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리 들판에서
리스 보엔 지음, 정서진 옮김 / 피니스아프리카에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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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 공습에 이어 독일군의 본토 공격이 임박했다는 소식에 영국 전역이 공포에 사로잡혀 있던 1941. 런던 근교 켄트의 대저택 팔리 플레이스의 웨스트햄 백작 가문은 하늘에서 떨어진 난데없는 의문의 시체 때문에 혼란에 빠집니다. 일련의 조사 끝에 모종의 목적을 갖고 침투하려던 독일 스파이라는 의혹이 제기됐기 때문입니다.

어릴 때부터 웨스트햄 백작의 3녀인 패멀라를 흠모해온 MI5(영국 정보국) 요원 벤 크로스웰은 상부로부터 이 수상한 시체가 접선하려던 자가 누군지 비밀리에 조사하라는 지시를 받습니다. 한편 암호해독 기관에서 근무하는 패멀라는 우여곡절 끝에 고향에 내려와 벤 크로스웰의 조사에 동참하게 되는데 그 과정에서 스파이의 정체와 목적을 알아내곤 큰 충격에 빠집니다.

 

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영국을 배경으로 한 독특한 역사 미스터리 첩보물입니다. 간단하게 요약하면 팔리 저택과 인근에 거주하는 인물들 가운데 스파이와 접선하려던 자, 즉 나치 독일에 협조하는 배신자를 찾아내는 이야기인데, 재미있는 건 딱딱하고 무거운 첩보물이 아니라 종합선물세트같은 다양한 장르의 재미를 만끽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전쟁과 스파이가 전면에 포진돼있지만 달달한 로맨스와 함께 전쟁으로 인해 억압받은 청춘들의 들끓는 욕망도 적잖은 분량과 비중으로 그려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백작의 3녀 패멀라를 오래 전부터 흠모해온 벤은 그녀의 마음이 온통 자신의 절친인 제레미에게만 향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여전히 미련을 버리지 못합니다. 전쟁은 세 남녀를 각각 정보국(), 암호해독 기관(패멀라), 전쟁터(제레미)로 흩어놓았는데, 공교롭게도 같은 시기에 팔리 플레이스로 돌아오는 운명을 맞이합니다. 벤은 독일 스파이와 접선하려던 배신자를 찾기 위해, 패멀라는 연이은 야근에 시달린 뒤 반강제로 받은 휴가 때문에, 그리고 제레미는 독일군 포로가 됐다가 기적적으로 탈출에 성공하면서 다시금 한 자리에 모이게 된 것입니다.

 

주인공이지만 슈퍼 히어로가 아닌 탓에 벤의 미션은 다소 지루하고 답답한 행보를 보이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짝사랑하는 패멀러의 도움으로 결정적인 단서를 포착해냅니다. 그 와중에도 벤은 눈앞에서 제레미와 패멀러의 다정한 모습을 지켜봐야 하는 고통을 겪는데 이 대목은 전쟁과 스파이의 공포를 잊게 만들 정도로 달달하게 전개됩니다. 특히 귀환한 제레미가 사랑보다 자신의 육체에만 관심을 갖자 실망과 회의를 느끼는 패멀라의 불안한 심리라든가 파티와 여자만 즐기려는 타고난 금수저 한량인 제레미의 폭주는 배신자 찾기못잖게 삼각 로맨스가 어떤 엔딩을 맞이하게 될지 궁금하게 만드는 매력적인 대목입니다.

 

배신자 찾기삼각 로맨스만큼이나 눈길을 끌었던 건 욕구를 배출하지 못해 폭발 직전에 이른 당시 청춘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사교계에 진출해 멋진 남자를 만나려던 명문가의 딸들은 모든 걸 금지시킨 전쟁을 원망했고, 자유연애와 방종한 성()에 눈이 벌개졌던 남자들은 언제 죽을지 모를 전쟁터로 끌려 나가야만 했습니다. 억압된 욕구는 때론 독일군의 공습이 이뤄지는 한밤중에 옥상에서 위험천만한 샴페인 파티를 벌이게끔 만들기도 합니다. 왜 하필 이런 세상에 태어났을까, 라는 한숨과 자조가 생생하게 귀에 들리는 듯한 당시 청춘들에 대한 묘사는 이 작품의 또 다른 매력이라는 생각입니다.

