 과정에서 벌이는 투닥거림은 로코 주인공들이 사랑에 빠지기 직전 벌이는 유쾌한 소동극에 가깝기 때문입니다. 이 두 사람이 어떤 미래를 맞이하게 되는지가 마지막 페이지에서 공개되는데, 미쓰다 신조의 다른 작품과 세계관이 연결돼있어서 무척 흥미롭게 읽혔습니다.

 

도조 겐야 시리즈가 괴이 현상 속에 교묘하게 감춰진 범죄를 밝혀내는 본격 미스터리라면, ‘걷는 망자는 진실이야 어떻든 상관없이 괴담 자체를 텍스트 삼아 실제로 벌어졌을 법한 상황을 추리하는, 말하자면 이런 일이 벌어진 게 아닐까?”라는 수준의 추측성 미스터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덴큐 마히토가 이런저런 추리를 마구 던지고 도쇼 아이가 깔끔한 논리로 반박하는 가운데 점차 진실이라 여겨지는 지점에 도달하는 과정이 반복됩니다. 이런 설정도 나름 재미있고 흥미롭긴 하지만, 아무래도 딱 떨어지는 결론이 아니다 보니 독자에 따라 다소 찜찜함을 느낄 수도 있습니다. 현장과 동떨어진 안락탐정 미스터리의 한계겠지만, 가령 이들이 내린 결론 가운데 한두 개쯤 도조 겐야의 반박을 통해 뒤집어지는 경우가 있었다면 조금은 더 매력적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도쇼 아이와 덴큐 마히토가 이끄는 괴민연 시리즈가 앞으로도 계속 이어질지 모르겠지만, 한번쯤이라도 도조 겐야가 특별출연을 해준다면, 아니 도조 겐야까지 포함한 3총사가 활약하는 이야기가 그려진다면 정말 흥미진진한 시리즈가 될 것 같다는 생각입니다. 아울러 이 작품을 계기로 11년 가까이 한국 출간이 중단된 도조 겐야 시리즈가 부활할 수 있다면 더 바랄 나위가 없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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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 재능
피터 스완슨 지음, 신솔잎 옮김 / 푸른숲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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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대 후반인 마사는 남편 앨런 때문에 말 못할 두려움에 휩싸입니다. 셔츠에서 의문의 핏자국을 발견한 뒤 뉴스를 검색해보니, 앨런이 출장을 다녀온 곳마다 여성을 상대로 한 끔찍한 살인사건이 벌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런 경우가 무려 다섯 번이 넘었지만, 아무 증거도 없이 오직 심증만으로 남편을 고발할 수도 없는 상황. 결국 마사는 대학원 시절, 자신을 한 남자에게서 구해줬던 릴리 킨트너에게 도움을 청합니다. 마사의 의심에 공감한 릴리는 직접 앨런을 미행하며 그의 행동을 관찰하기로 합니다. 하지만 릴리는 앨런을 미행하는 게 자신만이 아니란 걸 깨닫곤 큰 충격에 빠집니다.

 

살인 재능아홉 명의 목숨등 피터 스완슨의 작품 두 편이 비슷한 시기에 출간돼서 잠시 고민하다가 원조격인 푸른숲에서 출간한 살인 재능을 먼저 읽기로 했습니다. 사실 아무 정보도 없이 읽기 시작했는데, 초반 설정 소개가 끝날 무렵 갑자기 릴리 킨트너라는 이름이 등장해서 깜짝 놀랐습니다. 릴리는 한국 독자에게 피터 스완슨의 이름을 강렬하게 각인시킨 죽여 마땅한 사람들의 주인공이며, 2023년에 출간된 살려 마땅한 사람들로 오랜만에 다시 만났던 매력적인 인물이기 때문입니다. 개인적으론 살인 재능릴리 킨트너 시리즈의 세 번째 작품이라고 부르고 싶은데, 푸른숲에서 이 점을 좀더 홍보했더라면 더 큰 관심을 끌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요약한 줄거리대로 이야기는 마사가 남편 앨런이 연쇄살인마가 아닐까 의심하며 두려움에 휩싸이는 장면들로 시작됩니다. 50페이지가 채 안 되는 분량이지만 초반 장면들은 지금껏 읽은 피터 스완슨의 작품과는 결이 많이 다른 전형적인 심리 스릴러 서사에, 건조하기 짝이 없는 문체라서 다소 낯설게 느껴진 게 사실입니다. 그러다가 릴리의 등장과 함께 피터 스완슨 특유의 속도감 넘치는 서스펜스 스릴러로 탈바꿈합니다. 전작들을 읽지 않은 독자에게 최대한 스포일러 없이 릴리를 소개하자면 이 세상에 존재해선 안 될 것들을 가차 없이 죽이는 똑똑하고 정의로운 연쇄살인마입니다. 13살에 첫 살인을 시작한 릴리는 전작들에서 유감없이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며 독자에게 짜릿한 쾌감을 선사해왔는데, 그래선지 릴리가 등장하는 순간 그 쾌감을 다시 맛볼 수 있다는 기대감이 급상승했습니다.

