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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카르테 3 - 시간의 풍경 ㅣ 아르테 오리지널 8
나쓰카와 소스케 지음, 백지은 옮김 / arte(아르테) / 2018년 5월
평점 :
나가노 현의 소도시 마쓰모토에 위치한 혼조병원의 소화기 내과 5년차 의사 구리하라 이치토는 여러 가지 이유로 괴짜로 불립니다. 근대 소설가 나쓰메 소세키의 광팬으로서 그의 소설을 줄줄 외우고 다니는 것은 물론 말투까지 고풍스럽기 그지없습니다. 뛰어난 의술과 함께 오직 환자의 미소만 생각하는 선한 능력자이기도 하지만, 입이 험하고 차림새도 영 허술한데다 자신을 근면성실의 전형이라 자화자찬하는 등 어딘가 4차원 같은 인상이 짙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환자를 끌어들이는 구리하라’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로 외래든 응급실이든 그가 나타나는 곳엔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환자가 몰려들어서 동료의사와 간호사들로부터 장난기 섞인 조롱을 받기도 합니다. (‘신의 카르테 1,2’의 서평에 쓴 구리하라에 대한 소개글입니다.)
추측에 의한 어림짐작이지만 대체로 메디컬 드라마는 최소 기본 이상의 시청률을 올리곤 합니다. 생로병사를 다루는 긴박감 그 자체가 시청자의 눈길을 끌기 때문이겠지만, 의술이라는 ‘인간의 영역’과 생사를 관장하는 ‘신의 영역’이 공존하는 병원이라는 무대, 그리고 두 영역 사이를 오가며 혼신을 다 하는 의사라는 캐릭터가 때론 감동과 환희를, 때론 슬픔과 절망을 생생하게 전달하며 극적일 수밖에 없는 스토리를 자아내고 있기에 가능하다는 생각입니다.
그런 점에서 소도시의 열악한 지역의료기관에서 오로지 환자만을 생각하며 전력을 다하는 구리하라 이치토는 영웅적이지도 않고 천재적인 의술을 지니지도 않았으며 심지어 멋있는 캐릭터도 아니지만 환자라면 누구나 자신의 몸을 맡기고 싶은 진짜배기 의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신의 카르테 3’에서 서른이 된 구리하라는 의사 생활 6년차와 7년차를 맞이합니다. 전작에서 의대 동기이자 오랜 친구 신도 다쓰야와의 재회를 통해 의사로서 나아가야 할 길에 대해 진심으로 고민하며 끝내 한 뼘 이상 성장했던 구리하라가 이번에는 12년차 베테랑 내과의사 오바타 나미와의 만남을 통해 좀더 깊은 성찰과 비약에 가까운 성장을 이뤄냅니다. 더불어 여러 환자들과의 만남과 이별이 담담하게 그려지면서 전작들과 마찬가지로 수시로 눈가를 뜨끈하게 만들곤 합니다.
친구 신도 다쓰야, 선배 오바타 나미와의 만남을 통해 구리하라가 겪는 성장통은 어쩌면 세상의 모든 의사라면 한번쯤 거칠 수밖에 없는 통과의례인지도 모릅니다. 의사에게 가장 필요한 덕목은 무엇인가? 나는 어떤 의사가 되고 싶은 건가? 훌륭한 의사란 뛰어난 의술을 지닌 자인가, 아니면 철학과 양심을 더 중시 여기는 자인가? 적어도 베테랑이라는 소리를 듣기 전까지 지식과 임상을 쌓아야만 하는 젊은 의사라면 이 모든 질문을 숱하게 자기 자신에게 던질 것이 분명합니다. 일본의 의대 졸업생이라면 누구나 당연히 선택하는 대학병원 대신 열악한 지역의료기관에서 혼신을 다하는 구리하라는 그 누구보다 자주 그리고 절실하게 이 질문들을 스스로에게 던집니다.
회생 가능성이 없는 환자라도 마지막 순간까지 전력을 다하는 의사, “의사도 사람!”이라고 주장하며 연이은 밤샘과 과로를 거부하고 가족을 더 소중히 여기는 의사, 열정과 양심만 앞세울 뿐 나날이 발전하는 새로운 의학지식에는 무지한 의사들을 멸시하며 밤낮으로 스스로를 갈고 닦는 의사 등 구리하라 앞에는 어느 것이 정답이라고 할 수 없는 여러 롤 모델들이 제시됩니다. 친구 신도 다쓰야, 선배 오바타 나미와의 만남을 통해 자신이 걸어온 길을 되돌아보며 진정한 의사의 길을 모색하던 구리하라는 뜻하지 않은 오진 사태로 인해 ‘새로운 시작’을 고민하기 시작합니다.
‘신의 카르테 3’에서 성장통을 겪는 건 구리하라뿐만은 아닙니다. “안달하면 안 돼. 그저 소처럼 묵묵하게 앞으로 나아가는 게 중요해.”라는 (구리하라가 존경하는) 대문호 나쓰메 소세키의 문장이 자주 인용되면서 주조연을 막론하고 모두들 묵묵하게 앞으로 나아가는 모습들이 그려집니다. 선배의사 오바타 나미와의 우여곡절이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긴 하지만 그 외에도 독자를 울고 웃게 만드는 소소한 에피소드들을 통해 의사, 간호사, 환자, 가족 등 많은 인물들이 작지만 진정성 있는 성장을 이뤄낸다는 뜻입니다. 극적인 사건은 없지만 읽는 내내 마음의 동요가 그치지 않았던 건 바로 이런 매력적인 서사 덕분입니다.
‘신의 카르테 3’ 다음 작품은 구리하라의 프리퀄을 그린 ‘신의 카르테 0’입니다. 의대 기숙사 시절, 구리하라가 신도 다쓰야, 스나야마 지로와 절친의 인연을 맺는 과정을 비롯하여 레지던트 시절의 고생담이 그려질 것으로 보이는데, 3편까지 읽고 보니 정말 구리하라의 의대생 시절이 궁금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정식 의사가 되기 전의 구리하라가 어떤 성장을 겪었는지, 또 얼마나 웃음과 눈물을 번갈아 선사할지 벌써부터 기대가 될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