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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자요, 엄마
서미애 지음 / 엘릭시르 / 2018년 10월
평점 :
모든 인터뷰를 거절하고 침묵하던 희대의 연쇄살인범 이병도.
사형수로 수감 중인 그는 일면식도 없는 범죄심리학자 선경을 지목하며 면담을 요청한다.
선경은 그가 자신을 어떻게 아는지, 왜 자신을 지목해 인터뷰를 허락했는지 의문을 가진다.
한편, 또 한 명의 낯선 사람이 선경의 삶에 끼어든다.
갑작스러운 화재 사고로 오갈 데가 없어진, 남편이 데려온 전처의 딸 하영.
선경은 첫날부터 보이지 않는 신경전을 벌이게 되자 하영의 존재가 부담스러워지는데...
(출판사의 소개글을 일부 수정, 인용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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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장인물 설명 중 약간 상세한 소개가 포함돼있습니다.)
이 작품은 신간이 아니라 개정판으로, 당초 2010년(노블마인)에 처음 출간됐던 작품입니다.
작가 후기를 보면 단순 개정판이 아니라 시리즈를 염두에 둔 ‘새 출발’이란 뜻이 담겨있는데,
독자들이 이 작품의 뒷이야기를 너무 궁금히 여긴 탓도 있고,
“거듭 읽다 보니 나도 뒷이야기를 쓰고 싶어졌다.”는 작가의 의지도 가세한 것으로 보입니다.
내년(2019년)에 후속작이 나올 예정이라니 벌써부터 기대가 되기도 합니다.
서미애의 팬이라면 ‘잘 자요, 엄마’가 지독히 역설적인 제목이란 점을 진작 눈치 챌 것입니다.
책을 읽기도 전에 꽤나 비극적인 모자 혹은 모녀 관계가 등장할 게 분명하고,
‘엄마’라는 캐릭터가 따뜻함이나 모성애라는 의미보다는
그와는 정반대로 악마 또는 비극의 산실 역할을 맡을 거란 점도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주인공은 대학에서 범죄심리학을 가르치는 이선경입니다.
어느 날, 그녀에게 감당하기 어려운 두 개의 미션이 동시에 부여됩니다.
하나는 참혹한 연쇄살인마 이병도의 뜻밖의 요청으로 그와 면담을 진행해야 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남편과 전처 사이에 태어난 하영이라는 11살 소녀를 떠맡게 된 일입니다.
이선경은 이병도와의 면담을 통해 그의 악마성의 근원이 어머니의 오랜 학대임을 간파합니다.
또, 남편이 데려온 하영 역시 친모로부터 지독한 학대를 받아왔음을 눈치 챕니다.
특히 11살 소녀라는 외피에 어울리지 않는 공격성과 잔혹성을 지닌 하영을 지켜보며
이선경은 자기도 모르게 연쇄살인마 이병도와 하영을 동일선상에 놓기에 이릅니다.
이야기는 ‘이병도 면담’과 ‘하영과의 동거’ 등 크게 두 갈래로 전개됩니다.
말하자면 ‘완성된 소시오패스’와 ‘첫 걸음을 뗀 소시오패스’의 이야기인 셈입니다.
‘학대 엄마’는 두 소시오패스의 공통점이자, 악마성의 근원지로 설정됩니다.
두 소시오패스의 이야기는 별개의 이야기처럼 전개되며 위기감을 고조시키다가
막판에 이르러 예상치도 못한 방식으로 한데 합쳐집니다.
사건보다는 이선경-이병도-하영의 불안정하고 시한폭탄 같은 심리에 방점을 둔 작품이라
미스터리라기보다 심리스릴러로 보는 게 맞다는 생각입니다.
달리 이야기하면, 설정은 꽤 센데 이야기는 상대적으로 지루하게 읽힐 수도 있다는 뜻입니다.
실제로 이병도와의 면담은 그의 ‘고백과 회상’에만 의존할 뿐 특별한 사건을 일으키지 못했고,
하영과의 동거는 대체로 상투적인 전개를 벗어나지 못한 게 사실입니다.
또, 전체적인 이야기의 흐름이나 엔딩 직전의 클라이맥스 모두 다소 예측한대로 흘러가서
초반의 강렬한 설정에 비해 살짝 맥이 빠지는 게 아닌가, 걱정이 되기도 했는데,
이 모든 아쉬움과 걱정은 막판 몇 페이지의 엔딩에서 모조리 전복되고 맙니다.
2010년에 출간됐던 초판을 읽은 독자들이 후속작을 줄기차게 요구한 이유도
이 전복적인 엔딩을 읽고 나면 100%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게 됩니다.
이 작품이 딱히 “연쇄살인범은 타고 나는가, 만들어지는가?”라는 질문에 집착한 건 아니지만
아무래도 두 소시오패스 캐릭터가 등장하다 보니 그 문제가 자주 거론되긴 합니다.
“서른 넘어 갑자기 살인마가 되는 경우는 없다.”라는 대사를 쓴 점이나
작가가 두 소시오패스에게 공히 ‘학대 엄마’라는 외부요인의 영향을 설정한 걸 보면
‘연쇄살인범은 만들어지는 것이며, 주변의 노력에 따라 피할 수 있는 재앙’으로 본 것 같은데,
워낙 논란이 있는 주제라서 독자에 따라 의견이 갈릴 수는 있지만
작가는 캐릭터와 스토리를 통해 충분히 자신의 주장을 설득력 있게 펼쳤다는 생각입니다.
다만, 때론 ‘학대로 인한 인간의 내적 파괴’가 당연한 인과관계처럼 설정된 점은
다소 작위적으로 보이기도 했고 읽는 내내 목에 걸린 가시처럼 불편해 보이기도 했습니다.
특히 이병도와 하영을 데칼코마니처럼 그린 점은 극적이긴 해도 위화감이 들기도 했습니다.
또, “선경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기에 두 완벽한 소시오패스를 한꺼번에 만난 걸까?”라는,
조금은 지나쳐 보였던 운명적 우연은 비극의 무게감을 감소시킨 부작용이었다는 생각입니다.
사실, 서미애는 ‘아린의 시선’, ‘당신의 별이 사라지던 밤’에 이어 겨우 세 번째 만난 셈인데,
읽은 작품마다 생생한 캐릭터와 완결성이 돋보이는 이야기 때문에 푹 빠져들곤 했습니다.
이번에도 첫 페이지를 연 뒤 단숨에 마지막 페이지까지 완독했는데,
그녀의 두 번째 장편임에도 믿고 읽는 작가 서미애의 힘이 잘 배어있었던 것 같습니다.
내년에 출간될 이 작품의 후속작 소식이 하루빨리 들려왔으면 하는 바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