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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비밀 ㅣ 케이스릴러
이종관 지음 / 고즈넉이엔티 / 2024년 9월
평점 :
용산경찰서 강력2팀 오대영은 자신이 쫓던 사기범에게서 충격적인 이야기를 듣습니다. ‘당신의 비밀’이라는 사이트에 “오대영의 아내 해인과 불륜 관계인 국회의원 보좌관 나태곤이 실종됐는데, 실종 직전 마지막으로 만난 게 해인이며, 그 근방에서 오대영의 차가 목격됐다.”라는 글과 함께 해인이 큰 캐리어를 끌고 어디론가 가는 사진이 올라왔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얼마 후 토막 난 나태곤의 몸통부위가 해인이 끌고 가던 것과 똑같은 캐리어에 담긴 채 발견됐다는 점. 대영은 경찰의 수사망이 곧 해인을 향할 것을 직감하곤 자신이 먼저 진범을 찾아내기로 결심합니다. 한편 해인은 불륜 사실을 눈치 챈 남편 대영이 나태곤을 죽인 게 아닐까 의심하며 대영을 피해 진실을 밝히고자 합니다.
2019년에 출간된 ‘현장검증’을 읽고 이종관을 ‘관심 갖고 지켜볼 한국 장르물 작가’ 중 한 명으로 꼽았음에도 불구하고, 직전 작품인 ‘리볼브’는 1~2권으로 나뉜데다 700페이지에 육박하는 부담스러운 분량 때문에 결국 장바구니에 넣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2년 만의 신작인 ‘당신의 비밀’은 분량도 적절하고, 사건과 소재도 호기심을 자극해서 큰 기대감을 갖고 첫 페이지부터 찬찬히 읽기 시작했습니다.
큰 얼개만 보면, 남편은 불륜을 저지른 아내를 증오하면서도 그녀의 무죄를 입증하기 위해 홀로 수사를 벌이는 반면, 아내는 남편이 범인이라고 확신하곤 어떻게든 유죄를 입증하기 위해 분투한다는 기묘한 구도를 지닌 범죄 스릴러입니다.
이 구도를 더욱 흥미롭게 만드는 것은 다크웹처럼 은밀하고도 위험천만한 분위기를 풍기는 ‘당신의 비밀’이라는 사이트의 존재입니다. 누군가 타인의 비밀을 판매용으로 올리면 그 비밀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코인을 지불하고 구매하는 것입니다. 한번 판매된 비밀은 블라인드 처리되는 것은 물론 다시는 재게시가 불가능합니다.
대영은 누가, 왜 자신과 해인과 나태곤의 관계를 폭로한 것인지 가늠조차 할 수 없었지만, 나태곤의 토막시신이 발견되자마자 한 가지 확신을 품게 됩니다. 즉 그 글을 올린 자가 나태곤을 살해한 진범이며, 그 진범이 자신 혹은 해인을 살인범으로 몰아가려 한다는 점입니다. 더 큰 문제는 토막살인사건에 직간접적으로 연관된 자들이 하나둘씩 의문의 죽음을 맞이한다는 점, 또 그 죽음들이 모두 ‘당신의 비밀’ 사이트와 연관 있다는 점입니다.
“비밀이 있는 사람에겐 꼬리가 있다. 그리고 언젠가 그 꼬리가 몸통을 흔드는 순간이 온다.”라는 첫 문장처럼 이 작품 전반을 관통하는 코드는 바로 비밀입니다. 말하자면 (출판사 소개들대로) “비밀을 손에 쥐고 타인의 삶을 흔들려는 자, 비밀을 덮으려고 자신의 삶을 거는 자 그리고 이 모든 비밀을 이용해 자신의 목적을 이루려는 자가 서로 얽히는” 이야기를 그리고 있습니다. 각자 정반대의 이유로 진실 찾기에 나섰지만 대영과 해인은 한편으론 비밀을 밝히기 위해, 한편으론 비밀을 덮기 위해,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당신의 비밀’ 뒤에 숨은 진범의 정체를 밝히기 위해 숱한 위기를 함께 헤쳐가야 하는 역설적인 처지에 놓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미 불륜이라는 덫 때문에 돌이킬 수 없는 관계가 된 두 사람은 마지막 순간까지도 상대방이 공개하지 않은 비밀이 있다고 의심하며 위태로운 공조를 이어갑니다.
이종관의 전작인 ‘현장검증’의 서평에 “작가의 설계도가 워낙 복잡한데다 반전 역시 여러 차례 거듭된다.”라고 쓴 적 있는데, ‘당신의 비밀’은 그에 못잖게 인물도 많고 사건들도 얽히고설킨 데다 구도도 무척 복잡한 작품입니다. 또한 함께 진범을 찾아 나섰지만 서로에 대한 의심을 놓지 못하는 대영과 해인의 미묘한 심리전까지 가세하면서 독자는 범죄-서스펜스-심리 스릴러를 동시에 읽는 듯한 아찔함을 맛보게 됩니다.
하지만 복잡다단한 이야기를 다 읽은 뒤에 가장 먼저 느낀 건 어딘가 개운치 않다, 라는 점이었습니다. 진범의 정체도 매끄럽게 밝혀졌고, 뜻밖의 반전과 함께 이야기 자체도 잘 마무리되긴 했지만 실은 “왜 진범은 이렇게 번거롭고 수고스러운 일을 벌인 걸까?”라는 의문이 머릿속에 계속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작가가 막판에 그 이유를 진범의 입을 통해 설명하긴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깔끔한 답변이라고 여겨지진 않았습니다. 이야기의 완성도나 정교함에선 별 5개도 너끈한 작품이지만 이 개운치 않은 여운 때문에 별 1개를 빼야만 했습니다.
‘현장검증’ 서평 때 “복잡한 설계도에 비해 다소 모호하고 불친절한 설명이 잦다.”는 이유로 별 0.5개를 뺐고, 이번에는 이야기의 원점에 대한 의문 때문에 별 1개를 빼긴 했지만, ‘관심 갖고 지켜볼 한국 장르물 작가’ 중 한 명인 이종관의 필력은 여전히 매력적이었고 다음 작품도 무척 기대가 되는 게 사실입니다. 다만, 주제 넘는 당부를 한 가지만 하자면 이야기의 큰 선 혹은 시작점이 좀더 선명하고 단순했으면 좋겠다는 점입니다. 빽빽하고 치밀하게 나무를 심느라 숲 전체의 모습이 모호해지는 건 너무나도 아쉬운 일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