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변의 창 - 피의 노래
박성신 지음 / 북오션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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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신은 현대와 1960~70년대를 배경으로 가족의 비극과 시대의 문제를 정교한 미스터리로 풀어낸 3의 남자’(2017)로 처음 알게 됐는데, 재미와 완성도를 모두 갖춘 작품이라 후속작 소식을 기다렸지만 두 권의 앤솔로지 외엔 신작이 나오지 않아서 아쉬움이 남았던 작가입니다. 5년 만에 나온 새 작품이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한 역사물이라 다소 의외였지만, “실존인물 추남 남학을 소재로 한 충격적인 성형살인사건이라는 카피와 함께 피해자들의 얼굴을 잔혹하게 난도질한 연쇄살인사건을 다룬다고 해서 나름 기대감을 갖게 됐습니다.

기록에 따르면 남학은 난쟁이의 몸, 사자의 코, 늙은 양의 수염, 미친개의 눈, 닭발 같은 손을 지닌남자입니다. 하지만 그의 노래는 아름답고 영롱했으며, 여자 목소리까지 잘 내는 특별한 능력을 가졌다고 합니다. 작가는 이 남학이란 인물의 추한 외모와 아름다운 목소리에 착안하여 우정과 광기, 그리고 잔혹한 복수극의 주인공을 창조해냈습니다.

 

근친상간의 결과로 태어난 아기의 외모는 인간이라 할 수 없을 만큼 끔찍했습니다. 그저 괴물아이라 불리며 노파와 사냥꾼에게 이용당하다가 동굴에 버려진 아이는 11살 때 세상의 빛을 얻습니다. 또래인 양반 이수가 손을 내밀었고, 자신의 집에 살게 하며 황선이란 이름까지 지어주곤 사람에겐 귀천이 없으며, 우린 벗이다.”란 말과 함께 세상을 가르쳐줬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몇 년 후 이수는 한양으로 떠났고, 이후 황선은 또다시 괴물의 처지로 돌아가고 맙니다. 우여곡절 끝에 외모를 바꾸고 이름까지 남학으로 바꾼 황선은 한양에 도착해 이수를 만나지만 그는 자신을 못 알아보는 것은 물론 황선에 대해 아무 것도 기억하지 못합니다. 그날부터 남학은 자신의 특별한 능력을 이용하여 이수의 모든 것을 파멸시키기로 결심합니다.

 

결론부터 말하면, ‘3의 남자때문에 생긴 기대감이 너무 컸던 탓인지 300여 페이지에 불과한 분량을 읽는 동안 여러 번 한숨이 나올 정도로 실망스러운 작품이었습니다. 이야기 자체부터 질릴 만큼 봐온 퓨전 역사물의 플롯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문장은 소설다운 깊이나 진중함은 찾아볼 수 없었으며 시나리오의 지문마냥 불면 휙 날아갈 듯 한없이 가벼웠습니다. , 경어와 평어가 한 문장에 뒤섞이거나 줄 바꿈이 제대로 안 이뤄지기도 하고, 한참 전 날아간 비둘기가 갑자기 되돌아와 눈앞에서 피를 토하기도 하고, 능동태 자리에 수동태가 들어오는 등 여기저기서 디테일의 문제가 목격됐는데, 수두룩한 오타를 비롯한 무성의한 편집까지 가세한 탓에 실은 중간에 포기할 마음이 들었던 게 사실입니다. 다른 건 이해한다 쳐도 두 주인공의 캐릭터목표3의 남자에서 맛봤던 박성신의 필력과는 너무나도 거리가 멀었습니다.

 

우선 이야기의 핵심인 남학의 복수 자체가 전혀 공감을 얻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이수의 모든 걸 빼앗고 파멸시키겠다는 남학의 심정이 공감을 얻으려면 그만큼 이수에게 얻은 상처가 깊고 커야 되는데 실제론 별 일 아니듯 대수롭지 않게 그려질 뿐입니다. 뒤늦게 남학을 갖고 놀았던어린 시절 이수의 본심이 설명되긴 하지만 그 설명이 초반에 나왔더라도 남학의 복수심을 이해하는 데는 별 도움이 되지 않았을 거란 생각입니다.

