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과 부동명왕 미야베 월드 2막
미야베 미유키 지음, 김소연 옮김 / 북스피어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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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도 간다 미시마초에 있는 주머니 가게 미시마야는 흑백의 방이라는 객실에 손님을 초대하여 조금 특이한 괴담 자리를 마련해 왔다. 한 번에 부르는 이야기꾼은 한 명뿐. 이를 마주하여 듣는 이도 한 명이고 이야기도 하나. (중략) 이야기꾼은 이야기하여 추억의 짐을 내려놓고, 듣는 이는 받아 든 짐을 흑백의 방에만 넣어 두고 두 번 다시 입에 담지 않는다.” (p 9)

 

에도시대의 괴담을 다루는 미야베 월드 2에는 여러 시리즈와 스탠드얼론이 있지만 그중에서도 미야베 미유키 스스로 필생의 사업이라 부를 만큼 애정과 노력을 다 하는 건 바로 미시마야 변조 괴담 시리즈입니다. ‘청과 부동명왕은 그 아홉 번째 작품으로, 모두 네 편의 다채로운 괴담이 실려 있습니다.

17살 소녀 오치카가 시리즈 5편인 금빛 눈의 고양이까지 흑백의 방의 청자(聽者)를 맡았고, 오치카가 결혼한 뒤인 6눈물점부터는 그녀의 사촌이자 주머니 가게 미시마야의 차남인 도미지로가 그 역할을 이어받았습니다.

청과 부동명왕은 첫 주인공인 오치카의 지난한 출산 및 두 번째 주인공인 도미지로의 지독한 성장통을 함께 그리고 있어서 수록된 괴담들의 비극성과 감동이 몇 배는 더 진하게 느껴지는 작품입니다.

 

첫 주인공인 오치카의 무사 출산을 기원하기 위해 청과(靑瓜,울외)를 닮은 부동명왕 상을 안고 찾아온 한 중년여인이 들려주는 기구한 여성들의 연대(‘청과 부동명왕’), 탐관오리의 압제와 수탈로 파괴된 한 마을의 비극과 그로 인해 맺어진 기이한 인연(‘단단 인형’), 소유한 자에게 특별한 재능을 부여하지만 실은 앙화를 불러들이는 마물에 가까운 붓에 관한 이야기(‘자재의 붓’), 그리고 세상과 단절된 외딴 산기슭에서 특별한 산물을 채취하며 평화롭게 살아가던 사람들에게 들이닥친 참극(‘바늘비가 내리는 마을’)이 수록돼있습니다.

 

일본의, 그것도 에도 시대의 괴담은 처음 접하는 한국 독자에게는 다소 낯설고 불편할 수도 있습니다. 일본 특유의 괴담도 괴담이지만, 무수한 종류의 신과 제례, 낯선 인명과 지명, 복잡한 복식과 음식 이름 등 일본어 고유명사가 워낙 많이 등장해서 눈과 머리를 어질어질하게 만들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허들만 극복한다면 미시마야 변조 괴담 시리즈는 물론 미야베 월드 2의 진수를 만끽할 수 있습니다. 미야베 미유키가 다루는 괴담은 시대와 문화는 달라도 누구나 공감하고 이입할 수 있는 보편적인 희비극이기 때문입니다. ‘흑백의 방에 찾아와 자신이 알고 있는, 또는 자신을 옭아매고 있는 이야기를 들려주는 사람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다양하고, 그들이 풀어놓는 이야기 역시 유쾌한 추억부터 말할 수 없이 참담한 악몽에 이르기까지 다채롭습니다. 때론 화자(話者) 스스로도 눈치 채지 못했던 과거의 진상을 이야기를 나누는 중에 깨닫는 경우도 있어서 괴담 미스터리의 풍미를 맛볼 수도 있습니다.

 

청과 부동명왕은 이제 여자이자 어머니로서 살아가게 될 오치카의 출산 및 화공(畫工)으로 살고 싶다는 이상과 상인으로 살아가야 할 현실 사이에서 방황하는 도미지로의 고민이 각 괴담 속에 녹아있어서, 그동안 이 두 사람을 지켜봐온 독자에겐 더욱 더 각별하게 읽히는 작품입니다. 또한 수록된 괴담들 역시 전작들 못잖게 비극성의 깊이와 농도가 대단해서 오랜 여운을 남겨놓습니다.

 

매 작품마다 앞머리에 실은 ()’를 통해 흑백의 방이 운영되어온 과정을 설명하고 있어서 앞선 작품들을 읽지 않은 독자라도 대략의 분위기를 파악할 수는 있지만, 아무래도 미시마야 변조 괴담 시리즈의 참맛을 맛보려면 17살 오치카가 처음으로 흑백의 방에서 괴담을 듣기 시작한 시리즈 첫 편 흑백부터 순서대로 읽어야 된다는 생각입니다. 괴담 자체야 극히 일부 작품을 제외하곤 연결성이 없으니 읽는 순서에 구애받을 필요가 없지만, 오치카와 도미지로를 포함한 주머니 가게 미시마야 사람들의 성장과 변화도 흥미로운 대목이기 때문입니다.

 

편집자 후기에 따르면 일본에서 미시마야 변조 괴담 시리즈’ 10편의 연재가 거의 끝나간다고 합니다. 아마 내년(2025) 여름쯤엔 한국 독자도 만날 수 있지 않을까 싶은데 고양이의 참배라는 제목의 신작이 어떤 희비극을 담고 있을지 벌써부터 궁금해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미시마야 변조 괴담 시리즈순서 (출간연도는 한국 기준)

1. 흑백 (2012)

2. 안주 (2012)

3. 피리술사 (2014)

4. 삼귀 (2018)

5. 금빛 눈의 고양이 (2019)

6. 눈물점 (2020)

7. 영혼 통행증 (2021)

8. 삼가 이와 같이 아뢰옵니다 (2023)

9. 청과 부동명왕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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