 

스릴 넘치는 전쟁첩보물을 기대한 독자라면 다소 밋밋하게 읽힐 수도 있겠지만, 개인적으론 여러 장르가 재치 있게 믹스된 특별한 맛을 느낄 수 있어서 무척 인상적인 작품이었습니다. 리스 보엔은 다수의 미스터리 시리즈를 집필한 작가라고 하는데, 검색해보니 한국에는 1930년대 영국을 배경으로 한 탐정 레이디 조지애나’(2012, 문학동네) 단 한 편만 출간된 상태입니다. “정의감으로 똘똘 뭉친 조지애나가 왕족 신분을 벗어던지고 탐정으로 거듭나는 코지 미스터리라는데, 딱히 제 취향은 아니지만 시대 배경도 호기심을 끌고 왠지 팔리 들판에서처럼 매력적인 캐릭터와 이야기가 펼쳐질 것 같아 기회가 된다면 읽어보고 싶은 생각입니다.

 

사족으로... 다른 독자의 서평에서도 언급된 내용인데, 꽤 자주 등장하는 이크!”라는 감탄사가 눈에 거슬린 게 사실입니다. 때론 분위기를 확 깨뜨리기도 했는데 다른 적절한 표현이 없었을지 궁금합니다. ‘MI5’‘MI파이브가 혼재된 건 교정의 오류로 보였고, ‘5로 표기됐더라면 좀더 이해하기 쉬웠을 제오열내부의 적을 상징한다.”는 간단한 각주나 설명조차 없어서 처음 이 단어를 접하는 독자는 다소 어리둥절했을 거란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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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의 복수
안드레아스 그루버 지음, 송경은 옮김 / 단숨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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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라이프치히에서 관절 마디마디가 부러진 나탈리의 시신이 발견되지만 경찰은 그녀가 매춘부라며 마약중독자의 사고사로 단정합니다. 하지만 현장출동팀의 발터 풀라스키 형사는 타살의 가능성을 직감하곤 단독수사에 착수합니다. 문제는 나탈리의 엄마 미카엘라가 따라붙었다는 점. 딸의 살해범을 찾겠다는 일념에 빠진 미카엘라는 수시로 풀라스키의 수사를 방해하지만 때론 생각지도 못한 도움을 주기도 합니다. 그러던 중 연쇄살인의 가능성을 확인한 풀라스키는 단서를 찾기 위해 오스트리아 빈으로 향합니다. 마침 빈에서는 (전작 여름의 복수에서 풀라스키와 호흡을 맞췄던) 변호사 에블린 마이어스가 곤란한 지경에 빠져있습니다. 자신의 의뢰인이 연쇄살인범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품게 된 것입니다. 서로 다른 지점에서 출발한 풀라스키와 에블린은 결국 기이하고 끔직한 사건 앞에서 재회하게 됩니다.

 

안드레아스 그루버는 천재 프로파일러 슈나이더와 매력적인 여형사 자비네가 활약하는 슈나이더 시리즈로 더 많이 알려져 있지만, 상대적으로 덜 유명한 발터 풀라스키 시리즈역시 서사나 캐릭터는 물론 잔혹함에 있어서도 거의 비슷한 톤과 매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전작인 여름의 복수도 마찬가지였지만, 기괴한 형태로 발견되는 희생자들, 소시오패스적인 욕망과 망상에 휩싸여 참혹한 범죄를 저지르는 범인, 그리고 진실을 찾기 위해 분투하는 두 주인공 등 가을의 복수는 안드레아스 그루버의 개성과 함께 독일(또는 북유럽) 스릴러의 전형성을 고루 갖춘 작품입니다.