또 하나는 과하게 설정된 남학의 초능력입니다. 그는 세상의 모든 소리를 흉내 낼 수 있는 것은 물론 목소리만으로 타인을 완벽히 통제할 수 있는데다 아주 먼 곳의 소리까지 들을 수 있습니다. 어린 시절 사냥꾼과 노승에게 배운 해체술과 의학지식 덕분에 뛰어난 외과의사의 능력까지 갖췄습니다. 판타지라고 해도 좀처럼 이입하기 어려울 정도로 과했다는 생각입니다.

마지막으로 이수를 향한 남학의 복수극이 뜬금없이 반역도당과 연결되는 설정인데, 안 그래도 설득력이 전혀 없던 그의 복수심이 반역으로까지 확장되는 대목은 결국 반역 외엔 달리 해법이 없는 퓨전사극의 폐해를 그대로 모방한 듯 보였습니다. 그나마 반역 시퀀스가 재미있었다면 몰라도, 막판 관군과 반역군의 대결 장면은 좀 심하게 말하면 거의 메모 수준이었습니다.

 

기대가 컸던 탓에 실망이 컸던 것도 사실이지만, 최대한 객관적으로 봐도 살변의 창은 주인공의 성격과 목표, 사건의 전개, 클라이맥스와 엔딩, 문장력과 편집 모두 부족함이 많아 보인 작품입니다. 부디 다음 작품에서는 3의 남자에서 만끽했던 박성신의 매력을 다시 한 번 맛볼 수 있기를 기대할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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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섯 번째 2월 29일
송경혁 지음 / 고즈넉이엔티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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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9일에 태어나 4년마다 생일을 맞이하는 수현. 20대 초반 전역한 그를 기다린 건 엄청난 빚과 간경화로 투병 중인 어머니뿐입니다. 불법 콜택시, 일명 콜때기로 호구지책을 마련하지만 수현은 미래를 생각할 겨를도, 더 이상 잃을 것도, 죽지 않을 이유도 없는 무의미한 삶을 살아갑니다. 생일인 229, 도박사이트를 통해 자신과 생일이 같은 현채를 알게 된 수현은 그녀와 함께 충동적으로 현금 수송차량을 탈취하기로 합니다. 하지만 뺑소니를 당한 경찰에게서 빼앗은 총을 갖고 있던 현채가 엉겁결에 은행원을 쏴 죽이고 맙니다. 급한 나머지 현금을 나눠가진 뒤 4년 후 자신들의 생일인 229일에 다시 만나기로 한 두 사람. 하지만 이후 229일은 수현에게 4년마다 되풀이되는 끔찍한 지옥도를 펼쳐 보입니다.

 

살아갈 이유조차 없지만 현실적인 이유로 돈이 필요한 수현과 평범하고 모자람 없어 보이지만 무슨 이유에선지 큰돈이 필요하다는 현채. 더구나 우연히 손에 넣은 총까지 지닌 두 사람이 아무 계획도 없이 충동적으로 현금 수송차량을 탈취하다가 은행원을 죽이는 대목까지만 해도 영원한 고전 보니&클라이드’(한국 개봉 제목은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와 비슷한 전개를 예상했던 게 사실입니다. 현금 탈취 4년 후 자신들의 생일날 다시 만난 두 사람이 두 번째 한탕을 저지르며 희대의 2인조로 진화하는 액션 스릴러의 향기가 물씬 풍겼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몇 차례의 4년이 흐르는 동안 수현과 현채는 초반엔 전혀 예상할 수 없었던 극적인 반전과 함께 피비린내와 긴장감이 작열하는 치명적인 관계가 되고 맙니다.