 

제목에서 연상할 수 있듯 이 작품엔 살인에 관한 한 특별한 재능을 지닌 인물이 등장합니다. 릴리와 비슷한 시기인 11살에 첫 살인을 시작한 그는 지금까지 모두 26명의 목숨을 빼앗는 동안 단 한 번도 경찰의 수사망에 걸려든 적이 없습니다. 같은 방법을 두 번 이상 쓰지 않고 전혀 다른 사건처럼 보이게 조작함으로써 30년 가까이 완전범죄를 저질러 온 것입니다. 그의 유일한 고민은 너무 쉽고 지루한 살인 대신 좀더 짜릿한, 그러니까 아슬아슬한 스릴감 혹은 쾌감과 우월감을 만끽할 수 있는 특별한 살인을 갈망하지만 좀처럼 그런 기회가 찾아오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그런 그가 모처럼 만족감을 느끼며 연쇄살인을 자행하고 있던 중 뜻밖의 인물과 마주칩니다. 바로 15년 전, 첫눈에 자신과 같은 과인 괴물임을 알아봤던, 그리고 유일하게 자신을 겁먹게 만들었던 릴리입니다. 말하자면 살인 재능에 관한 한 천재적이라 할 수 있는 두 사람이 누군가 하나가 죽지 않으면 끝나지 않을 무자비한 게임을 시작하게 된 것입니다.

 

재미있게 읽었지만 가장 아쉬운 건 막 재미있어지려 하는 지점에서 갑자기 이야기가 엔딩으로 치닫는 점입니다. 마치 기승전결 구도에서 이 빠진 채 막바로 에서 로 달려간 느낌이랄까요? ‘릴리 킨트너 시리즈전작 두 편이 450~480페이지였던 반면 살인 재능344페이지에 불과한데, 그래선지 딱 100페이지 정도가 더 길었다면, 그래서 그 자리에 에 해당하는 숨 가쁜 액션 스릴러의 묘미가 채워졌더라면 좋았을 거란 아쉬움이 진하게 남았습니다.

 

한국에 처음 소개된 죽여 마땅한 사람들이 너무 재미있었던 탓에 그 후로 나온 작품들이 독자의 눈높이에 부응하지 못했던 게 사실이지만, 그래도 피터 스완슨은 늘 신작을 기다리게 만드는 작가 중 한 명입니다. 아무 정보 없이 읽다가 뜻밖에 릴리 킨트너를 다시 만나서 반가웠고, 어쩌면 머잖아 그녀의 네 번째 이야기가 나올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을 품게 됐습니다. 다만 다음 작품은 좀더 두툼한 분량에 풍성하고 볼륨감 넘치는 이야기가 실리기를 바라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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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과 부동명왕 미야베 월드 2막
미야베 미유키 지음, 김소연 옮김 / 북스피어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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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도 간다 미시마초에 있는 주머니 가게 미시마야는 흑백의 방이라는 객실에 손님을 초대하여 조금 특이한 괴담 자리를 마련해 왔다. 한 번에 부르는 이야기꾼은 한 명뿐. 이를 마주하여 듣는 이도 한 명이고 이야기도 하나. (중략) 이야기꾼은 이야기하여 추억의 짐을 내려놓고, 듣는 이는 받아 든 짐을 흑백의 방에만 넣어 두고 두 번 다시 입에 담지 않는다.” (p 9)

 

에도시대의 괴담을 다루는 미야베 월드 2에는 여러 시리즈와 스탠드얼론이 있지만 그중에서도 미야베 미유키 스스로 필생의 사업이라 부를 만큼 애정과 노력을 다 하는 건 바로 미시마야 변조 괴담 시리즈입니다. ‘청과 부동명왕은 그 아홉 번째 작품으로, 모두 네 편의 다채로운 괴담이 실려 있습니다.