 

주인공 발터 풀라스키는 작가의 또 다른 주인공 슈나이더와 비교하면 참 초라해 보입니다. 50대의 나이에, 천식을 앓는 이유로 수사와는 거리가 먼 현장출동팀에 머물고 있는 그는 외형만 보면 은퇴 직전의 사람 좋은 아저씨에 불과하지만, 경찰로서의 열정, 추리력, 판단력에 관한 한 슈나이더에 조금도 뒤지지 않는 인물입니다.

풀라스키 못잖은 활약을 펼치는 희생자의 어머니 미카엘라는 어디로 튈지 모르는 럭비공 같은 인물이자 실질적인수사를 진행하는 정말 독특한 인물인데, 굳이 비교하자면 영화 델마와 루이스의 거칠고 정의로운 여전사와 비견할 만한 캐릭터입니다. 번번이 풀라스키를 곤란한 지경에 빠뜨리며 독단적으로 수사를 벌이는 그녀의 행동은 처음엔 민폐 캐릭터처럼 눈살을 찌푸리게 만들기도 하지만 뒤로 갈수록 풀라스키에게 이보다 더 멋진 파트너는 없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강하고 매력적인 캐릭터로 진화합니다.

풀라스키와 미카엘라의 활약이 분량이나 비중 면에서 워낙 압도적이다 보니 세컨드 주인공인 변호사 에블린 마이어스는 상대적으로 왜소해 보인 게 사실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차고 집요한 캐릭터는 전작에 못잖게 매력적으로 그려지고 있습니다.

 

흥미진진하게 읽었음에도 불구하고 유일하게 아쉬운 대목은 범인의 범행동기입니다. 독일과 북유럽 작품 중 형이상학적 또는 주술적 목적을 지닌 범인을 종종 목격하게 되는데 이런 설정은 공감하기 어려운 신비주의 또는 억지 설정처럼 느껴지곤 했습니다. ‘가을의 복수의 범인 역시 다분히 그런 냄새를 풍기는데, 그런 탓에 이야기에 100% 몰입하기 어려웠던 것이 사실입니다. 만점에서 별 1개가 사라진 건 그런 이유 때문입니다.

 

주인공도 스릴러도 매력이 철철 넘치는 시리즈임에도 불구하고 아쉽게도 이 작품(한국출간 2017) 이후로 더는 발터 풀라스키 시리즈를 한국에서 만나볼 수 없었습니다. 검색해보니 원작 자체도 겨울의 복수’(Rachewinter, 2018) 한 편만 더 출간된 걸로 나오는데, 이 작품이라도 조만간 한국 독자들과 만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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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죄 : 검은 강 심리죄 시리즈
레이미 지음, 이연희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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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파일러 팡무는 자신과 각별한 인연이 있는 공안국 부국장 싱즈썬이 살인 용의자로 체포되자 큰 충격을 받는다. 싱즈썬은 아동 인신매매 조직 수사를 위해 부하를 위장잠입 시켰는데 그와의 연락이 두절된 상태에서 인신매매 조직의 함정에 빠지고 만 것. 하지만 CCTV는 물론 싱즈썬의 무고함을 밝혀줄 단서가 아무 것도 남아있지 않아 팡무는 그저 망연자실할 뿐이다. 경찰 내의 분위기마저 우호적이지 않은 상태에서 팡무는 싱즈썬의 결백을 밝히기 위해 고군분투하던 중 납치된 여자아이들이 해외로 팔려 나가는 정황을 파악하게 된다. (출판사의 소개글을 일부 수정, 인용했습니다.)

 

프로파일링’, ‘교화장에 이은 심리죄 시리즈세 번째 작품입니다. 주인공 팡무는 학생 시절부터 천재적인 프로파일링 능력을 발휘하여 자신이 다니는 대학에서 벌어진 끔찍한 연쇄살인을 해결한 바 있고(‘프로파일링’), 졸업 후 경찰이 된 직후에는 기괴하기 짝이 없는 범죄 집단을 응징한 적도 있습니다.(‘교화장’)

이 작품 속 팡무에게선 이제 제법 베테랑의 품격까지 느낄 수 있는데, 그런 탓인지 그가 마주한 사건 역시 스케일도 커지고 비극이나 잔혹성의 깊이는 전작들보다 훨씬 더 깊어진 느낌이었습니다.

