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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몰
미나토 가나에 지음, 김난주 옮김 / 재인 / 2024년 5월
평점 :
신인 각본가 가이 치히로는 유명세를 타고 있는 영화감독 하세베 가오리에게서 신작 각본에 대해 의논하고 싶다는 메일을 받고 깜짝 놀랍니다. 더구나 그 소재가 15년 전 고향 사사즈카초에서 벌어진 일가족 살해사건이란 사실에 궁금증이 더해졌지만, 실은 가오리 역시 그곳에서 3년 정도 살았으며, 그래서 그 사건을 영화로 조명하고 싶다는 설명을 듣곤 그녀의 신작에 전력을 다하기로 합니다. 그런데 자료조사를 하면 할수록 치히로는 혼란에 빠집니다. 새롭게 밝혀낼 진상이 없는 그 사건에 가오리가 집착하는 이유도, 영화로 만들려는 이유도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가오리는 그저 “알고 싶어서.”라는 모호한 말만 할뿐입니다. 한편 치히로는 일가족 살해사건과 비슷한 시기에 사고로 죽은 언니 치호를 떠올리며 착잡한 심경에 빠집니다.
미나토 가나에의 작품에 별 3.5개라는, 보기 드문 야박한 평점을 주긴 했지만, 그건 ‘일몰’이 함량이 부족한 작품이라거나 재미가 없어서가 아니라 서사나 스토리가 제 취향과 거리가 멀어 보였기 때문입니다. 인터넷서점에서 ‘일본소설’로만 분류돼서 미스터리 작품이 아니란 건 알고 있었지만 “일본의 어느 한적한 시골 마을을 강타한 전대미문의 살인 사건. 15년 전에 일어난 그 사건을 좇는 두 여성이 맞닥뜨린 진실은?”이라는 소개글 때문에 미나토 가나에 특유의 미스터리 서사를 조금은 맛볼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하고 읽은 건데, 분명 ‘살인사건의 진실을 찾아가는 이야기’는 맞지만, ‘일몰’은 두 여성 가오리와 치히로가 유년시절과 청소년시절에 겪은 깊은 상처와 정면으로 마주하는 이야기를 그린 ‘정통소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세계 유수 영화제에서 수상하며 일약 유명세를 타게 됐지만 하세베 가오리는 대중성 높은 상업영화와는 거리가 먼 감독입니다. 오히려 논픽션에 가까운 무거운 주제 - ‘자살한 자들의 마지막 한 시간’ - 를 그려내서 화제가 됐는데, 그녀는 ‘관객에게 보여주기 위함’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가 ‘알고 싶어서’ 영화를 만들었다는, 다소 선문답 같은 대답을 내놓은 바 있습니다. 그리고 어릴 적 잠시 살았던 사사즈카초에서 15년 전 벌어진 일가족 살해사건을 영화로 만들려고 하는 지금도 역시 같은 목적을 견지하고 있습니다.
반면 업계에 발을 들인 지 10년이 됐는데도 대작가의 조수 역할에 머물고 있는 신인 각본가 가이 치히로는 가오리와의 작업을 통해 제대로 된 각본가로 성공하겠다는 열망에 사로잡히지만, 시간이 갈수록 가오리의 목적을 이해하지 못해 당황합니다. 범인이 뒤바뀔 일도, 이미 알려진 것 외에 새롭게 드러날 일가족의 사연도 없는데 굳이 그 사건을 영화로 만드는 이유를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과연 가오리는 이 영화를 통해 무엇을 보여주고 싶은 건지, “알고 싶어서.”라는 가오리의 말 속엔 무슨 함의가 숨어있는 건지 치히로는 내내 답답할 뿐입니다.
“감독님은 그렇게까지 해서 뭘 알고 싶은데요? 그리고 알면, 그 다음에 뭐가 있는데요?”
“잘은 모르지만, 알지 않고는 앞으로 나아갈 수 없으니까요.” (p325)
인구 1만 5천 명 안팎의 작은 소도시 사사즈카초를 무대로 하고 있지만 ‘일몰’에는 가오리와 치히로를 둘러싼 여러 건의 죽음이 등장합니다. 가족, 친구, 좋아하는 사람을 비극적으로 떠나보냈던 가오리와 치히로는 보통사람들은 상상하기 어려운 큰 상처와 트라우마를 지닌 채 성장했고, 그것들은 지금도 현재진행형입니다. 그리고 두 사람이 영화 자료조사 차 여러 사람을 만나며 접하게 되는 정보들은 뜻밖의 진실을 알게 해주기도 하지만 동시에 상처와 트라우마를 더 고통스럽게 헤집기도 합니다. 그 지난한 과정들이 자신들을 따뜻한 구원으로 이어줄지, 더 가혹한 지옥에 밀어 넣을지 알 수 없는 상태에서 가오리와 치히로는 15년 전의 진실과 정면으로 마주하기로 결심하는 것입니다.
야박한 평점을 준 이유가 ‘서사나 스토리가 제 취향과 거리가 꽤 멀어 보였기 때문’이라고 앞서 밝혔는데, 저와는 반대로 미스터리에 대한 기대감 없이 ‘절망의 밑바닥을 경험한 사람들의 구원과 재생에 관한 이야기’라는 홍보 카피에 눈길이 끌리는 독자라면 별 5개도 모자랄 만큼 푹 빠져서 읽을 수 있는 매력적인 작품이기도 합니다. 만일 똑같은 이야기를 정통 미스터리 서사로 풀었다면 재미있게 읽긴 했겠지만 ‘일몰’ 특유의 묵직하고 깊은 여운을 만끽하기 어려웠을 거란 점은 저 역시 인정하기 때문입니다. 제 서평 때문에 조금이라도 선입관을 갖게 된 독자라면 다른 분들의 서평도 꼭 참고할 것을 권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