17살 소녀 오치카가 시리즈 5편인 금빛 눈의 고양이까지 흑백의 방의 청자(聽者)를 맡았고, 오치카가 결혼한 뒤인 6눈물점부터는 그녀의 사촌이자 주머니 가게 미시마야의 차남인 도미지로가 그 역할을 이어받았습니다.

청과 부동명왕은 첫 주인공인 오치카의 지난한 출산 및 두 번째 주인공인 도미지로의 지독한 성장통을 함께 그리고 있어서 수록된 괴담들의 비극성과 감동이 몇 배는 더 진하게 느껴지는 작품입니다.

 

첫 주인공인 오치카의 무사 출산을 기원하기 위해 청과(靑瓜,울외)를 닮은 부동명왕 상을 안고 찾아온 한 중년여인이 들려주는 기구한 여성들의 연대(‘청과 부동명왕’), 탐관오리의 압제와 수탈로 파괴된 한 마을의 비극과 그로 인해 맺어진 기이한 인연(‘단단 인형’), 소유한 자에게 특별한 재능을 부여하지만 실은 앙화를 불러들이는 마물에 가까운 붓에 관한 이야기(‘자재의 붓’), 그리고 세상과 단절된 외딴 산기슭에서 특별한 산물을 채취하며 평화롭게 살아가던 사람들에게 들이닥친 참극(‘바늘비가 내리는 마을’)이 수록돼있습니다.

 

일본의, 그것도 에도 시대의 괴담은 처음 접하는 한국 독자에게는 다소 낯설고 불편할 수도 있습니다. 일본 특유의 괴담도 괴담이지만, 무수한 종류의 신과 제례, 낯선 인명과 지명, 복잡한 복식과 음식 이름 등 일본어 고유명사가 워낙 많이 등장해서 눈과 머리를 어질어질하게 만들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허들만 극복한다면 미시마야 변조 괴담 시리즈는 물론 미야베 월드 2의 진수를 만끽할 수 있습니다. 미야베 미유키가 다루는 괴담은 시대와 문화는 달라도 누구나 공감하고 이입할 수 있는 보편적인 희비극이기 때문입니다. ‘흑백의 방에 찾아와 자신이 알고 있는, 또는 자신을 옭아매고 있는 이야기를 들려주는 사람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다양하고, 그들이 풀어놓는 이야기 역시 유쾌한 추억부터 말할 수 없이 참담한 악몽에 이르기까지 다채롭습니다. 때론 화자(話者) 스스로도 눈치 채지 못했던 과거의 진상을 이야기를 나누는 중에 깨닫는 경우도 있어서 괴담 미스터리의 풍미를 맛볼 수도 있습니다.

 

청과 부동명왕은 이제 여자이자 어머니로서 살아가게 될 오치카의 출산 및 화공(畫工)으로 살고 싶다는 이상과 상인으로 살아가야 할 현실 사이에서 방황하는 도미지로의 고민이 각 괴담 속에 녹아있어서, 그동안 이 두 사람을 지켜봐온 독자에겐 더욱 더 각별하게 읽히는 작품입니다. 또한 수록된 괴담들 역시 전작들 못잖게 비극성의 깊이와 농도가 대단해서 오랜 여운을 남겨놓습니다.

 

매 작품마다 앞머리에 실은 ()’를 통해 흑백의 방이 운영되어온 과정을 설명하고 있어서 앞선 작품들을 읽지 않은 독자라도 대략의 분위기를 파악할 수는 있지만, 아무래도 미시마야 변조 괴담 시리즈의 참맛을 맛보려면 17살 오치카가 처음으로 흑백의 방에서 괴담을 듣기 시작한 시리즈 첫 편 흑백부터 순서대로 읽어야 된다는 생각입니다. 괴담 자체야 극히 일부 작품을 제외하곤 연결성이 없으니 읽는 순서에 구애받을 필요가 없지만, 오치카와 도미지로를 포함한 주머니 가게 미시마야 사람들의 성장과 변화도 흥미로운 대목이기 때문입니다.