 

자신의 성장에 큰 영향을 미쳤던 싱즈썬의 무고를 밝히고 그를 함정에 빠뜨린 아동 인신매매 조직을 쫓는 팡무의 여정은 외로움과 고달픔 그 자체입니다. 싱즈썬의 혐의를 벗길 만한 단서가 발견되지 않자 경찰 내부에선 딱히 적극적인 수사를 벌이지도 않는 것은 물론 일부 간부들은 그의 자리를 탐내는 속내를 감추지 않기도 합니다. 더구나 자신의 행보가 번번이 누군가에게 간파당하자 팡무는 경찰 내의 그 누구도 믿을 수 없는 처지에 빠지고 맙니다.

애초 위장잠입을 시켰던 부하 외에 싱즈썬이 아무하고도 수사에 대해 논의하지 않았음을 의아하게 여겼던 팡무는 뒤늦게 싱즈썬이 말할 수 없는 참혹한 비극을 겪었고 그 때문에 사적인 복수를 도모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곤 상부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단독수사에 나섭니다. 그리고 몇 차례나 목숨이 날아갈 위기를 겪은 끝에 진실을 찾아내고 악의 세력들을 일망타진합니다.

 

사실 심리죄 시리즈는 전반적으로 선명하고 명쾌한 구조의 작품들은 아닙니다. 아무래도 주인공 팡무가 프로파일러라 그런지 범죄 자체도 기괴하고 범행동기나 심리 역시 다소 추상적이거나 모호한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세 번째 작품인 검은 강은 전작들에 비하면 악당들의 캐릭터나 범행 자체가 구체적인데다, 팡무의 활약도 프로파일러보다는 물불 안 가리는 열혈형사에 가까워서 수월하게 페이지를 넘길 수 있습니다. 물론 곳곳에서 프로파일러 팡무의 맹활약도 맛볼 수 있어서 여러 가지 재미가 골고루 담겨 있는 작품이기도 합니다.

 

다만, 범죄조직의 수법과 범행 스케일, 그리고 팡무의 목숨을 건 활약들 가운데 다소 사실감이 떨어지는 설정들이 자주 발견돼서 읽는 동안 여러 차례 위화감 또는 억지스럽다는 느낌을 받은 것도 사실인데, 스포일러가 될 수 없어 일일이 열거할 수는 없지만 그런 아쉬움들이 적잖이 쌓인 탓에 높은 평점을 주기는 어려웠습니다.

막다른 벽에 가로막힌 팡무의 다음 행보를 위한 단서들은 때론 너무 쉽게, 때론 느닷없는 조력자에 의해 제공됐고, 몇 차례 팡무의 목숨을 위협했던 극단의 위기들은 조금은 억지스럽게 해소되곤 합니다. 누구도 믿지 못하는 상태에서 거의 단독수사에 임한 팡무가 막판에 악당들을 예상외의 방법으로 궤멸시키는 대목은 흥미진진하긴 했지만 너무나도 전지전능한 능력을 발휘한 나머지 허구의 냄새가 과하게 풍긴 점도 아쉬움 중 하나였습니다. , 소녀들을 해외로 팔아넘기는 인신매매 조직의 범행 수법도 그 규모나 잔악함에 비하면 고개가 갸웃거려질 정도로 어수룩하거나 허술해 보여서 현실감이 떨어지기도 했습니다.

 

몇몇 아쉬움은 있었지만 개인적으론 전작들에 비해 페이지터너로서의 위력은 가장 매력적이었다는 생각입니다. 피를 흠뻑 뒤집어쓰며 숱한 위기를 넘긴 팡무가 프로파일러를 넘어 뛰어난 현장 전문가로 성장하는 대목도 계속 눈길을 끌었는데, 덕분에 과연 다음에는 팡무가 어떤 사건들과 마주하게 될지 무척 기대하게 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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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집이 대가를 치를 것이다
스테프 차 지음, 이나경 옮김 / 황금가지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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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6, 백인경찰이 흑인소년을 사살한 사건으로 LA 전역이 또다시 긴장감에 휩싸인 가운데, 한인마켓에서 약사로 일하는 그레이스 박은 이 사건에 대한 TV뉴스에 유독 민감하게 반응하는 부모님의 모습을 의아하게 여깁니다. 그러던 중 느닷없이 닥친 끔찍한 사건을 계기로 그레이스 박은 자신만 모르고 있던 가족의 비밀을 알게 되곤 큰 충격에 빠집니다.

