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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의 카르테
치넨 미키토 지음, 권남희 옮김 / ㈜소미미디어 / 2019년 9월
평점 :
품절
“판타지 소설이 아닌가 싶을 만큼 현실에서는 좀처럼 보기 어려운 수련의가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상냥하고 다정하고 온화한 성격으로, 환자의 마음에 입은 상처를 달래주고 치료하려고 애쓰는 병아리 의사 선생님이. 술술 넘어가는 책장, 줄줄 새어나오는 미소, 어쩌면 이렇게 착한 소설이 있을까.” (p269, ‘옮긴이의 말’ 중)
‘기도의 카르테’는 주인공 스와노 료타가 준세이 의과대학 부속병원에서 보낸 2년 동안의 수련의 생활을 연작단편 형식으로 그린 작품입니다. 스와노는 지도교수의 가르침 아래 정신과, 외과, 피부과, 소아청소년과, 순환기 내과를 돌며 환자들을 열심히 치료하는 수련의지만, 동시에 그 환자들이 품고 있는 내밀한 사연들을 포착하여 마음에 입은 상처까지 치료해주는 특별한 의사이기도 합니다.
툭하면 대량의 수면제를 먹고 스스로 구급차를 불러 실려 오는 여자, 완치가 확실한 간단한 수술법을 거부한 채 위험도 높은 개복수술을 요구하는 노인, 어떻게 봐도 수상할 뿐인 기묘한 화상을 입은 중년여자, 1년 전부터 천식 발작이 갑자기 심해진 소녀, 한때 아이돌 출신 배우로 이름을 날렸지만 지금은 치명적인 심장병 때문에 이식수술만 기다리고 있는 여자 등 스와노는 자신이 마주한 환자들에게서 다른 의사들은 알아채지 못한 특별한 사연과 비밀을 포착합니다. 정신없이 돌아가는 대학병원에서 의사가 한 사람의 환자에게 전력을 다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지만 스와노는 쪽잠과 휴식을 포기하면서까지 환자들이 감추려 하는 ‘뭔가’를 알아내기 위해 진심으로 열과 성을 다합니다.
스와노를 지도하는 각 과의 의사들은 그의 진심 어린 노력과 의사로서의 재능을 칭찬하면서도 정작 자신의 과에는 맞지 않는다며 손사래를 칩니다. 이유는 모두 똑같습니다. 환자 한 사람에게 전력을 다하는 스와노의 성격이 많은 환자들을 한꺼번에 돌봐야 하는 시급한 상황에는 잘 맞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옮긴이의 말’에서 스와노를 놓고 “현실에서는 좀처럼 보기 어려운 수련의”라고 표현한 건 바로 이런 캐릭터 때문입니다.
지금도 크게 바뀌지 않았겠지만 “5시간을 기다렸지만 의사와 만난 건 달랑 5분뿐”이라는 대형병원 환자들의 불만을 떠올리면 분명 스와노는 “이런 의사가 현실에 한 명이라도 있었으면...”이라는 바람을 갖게 만드는 판타지 소설 속 의사로 보입니다. 의료체계가 무너져버린 이즈음의 세상을 떠올려보면 스와노 같은 의사에 대한 간절함이 더욱 커질 수밖에 없는 게 사실인데, 그래선지 현직 의사인 치넨 미키토가 이 작품을 통해 말하려고 했던 바가 더욱 진정성 있게 느껴졌습니다.
뒤늦게 그 진가를 알아본 탓에 미처 못 읽었던 치넨 미키토의 작품들을 몰아서 읽는 중인데, 판타지와 라노벨 계열의 작품을 제외하곤 이제 거의 다 읽은 것 같습니다. 아직 한국에 소개되지 않은 그의 작품이 꽤 많은데, 2024년 안에 한두 편쯤은 신작 소식이 들려오기를 간절히 기대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