 

사실 여섯 번째 229은 서평을 쓰기가 참 난감한 작품입니다. 229일이 돌아올 때마다 점점 더 짙고 불온한 악의에 휩싸이는 수현과 현채의 비밀을 설명하지 않곤 초반 이후의 줄거리를 소개할 방법이 없는데, 대략 1/3쯤 공개되긴 하지만 제가 볼 땐 가장 강력한 스포일러라 함부로 언급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두 주인공이 어떤 종류의 갈등을 벌이는지, 각자 어느 방향으로 달려가는지, 궁극의 목표는 무엇인지조차 소개할 수 없으니 인상비평 수준의 다소 모호한 서평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하드보일드는 특성상 누아르와 결합하기 쉽지만, 언제나 누아르일 필요는 없다. 때로는 우리 주변에서 언제든 볼 수 있을 것 같은 범죄의 경계선에 선 사람들이 이야기의 주체일 때 건조함과 비극성이 극대화되기도 한다.”라는 출판사 소개글대로 수현과 현채는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존재들이지만 실은 과거도 미래도 온통 감당하기 힘든 비극으로 채워진 심연 같은 인물들이기도 합니다. 피할 수 없는 파국이 예정된 두 사람의 행보는 최대한 절제된, 그래서 오히려 독자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 하드보일드 스타일대로 묘사되는데, 특히 어딘가 공감 능력이 결여된 듯한 수현의 캐릭터와 차분한 미소와 낮은 목소리 속에 섬뜩한 냉기를 품고 있는 현채의 캐릭터는 작가가 구사하는 건조한 문장들 속에서 더욱 빛을 발하게 됩니다.

 

수현과 현채의 잔혹한 이야기는 다섯 번의 229, 그러니까 16년에 걸쳐 느리지만 위험하게 끓어오르다가 극적으로 폭발합니다. 그리고 두 사람이 함께 맞이하는 여섯 번째 229일은 독자에게 그 누구도 원망할 수 없는, 그 누구도 편들어 줄 수 없는 복잡한 감정을 선사합니다. 그야말로 제대로 된 하드보일드 스타일 엔딩이라고 할까요?

 

이 작품은 송경혁의 첫 장편이라고 합니다. 고즈넉이엔티의 케이스릴러 시리즈를 통해 앞으로의 활약이 기대되는 신인작가들을 여럿 만났는데, 송경혁 역시 다음 작품이 기다려지는 대단한 유망주라는 생각입니다. 앞으로도 하드보일드 혹은 누아르 스타일을 고수할지는 모르겠지만, 개인적으론 좀더 그쪽으로 파고들어 자신의 강점을 살렸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영화로 만들어져도 매력적일 여섯 번째 229이 많은 독자들과 만날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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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험한 장난감 케이 미스터리 k_mystery
박상민 지음 / 몽실북스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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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면부족은 기본이고 비인간적인 초과근무에 대학병원 내 모든 직종의 이나 다름없는 신세라 공공연히 최하층 계급으로 불리는 인턴. 장래 정형외과 의사를 꿈꾸는 명성대학병원 인턴 강석호는 오로지 레지던트 합격을 위해 오늘도 지옥 같은 인턴 생활을 견디는 중입니다. 하지만 갑작스레 병세가 악화되어 사망한 두 환자의 죽음에 책임이 있다며 징계위원회에 회부되고, 이어 업무상 과실치사 혐의로 경찰 수사를 받는 것은 물론 인턴 자격을 박탈당할 수도 있다는 통보를 받곤 패닉 상태에 빠집니다. 두 환자의 죽음이 자신의 실수 탓이 아니란 걸 입증할 수 있는 시간은 24시간도 채 남지 않은 상황. 강석호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조사에 나서지만 그 과정에서 괴물과도 같은 대학병원의 민낯과 마주치게 됩니다.

 

개인적으로 가이도 다케루의 메디컬 엔터테인먼트 미스터리 다구치-시라토리 시리즈를 무척 좋아합니다. 도조대학병원을 무대로 펼쳐지는 흥미진진한 이야기는 메디컬 스토리의 미덕과 미스터리의 강점을 두루 갖추고 있어서 첫 편인 바티스타 수술 팀의 영광이후 한 편도 빠지지 않고 읽어왔습니다.