한편, 40대 흑인남성 숀은 10년의 복역을 마치고 출소한 사촌 레이가 가족과 섞이지 못한 채 방황하자 또다시 범죄를 저지르지 않을까 걱정합니다. 그런 와중에 1991년 자신의 누나 에이바를 살해하고도 집행유예만 받고 종적을 감췄던 한인 여성이 괴한의 총에 맞았다는 소식이 들리자 숀은 레이에 대한 의심과 함께 28년 동안 묵혀왔던 분노를 다시 상기시킵니다.

 

이 작품의 모티브는 1991년에 벌어진 일명 두순자 사건과 이듬해 벌어진 LA 폭동입니다. 1992LA 폭동의 도화선은 분명 백인경찰이 흑인청년을 무차별 폭행한 로드니 킹 사건이었지만, 당시 가장 큰 피해를 입은 건 한인 사회였습니다. 그 이유 중 하나로 대두된 것이 1년 전 벌어진 두순자 사건인데, 이는 15세 흑인소녀를 도둑으로 여긴 한인상점 주인 두순자가 폭력을 주고받다가 총으로 소녀를 사살한 사건입니다. 두순자는 유죄판결을 받긴 했지만 금고형은 면했고 이는 흑인사회에 큰 공분을 일으켰습니다. 그리고 그 분노가 1년 후 LA폭동에서 한인에 대한 적개심으로 폭발한 것입니다.

 

숀의 누나 에이바가 한인마켓 주인에게 사살당한 사건은 두순자 사건을 거의 그대로 따온 설정입니다. 하지만 작가는 에이바의 죽음을 이 이야기의 출발점으로만 삼은 게 아니라 현재진행형인 사건으로 확장시킵니다. , 당시 에이바를 살해하고 종적을 감췄던 한인마켓 주인이 28년만인 2019, 누군가에게 응징당하듯총에 맞는 사건을 설정함으로써 되풀이되는 비극에 휩싸인 두 가족 숀 일가와 한인마켓 주인의 가족 의 상처를 그리는 것은 물론 결코 메워지지 않을 것 같은 인종갈등의 골의 민낯을 독자 앞에 내놓고 있습니다.

 

하지만 작가는 어설픈 화해나 용서를 제시하지도 않고 낙관적인 미래를 그리지도 않습니다. 또 다큐멘터리처럼 인종갈등 문제를 고발하는 자세를 취하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백인중심사회에서 살아가는 두 유색인종 가족 내부의 고민과 갈등에 좀더 방점을 찍는가 하면, 그런 개인적인 차원의 고민과 갈등이 사회적 문제나 우발적인 폭력과 스파크를 일으켰을 때 얼마나 끔찍하고 궤멸적인 결과를 일으킬 수 있는지에 대해 소름 돋을 정도로 담담하게 그려낼 뿐입니다.

 

80년대에 이민 와 힘겹게 정착한 부모를 둔 그레이스는 흑인에 대한 부당한 처우에 공분하고 추모식에도 참석할 정도로 올곧은 인물이지만 자신의 가족이 사건의 중심에 휘말리자 저도 모르게 인종차별주의자가 되어 가족을 지키려 분투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녀가 바라는 것은 승리가 아니라 진실일 뿐입니다.

숀은 지금까지도 에이바를 추모하고 그리워하지만, 에이바에 대해 잘 모르면서도 그녀를 무작정 미화하고 이용하려는자들을 극도로 혐오하기도 합니다. 여전히 에이바를 착하고 똑똑하고 재능 있는 소녀로 포장하려는 가족들도, 에이바에 관한 책을 펴내 부와 인기를 얻으려는 위선자들도 숀에겐 모두 가증스럽게 보일 뿐입니다. 하지만 에이바를 죽이고 자취를 감췄던 한인마켓 주인의 피격사건은 숀이 28년 동안 억눌러왔던 분노에 기름을 끼얹고 맙니다.

