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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집이 대가를 치를 것이다
스테프 차 지음, 이나경 옮김 / 황금가지 / 2021년 4월
평점 :
2019년 6월, 백인경찰이 흑인소년을 사살한 사건으로 LA 전역이 또다시 긴장감에 휩싸인 가운데, 한인마켓에서 약사로 일하는 그레이스 박은 이 사건에 대한 TV뉴스에 유독 민감하게 반응하는 부모님의 모습을 의아하게 여깁니다. 그러던 중 느닷없이 닥친 끔찍한 사건을 계기로 그레이스 박은 자신만 모르고 있던 가족의 비밀을 알게 되곤 큰 충격에 빠집니다.
한편, 40대 흑인남성 숀은 10년의 복역을 마치고 출소한 사촌 레이가 가족과 섞이지 못한 채 방황하자 또다시 범죄를 저지르지 않을까 걱정합니다. 그런 와중에 1991년 자신의 누나 에이바를 살해하고도 집행유예만 받고 종적을 감췄던 한인 여성이 괴한의 총에 맞았다는 소식이 들리자 숀은 레이에 대한 의심과 함께 28년 동안 묵혀왔던 분노를 다시 상기시킵니다.
이 작품의 모티브는 1991년에 벌어진 일명 ‘두순자 사건’과 이듬해 벌어진 LA 폭동입니다. 1992년 LA 폭동의 도화선은 분명 백인경찰이 흑인청년을 무차별 폭행한 ‘로드니 킹 사건’이었지만, 당시 가장 큰 피해를 입은 건 한인 사회였습니다. 그 이유 중 하나로 대두된 것이 1년 전 벌어진 ‘두순자 사건’인데, 이는 15세 흑인소녀를 도둑으로 여긴 한인상점 주인 두순자가 폭력을 주고받다가 총으로 소녀를 사살한 사건입니다. 두순자는 유죄판결을 받긴 했지만 금고형은 면했고 이는 흑인사회에 큰 공분을 일으켰습니다. 그리고 그 분노가 1년 후 LA폭동에서 한인에 대한 적개심으로 폭발한 것입니다.
숀의 누나 에이바가 한인마켓 주인에게 사살당한 사건은 ‘두순자 사건’을 거의 그대로 따온 설정입니다. 하지만 작가는 에이바의 죽음을 이 이야기의 출발점으로만 삼은 게 아니라 현재진행형인 사건으로 확장시킵니다. 즉, 당시 에이바를 살해하고 종적을 감췄던 한인마켓 주인이 28년만인 2019년, 누군가에게 ‘응징당하듯’ 총에 맞는 사건을 설정함으로써 되풀이되는 비극에 휩싸인 두 가족 – 숀 일가와 한인마켓 주인의 가족 – 의 상처를 그리는 것은 물론 결코 메워지지 않을 것 같은 인종갈등의 골의 민낯을 독자 앞에 내놓고 있습니다.
하지만 작가는 어설픈 화해나 용서를 제시하지도 않고 낙관적인 미래를 그리지도 않습니다. 또 다큐멘터리처럼 인종갈등 문제를 고발하는 자세를 취하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백인중심사회에서 살아가는 두 유색인종 가족 내부의 고민과 갈등에 좀더 방점을 찍는가 하면, 그런 개인적인 차원의 고민과 갈등이 사회적 문제나 우발적인 폭력과 스파크를 일으켰을 때 얼마나 끔찍하고 궤멸적인 결과를 일으킬 수 있는지에 대해 소름 돋을 정도로 담담하게 그려낼 뿐입니다.
80년대에 이민 와 힘겹게 정착한 부모를 둔 그레이스는 흑인에 대한 부당한 처우에 공분하고 추모식에도 참석할 정도로 올곧은 인물이지만 자신의 가족이 사건의 중심에 휘말리자 저도 모르게 인종차별주의자가 되어 가족을 지키려 분투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녀가 바라는 것은 ‘승리’가 아니라 ‘진실’일 뿐입니다.
숀은 지금까지도 에이바를 추모하고 그리워하지만, 에이바에 대해 잘 모르면서도 그녀를 무작정 미화하고 ‘이용하려는’ 자들을 극도로 혐오하기도 합니다. 여전히 에이바를 착하고 똑똑하고 재능 있는 소녀로 포장하려는 가족들도, 에이바에 관한 책을 펴내 부와 인기를 얻으려는 위선자들도 숀에겐 모두 가증스럽게 보일 뿐입니다. 하지만 에이바를 죽이고 자취를 감췄던 한인마켓 주인의 피격사건은 숀이 28년 동안 억눌러왔던 분노에 기름을 끼얹고 맙니다.
서로 접점 없이 각자의 이야기를 풀어가던 그레이스와 숀은 중반 이후 “누가 한인마켓 주인을 쏘았는가?”라는 미스터리를 푸는 과정에서 극적으로 만나게 됩니다. 하지만 앞서 언급한대로 그들은 상투적이고 진부한 화해나 용서를 나누지 않습니다. 오히려 각자의 입장에서 각자의 주장과 설득을 펼칠 뿐입니다. 어느 한쪽이 옳거나 그르다고 할 수 없는, 영원한 평행선과도 같은 ‘각자의 입장들’은 이른바 인종갈등을 소통이나 화해로 해결하겠다는 ‘선언’들이 얼마나 허망하고 실현되기 어려운 일인지를 극명히 보여줍니다.
그런 면에서 근거 없는 낙관론도, 어설픈 관용도, 현실에 대한 냉소도 던지지 않은 작가의 진짜 의도는 독자에게 정답 없는 고민거리를 건네주려던 게 아니었나,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혼돈에 빠진 그레이스와 숀을 묘사한 후반부 몇 줄의 문장처럼 말입니다.
“그들은 앞으로의 일을 고민해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 뭐라고 말할지, 무슨 일을 할지, 알고 있는 사실을 안고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그때까지 그들은 불길을 함께 바라봤다.” (p39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