킹덤
요 네스뵈 지음, 김승욱 옮김 / 비채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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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위와 칼 형제의 아버지 오프가르는 노르웨이 소도시 오스의 아라라트 산 정상부에 자리한 작고 한심한 농장을 킹덤, 우리 가족의 왕국이라고 불렀습니다. 하지만 20년 전 형제의 부모가 끔찍한 자동차 추락사고로 숨진 이후 왕국과 그 일대는 피비린내로 진동했고, 이제 30대 중반이 된 로위와 칼에게 왕국은 잊힌 지 오래된 망령 혹은 추억일 뿐입니다.

작은 주유소를 경영하며 홀로 집을 지켜온 로위는 미국에서 학위를 딴 뒤 부동산 거부가 됐다는 동생 칼의 15년 만의 갑작스런 방문에 놀랍니다. 바베이도스 출신의 아내 섀넌을 동반한 칼은 산 정상부에 호텔을 지어 몰락중인 고향 오스를 살리겠다는 꿈같은 계획을 늘어놓습니다. 오스 전체가 들썩이는 가운데 로위는 복잡한 감정에 빠집니다. 황당무계한 호텔 건설계획은 의심스럽고, 동생의 아내 섀넌이 내뿜는 묘한 매력에 혼란스러워졌으며, 특히 늘 적대적이던 경찰 올센이 칼의 귀국을 기다렸다는 듯 과거 미제사건을 들쑤시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킹덤해리 홀레 시리즈는 물론 요 네스뵈의 다른 어느 스탠드얼론과도 완전히 결이 다른 작품입니다. 살인과 폭력이 난무하고 경찰이 등장하긴 하지만 낯익은 스릴러 서사에서 많이 벗어난 독특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킹덤10대 시절부터 살인에 관여했고, 부적절하거나 일그러진 사랑에만 전념했으며, 상식을 벗어난 지독한 형제애를 동생에게 투사해온 로위 오프가르라는 한 남자의 비극적인 성장 스토리이자 세상의 모든 악몽을 죄다 뒤집어쓴 한 가족의 파멸기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여전히 10대 때 겪은 끔찍한 악몽에 얽매여 있긴 해도 가까스로 소박한 삶을 유지해온 로위는 동생 칼의 귀국 이후 또다시 손에 피를 묻혀야만 하는 가혹한 운명과 함께 스스로도 통제할 수 없는 부도덕한 사랑에 휘말립니다.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존재인 동생이 15년 만에 귀국하며 갖고 온 두 개의 폭탄’ - 무모한 호텔 건설계획과 치명적인 매력의 섀넌 은 로위를 완전히 박살내고도 남을 만한 파괴력을 지녔기 때문입니다. 그 두 개의 폭탄은 로위 주변뿐 아니라 오스 곳곳에서 심각한 파문을 일으켰고 그로 인해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임계점을 넘어서버린 로위는 피비린내에서 벗어날 수 없는 자신의 운명을 뼈저리게 깨닫습니다.

 

나는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절대적으로 확신했다. 마땅히 자기 것이어야 하는 것을 손에 넣는 일. 설사 그것이 아주 망가진 모습이라 해도. 그리고 그 일을 방해하는 자들과 내가 반드시 보호해야 하는 사람들을 위협하는 자들을 제거하는 것.” (p704)

 

로위--섀넌의 이야기에 못잖게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건 소도시 오스의 다양한 군상들이 로위와 칼 부부 주변을 맴돌며 벌이는 위태롭고 도발적인 행각들입니다. 이 행각들의 밑바닥에 자리 잡은 건 탐욕, 욕망, 시기, 질투, 복수 등 하나같이 비뚤어지고 뿌리 깊은 감정들인데, 이야기의 긴장감을 더욱 팽팽하게 하는 것은 물론 로위의 상황을 한층 더 복잡하고 골치 아프게 만드는 적절한 양념 역할을 맡고 있습니다.

