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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계산장의 재판 - 대한민국 스토리공모대전 우수상 수상작 ㅣ 케이스릴러
박은우 지음 / 고즈넉이엔티 / 2017년 10월
평점 :
10월 말의 어느 밤. 경찰에 이상한 신고 전화가 줄을 잇는다.
자신의 딸이, 아들이, 친구가, 혹은 그 자신이 청계산의 어느 산장에서 인질이 되었다는 것.
경찰에 인질극 신고가 접수됨과 동시에 언론에도 같은 정보가 들어간다.
언론과 SNS로 시시각각 퍼져나가는 인질사건의 내막.
누군가 인질범의 총에 맞아 쓰러졌으며, 산장에는 3~40명의 남녀가 갇혀 있다.
경찰은 인질범과 첫 번째 통화에 성공하지만, 그에게서 얻어낼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경찰이 현장 정리를 채 끝내기도 전에 취재 차량들이 몰려오고,
산장에서 벌어졌던 파티는 마약과 섹스가 난무하는 비윤리적인 가면 파티였다는 게 밝혀진다.
인질사건의 주범인 ‘마스터’. 그가 인질극으로 정말 얻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가?
(출판사의 소개글을 일부 편집, 인용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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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과 출판사의 소개글만 봐도 일단 ‘개인의 복수’를 다룬 작품이란 걸 쉽게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인질들이 3~40명이나 되며, 가족과 언론에게 자신들의 상황을 알릴 수 있었다는 점,
그로 인해 복수극의 주범이 외진 산장에서 경찰에게 꼼짝없이 포위됐다는 점 등을 보면
흔히 봐온 일반적인 ‘개인의 복수’와는 뭔가 다른 위화감이 느껴지게 됩니다.
보통은 아주 조심스럽게, 철저한 준비와 설계 끝에 은밀하게 진행되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제목에 ‘재판’이란 말까지 들어가 있는 걸 보면
어쩌면 이 인질극은 처음부터 대중에게 공개할 의도가 있었던 것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특히 산장에 모인 이들의 목적이 ‘마약과 섹스가 난무하는 비윤리적인 가면 파티’였다는 점은
대략 인질범과 인질들 사이의 관계나 사연을 가늠하게 하는 대목이기도 합니다.
사방에 스포일러가 널려있는 작품이라 더 이상 내용을 소개하기도 어렵고,
결국 두루뭉술한 인상비평 이상의 서평을 쓰기가 어렵지만
간단하게 이 작품의 미덕과 아쉬운 점을 정리해보겠습니다.
우선, 페이지가 무척 잘 넘어갑니다.
메인 스토리와 무관해 보이는 프롤로그와 후반의 회상 장면을 제외하곤
대부분 시간순서대로 이야기가 흘러가고, 전개 역시 통상적인 인질극에서 벗어나지 못하지만,
불필요한 구석 없이 간결하고 탄탄한 문장들이 눈에 쏙쏙 잘 들어오고,
긴장감을 고조시키기 위한 크고 작은 장치들이 잘 배치돼있어서 금세 읽히는 작품입니다.
외진 산장에서 인질 재판을 통해 사적 복수를 벌인다는 기본 설정도 비교적 단순하고,
인질극을 벌이게 된 최초의 계기 역시 미스터리 소재로선 그리 새롭지 않지만,
‘범행 준비 - 실행 과정 – 완벽한 마무리’의 과정이 복잡하면서도 빈틈없이 촘촘하고 정교해서
단선적이거나 지루하긴커녕 초반의 의문 – 이 분량을 뭘로 다 채우나? - 을 무색하게 만듭니다.
그 외에도, 앞서 깔아놓은 복선이나 단서들은 남김없이 깔끔하게 잘 회수됐고,
어딘가 위화감이 들었던 대목은 반드시 그만한 이유가 있었음이 나중에 선명하게 설명됩니다.
우연까지 내다본 범인의 치밀한 계획도, 그 계획을 간파하는 경찰의 뛰어난 추리도
독자들의 뒤통수를 (세진 않아도) 여러 차례 기분 좋게 두드려대곤 합니다.
또, 범인, 인질, 가족, 경찰, 언론 등 꽤 많은 인물이 등장하지만 캐릭터와 역할이 선명해서
크게 혼란스럽지도 않을뿐더러 작가가 하고 싶은 말을 적절히 분배받았다는 느낌입니다.
이런 장점들에도 불구하고 한 가지 결정적인 아쉬움 때문에 별 5개를 주지 못했는데,
그것은 ‘너무 완벽해서 오히려 현실감을 증발시킨 범인의 무한 능력’입니다.
사실, ‘개인의 복수’라는 소재가 독자들에게 어필하는 가장 큰 미덕은 현실감입니다.
법 집행은 말할 것도 없고 진실을 찾기 위한 그 어떤 행위도 허용받지 못하는 평범한 개인이
온갖 위험과 고비를 무릅쓰고 진실을 알아낸 뒤 자기만의 정의를 구현하는 과정은
누가 봐도 그럴 듯한 리얼리티를 담고 있어야 공감의 폭이 커지는 법인데,
이 작품의 범인은 (좀 과한 비유지만) 거의 ‘MI6의 톰 크루즈’에 버금가는 캐릭터에,
독자의 뒤통수를 치는 클라이맥스에서는 할리우드 액션물의 기시감까지 불러일으킵니다.
그러다 보니 “나 같은 사람은 범인과 같은 처지에 놓여도 복수는 꿈도 못 꾸겠군.”이라는,
즉, ‘허황된 남의 이야기’란 위화감과 비현실감 같은 개운치 않은 뒷맛이 남게 됐습니다.
말하자면 ‘개인의 복수’라는 소재의 가장 큰 미덕이 막판에 힘을 잃었다고 할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뛰어난 스토리텔러 한 명을 만난 반가움은 충분히 컸습니다.
2017년에 처음 만난 박성신(제3의 남자), 도선우(저스티스맨), 김희재(소실점) 등과 함께
후속작이 기대되는 한국작가 목록에 반드시 올려놓아야 할 이름이란 생각입니다.
어쩌면 이 작품은 소설보다 영상으로 만들어졌을 때 진가를 발휘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콘텐츠진흥원 스토리공모대전 수상작이니만큼 곧 영상화 소식이 들릴 수도 있을 텐데
스크린에서 ‘청계산장의 재판’을 보게 되기를 기대해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