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년째 농담 중인 고가티 할머니
레베카 하디먼 지음, 김지선 옮김 / 북로드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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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일랜드 가족 3대가 펼치는 전대미문의 애정 활극이란 카피가 눈에 쏙 들어온 작품입니다. 이 카피를 보자마자 떠오른 건 중국 작가 디안의 개처럼 싸우고 꽃처럼 아끼고였는데, 한국형 막장드라마를 지독하게 확장시킨 듯한 다소 거칠고 요란한, 하지만 진저리 칠 정도로 현실적인 이야기를 다룬 작품입니다. 그렇다면 기질적으로 다소 시니컬하고 다혈질이며 배타적이라고 알고 있는 아일랜드의 가족이야기는 과연 어떻게 그려졌을까 무척 궁금해졌고, 무엇보다 주인공이 83세의 할머니라는 점 때문에 호기심이 더 일었습니다.

 

밀리 고가티는 남편과 사별한 83세의 할머니입니다. ‘옮긴이의 말에 따르면 순간의 스릴을 위해 필요도 없는 것들을 슬쩍하는 좀도둑 기질과 자신이 무대의 주인공이 되지 않으면 심통을 부리는 짜증나는 버릇이 있고, 그 어떤 가벼운 대화든 최소한 40~5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서 시작하는 등 여전히 질풍노도 한복판을 사는 인물입니다. 아무에게나 거침없이 말을 걸고, 상대가 가족이든 아니든 무례할 정도로 이것저것 요구하며, 비행기 안에서 담배를 피우는 건 예사이고 상황이 불리할 땐 치매노인으로 즉각 변신하는 악동이기도 합니다.

 

이 작품의 두 번째 주인공으로 밀리보다 무려 67년이나 어리지만 악동 기질에 관한 한 쌍벽을 이루는 인물은 16살 소녀 에이딘입니다. 역시 옮긴이의 말에 따르면 밀리의 손녀인 그녀는 모든 부모의 악몽을 그대로 형상화한 듯한 사춘기 여자아이입니다. 미모와 능력에서 너무나도 뛰어난데다 자신을 하찮게 여기는 쌍둥이 언니 누알라를 원수로 여기는 에이딘은 그로 인한 스트레스를 모든 가족에게 거침없이 퍼붓습니다. 특히 아빠 케빈은 에이딘의 이나 다름없습니다. 말하자면 평범한 사춘기를 뛰어넘는 극한의 트러블메이커라고 할까요?

 

세상에 못마땅한 것투성이고 속칭 금사빠(금방 사랑에 빠지는 사람)에 항상 잘못된 결정을 내려 불필요한 재앙을 자초한다는 공통점을 지닌 밀리와 에이딘이지만, 두 사람 모두 실은 무척 소심하고 연약한 성격입니다. 밀리는 첫 아기를 잃어버린 상심과 사별한 남편에 대한 그리움을 마음 깊이 간직하고 있고, 에이딘은 약해 보이지 않기 위해사방팔방에 분노를 터뜨리며 위악을 떨긴 해도 딱 그 또래의 소녀일 뿐입니다. 그런 두 사람이 하나는 양로원에서, 또 하나는 기숙학교에서 본인들이 원치 않는 유배생활(?)을 시작하게 되는데, 생각지도 못한 우연한 사건들로 인해 각각의 유배지를 벗어나 기막힌 모험을 감행하면서 동료가 되고 동지가 되고 예전과는 다른 할머니-손녀 관계를 이루는 이야기가 이 작품의 골자입니다.

 

밀리와 에이딘의 공동의 적은 바로 밀리의 아들이자 에이딘의 아버지인 케빈입니다. 평생 해오던 잡지 일에서 해고당한 뒤 전업주부가 된 그는 여행업계에서 승승장구하며 야근과 출장을 거듭하는 아내를 지켜보며 자괴감과 열패감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의도적인 건 아니지만 말문이 통하지 않는 고집불통 어머니와 말썽쟁이 딸에게 유독 예민하게 구는 건 그런 그의 처지와 결코 무관하진 않습니다. 어머니를 양로원으로, 딸을 기숙학교로 유배 보내긴 했어도 결코 비열하거나 못된 인간은 아니지만, 그 스트레스를 엉뚱하게 자기 나이 절반도 안 되는 여학교 행정직원과의 불륜 로망으로 풀어볼까, 궁리하는 소심한 악당인 건 사실입니다.

 

이 작품에는 영어 F로 시작하는 욕을 번역한 ㅆㅂ이란 단어가 무수히 등장합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욕이 등장할 때마다 웃음이 튀어나옵니다. 진짜 욕 하고 싶겠다, 라는 공감 때문이기도 하고, 그 상황을 깔끔하게 대변하는 유일한 수식어처럼 보이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독자에 따라 불편함을 느낄 수도 있겠지만, 개인적으론 이 단어가 이 작품의 제목이었어도 괜찮았을 거란 생각입니다.

 

출판사 소개글대로 언제 어느 부위가 찢어질지 모르는 누더기로 만든 옷처럼 위태로운고가티 가족은 일대 소동을 거쳐 다시 한자리에 모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억지스런 해피엔딩으로 포장되진 않습니다. 물론 모두가 처음보다는 조금은 편하게 웃을 수 있게 됐고 마음도 가벼워지긴 했지만 이들의 갈등은 언제라도 다시 터질 수 있는 시한폭탄인 것 역시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찢어지기 직전 가까스로 누더기를 봉합해낸 83살 밀리와 16살 에이딘의 분투는 독자에게 기분 좋은 웃음과 함께 마지막 장을 덮게 만들어줍니다.

