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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백한 말
최민호 지음 / 황금가지 / 2018년 1월
평점 :
대체로 출판사의 소개글은 크든 작든 과장이 들어가기 마련인데
‘창백한 말’의 경우 그런 과장이 전혀 느껴지지 않은 작품이었습니다.
물론 이런저런 수식어가 들어가긴 했지만 개인적으로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내용이었고,
결과적으로 다 읽은 뒤의 만족도가 그만큼 높았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ZA(Zombie Apocalypse) 문학공모전’에서 6회 만에 장편으로서는 처음 당선작에 오른..”
“좀비라는 소재와 사회적 메시지를 스릴러 전개 속에 잘 담아낸...”
“때로는 사회파 소설을, 때로는 첩보 스릴러를 연상하게 하는 빠르고 강렬한 전개”
여느 좀비물과 달리 ‘창백한 말’의 공간적 배경은 무척 독특합니다.
좀비 바이러스는 이미 26년 전에 출몰했지만 한국에는 여전히 사람들과 시체들이 공존합니다.
사람들은 ‘면역자’와 ‘보유자’로 구분되는데,
면역자가 건강한 신체와 사회적 권력을 향유한 채 (서울) 북쪽의 안전지대에서 살아간다면,
보유자는 시체가 되지 않기 위해 매일 바이러스 억제제를 먹어야만 하는 것은 물론
사회적으로도 하층에 위치한 약자들이며 대부분 남쪽과 지방에 살고 있습니다.
남쪽과 북쪽을 가로지른 엄청난 장벽은 1차적으로는 시체들의 공격을 막는 기능을 하지만
실제로는 면역자와 보유자를 갈라놓는 사회적 장벽이기도 합니다.
이런 배경 하에 몇몇 인물들이 극적인 사건에 휘말리게 됩니다.
바이러스 억제제를 생산하는 구인제약 하청공장에서 해고된 뒤
생활고로 인해 억제제를 구하지 못한 나머지 딸의 죽음을 지켜봐야만 했던 보유자 김수진,
윗사람의 눈에 들어야만 얻을 수 있는 (시체들의 위협에서 100% 안전한) ‘섬’ 거주권을 위해
무슨 짓이든 서슴지 않는 구인제약 하청공장의 사장이자 면역자 진석호,
그리고 구인제약의 비리를 캐던 동생이 불법 시체게임장에서 살해되자
그 진실을 알아내기 위해 백방으로 애를 쓰는 전직 군인 박세영이 그들입니다.
딱히 좀비물을 좋아하는 취향은 아니지만 책이든 영화든 좀비를 다룬 작품 가운데
‘창백한 말’만큼 현실감 있게 다가온 작품은 드물었습니다.
좀비가 등장하기만 하면 도시든 국가든 절멸의 운명에 처하는 것으로 그려지곤 했는데
이 작품 속 한국은 나름 시체와 공존하며 균형감(?)있는 체제유지에 성공한 상태입니다.
26년에 걸쳐 다져진 체제는 면역자와 보유자라는 새로운 계급을 탄생시켰고,
장벽 너머에서 시체들에게 무참히 물어뜯긴 보유자들이 새로운 시체로 전락하는 사이
장벽 반대편에서는 천하태평인 면역자들이 문명의 이기를 누리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훌륭한 유전자 덕분에 억제제 없이도 건강한 삶을 보장받은 면역자와
비싼 억제제 없이는 언제라도 바이러스에게 먹힐 수 있는 비참한 신세의 보유자의 격차는
빈부, 의료, 복지, 인권 등 모든 면에서 까마득할 정도로 벌어져있으며,
그 격차는 결국 삶과 죽음을 갈라놓는 단순하고도 명쾌한 기준이 돼버렸습니다.
이런 설정은 ‘좀비의 공격 앞에 만인은 평등하다’는 공식을 넘어선 특별한 힘을 발산했고,
인물들이 겪는 위기와 고민, 갈등과 협력, 삶과 죽음을
먼 나라 이야기가 아닌 피부에 와 닿는 현실감 충만한 이야기로 만들어줍니다.
얼마 전 본 영화 ‘월드 워 Z’에도 이런 비슷한 상황이 살짝 전개되긴 하지만,
‘창백한 말’의 압도적인 리얼리티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다는 생각입니다.
각 인물들이 지닌 리얼리티도 굉장히 생생했는데,
각각 딸과 동생을 잃은 채 구인제약이라는 괴물에 맞서는 김수진이나 박세영도,
자신과 가족들의 안전을 위해 무슨 짓이든 서슴지 않는 진석호도,
또 바이러스가 지배한 세상에서 제정신을 잃고 폭주하는 크고 작은 조연들도
각자 자신만의 정의와 생존을 위해 나름 제대로 분투하고 있어서
단순한 선악 이분법으로만 나눠서 평가할 수 없는 인물들입니다.
물론 대부분의 인물이 ‘평범한 일반인’이 아니라 나름 특별한 이력과 과거를 지닌 탓에
다소 작위적이란 느낌이 들긴 하지만 스토리의 힘으로 충분히 상쇄될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그리 길지 않은 분량임에도 중반부에 약간 늘어지는 대목이 있었는데,
더 이상 새로울 게 없는 좀비물의 상투성을 완전히 피하지 못한 탓으로 보입니다.
(별 1개가 빠진 건 좀비물에 대한 개인적인 취향과 이 대목의 느슨함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클라이맥스를 지나면서 상투성은 사라지고 예상외의 전개가 이뤄지는데
특히 마지막 50페이지는 분노, 동정, 안쓰러움 등 여러 감정을 뒤섞이게 만들면서
영화 ‘월드 워 Z’의 허망하고 억지스런 해피엔딩과는 급이 다른 현실감을 느끼게 만듭니다.
적잖은 제작비가 들겠지만 ‘창백한 말’이 영상으로 만들어진다면
‘부산행’ 못잖은 매력을 발휘할 것 같다는 기대를 하게 됩니다.
(전부는 아니라도) 공포 자체에 방점이 찍힌 ‘부산행’의 시체들과 달리
‘창백한 말’의 시체들은 묵직한 사회적 메시지까지 함께 던져주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