 

편집자 후기에 따르면 일본에서 미시마야 변조 괴담 시리즈’ 10편의 연재가 거의 끝나간다고 합니다. 아마 내년(2025) 여름쯤엔 한국 독자도 만날 수 있지 않을까 싶은데 고양이의 참배라는 제목의 신작이 어떤 희비극을 담고 있을지 벌써부터 궁금해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미시마야 변조 괴담 시리즈순서 (출간연도는 한국 기준)

1. 흑백 (2012)

2. 안주 (2012)

3. 피리술사 (2014)

4. 삼귀 (2018)

5. 금빛 눈의 고양이 (2019)

6. 눈물점 (2020)

7. 영혼 통행증 (2021)

8. 삼가 이와 같이 아뢰옵니다 (2023)

9. 청과 부동명왕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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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카르테 3 - 시간의 풍경 아르테 오리지널 8
나쓰카와 소스케 지음, 백지은 옮김 / arte(아르테)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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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가노 현의 소도시 마쓰모토에 위치한 혼조병원의 소화기 내과 5년차 의사 구리하라 이치토는 여러 가지 이유로 괴짜로 불립니다. 근대 소설가 나쓰메 소세키의 광팬으로서 그의 소설을 줄줄 외우고 다니는 것은 물론 말투까지 고풍스럽기 그지없습니다. 뛰어난 의술과 함께 오직 환자의 미소만 생각하는 선한 능력자이기도 하지만, 입이 험하고 차림새도 영 허술한데다 자신을 근면성실의 전형이라 자화자찬하는 등 어딘가 4차원 같은 인상이 짙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환자를 끌어들이는 구리하라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로 외래든 응급실이든 그가 나타나는 곳엔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환자가 몰려들어서 동료의사와 간호사들로부터 장난기 섞인 조롱을 받기도 합니다. (‘신의 카르테 1,2’의 서평에 쓴 구리하라에 대한 소개글입니다.)

 

추측에 의한 어림짐작이지만 대체로 메디컬 드라마는 최소 기본 이상의 시청률을 올리곤 합니다. 생로병사를 다루는 긴박감 그 자체가 시청자의 눈길을 끌기 때문이겠지만, 의술이라는 인간의 영역과 생사를 관장하는 신의 영역이 공존하는 병원이라는 무대, 그리고 두 영역 사이를 오가며 혼신을 다 하는 의사라는 캐릭터가 때론 감동과 환희를, 때론 슬픔과 절망을 생생하게 전달하며 극적일 수밖에 없는 스토리를 자아내고 있기에 가능하다는 생각입니다.

그런 점에서 소도시의 열악한 지역의료기관에서 오로지 환자만을 생각하며 전력을 다하는 구리하라 이치토는 영웅적이지도 않고 천재적인 의술을 지니지도 않았으며 심지어 멋있는 캐릭터도 아니지만 환자라면 누구나 자신의 몸을 맡기고 싶은 진짜배기 의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신의 카르테 3’에서 서른이 된 구리하라는 의사 생활 6년차와 7년차를 맞이합니다. 전작에서 의대 동기이자 오랜 친구 신도 다쓰야와의 재회를 통해 의사로서 나아가야 할 길에 대해 진심으로 고민하며 끝내 한 뼘 이상 성장했던 구리하라가 이번에는 12년차 베테랑 내과의사 오바타 나미와의 만남을 통해 좀더 깊은 성찰과 비약에 가까운 성장을 이뤄냅니다. 더불어 여러 환자들과의 만남과 이별이 담담하게 그려지면서 전작들과 마찬가지로 수시로 눈가를 뜨끈하게 만들곤 합니다.

 

친구 신도 다쓰야, 선배 오바타 나미와의 만남을 통해 구리하라가 겪는 성장통은 어쩌면 세상의 모든 의사라면 한번쯤 거칠 수밖에 없는 통과의례인지도 모릅니다. 의사에게 가장 필요한 덕목은 무엇인가? 나는 어떤 의사가 되고 싶은 건가? 훌륭한 의사란 뛰어난 의술을 지닌 자인가, 아니면 철학과 양심을 더 중시 여기는 자인가? 적어도 베테랑이라는 소리를 듣기 전까지 지식과 임상을 쌓아야만 하는 젊은 의사라면 이 모든 질문을 숱하게 자기 자신에게 던질 것이 분명합니다. 일본의 의대 졸업생이라면 누구나 당연히 선택하는 대학병원 대신 열악한 지역의료기관에서 혼신을 다하는 구리하라는 그 누구보다 자주 그리고 절실하게 이 질문들을 스스로에게 던집니다.