 

서로 접점 없이 각자의 이야기를 풀어가던 그레이스와 숀은 중반 이후 누가 한인마켓 주인을 쏘았는가?”라는 미스터리를 푸는 과정에서 극적으로 만나게 됩니다. 하지만 앞서 언급한대로 그들은 상투적이고 진부한 화해나 용서를 나누지 않습니다. 오히려 각자의 입장에서 각자의 주장과 설득을 펼칠 뿐입니다. 어느 한쪽이 옳거나 그르다고 할 수 없는, 영원한 평행선과도 같은 각자의 입장들은 이른바 인종갈등을 소통이나 화해로 해결하겠다는 선언들이 얼마나 허망하고 실현되기 어려운 일인지를 극명히 보여줍니다.

그런 면에서 근거 없는 낙관론도, 어설픈 관용도, 현실에 대한 냉소도 던지지 않은 작가의 진짜 의도는 독자에게 정답 없는 고민거리를 건네주려던 게 아니었나,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혼돈에 빠진 그레이스와 숀을 묘사한 후반부 몇 줄의 문장처럼 말입니다.

 

그들은 앞으로의 일을 고민해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 뭐라고 말할지, 무슨 일을 할지, 알고 있는 사실을 안고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그때까지 그들은 불길을 함께 바라봤다.” (p3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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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의 여백
아시자와 요 지음, 김은모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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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도는 먼저 떠난 아내의 몫까지 정성을 다해 홀로 딸 가나를 키운다. 하지만 목숨과도 같았던 딸이 교실 난간에서 추락하던 그날, 안도의 세상도 함께 무너졌다. 유서조차 남기지 않고 떠난 딸의 죽음을 믿을 수 없어 괴로워하던 안도 앞에 딸의 친구라는 소녀가 찾아오면서 상황은 급반전 된다. 과연 가나의 죽음은 자살인가 타살인가? 분노와 증오에 휩싸인 채 서서히 밝혀지는 가나의 죽음의 진실 앞에서 안도는 돌이킬 수 없는 결심을 하는데... (출판사의 소개글을 일부 수정, 인용했습니다.)

 

지독한 따돌림이나 폭력을 통한 괴롭힘, 그리고 그로 인해 벌어지는 자살 혹은 살인 등 학교폭력을 소재로 한 이야기는 좀처럼 읽을 생각이 들지 않는 장르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몇 이유, 가령 픽션을 통해서라도 끔찍한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는 의무감, 또는 어린 나이라고 해도 함부로 용서받아선 안 될 가해자들이 제대로 벌 받고 응징되는 엔딩의 쾌감 같은 것 때문에 자꾸만 눈길이 가는 것 역시 사실입니다.

 

죄의 여백은 학교폭력을 소재로 한 전형적인 미스터리이자 복수극이지만 그에 못잖게 악의 혹은 반성의 의미를 심도 있게 그린 작품이기도 합니다. 그래서인지 분량이나 비중 면에서 미스터리와 복수극이란 서사보다는 가해자와 피해자(의 유족)의 내면과 심리가 더 무게감 있게 그려지고 있습니다. 자책과 자괴감에 휩싸인 채 절망의 밑바닥을 헤매던 아버지 안도가 복수와 용서와 반성 사이에서 고뇌하는 대목이라든가 가해자인 두 소녀가 두려움과 공포의 순간을 지나 자기합리화와 은폐를 결심하기까지 겪는 요동치는 심리를 그린 대목들이 오히려 이야기의 중심에 놓여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반성하면 용서가 될까? 반성을 면죄부로 여기는 사람들, 거기에도 악의는 존재하지 않을까? 죄와 벌, 그 사이에는 이름 붙일 수 없는 죄의 여백이 존재한다.”라는 출판사 소개글은 이 작품만의 특별함을 잘 대변하고 있다는 생각입니다.

