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피스, 잔혹한 소녀들
에이버리 비숍 지음, 김나연 옮김 / 하빌리스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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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밀리 베넷은 마음의 상처를 입은 청소년들을 도와주는 심리치료사다. 그녀는 아직도 자신의 발목을 붙잡고 있는 과거의 망령에 사로잡혀 있다. 14년 전, 에밀리는 금수저라는 특혜를 등에 업고 비행을 일삼던 여섯 명의 여중생이 결성한 하피스의 멤버였다. 하피스 패거리는 전학생 그레이스를 괴롭히던 끝에 결코 넘어선 안 될 선까지 넘어버렸고, 그 비밀을 지키자며 피의 맹세까지 나눴다. 14년이 흘러 하피스 멤버들의 연이은 자살 소식을 들은 에밀리는 어딘가 석연치 않은 구석을 발견한다. 게다가 그녀 또한 정신이 망가진 건지 여기저기서 그레이스의 환영을 목격한다. 과연 그레이스가 복수를 위해 돌아온 걸까? 혹시 에밀리의 죄책감이 스스로를 파괴하고 있는 건 아닐까? (출판사의 소개글을 일부 수정, 인용했습니다.)

 

하피스는 역자의 설명에 따르면 여자의 머리와 몸에 새의 날개와 발을 가진 고대 신화 속 괴물”, 여자의 얼굴을 가진 맹금류란 뜻입니다. 흙수저지만 유치원 시절부터의 인연으로 본의 아니게 하피스가 된 에밀리를 제외한 나머지 다섯 명은 모두 금수저에 소시오패스 기질이 다분했습니다. 그녀들은 왕따, 뒷담화, 폭력, 절도 등 온갖 악행으로 학생들은 물론 교사들에게까지 소문난 악마들이었습니다. 한때 북한도 두려워하는 대한민국 중2”라는 웃지 못 할 농담이 돌아다녔지만, 하피스의 위세가 등등했던 시기가 중2로 설정된 걸 보면 14~15살의 잔혹성은 국적 불문의 진리가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하피스의 악행이 정점을 찍은 건 숫기 없는 여학생 그레이스가 전학을 오면서부터 시작됐습니다. 흙수저인 탓에 언제라도 하피스에서 쫓겨날 걸 두려워하던 에밀리는 하피스가 될 자격이라곤 전혀 없던 그레이스를 자신을 대체할 희생양이라 여겼고, 결국 그레이스는 에밀리의 손에 이끌려 하피스의 일원이 됐습니다. 그리고 몇 달 동안 이루 말할 수 없는 수모와 폭력에 시달리던 그녀는 자살을 시도한 뒤 학교를 떠나야만 했습니다.

이후 하피스는 해체되다시피 했지만 그 누구도 그레이스 사건에 대해 제대로 된 처분을 받지 않았습니다. (에밀리를 제외하곤) 반성은커녕 자신들의 죄를 완벽하게 감추는데 성공한 셈입니다. 그런 탓에 14년이 지난 현재 연이은 하피스 멤버들의 자살 소식은 에밀리를 충격에 빠뜨립니다. 아무리 긴 시간이 흘러도 하피스의 악마적인 기질은 변치 않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에밀리는 그레이스의 복수가 시작됐다.”라는 막연하지만 끔찍한 자신의 추리가 결코 허황된 망상이 아님을 점점 더 절감하게 됩니다.

 

이런 배경 하에 이야기는 과거 하피스의 만행현재 에밀리의 진실 찾기로 나뉘어 전개됩니다. 기본적으론 범인을 쫓는 미스터리지만 이 작품은 심리스릴러로서의 미묘하고 팽팽한 긴장감을 지니고 있기도 합니다. 하피스의 통제 불가능한 악마적 심리도 세세히 묘사됐고, 하피스에서의 악행에 대한 반성으로 청소년 심리치료사가 된 에밀리의 내면 역시 사건 못잖게 큰 비중으로 그려지기 때문입니다. 에밀리는 치료사지만 스스로도 상담을 받는 환자이기도 합니다. 여전히 하피스 시절의 악몽이 그녀를 괴롭히고 있는데다 단순히 반성이라고 하기엔 너무나도 막중한 회한이 그녀의 몸과 마음을 지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선명한 미스터리 해결법 대신 다소 모호하게 마무리될 것만 같던 이야기는 막판 반전을 통해 그 진상을 드러냅니다. 그리고 이 작품의 원제인 ‘Girl Gone Mad’에 숨겨진 의미 역시 뚜렷하게 밝혀집니다. 추리의 주인공인 에밀리조차 완벽하게 알아내지 못한 진실이 독자에게 폭로되는 순간 (출판사 소개글처럼 식스센스 급 반전은 아니더라도) “와우~ 이럴 수도 있겠구나!”라는 반전의 쾌감을 만끽할 수 있습니다. 자칫 뻔한 엔딩이 될 수도 있는 상황에서 작가가 동원한 몇 가지 결정적 설정들이 막판에 제대로 된 힘을 발휘했다고 할까요?

 

학교폭력, 소시오패스, 계급과 권력, 트라우마, 복수, 소셜미디어의 문제 등 다양한 소재들이 한데 버무려진 하피스, 잔혹한 소녀들은 같은 주제를 다룬 작품들과 큰 틀에서는 비슷한 흐름을 보이지만 심리스릴러의 미덕까지 가미된 덕분에 전혀 다른 맛을 내는 작품이 됐습니다. 다만, 유일한 아쉬움은 분량의 문제인데, 조금만 더 슬림했더라면 속도감이나 몰입감 모두 훨씬 대단했을 거란 점에서 520페이지는 주제나 소재에 비해 다소 과해 보인 게 사실입니다.

에이버리 비숍은 독자의 선입관을 배제하기 위해 유명작가가 사용한 필명이라고 합니다. 인터넷 서점에서 찾아보니 이 필명으로 모두 세 편의 작품이 출간됐는데 한국에는 하피스, 잔혹한 소녀들이 처음으로 소개된 작품입니다. 이 작품이 좋은 결과를 낸다면 나머지 두 작품도 만나볼 수 있을 것 같은데 개인적으론 충분히 기대해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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