회생 가능성이 없는 환자라도 마지막 순간까지 전력을 다하는 의사, “의사도 사람!”이라고 주장하며 연이은 밤샘과 과로를 거부하고 가족을 더 소중히 여기는 의사, 열정과 양심만 앞세울 뿐 나날이 발전하는 새로운 의학지식에는 무지한 의사들을 멸시하며 밤낮으로 스스로를 갈고 닦는 의사 등 구리하라 앞에는 어느 것이 정답이라고 할 수 없는 여러 롤 모델들이 제시됩니다. 친구 신도 다쓰야, 선배 오바타 나미와의 만남을 통해 자신이 걸어온 길을 되돌아보며 진정한 의사의 길을 모색하던 구리하라는 뜻하지 않은 오진 사태로 인해 새로운 시작을 고민하기 시작합니다.

 

신의 카르테 3’에서 성장통을 겪는 건 구리하라뿐만은 아닙니다. “안달하면 안 돼. 그저 소처럼 묵묵하게 앞으로 나아가는 게 중요해.”라는 (구리하라가 존경하는) 대문호 나쓰메 소세키의 문장이 자주 인용되면서 주조연을 막론하고 모두들 묵묵하게 앞으로 나아가는 모습들이 그려집니다. 선배의사 오바타 나미와의 우여곡절이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긴 하지만 그 외에도 독자를 울고 웃게 만드는 소소한 에피소드들을 통해 의사, 간호사, 환자, 가족 등 많은 인물들이 작지만 진정성 있는 성장을 이뤄낸다는 뜻입니다. 극적인 사건은 없지만 읽는 내내 마음의 동요가 그치지 않았던 건 바로 이런 매력적인 서사 덕분입니다.

 

신의 카르테 3’ 다음 작품은 구리하라의 프리퀄을 그린 신의 카르테 0’입니다. 의대 기숙사 시절, 구리하라가 신도 다쓰야, 스나야마 지로와 절친의 인연을 맺는 과정을 비롯하여 레지던트 시절의 고생담이 그려질 것으로 보이는데, 3편까지 읽고 보니 정말 구리하라의 의대생 시절이 궁금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정식 의사가 되기 전의 구리하라가 어떤 성장을 겪었는지, 또 얼마나 웃음과 눈물을 번갈아 선사할지 벌써부터 기대가 될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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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비밀 케이스릴러
이종관 지음 / 고즈넉이엔티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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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경찰서 강력2팀 오대영은 자신이 쫓던 사기범에게서 충격적인 이야기를 듣습니다. ‘당신의 비밀이라는 사이트에 오대영의 아내 해인과 불륜 관계인 국회의원 보좌관 나태곤이 실종됐는데, 실종 직전 마지막으로 만난 게 해인이며, 그 근방에서 오대영의 차가 목격됐다.”라는 글과 함께 해인이 큰 캐리어를 끌고 어디론가 가는 사진이 올라왔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얼마 후 토막 난 나태곤의 몸통부위가 해인이 끌고 가던 것과 똑같은 캐리어에 담긴 채 발견됐다는 점. 대영은 경찰의 수사망이 곧 해인을 향할 것을 직감하곤 자신이 먼저 진범을 찾아내기로 결심합니다. 한편 해인은 불륜 사실을 눈치 챈 남편 대영이 나태곤을 죽인 게 아닐까 의심하며 대영을 피해 진실을 밝히고자 합니다.

 

2019년에 출간된 현장검증을 읽고 이종관을 관심 갖고 지켜볼 한국 장르물 작가중 한 명으로 꼽았음에도 불구하고, 직전 작품인 리볼브1~2권으로 나뉜데다 700페이지에 육박하는 부담스러운 분량 때문에 결국 장바구니에 넣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2년 만의 신작인 당신의 비밀은 분량도 적절하고, 사건과 소재도 호기심을 자극해서 큰 기대감을 갖고 첫 페이지부터 찬찬히 읽기 시작했습니다.

 

큰 얼개만 보면, 남편은 불륜을 저지른 아내를 증오하면서도 그녀의 무죄를 입증하기 위해 홀로 수사를 벌이는 반면, 아내는 남편이 범인이라고 확신하곤 어떻게든 유죄를 입증하기 위해 분투한다는 기묘한 구도를 지닌 범죄 스릴러입니다.