 

후반부에 이르러 본격적으로 펼쳐지는 안도의 복수극은 독자에게 기대와 우려를 동시에 갖게 만듭니다. 복수가 성공한다면 통쾌하긴 하겠지만 그것이 안도에게 과연 안식과 만족과 평화를 주게 될까, 라는 우려 섞인 의문이 들 수밖에 없기 때문인데, 작가는 몇 차례의 반전을 통해 어느 정도는 타협적인, 또 어느 정도는 예상을 뛰어넘는다고 할 수 있는 특별한 엔딩을 내놓습니다. 이 엔딩에 대해서는 다소 의견이 엇갈릴 수 있는데, 개인적으로는 좀더 폭발력 있는 엔딩을 기대했던 탓에 살짝 아쉽게 느껴진 게 사실이긴 합니다.

 

주인공들만큼 눈길을 끄는 조연은 안도의 동료인 심리학 교수 오자와 사나에입니다. 타인의 심리에 잘 공감하지 못하고 사회성이 떨어져 대인관계에 문제가 있는 사나에는 쉽게 얘기하면 진담과 농담과 돌려 말하기를 잘 이해하지 못하고 상대방의 감정을 읽는데도 서투른 인물입니다. 재미있는 건 사나에는 애초 초고에는 없던 인물이란 점입니다.

하지만 작가는 사나에를 투입하면서 결말이 크게 바뀌었고 안도와 소녀들의 팽팽한 긴장감에 완급을 줄 수 있었다.”라고 언급했고, 번역자는 사나에를 쓸모 있는 곁가지라고 칭하며 공감 능력과 배려심이 뛰어난 척하지만 인간성이 최하인 가해자와 대비된다.”라고 설명합니다. 실제로 사나에 덕분에 시종 팽팽하고 숨 쉴 틈 없을 뻔한 이야기가 나름 굴곡과 완급을 지닐 수 있었는데, 이런 인물을 주인공으로 한 시리즈가 나온다면 그것도 꽤 매력 있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아시자와 요는 미쓰다 신조의 작가 시리즈를 떠올리게 만드는 독특한 연작 괴담집 아니 땐 굴뚝에 연기는을 통해 최근 알게 된 작가인데, 처음 만난 작품의 인상이 워낙 강렬했던 탓인지 그가 학교폭력을 다룬 작품을 집필했다는 점 자체가 놀랍기도 하고 흥미롭기도 했습니다. 소재의 스펙트럼도 넓고 이야기를 끌고 가는 힘이나 개성도 강한 작가라 앞으로 한국에 자주 소개될 것 같은데 다음엔 어떤 특별한 이야기로 만나게 될지 사뭇 기대감이 앞섭니다.

 

사족으로...

최근 몽실북스 포스트에서 학교가 지옥이 되어버린 소설 Best 5’라는 흥미로운 글을 발견했는데, 이 작품을 포함하여 풀꽃도 꽃이다’(조정래), ‘파멸일기’(윤자영), ‘악의 교전’(기시 유스케), ‘이웃이 같은 사람들’(김재희)이 언급됐습니다.

동의하는 작품도 있고 그렇지 않은 작품도 있는데, 덕분에 그동안 읽은 작품들 가운데 제 나름대로의 학교가 지옥이 되어버린 소설 Best 5’를 꼽아봤습니다.

 

1. ‘그리고 숙청의 문을’ (구로타케 요)

2. ‘고백’ (미나토 가나에)

3. ‘어나더’ (아야츠지 유키토)

4. ‘침묵의 교실’ (오리하라 이치)

5. ‘솔로몬의 위증’ (미야베 미유키)

 

지옥의 강도가 강렬한 순서로 꼽은 리스트인데, 사실 솔로몬의 위증지옥이 된 학교라고 하기엔 좀 애매하긴 합니다. 그렇다면 그 자리를 대신할 만한 작품으론 기시 유스케의 악의 교전이나 오쿠다 히데오의 침묵의 거리에서정도를 꼽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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