 

뉴욕타임스는 “‘킹덤에 비하면 해리 홀레 시리즈는 차라리 희망과 위안을 주는 이야기였다.”라는 북 리뷰를 내놓았는데, 개인적으론 반은 맞고 반은 좀 애매한 평가라는 생각입니다. 훨씬 더 독하고 센 스릴러를 기대했지만 실은 가혹한 운명에 휩싸인 한 남자의 비극에 좀더 초점을 맞춘 작품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면에서 요 네스뵈 특유의 스릴러 서사를 기대했던 독자라면 적잖은 분량을 차지하고 있는 다소 느슨하고 장황한 (‘한 남자의 우여곡절 연대기로 보일 수도 있는) 곁가지 이야기들이 당혹스러울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들은 로위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한 밑받침이자 궁극적으로는 로위--섀넌의 비극을 더욱 강렬하게 만드는 주춧돌이라는 생각입니다. (가령 로위와 칼의 이름에 깃든 의미라든가 로위가 즐겨듣는 음악, 모든 사람들을 새에 빗댄 묘사, 늘 돌 무너지는 소리가 농장 인근의 협곡, 로위를 도발하는 주유소 10대 소녀 등 무수한 상징과 비유들이 그런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물론 740여 페이지의 분량은 주제나 소재에 비해 살짝 과해 보였고, 요 네스뵈가 문학적 성취(?)라는 과욕을 부린 대목도 곳곳에서 눈에 띄었으며, 없어도 무방한 사소한 해프닝들이 종종 끼어든 것도 사실이긴 합니다. (0.5개가 빠진 유일한 이유입니다.) 그래선지 이 작품을 통해 요 네스뵈를 처음 만난 독자라면 자칫 이런 스타일의 작가였나?”라고 오해할 수도 있겠다는 기우가 들었는데, 만일 그렇다면 요 네스뵈의 대표작들을 한 편이라도 꼭 만나볼 것을 권하고 싶습니다.

아마도 요 네스뵈의 다음 한국 출간작은 해리 홀레의 12번째 이야기 ‘Knife’가 될 것 같은데, 요 네스뵈의 개성 강하고 매력적인 새 스탠드얼론의 소식 역시 궁금한 터라 그 반가운 소식을 듣기까지 너무 오래 걸리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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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피스, 잔혹한 소녀들
에이버리 비숍 지음, 김나연 옮김 / 하빌리스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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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밀리 베넷은 마음의 상처를 입은 청소년들을 도와주는 심리치료사다. 그녀는 아직도 자신의 발목을 붙잡고 있는 과거의 망령에 사로잡혀 있다. 14년 전, 에밀리는 금수저라는 특혜를 등에 업고 비행을 일삼던 여섯 명의 여중생이 결성한 하피스의 멤버였다. 하피스 패거리는 전학생 그레이스를 괴롭히던 끝에 결코 넘어선 안 될 선까지 넘어버렸고, 그 비밀을 지키자며 피의 맹세까지 나눴다. 14년이 흘러 하피스 멤버들의 연이은 자살 소식을 들은 에밀리는 어딘가 석연치 않은 구석을 발견한다. 게다가 그녀 또한 정신이 망가진 건지 여기저기서 그레이스의 환영을 목격한다. 과연 그레이스가 복수를 위해 돌아온 걸까? 혹시 에밀리의 죄책감이 스스로를 파괴하고 있는 건 아닐까? (출판사의 소개글을 일부 수정, 인용했습니다.)

 

하피스는 역자의 설명에 따르면 여자의 머리와 몸에 새의 날개와 발을 가진 고대 신화 속 괴물”, 여자의 얼굴을 가진 맹금류란 뜻입니다. 흙수저지만 유치원 시절부터의 인연으로 본의 아니게 하피스가 된 에밀리를 제외한 나머지 다섯 명은 모두 금수저에 소시오패스 기질이 다분했습니다. 그녀들은 왕따, 뒷담화, 폭력, 절도 등 온갖 악행으로 학생들은 물론 교사들에게까지 소문난 악마들이었습니다. 한때 북한도 두려워하는 대한민국 중2”라는 웃지 못 할 농담이 돌아다녔지만, 하피스의 위세가 등등했던 시기가 중2로 설정된 걸 보면 14~15살의 잔혹성은 국적 불문의 진리가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하피스의 악행이 정점을 찍은 건 숫기 없는 여학생 그레이스가 전학을 오면서부터 시작됐습니다. 흙수저인 탓에 언제라도 하피스에서 쫓겨날 걸 두려워하던 에밀리는 하피스가 될 자격이라곤 전혀 없던 그레이스를 자신을 대체할 희생양이라 여겼고, 결국 그레이스는 에밀리의 손에 이끌려 하피스의 일원이 됐습니다. 그리고 몇 달 동안 이루 말할 수 없는 수모와 폭력에 시달리던 그녀는 자살을 시도한 뒤 학교를 떠나야만 했습니다.

