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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는 망자, ‘괴민연’에서의 기록과 추리
미쓰다 신조 지음, 김은모 옮김 / 리드비 / 2024년 7월
평점 :
개인적으로 무척 좋아하는 작품 중 하나가 미쓰다 신조의 ‘도조 겐야 시리즈’입니다. 패전 직후 혼란에 빠진 근현대 일본을 배경으로 민속학과 호러와 본격 미스터리가 혼재된 독특한 장르를 맛볼 수 있는 시리즈인데, 일본에서는 2021년까지 모두 11편의 작품이 출간됐지만, 아쉽게도 한국에선 2013년에 출간된 ‘미즈치처럼 가라앉는 것’을 끝으로(모두 4편 출간) 신간 소식이 끊겼습니다.
그런 점에서 ‘걷는 망자’는 저와 같은 도조 겐야 팬에게는 무척 반가운 작품인데, ‘도조 겐야 시리즈’의 스핀 오프라 할 수 있는 연작단편집이기 때문입니다. 주인공은 도조 겐야의 조수인 젊은 남녀지만, 전국을 떠돌며 괴담을 수집하는 도조 겐야의 행적이 간간이 그려지고 있어서 아쉬운 대로 ‘도조 겐야 시리즈’의 정취를 만끽할 수 있습니다.
도쇼 아이는 어릴 적 고향 인근에서 벌어진 사건 때문에 도조 겐야와 간접적으로 인연을 맺은 바 있고, 그 덕분에 대학생이 된 현재 학교 도서관 지하에 자리 한 ‘괴이 민속학 연구실’, 통칭 괴민연으로 불리는 도조 겐야의 연구실 겸 장서 보관실에 드나들게 됩니다. 홀로 괴민연을 지키고 있던 건 도조 겐야의 조수이자 대학원생인 덴큐 마히토입니다. 두 사람은 도조 겐야가 수집해서 보내온 괴담의 진상을 토론하고 미스터리를 추리하여 합리적인 결론을 도출하곤 합니다. 재미있는 건 격세유전을 통해 외할머니의 영매 재능을 물려받은 도쇼 아이가 괴이 현상을 실재하는 것으로 받아들이는 반면, 덴큐 마히토는 소심할 정도로 괴담 공포증을 가진 인물로, 괴이란 모두 망상이며 합리적인 추리가 가능하다고 믿는다는 점입니다.
도조 겐야가 30대 초반으로 나오는 이 작품의 시대적 배경은 1950년대 중반입니다. 외지고 작은 마을이라면 여전히 근대적 풍습과 전설이 잔존해있던 시절로, 도조 겐야가 수집한 괴담들은 하나 같이 현지인들에게는 생생한 공포이자 무시할 수 없는 금기를 담고 있습니다. 물에 빠져 죽은 자의 망령이 돌아다니는 바닷가(‘걷는 망자’), 400여 년 전부터 내려오는 머리 없는 여자의 저주(‘다가오는 머리 없는 여자’), 완벽한 밀실인 곰덫 안에서 내장이 파헤쳐진 채 발견되는 어린이의 시신과 시간이 갈수록 작아지는 깊은 산속 서양식 저택의 비밀(‘배를 가르는 호귀와 작아지는 두꺼비집’), 요괴를 체험하기 위해 스스로를 밀실에 가둔 요괴연구회 멤버가 겪은 의문의 사건(‘봉인지가 붙여진 방의 자시키 할멈’), 그리고 풍토병이 불러온 끔찍한 앙화와 참극(‘서 있는 쿠치바온나’) 등 모두 다섯 편이 실려 있습니다.
도조 겐야가 수집한 괴담의 내용이 먼저 소개되고, 괴민연 책상에 마주앉은 도쇼 아이와 덴큐 마히토가 괴담 속 미스터리를 추리하는 형식으로 이뤄져있습니다. 말하자면 추리 과정 자체는 안락탐정 미스터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앞부분의 괴담이 미쓰다 신조 특유의 민속학과 호러가 접목된 으슬으슬한 내용을 담고 있다면, 이어지는 두 안락탐정의 추리는 로맨틱 코미디 기운이 깃든 코지 미스터리에 가까워서 전혀 다른 분위기를 풍깁니다. 남들이 볼 수 없는 것을 볼 줄 아는 영매의 재능을 가진 도쇼 아이와 괴이 현상 자체를 부정하며 어떻게든 합리적인 추리를 도출해내려는 덴큐 마히토가 괴담의 실체에 다가가는 과정에서 벌이는 투닥거림은 로코 주인공들이 사랑에 빠지기 직전 벌이는 유쾌한 소동극에 가깝기 때문입니다. 이 두 사람이 어떤 미래를 맞이하게 되는지가 마지막 페이지에서 공개되는데, 미쓰다 신조의 다른 작품과 세계관이 연결돼있어서 무척 흥미롭게 읽혔습니다.
‘도조 겐야 시리즈’가 괴이 현상 속에 교묘하게 감춰진 범죄를 밝혀내는 본격 미스터리라면, ‘걷는 망자’는 진실이야 어떻든 상관없이 괴담 자체를 텍스트 삼아 ‘실제로 벌어졌을 법한 상황’을 추리하는, 말하자면 “이런 일이 벌어진 게 아닐까?”라는 수준의 추측성 미스터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덴큐 마히토가 이런저런 추리를 마구 던지고 도쇼 아이가 깔끔한 논리로 반박하는 가운데 점차 진실이라 여겨지는 지점에 도달하는 과정이 반복됩니다. 이런 설정도 나름 재미있고 흥미롭긴 하지만, 아무래도 딱 떨어지는 결론이 아니다 보니 독자에 따라 다소 찜찜함을 느낄 수도 있습니다. 현장과 동떨어진 안락탐정 미스터리의 한계겠지만, 가령 이들이 내린 결론 가운데 한두 개쯤 도조 겐야의 반박을 통해 뒤집어지는 경우가 있었다면 조금은 더 매력적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도쇼 아이와 덴큐 마히토가 이끄는 ‘괴민연 시리즈’가 앞으로도 계속 이어질지 모르겠지만, 한번쯤이라도 도조 겐야가 ‘특별출연’을 해준다면, 아니 도조 겐야까지 포함한 3총사가 활약하는 이야기가 그려진다면 정말 흥미진진한 시리즈가 될 것 같다는 생각입니다. 아울러 이 작품을 계기로 11년 가까이 한국 출간이 중단된 ‘도조 겐야 시리즈’가 부활할 수 있다면 더 바랄 나위가 없을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