위험한 장난감에 눈길이 갔던 건 무엇보다 메디컬 엔터테인먼트 미스터리라는 홍보 카피 때문인데, 가이도 다케루의 다구치-시라토리 시리즈에 대한 오마주로 보이기도 했고, 또 그 작품들에 맞먹겠다는 자신감이 엿보이기도 했습니다. 대학병원이라는 무대까지 닮은꼴이라 더 기대감이 들었는데, 드라마나 소설로 많이 봐온 일본 대학병원에 비해 정작 그 내부 사정을 잘 모르는 한국 대학병원의 속살을 들여다볼 기회가 될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그야말로 인생 자체가 개고생인 인턴 강석호는 하루아침에 자신의 모든 것을 잃을 위기에 처합니다. 두 환자의 죽음의 책임을 지고 그동안 쌓아온 것들과 다가올 미래를 통째로 내놓게 됐기 때문입니다. 적어도 한 명의 환자에 관한 한 자신의 책임이 아님을 확신한 강석호는 순진하게도 인간의 양심을 믿어보지만 바보 취급을 당하거나 미안하지만 도와줄 수 없다.”는 냉정한 대답만 듣고 맙니다. 징계위원회까지 24시간도 채 안 남은 상태에서 강석호는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두 환자의 죽음의 진상을 알아내기 위해 분투합니다. 사망자가 발생한 병실의 환자들을 탐문하고, 몰래 시신 안치실에 잠입하고, 사망자들의 기록을 열람했던 의료진 명단을 입수하는 등 물러설 곳 없는 각오로 조사를 하면서도, 한편으론 자신의 실수를 덮기 위해 엉뚱한 희생양을 찾는 탐정 놀이를 하고 있는 건 아닌지 자괴감에 빠지기도 합니다.

 

복잡한 의학용어들이 난무하지만 이야기의 흐름을 따라가는 데는 큰 무리가 없습니다. 교수, 레지던트, 간호사, 사무직 등 인턴을 으로 아는 대학병원 내의 인간관계도 흥미롭습니다. 자칫 의사로서의 인생을 종치게 될지도 모를 강석호의 진실 찾기는 피를 말리는 시간제한 설정 속에 팽팽한 긴장감을 놓치지 않습니다.

하지만 결정적인 대목에서 미스터리가 힘을 잃은 건 무척 아쉬웠습니다. 범인의 동기는 억지에 가까울 정도로 설득력이 없었는데, 앞서 그럴 만한 정황이나 밑밥이 뿌려진 적이 없다보니 그 사람들이 그런 관계였어?”라는 허망한 의문이 들 수밖에 없었습니다. 범인 입장에서 살인으로 인해 얻을 것이 별로 없다는 점도 의아한 대목입니다. 범행수법들 역시 설정을 위한 설정’, 즉 새롭고 기발한 방법을 고민하다가 오히려 사실감을 놓쳤다는 생각인데, 그중 한 가지 방법은 허술하고 들통 날 여지가 너무 많아서 범인의 수준을 훅 떨어뜨리고 말았습니다.

 

가이도 다케루의 다구치-시라토리 시리즈에서 가장 매력적인 대목은 대학병원 내의 치열하고 잔인한 권력구도입니다. 미스터리의 힘을 몇 배는 더 강렬하게 만드는 불쏘시개 역할 역시 그 권력구도입니다. ‘위험한 장난감은 분명 그 권력구도를 밑바탕에 깔아두고 있지만 정작 이야기의 몸통에선 그 부분이 제대로 묘사되지 않았습니다. 즉 최하층 계급이자 모두의 밥인 강석호의 수난사와 고군분투기가 대부분이라 뒤늦게 권력구도를 강조한 클라이맥스와 엔딩이 힘을 얻지 못한 것입니다. 에필로그와 작가의 말을 보면 강석호 시리즈가 계속 이어질 것 같은데, 후속작에서는 밑바탕과 몸통의 조화가 좀더 잘 이루어졌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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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자의 쇼핑목록 네오픽션 ON시리즈 2
강지영 지음 / 네오픽션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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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자의 쇼핑목록다섯 번째로 만난 강지영의 작품입니다. 제목만 보면 장편 살인자의 쇼핑몰의 후속작으로 오해하기 쉽지만, 표제작 살인자의 쇼핑목록을 포함하여 모두 7편의 작품이 수록된 단편집입니다.