이후 하피스는 해체되다시피 했지만 그 누구도 그레이스 사건에 대해 제대로 된 처분을 받지 않았습니다. (에밀리를 제외하곤) 반성은커녕 자신들의 죄를 완벽하게 감추는데 성공한 셈입니다. 그런 탓에 14년이 지난 현재 연이은 하피스 멤버들의 자살 소식은 에밀리를 충격에 빠뜨립니다. 아무리 긴 시간이 흘러도 하피스의 악마적인 기질은 변치 않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에밀리는 그레이스의 복수가 시작됐다.”라는 막연하지만 끔찍한 자신의 추리가 결코 허황된 망상이 아님을 점점 더 절감하게 됩니다.

 

이런 배경 하에 이야기는 과거 하피스의 만행현재 에밀리의 진실 찾기로 나뉘어 전개됩니다. 기본적으론 범인을 쫓는 미스터리지만 이 작품은 심리스릴러로서의 미묘하고 팽팽한 긴장감을 지니고 있기도 합니다. 하피스의 통제 불가능한 악마적 심리도 세세히 묘사됐고, 하피스에서의 악행에 대한 반성으로 청소년 심리치료사가 된 에밀리의 내면 역시 사건 못잖게 큰 비중으로 그려지기 때문입니다. 에밀리는 치료사지만 스스로도 상담을 받는 환자이기도 합니다. 여전히 하피스 시절의 악몽이 그녀를 괴롭히고 있는데다 단순히 반성이라고 하기엔 너무나도 막중한 회한이 그녀의 몸과 마음을 지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선명한 미스터리 해결법 대신 다소 모호하게 마무리될 것만 같던 이야기는 막판 반전을 통해 그 진상을 드러냅니다. 그리고 이 작품의 원제인 ‘Girl Gone Mad’에 숨겨진 의미 역시 뚜렷하게 밝혀집니다. 추리의 주인공인 에밀리조차 완벽하게 알아내지 못한 진실이 독자에게 폭로되는 순간 (출판사 소개글처럼 식스센스 급 반전은 아니더라도) “와우~ 이럴 수도 있겠구나!”라는 반전의 쾌감을 만끽할 수 있습니다. 자칫 뻔한 엔딩이 될 수도 있는 상황에서 작가가 동원한 몇 가지 결정적 설정들이 막판에 제대로 된 힘을 발휘했다고 할까요?

 

학교폭력, 소시오패스, 계급과 권력, 트라우마, 복수, 소셜미디어의 문제 등 다양한 소재들이 한데 버무려진 하피스, 잔혹한 소녀들은 같은 주제를 다룬 작품들과 큰 틀에서는 비슷한 흐름을 보이지만 심리스릴러의 미덕까지 가미된 덕분에 전혀 다른 맛을 내는 작품이 됐습니다. 다만, 유일한 아쉬움은 분량의 문제인데, 조금만 더 슬림했더라면 속도감이나 몰입감 모두 훨씬 대단했을 거란 점에서 520페이지는 주제나 소재에 비해 다소 과해 보인 게 사실입니다.

에이버리 비숍은 독자의 선입관을 배제하기 위해 유명작가가 사용한 필명이라고 합니다. 인터넷 서점에서 찾아보니 이 필명으로 모두 세 편의 작품이 출간됐는데 한국에는 하피스, 잔혹한 소녀들이 처음으로 소개된 작품입니다. 이 작품이 좋은 결과를 낸다면 나머지 두 작품도 만나볼 수 있을 것 같은데 개인적으론 충분히 기대해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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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친한 친구들 스토리콜렉터 4
넬레 노이하우스 지음, 김진아 옮김 / 북로드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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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교 교사이자 극렬 환경운동가인 파울리가 동물원 인근에서 참혹한 사체로 발견됩니다. 호프하임 경찰청 보덴슈타인 반장은 열혈 여형사 피아 키르히호프와 함께 수사에 나서지만 시작부터 난관에 부딪힙니다. 젊은 층을 중심으로 파울리의 극단적인 환경운동을 추종하는 세력도 적지 않았지만 그보다 훨씬 더 많은 적들, 그것도 그를 죽이고 싶을 정도로 증오한 자들이 파울리 주변에 널렸기 때문입니다. 파울리가 가르치던 학생, 이혼한 전처, 갈등중인 이웃은 물론 환경과 동물보호 문제로 잦은 충돌을 빚던 기업이나 관료, 심지어 동물원 원장까지 용의선상에 오르고 특히 최근 도로확장 계획을 놓고 거세게 대립하던 관계자들도 수사대상에 오르지만 출구는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유력한 용의자들이 하나둘씩 무혐의 처분을 받는 가운데 파울리를 추종하던 청년 한 명이 살해되자 피아와 보덴슈타인은 동일범의 소행으로 확신합니다.

