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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형은 왜 살해되는가 ㅣ 다카기 아키미쓰 걸작선 1
다카기 아키미쓰 지음, 김선영 옮김 / 검은숲 / 2013년 1월
평점 :
절판
단두대로 머리를 자르는 ‘마리 앙투아네트의 처형’이라는 마술쇼가 벌어지기 직전 마술에 사용될 예정이던 인형의 머리가 사라집니다. 단순한 해프닝으로 여겨졌지만 이 마술쇼에서 머리 잘리는 앙투아네트 역할을 맡았던 유리코가 얼마 후 머리 없는 시신으로 발견되자 큰 소동이 벌어집니다. 쇼에 참가했던 아마추어 마술협회 회원들이 용의선상에 올랐지만 모두 알리바이가 입증된 상황에서, 명탐정으로 이름 높은 가미즈 교스케가 사건에 합류합니다. 하지만 가미즈가 신중에 신중을 거듭하는 사이 두 번째 희생자가 발생하는데, 이번에도 인형이 먼저 ‘살해당한’ 뒤 살인사건이 벌어진 탓에 언론은 ‘인형 살인사건’이라는 별명을 붙입니다.
다카기 아키미쓰가 창조한 명탐정 가미즈 교스케는 에도가와 란포의 아케치 고고로, 요코미조 세이시의 긴다이치 코스케와 함께 일본 본격 미스터리를 대표하는 3대 명탐정으로 불립니다. 주로 1950~60년대에 출간된 ‘가미즈 교스케 시리즈’ 가운데 한국에 소개된 건 다카기 아키미쓰의 데뷔작인 ‘문신살인사건’(1948)과 ‘인형은 왜 살해되는가’(1955) 등 두 편뿐입니다. (그 외에 천재적인 경제 사기범을 다룬 ‘대낮의 사각’과 ‘변호사 햐쿠타니 센이치로 시리즈’인 ‘파계재판’, ‘유괴’, ‘법정의 마녀’ 등이 출간됐습니다.)
‘인형은 왜 살해되는가’는 (출판사 소개글대로) “마술을 매개로 한 불가능한 범죄와 인형을 이용한 예고살인이라는 괴이한 설정의 작품”입니다. 범인은 살인을 저지르기 전에 동일한 수법으로 인형을 먼저 ‘살해하는’ 기이한 행각을 벌이는데, 그 행각 자체가 고도의 마술과도 같아서 경찰은 물론 명탐정 가미즈의 혼까지 쏙 빼놓습니다.
두 번째 사건 직후 용의자는 10여 명의 아마추어 마술협회 회원들로 압축되지만, 알리바이 문제라든가 불분명한 동기 때문에 좀처럼 수사는 앞으로 나아가지 못합니다. 그런 와중에 전혀 다른 스타일의 사건이 발생하자 가미즈는 그의 명성에 어울리지 않게 수사에서 철수하기로 결정합니다.
광기에 사로잡힌 사이코패스의 쾌락살인인지, 막대한 재산을 노린 계획살인인지조차 확실치 않은 상황에서 가미즈를 혼란에 빠뜨리는 요소는 ‘인형’과 ‘마술’입니다. 왜 인형을 먼저 살해해야 했는지, 왜 범인이 굳이 마술과도 같은 어려운 방법을 써서 ‘살해할 인형’을 구하는 것인지를 알아내지 못하면 진상에 다가가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명탐정으로서의 첫 등장을 알린 ‘문신살인사건’에서 ‘주술’과 ‘문신’으로 인해 큰 혼란을 겪었던 가미즈가 또 한 번 비슷한 경험을 하게 된 셈인데, 1950년대라는 시대상까지 가미된 덕분에 ‘인형’과 ‘마술’은 기괴함과 고전미를 훨씬 더 강렬하게 발산합니다.
다만 다소 야박한 평점을 준 이유는 빠르고 긴박했던 ‘문신살인사건’과 달리 템포도 처지고 사족 같은 설명도 너무 많아서 중반 이후로 이야기가 정체됐기 때문입니다. 출판사 소개글 가운데 “(가미즈는) 매사를 지나치게 숙고하는 성격 탓에 단순한 메시지를 복잡하게 생각하다가 용의자를 잃거나 부주의한 행동으로 또 다른 살인사건을 놓치기도 한다.”라는 대목이 있는데, 바로 이 ‘지나친 숙고’가 이야기를 정체시킨 주범입니다. 물론 다 읽고 복기해보면 막판의 비약과도 같은 추리와 반전을 위해 ‘지나친 숙고’가 꼭 필요하긴 했지만, 이 세상사람 같지 않은 천재적인 명탐정 가미즈의 신비한 능력을 지나치게 강조하려다가 역효과가 더 크게 난 느낌이었습니다.
또한 마지막에 밝혀진 범인의 정체가 뜻밖의 충격을 주긴 했지만, 돌이켜보면 그가 왜 이토록 복잡하고 난이도 높은 연쇄살인을 저질렀는지 쉽게 이해하기 어려웠습니다. 물론 그럴 수밖에 없었던 사연들이 설명되긴 하지만 ‘결과를 위한 다소 억지스러운 변명’처럼 읽혔다고 할까요?
다카기 아키미쓰의 작품들에 만점을 준 적은 없어도 고풍스런 아날로그의 향기가 너무 좋아서 한국에 출간된 작품들은 모두 찾아 읽었습니다. ‘인형은 왜 살해되는가’ 역시 고전미에 관한 한 무척 매력적이지만, 우선 미스터리 외적인 곁가지들이 이야기를 정체시키면서 지루하게 만든 점, 그리고 개인적으로 별로 좋아하지 않는 ‘비약을 일삼는 천재 명탐정’의 활약이 지나치게 부각된 점 때문에 아쉬움이 많이 남았습니다.
사족으로, 후반부에 두 편의 단편 미스터리(‘무고한 죄인’, ‘뱀의 원’)가 수록돼있는데, 짧지만 임팩트도 강하고 다카기 아키미쓰의 매력을 훨씬 더 강렬하게 맛볼 수 있었습니다. 기회가 된다면 그의 미스터리 단편집을 꼭 읽어보고 싶은데, 2017년 ‘법정의 마녀’ 이후 7년 넘게 소식이 끊기긴 했지만 언젠가는 그의 작품이 한국에 또다시 소개되기를 기대해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