 

영수증 속 쇼핑목록을 근거로 엽기적인 연쇄살인마를 뒤쫓는 프로관찰러마트 캐셔, 향낭 주머니를 매개로 귀신들과 접촉하다가 위기에 빠지는 교수, 게임 속 캐릭터가 죽으면 그만큼의 현실 속 사람들이 사라진다는 도시전설, 태어나 100일이 되기 전까지 전생의 기억을 간직할 수 있다는 판타지, 타고난 사이코패스 기질을 더욱 무시무시하게 진화시키는 괴물, 그리고 마을의 결계를 하나둘씩 무너뜨리며 죽음의 그림자를 드리우는 염병귀신 등 미스터리, 스릴러, 호러, 판타지를 넘나드는 다양한 작품들이 수록돼있습니다.

 

다섯 번째 만남이긴 하지만 개인적으론 강지영과 처음 만났던 단편집 개들이 식사할 시간이 가장 인상 깊은 작품입니다. 당시 서평에 편혜영의 아오이 가든이나 히라야마 유메아키의 남의 일’, 오츠이치의 ‘ZOO’ 등이 생각나곤 했다.”라고 적을 정도로 흥미로운 불쾌감을 만끽했기 때문인데, ‘살인자의 쇼핑목록은 그에 못잖은 매력적인 이야기들을 담고 있습니다. 물론 수위나 기괴함에 있어선 개들이 식사할 시간이 압도적인 게 사실이지만, 이 단편집에 실린 7편의 작품 역시 잘 차려진 고급 뷔페처럼 오감을 자극하는 강렬한 맛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표제작인 살인자의 쇼핑목록과 귀신호러물 데우스 엑스 마키나’, ‘전설의 고향을 떠올리게 하는 각시는 단편영화나 단막극으로 만들어진다면 원작 못잖게 서늘한 공포를 발산할 작품들이라 영상화가 기대되기도 합니다.

 

그동안 읽은 작품들에게 준 평점이 2.5개에서 4.5개에 이를 정도로 개인적인 호불호가 심하긴 하지만, 두 편의 단편집에 유독 높은 평점을 준 건 한국 장르물에서 보기 드물 정도로 뛰어난 강지영의 상상력 때문입니다. 타고난 이야기꾼이기도 하지만 발상 자체가 차원이 다르다 보니 어떤 작품이든 초반부터 옆구리를 찔린 듯한 인상을 받게 되는데, 단지 뛰어난 발상에 머물지 않고 그것을 긴장감과 속도감을 갖춘 이야기 속에 잘 녹여내는 건 강지영만의 특별한 매력이라는 생각입니다. 덧붙이자면, 형식의 힘, 즉 단편이기에 그 매력이 더욱 빛난 게 아닐까 생각되는데, 그래선지 다음에 만나게 될 새 작품 역시 장편보다는 단편집이기를 더 기대하게 됩니다. 욕심을 부리자면 개들이 식사할 시간살인자의 쇼핑목록보다 조금 더 독하고 센 이야기라면 바랄 나위가 없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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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질긴 족쇄, 가장 지긋지긋한 족속, 가족 새소설 11
류현재 지음 / 자음과모음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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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부부가 사체로 발견되고 자식 중 한 명이 자수를 하지만, 다른 자식은 범인이 또 다른 자식이라고 주장하여 경찰을 당혹스럽게 만듭니다. 김영춘과 이정숙 부부에겐 4남매가 있습니다. 부모의 기대대로 잘 성장해서 교사가 된 맏딸 김인경과 대학병원 의사가 된 장남 김현창, 그리고 아픈 손가락 같은 차녀 김은희와 막내아들 김현기가 그들입니다. 여섯 식구에게 출구 없는 비극이 시작된 건 몇 년 전 어머니 이정숙이 쓰러지고부터입니다. 이혼한 차녀 김은희가 요양원을 거부하는 부모를 모시기 시작했고, 장남과 장녀는 자신들의 사정 때문에 점차 부모와 거리를 두기 시작합니다. 늘 모진 소리만 듣고 자란 막내는 아예 집을 나가버렸고, 그 뒤로 단란했던 한때를 구가했던 마당 딸린 2층집은 증오와 탄식만 남고 맙니다.

