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에스트라
L.S. 힐턴 지음, 이경아 옮김 / 열린책들 / 2019년 6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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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우한 환경에서도 열심히 노력하여 런던의 미술품 경매회사에 입사한 주디스. 그녀는 노력한 만큼 성공하고픈 순수한 바람을 품었지만, 탐욕스럽고 이기적인 상사에게 해고당하고 맙니다. 먹고 살기 위해 친구 린의 권유로 시작한 샴페인 클럽 접대 아르바이트 중 자신을 지목한 고도비만의 유부남 제임스 덕분에 대출금과 생활비의 위기를 넘긴 주디스는 어느 날 그와 함께 남프랑스로 여행을 떠납니다. 하지만 예기치 못한 사고로 제임스가 사망하자 주디스는 스스로도 놀랄만한 선택을 합니다. 사고를 은폐하고 그의 돈을 챙겨 도망치기로 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날 이후 주디스의 삶엔 연이은 죽음이 등장합니다.

 

누구에게나 인생에 커다란 변곡점 한두 개는 있기 마련입니다. 누군가를 만난 탓에, 뭔가를 보거나 겪은 탓에 혹은 새로운 꿈과 욕망을 품게 된 탓에 직전까지와는 전혀 다른 모양새를 갖게 됩니다. 변곡점 이전의 주디스는 불우한 환경에서도 미술에 대한 열정을 놓지 않았고, 경매회사에 들어온 뒤론 자신의 재능을 발휘하기 위해 성실히 노력했습니다. 가끔 스트레스를 받을 때마다 비밀스런 난교 파티에 참석하여 거침없이 욕망을 발산하는 점만 제외하면 주디스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에서 앤 해서웨이가 연기한 앤디를 떠올리게 하는 인물입니다.

하지만 그런 주디스에게 한꺼번에 들이닥친 변곡점들 회사의 해고 통보, 우연히 만난 친구 린 때문에 시작한 접대 아르바이트, 든든한 스폰서 제임스의 갑작스런 죽음 은 이후 그녀의 삶을 180도 바꿔놓습니다. 그리고 생존과 복수를 위해, 또 욕망과 희열을 위해 거침없이 폭주하기 시작한 그녀는 악녀이자 팜므 파탈이자 소시오패스로 진화합니다.

 

주디스의 전광석화와도 같은 변신은 독자에 따라 당황스럽게 보일 수 있습니다. 첫 사고(제임스의 죽음) 이후 적극적으로 사기와 살인을 저지르며 동시에 원초적인 욕망을 채우는 일도 잊지 않는 그녀의 폭주는 사람이 이렇게 변할 수도 있나?”라는 의문을 품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특히 죄책감 하나 없이 눈앞의 장애물을 잔혹하게 제거하는 장면들은 이 모든 일이 어떻게 시작되었느냐고 묻는다면, 처음에는 우연이었다고 답할 수밖에 없는 게 솔직한 마음이다.”라는 이 작품의 첫 문장에 담긴 소박한 변명은 다소 생뚱맞아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숱한 위기를 겪는 가운데 유럽 곳곳을 휘젓는 주디스의 광폭 행보는 위화감이나 의문이 더 깊어질 틈을 주지 않고 연신 페이지를 넘기게 만들어서 독자는 ?”하면서도 그저 몰입할 수밖에 없게 됩니다. 덧붙여 이 작품에 ‘19금 딱지를 붙인 무척이나 노골적이고 농도 짙은 성적 묘사는 적절한 타이밍마다 등장하여 독자의 눈길을 사로잡습니다.

 

인터넷 서점이나 블로그 서평을 보면 주디스에 대한 극과 극의 반응을 엿볼 수 있는데, 한쪽이 괴물이 된 채 자신의 목표와 정체성을 잃어버린 여자.”라면, 다른 한쪽은 욕망에 충실한 주디스의 두 번째 삶은 파괴적이긴 해도 매혹적이다.”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개인적으론 두 반응의 중간쯤에 한 표를 던지고 싶은데, 고백하자면, 주디스를 마냥 응원하기도 어렵고 그렇다고 매도하거나 비난하기도 어려운 애매한 엔딩 때문입니다. 아마 적잖은 독자가 이런 어중간한 여운을 품은 채 마지막 장을 덮지 않았을까 생각됩니다.

 

에로틱 스릴러로 분류되긴 했지만 사실 스릴러로서의 매력은 다소 떨어집니다. 무엇보다 첫 사건이 벌어지기 전까지의 산만하고 장황한 초중반부는 중도포기를 고민하게 할 만큼 느슨하거나 지루했고(야박한 평점의 가장 큰 이유입니다.), 그 뒤에 벌어지는 주디스의 행적들 역시 스릴러라기보다는 괴물로의 진화 기록에 가까워보였기 때문입니다. 그마저도 사족처럼 느껴진 대목들이 많아서 500페이지가 넘는 분량이 과도하게 느껴졌는데, 말 그대로 순삭했다는 독자들도 많은 걸 보면 취향에 따라 호불호가 많이 갈릴 수 있겠다는 생각입니다.

한 가지만 덧붙이면, ‘19금 딱지에 어울리는 높은 수위의 묘사가 자주 등장하긴 하지만 마에스트라는 결코 성애소설이 아니며 그런 호기심만으로 선택할 작품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강렬한 성적 욕망이 주디스의 주된 캐릭터인 건 맞지만 작품 전체를 놓고 보면 높은 수위의 성적 묘사는 양념 정도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젊은 시절의 주디스에게 깊고 강렬한 인상을 남겼으며 동시에 그녀의 폭풍 같은 삶을 대변하는 두 그림을 소개합니다. 왼쪽은 브론치노의 비너스, 큐피드, 어리석음과 세월’(Venus, Cupid, Folly and Time), 일명 시간과 사랑의 알레고리인데, 이 작품이 미술을 사랑하는 10대 시절 주디스의 순수한 열정을 반영하고 있다면, 오른쪽의 젠틸레스키의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치는 유디트는 변곡점을 맞이한 뒤 욕망 덩어리가 된 주디스의 폭주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작품입니다. 이 그림들이 거론되는 대목에서 잠시 책을 내려놓고 그림을 찬찬히 들여다본다면 주디스의 내면을 좀더 생생하게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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