 

끄떡하면 새로운 용의자가 나타나고, 강력한 살해 동기를 가졌다 싶어서 쫓아가보면 막다른 골목에서 막혀버리니 사람 환장할 노릇 아닌가! (p243)

 

이 작품의 구도를 잘 압축해놓은 보덴슈타인의 탄식입니다. 전작인 시리즈 첫 편 사랑받지 못한 여자역시 모두가 죽이고 싶었던 여자라는 제목이 더 어울릴 만큼 수많은 용의자가 등장하고 그에 따른 부수적 사건들이 여러 건 발생했는데, ‘너무 친한 친구들은 그에 못잖은 복잡한 구도로 이뤄진 작품입니다.

살해된 환경운동가 파울리는 생전에 그 언행이 지나치게 과격하고 공격적이라 사방팔방에 그를 죽이고 싶어 하는 적들을 만들었습니다. 자연히 피아와 보덴슈타인의 수사는 닥치는대로 여기저기 찔러보기’, ‘알리바이가 모호하거나 심증이 가는 인물은 일단 체포하기등 조금은 막무가내 식으로 전개될 수밖에 없었고, 그런 와중에 사건 관련자인 청년 한 명까지 살해되자 그야말로 막다른 벽에 부딪히고 맙니다. 더 난감한 것은 두 남자가 살해된 메인 사건 못잖게 주변 인물들이 관련된 부수적 사건들까지 사방에서 요동치는 바람에 피아와 보덴슈타인을 혼란 속에 빠뜨린다는 점입니다.

 

이런 복잡한 설정은 때론 독자에게 도전적인 추리 욕구를 자극하기도 하지만, 때론 이야기의 향방을 모호하게 만드는 부작용을 낳기도 합니다. 개인적으론 후자의 경향이 강했다는 느낌인데, 추정하자면 메인 사건 자체가 사이즈도 작고 강렬하지 못하다 보니 주변 인물들과 부수적인 사건이 애초 의도보다 훨씬 더 확장된 결과 같습니다. 어느 시점부터는 피아와 보덴슈타인이 뭘 쫓고 있는지조차 헷갈리기 시작했고, ‘극렬 환경운동가의 도로확장 반대운동이라는 중요한 초기 모티브마저 희미해진 느낌을 받았습니다.

가장 아쉬웠던 건 마지막에 밝혀진 범인의 정체와 동기가 앞서 펼쳐진 그 복잡한 구도를 다소 허무하게 만들 정도로 단순했다는 점인데, 역자 후기에 실린 이해받고 싶고 인정받고 싶은 욕구가 채워지지 않을 때 욕망은 비틀리고 걷잡을 수 없는 괴물로 변한다.”는 이 작품의 주제를 위해 그토록 많은 용의자와 부수적 사건들이 반드시 필요했던 건 아니라는 생각입니다. 전작인 사랑받지 못한 여자가 복잡한 구도 속에서도 나름 하나의 방향으로 이야기가 응집됐다면 너무 친한 친구들은 왠지 갈팡질팡하다가 이야기 자체가 미궁에 빠진 듯 보였습니다.

 

시리즈 초반이라 주요 등장인물들의 개인사나 과거에 대한 설명이 자주 등장했는데, 피아의 경우 20대 초반에 겪은 끔찍한 사건과 그로 인한 트라우마, 용의자 중 한 명인 동물원 원장 크리스토프 산더와 위험한 감정을 주고받는 에피소드, 또 여성비하적인 시선을 가진 저질 캐릭터 형사와의 충돌이 눈에 띄었고, 보덴슈타인 역시 중년의 위기를 겪는 듯한 아내 코지마와의 갈등, 사춘기의 절정을 달리는 딸 로잘리와의 충돌이 흥미롭게 읽혔습니다. 이미 이 시리즈의 최근작까지 다 읽은 터라 이들의 인연이 어떻게 전개될지 다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과거를 다시 들여다보는 듯한 재미는 제법 쏠쏠한 편이었습니다.