 

너무 노골적이어서 눈길을 끄는 제목입니다. 하지만 동시에 누군가에겐 딱 내 얘기네!”라며 가슴을 철렁하게 만드는 제목이기도 합니다. 다소 극단적인 제목과 스토리를 담고 있지만 알고 보면 자신의 가족을 질기고 지긋지긋한 족쇄로 여기는 사람들은 주변에 의외로 많을지도 모릅니다. 이 작품처럼 노부모 간병이 도화선이 되어 온 식구가 서로에게 날선 감정을 폭발시키는 경우도 있고, 그 외에도 수많은 이유로 부부, 부모자식, 형제자매가 어느 한쪽이 항복하기 전에는 절대 끝나지 않을 무자비한 전쟁을 벌입니다. 하지만 가족 간의 갈등은 깨진 유리마냥 봉합 자체가 불가능하기에 어느 한쪽이 항복해도 원상복구가 불가능한 게 사실입니다.

 

각 챕터의 제목이 네 명의 자식과 부모의 이름으로 돼있는데서 알 수 있듯 이들에겐 가족에게도 털어놓을 수 없는 각자의 비밀과 속내가 있습니다. 자식들은 부모를 향해 내 엄마만 아니었으면, 내 아버지만 아니었으면, 이혼으로 끝낼 수 있는 관계였으면 벌써 몇 번은 했을 거야.”라고, 형제자매를 향해선 핏줄이라는 말은 사기다. 진짜 피로 연결되어 있지도 않은데, 연결된 것 같은 착각을 하게 하니까.”라고, 또 부모는 자식들을 향해 어떻게 부모가 자식 잘못되는 걸 그냥 보고만 있어?”라고 토로합니다.

각자 불가피하고 정당한 사연들을 갖고 있는 탓에 모두 가해자이자 동시에 피해자이기도 한 그들은 차라리 남이었다면 봉합이든 결별이든 선택지를 고를 수 있었겠지만, 가족이기에 끝장외엔 달리 선택지가 없습니다. 버릴 수도, 끊을 수도 없는 관계인 탓에 오로지 죽거나 사라지는 것만이 유일한 해결책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노부부의 죽음은 4남매에게는 비극이자 구원입니다. 절대 일어나선 안 될 일이었지만, 동시에 누군가 확 저질러주길 바랐던 일이기도 합니다. 자수를 한 자식, 결백을 주장하는 자식, 다른 자식을 고발하는 자식이 등장하면서 김영춘 일가의 비극은 부부가 죽은 뒤에도 결코 마무리되지 않습니다.

 

독자의 반응은 우리보단 낫네.”, “우리랑 똑같아!”, “저러고 어떻게 사냐?” 등 세 가지 중 하나일 것입니다. 아마도 다소 극단적인 김영춘 일가의 불행을 지켜보며 위안을 받는 경우가 가장 많을 것 같은데, 작가 역시 당신만 이기적이어서 그런 게 아니라고, 당신네 가족만 이상해서 그런 게 아니라고 따뜻한 위로의 말을 전하고 싶다.”는 작의를 밝히기도 했습니다.

막판에 누가 범인인가?”를 밝히는 미스터리가 전개되긴 하지만, 이 작품의 뼈대는 그리 새롭거나 특별하진 않은 지저분하고 꼴사나운 가족의 전쟁에 불과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느 막장 드라마와는 다른 묵직한 여운을 남기는 건 그만큼 생생하고 현실감 있는 설정들 때문입니다. 이미 시작된 고령화 사회, 더욱 팽배해지는 개인주의, 간병살인을 비롯하여 나날이 늘어가는 가족 대상 범죄 등 한국사회가 안고 있는 여러 가지 문제들이 김영춘 일가의 비극 곳곳에 잘 녹아있다는 뜻입니다. 나와는 거리가 먼 이야기, 나에게 닥치려면 아직 먼 이야기라며 외면하고 싶겠지만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예방주사 차원에서라도 생생하고 현실감 가득한 이 이야기를 한번쯤은 읽어봐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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