이 구도를 더욱 흥미롭게 만드는 것은 다크웹처럼 은밀하고도 위험천만한 분위기를 풍기는 당신의 비밀이라는 사이트의 존재입니다. 누군가 타인의 비밀을 판매용으로 올리면 그 비밀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코인을 지불하고 구매하는 것입니다. 한번 판매된 비밀은 블라인드 처리되는 것은 물론 다시는 재게시가 불가능합니다.

대영은 누가, 왜 자신과 해인과 나태곤의 관계를 폭로한 것인지 가늠조차 할 수 없었지만, 나태곤의 토막시신이 발견되자마자 한 가지 확신을 품게 됩니다. 즉 그 글을 올린 자가 나태곤을 살해한 진범이며, 그 진범이 자신 혹은 해인을 살인범으로 몰아가려 한다는 점입니다. 더 큰 문제는 토막살인사건에 직간접적으로 연관된 자들이 하나둘씩 의문의 죽음을 맞이한다는 점, 또 그 죽음들이 모두 당신의 비밀사이트와 연관 있다는 점입니다.

 

비밀이 있는 사람에겐 꼬리가 있다. 그리고 언젠가 그 꼬리가 몸통을 흔드는 순간이 온다.”라는 첫 문장처럼 이 작품 전반을 관통하는 코드는 바로 비밀입니다. 말하자면 (출판사 소개들대로) “비밀을 손에 쥐고 타인의 삶을 흔들려는 자, 비밀을 덮으려고 자신의 삶을 거는 자 그리고 이 모든 비밀을 이용해 자신의 목적을 이루려는 자가 서로 얽히는이야기를 그리고 있습니다. 각자 정반대의 이유로 진실 찾기에 나섰지만 대영과 해인은 한편으론 비밀을 밝히기 위해, 한편으론 비밀을 덮기 위해,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당신의 비밀뒤에 숨은 진범의 정체를 밝히기 위해 숱한 위기를 함께 헤쳐가야 하는 역설적인 처지에 놓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미 불륜이라는 덫 때문에 돌이킬 수 없는 관계가 된 두 사람은 마지막 순간까지도 상대방이 공개하지 않은 비밀이 있다고 의심하며 위태로운 공조를 이어갑니다.

 

이종관의 전작인 현장검증의 서평에 작가의 설계도가 워낙 복잡한데다 반전 역시 여러 차례 거듭된다.”라고 쓴 적 있는데, ‘당신의 비밀은 그에 못잖게 인물도 많고 사건들도 얽히고설킨 데다 구도도 무척 복잡한 작품입니다. 또한 함께 진범을 찾아 나섰지만 서로에 대한 의심을 놓지 못하는 대영과 해인의 미묘한 심리전까지 가세하면서 독자는 범죄-서스펜스-심리 스릴러를 동시에 읽는 듯한 아찔함을 맛보게 됩니다.

하지만 복잡다단한 이야기를 다 읽은 뒤에 가장 먼저 느낀 건 어딘가 개운치 않다, 라는 점이었습니다. 진범의 정체도 매끄럽게 밝혀졌고, 뜻밖의 반전과 함께 이야기 자체도 잘 마무리되긴 했지만 실은 왜 진범은 이렇게 번거롭고 수고스러운 일을 벌인 걸까?”라는 의문이 머릿속에 계속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작가가 막판에 그 이유를 진범의 입을 통해 설명하긴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깔끔한 답변이라고 여겨지진 않았습니다. 이야기의 완성도나 정교함에선 별 5개도 너끈한 작품이지만 이 개운치 않은 여운 때문에 별 1개를 빼야만 했습니다.

 

현장검증서평 때 복잡한 설계도에 비해 다소 모호하고 불친절한 설명이 잦다.”는 이유로 별 0.5개를 뺐고, 이번에는 이야기의 원점에 대한 의문 때문에 별 1개를 빼긴 했지만, ‘관심 갖고 지켜볼 한국 장르물 작가중 한 명인 이종관의 필력은 여전히 매력적이었고 다음 작품도 무척 기대가 되는 게 사실입니다. 다만, 주제 넘는 당부를 한 가지만 하자면 이야기의 큰 선 혹은 시작점이 좀더 선명하고 단순했으면 좋겠다는 점입니다. 빽빽하고 치밀하게 나무를 심느라 숲 전체의 모습이 모호해지는 건 너무나도 아쉬운 일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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