 

워낙 오래 전에 읽어서 확실하진 않지만 다음 작품인 깊은 상처는 이 시리즈의 백미인 백설공주에게 죽음을과 함께 가장 좋은 인상을 받은 걸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시리즈를 순서대로 다시 읽다 보면 등장인물들의 성장과 변화를 한눈에 파악할 수 있는데, 그와 함께 작가의 성장을 미세하게나마 감지할 수 있는 경우도 종종 있습니다. 시리즈 초반의 두 작품이 좀 어수선했다면 세 번째 작품부터 넬레 노이하우스의 진짜 저력이 발휘되기 시작했다고 할까요? 물론 이후에도 다소 아쉬웠던 작품도 있긴 하지만, 어쨌든 그녀의 성장을 지켜보는 일이 스토리 못잖게 흥미진진한 건 분명한 사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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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교 교사이자 극렬 환경운동가인 파울리가 동물원 인근에서 참혹한 사체로 발견됩니다. 호프하임 경찰청 보덴슈타인 반장은 열혈 여형사 피아 키르히호프와 함께 수사에 나서지만 시작부터 난관에 부딪힙니다. 젊은 층을 중심으로 파울리의 극단적인 환경운동을 추종하는 세력도 적지 않았지만 그보다 훨씬 더 많은 적들, 그것도 그를 죽이고 싶을 정도로 증오한 자들이 파울리 주변에 널렸기 때문입니다. 파울리가 가르치던 학생, 이혼한 전처, 갈등중인 이웃은 물론 환경과 동물보호 문제로 잦은 충돌을 빚던 기업이나 관료, 심지어 동물원 원장까지 용의선상에 오르고 특히 최근 도로확장 계획을 놓고 거세게 대립하던 관계자들도 수사대상에 오르지만 출구는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유력한 용의자들이 하나둘씩 무혐의 처분을 받는 가운데 파울리를 추종하던 청년 한 명이 살해되자 피아와 보덴슈타인은 동일범의 소행으로 확신합니다.

 

끄떡하면 새로운 용의자가 나타나고, 강력한 살해 동기를 가졌다 싶어서 쫓아가보면 막다른 골목에서 막혀버리니 사람 환장할 노릇 아닌가! (p243)

 

이 작품의 구도를 잘 압축해놓은 보덴슈타인의 탄식입니다. 전작인 시리즈 첫 편 사랑받지 못한 여자역시 모두가 죽이고 싶었던 여자라는 제목이 더 어울릴 만큼 수많은 용의자가 등장하고 그에 따른 부수적 사건들이 여러 건 발생했는데, ‘너무 친한 친구들은 그에 못잖은 복잡한 구도로 이뤄진 작품입니다.

살해된 환경운동가 파울리는 생전에 그 언행이 지나치게 과격하고 공격적이라 사방팔방에 그를 죽이고 싶어 하는 적들을 만들었습니다. 자연히 피아와 보덴슈타인의 수사는 닥치는대로 여기저기 찔러보기’, ‘알리바이가 모호하거나 심증이 가는 인물은 일단 체포하기등 조금은 막무가내 식으로 전개될 수밖에 없었고, 그런 와중에 사건 관련자인 청년 한 명까지 살해되자 그야말로 막다른 벽에 부딪히고 맙니다. 더 난감한 것은 두 남자가 살해된 메인 사건 못잖게 주변 인물들이 관련된 부수적 사건들까지 사방에서 요동치는 바람에 피아와 보덴슈타인을 혼란 속에 빠뜨린다는 점입니다.

 

이런 복잡한 설정은 때론 독자에게 도전적인 추리 욕구를 자극하기도 하지만, 때론 이야기의 향방을 모호하게 만드는 부작용을 낳기도 합니다. 개인적으론 후자의 경향이 강했다는 느낌인데, 추정하자면 메인 사건 자체가 사이즈도 작고 강렬하지 못하다 보니 주변 인물들과 부수적인 사건이 애초 의도보다 훨씬 더 확장된 결과 같습니다. 어느 시점부터는 피아와 보덴슈타인이 뭘 쫓고 있는지조차 헷갈리기 시작했고, ‘극렬 환경운동가의 도로확장 반대운동이라는 중요한 초기 모티브마저 희미해진 느낌을 받았습니다.

가장 아쉬웠던 건 마지막에 밝혀진 범인의 정체와 동기가 앞서 펼쳐진 그 복잡한 구도를 다소 허무하게 만들 정도로 단순했다는 점인데, 역자 후기에 실린 이해받고 싶고 인정받고 싶은 욕구가 채워지지 않을 때 욕망은 비틀리고 걷잡을 수 없는 괴물로 변한다.”는 이 작품의 주제를 위해 그토록 많은 용의자와 부수적 사건들이 반드시 필요했던 건 아니라는 생각입니다. 전작인 사랑받지 못한 여자가 복잡한 구도 속에서도 나름 하나의 방향으로 이야기가 응집됐다면 너무 친한 친구들은 왠지 갈팡질팡하다가 이야기 자체가 미궁에 빠진 듯 보였습니다.

 

시리즈 초반이라 주요 등장인물들의 개인사나 과거에 대한 설명이 자주 등장했는데, 피아의 경우 20대 초반에 겪은 끔찍한 사건과 그로 인한 트라우마, 용의자 중 한 명인 동물원 원장 크리스토프 산더와 위험한 감정을 주고받는 에피소드, 또 여성비하적인 시선을 가진 저질 캐릭터 형사와의 충돌이 눈에 띄었고, 보덴슈타인 역시 중년의 위기를 겪는 듯한 아내 코지마와의 갈등, 사춘기의 절정을 달리는 딸 로잘리와의 충돌이 흥미롭게 읽혔습니다. 이미 이 시리즈의 최근작까지 다 읽은 터라 이들의 인연이 어떻게 전개될지 다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과거를 다시 들여다보는 듯한 재미는 제법 쏠쏠한 편이었습니다.

 

워낙 오래 전에 읽어서 확실하진 않지만 다음 작품인 깊은 상처는 이 시리즈의 백미인 백설공주에게 죽음을과 함께 가장 좋은 인상을 받은 걸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시리즈를 순서대로 다시 읽다 보면 등장인물들의 성장과 변화를 한눈에 파악할 수 있는데, 그와 함께 작가의 성장을 미세하게나마 감지할 수 있는 경우도 종종 있습니다. 시리즈 초반의 두 작품이 좀 어수선했다면 세 번째 작품부터 넬레 노이하우스의 진짜 저력이 발휘되기 시작했다고 할까요? 물론 이후에도 다소 아쉬웠던 작품도 있긴 하지만, 어쨌든 그녀의 성장을 지켜보는 일이 스토리 못잖게 흥미진진한 건 분명한 사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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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에스트라
L.S. 힐턴 지음, 이경아 옮김 / 열린책들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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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우한 환경에서도 열심히 노력하여 런던의 미술품 경매회사에 입사한 주디스. 그녀는 노력한 만큼 성공하고픈 순수한 바람을 품었지만, 탐욕스럽고 이기적인 상사에게 해고당하고 맙니다. 먹고 살기 위해 친구 린의 권유로 시작한 샴페인 클럽 접대 아르바이트 중 자신을 지목한 고도비만의 유부남 제임스 덕분에 대출금과 생활비의 위기를 넘긴 주디스는 어느 날 그와 함께 남프랑스로 여행을 떠납니다. 하지만 예기치 못한 사고로 제임스가 사망하자 주디스는 스스로도 놀랄만한 선택을 합니다. 사고를 은폐하고 그의 돈을 챙겨 도망치기로 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날 이후 주디스의 삶엔 연이은 죽음이 등장합니다.

 

누구에게나 인생에 커다란 변곡점 한두 개는 있기 마련입니다. 누군가를 만난 탓에, 뭔가를 보거나 겪은 탓에 혹은 새로운 꿈과 욕망을 품게 된 탓에 직전까지와는 전혀 다른 모양새를 갖게 됩니다. 변곡점 이전의 주디스는 불우한 환경에서도 미술에 대한 열정을 놓지 않았고, 경매회사에 들어온 뒤론 자신의 재능을 발휘하기 위해 성실히 노력했습니다. 가끔 스트레스를 받을 때마다 비밀스런 난교 파티에 참석하여 거침없이 욕망을 발산하는 점만 제외하면 주디스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에서 앤 해서웨이가 연기한 앤디를 떠올리게 하는 인물입니다.

하지만 그런 주디스에게 한꺼번에 들이닥친 변곡점들 회사의 해고 통보, 우연히 만난 친구 린 때문에 시작한 접대 아르바이트, 든든한 스폰서 제임스의 갑작스런 죽음 은 이후 그녀의 삶을 180도 바꿔놓습니다. 그리고 생존과 복수를 위해, 또 욕망과 희열을 위해 거침없이 폭주하기 시작한 그녀는 악녀이자 팜므 파탈이자 소시오패스로 진화합니다.

 

주디스의 전광석화와도 같은 변신은 독자에 따라 당황스럽게 보일 수 있습니다. 첫 사고(제임스의 죽음) 이후 적극적으로 사기와 살인을 저지르며 동시에 원초적인 욕망을 채우는 일도 잊지 않는 그녀의 폭주는 사람이 이렇게 변할 수도 있나?”라는 의문을 품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특히 죄책감 하나 없이 눈앞의 장애물을 잔혹하게 제거하는 장면들은 이 모든 일이 어떻게 시작되었느냐고 묻는다면, 처음에는 우연이었다고 답할 수밖에 없는 게 솔직한 마음이다.”라는 이 작품의 첫 문장에 담긴 소박한 변명은 다소 생뚱맞아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숱한 위기를 겪는 가운데 유럽 곳곳을 휘젓는 주디스의 광폭 행보는 위화감이나 의문이 더 깊어질 틈을 주지 않고 연신 페이지를 넘기게 만들어서 독자는 ?”하면서도 그저 몰입할 수밖에 없게 됩니다. 덧붙여 이 작품에 ‘19금 딱지를 붙인 무척이나 노골적이고 농도 짙은 성적 묘사는 적절한 타이밍마다 등장하여 독자의 눈길을 사로잡습니다.

 

인터넷 서점이나 블로그 서평을 보면 주디스에 대한 극과 극의 반응을 엿볼 수 있는데, 한쪽이 괴물이 된 채 자신의 목표와 정체성을 잃어버린 여자.”라면, 다른 한쪽은 욕망에 충실한 주디스의 두 번째 삶은 파괴적이긴 해도 매혹적이다.”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개인적으론 두 반응의 중간쯤에 한 표를 던지고 싶은데, 고백하자면, 주디스를 마냥 응원하기도 어렵고 그렇다고 매도하거나 비난하기도 어려운 애매한 엔딩 때문입니다. 아마 적잖은 독자가 이런 어중간한 여운을 품은 채 마지막 장을 덮지 않았을까 생각됩니다.

 

에로틱 스릴러로 분류되긴 했지만 사실 스릴러로서의 매력은 다소 떨어집니다. 무엇보다 첫 사건이 벌어지기 전까지의 산만하고 장황한 초중반부는 중도포기를 고민하게 할 만큼 느슨하거나 지루했고(야박한 평점의 가장 큰 이유입니다.), 그 뒤에 벌어지는 주디스의 행적들 역시 스릴러라기보다는 괴물로의 진화 기록에 가까워보였기 때문입니다. 그마저도 사족처럼 느껴진 대목들이 많아서 500페이지가 넘는 분량이 과도하게 느껴졌는데, 말 그대로 순삭했다는 독자들도 많은 걸 보면 취향에 따라 호불호가 많이 갈릴 수 있겠다는 생각입니다.

한 가지만 덧붙이면, ‘19금 딱지에 어울리는 높은 수위의 묘사가 자주 등장하긴 하지만 마에스트라는 결코 성애소설이 아니며 그런 호기심만으로 선택할 작품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강렬한 성적 욕망이 주디스의 주된 캐릭터인 건 맞지만 작품 전체를 놓고 보면 높은 수위의 성적 묘사는 양념 정도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젊은 시절의 주디스에게 깊고 강렬한 인상을 남겼으며 동시에 그녀의 폭풍 같은 삶을 대변하는 두 그림을 소개합니다. 왼쪽은 브론치노의 비너스, 큐피드, 어리석음과 세월’(Venus, Cupid, Folly and Time), 일명 시간과 사랑의 알레고리인데, 이 작품이 미술을 사랑하는 10대 시절 주디스의 순수한 열정을 반영하고 있다면, 오른쪽의 젠틸레스키의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치는 유디트는 변곡점을 맞이한 뒤 욕망 덩어리가 된 주디스의 폭주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작품입니다. 이 그림들이 거론되는 대목에서 잠시 책을 내려놓고 그림을 찬찬히 들여다본다면 주디스의 내면을 좀더 생생하게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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