 

끝으로, 아일랜드 특유의 유머와 유려하면서도 눈에 쏙 들어오는 작가의 매력적인 문장은 주인공들의 분투를 빛나게 만든 가장 큰 힘이었습니다. 특히 한없이 길게 늘어져도 전혀 어렵지 않게 읽혔던 문장들은 작가의 힘이자 번역자의 공이란 생각입니다. 이 작품으로 데뷔한 레베카 하디먼이 다음엔 어떤 이야기를 들고 독자를 찾을지 벌써부터 기대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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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수는 나의 것 - 마이크 해머 시리즈 3 밀리언셀러 클럽 32
미키 스필레인 지음, 박선주 옮김 / 황금가지 / 200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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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정 마이크 해머와 함께 호텔방에 묵었던 친구가 밤사이 총에 맞아 사망합니다. 문제는 해머는 만취하여 아무 것도 기억 못한다는 점, 또 사용된 총기가 하필 해머의 것이란 점입니다. 평소 해머를 못마땅하게 여기던 검사는 그를 용의선상에 올린 것은 물론 탐정 면허까지 취소시키지만 최종적으론 자살로 결론짓습니다. 해머는 친구의 죽음이 결코 자살이 아니라고 확신하며 비밀리에 수사를 진행하는데, 친구의 행적과 근황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최근 새롭게 떠오른 관광지이자 불법 도박과 매춘이 은밀히 이뤄지는 구역, 그리고 한 파티에서 친구와 동행했던 모델과 그녀가 속한 에이전시에 주목하게 됩니다. 하지만 수사가 좀처럼 진전을 보이지 못하는 사이, 해머에 대한 살해 시도가 연이어 벌어지는 것은 물론 예기치 못한 시체들이 발견되면서 해머는 오히려 용의자로 쫓기는 상황에 처하고 맙니다.

 

복수는 나의 것’(원제 ‘Vengeance Is Mine’)은 한국에 출간된 마이크 해머 시리즈의 세 번째 작품입니다. 이 작품을 끝으로 20년 가까이 후속작 소식이 없었으니 앞으로도 남은 시리즈를 만나긴 어려울 것 같지만, 희대의 폭주탐정 마이크 해머의 이야기를 세 편이나마 만날 수 있었던 건 그나마 다행이었다는 생각입니다. (‘마이크 해머 시리즈1947~1996년에 걸쳐 모두 13편이 출간됐습니다.)

 

난 살인자들을 쏘는 것을 정말 좋아한다. 살인자를 쏘아 그 피가 바닥에 퍼지는 것을 지켜보는 것보다 더 즐거운 일은 생각할 수도 없을 정도다. 살인을 하고도 빠져나가는 나쁜 놈들을 죽이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p263)

 

이 시리즈의 첫 편 제목인 내가 심판한다’(원제 ‘I, The Jury’)는 탐정 마이크 해머의 캐릭터를 한눈에 확실하게 보여줍니다. “법보다 주먹이 가깝다.”는 소신과 함께 살인자에겐 재판 따위 필요 없고 내가 직접 응징하고 처단한다.”는 행동원칙을 가진 해머는 매번 45구경 권총을 거침없이 쏘아대며 폭주탐정의 매력을 발산합니다. 경찰과의 트러블은 말할 것도 없고 언제라도 그가 삐끗하기만을 기다리는 검찰과의 신경전도 해머의 폭주를 전혀 막지 못합니다.

 

그런 해머가 이번에는 복수는 나의 것이란 제목대로 앞선 두 편보다 훨씬 더 강렬한 에너지를 장착합니다. 피살자가 5년 만에 재회한 친구란 점, 살인용의자로 지목당해 탐정 면허까지 빼앗긴 점, 수사 도중 연이어 피습을 당한 점, 그리고 사건관련자들이 줄줄이 살해되는 점 등 해머에게 복수와 증오심을 불러일으킬 재료들은 그야말로 넘쳐날 정도로 많습니다.

약간의 우연과 행운, 생각지 못했던 정보들이 결정적인 도움을 주긴 했지만 해머의 추리 역시 사건 해결에 큰 역할을 합니다. 몇 차례의 반전 끝에 진범에 도달하는 과정에서 해머는 오해와 섣부른 판단을 저지르기도 하지만 작가는 해머가 단지 거침없이 총만 쏴대는 무력꾼이 아니라 나름의 혜안과 추리력을 겸비한 명탐정임을 여러 차례 입증해보입니다.

 

해머에게는 두 명의 중요한 조연이 있는데, 하나는 절친이자 뉴욕경찰 강력반 반장인 패트릭 체임버스(일명 팻)이고, 또 하나는 밀당의 로맨스를 주고받는 비서 벨다 스탈링입니다. 뛰어난 능력자인 해머를 경찰에 영입하기 위해 여러 차례 노력했다가 거절만 당해온 팻은 매번 해머에게 뒤통수를 맞거나 잘 해야 본전도 못 찾는 캐릭터지만 이번 작품에서는 자신의 직을 걸고 해머를 돕는 강수를 두기도 합니다. 탐정면허까지 가진 매력적인 비서 벨다 역시 그동안 다소 애매한 수준에 머물던 해머와의 밀당을 과감하게 밀어붙이는가 하면, 모처럼 사무실을 벗어나 위험을 무릅쓰고 전력을 다해 해머의 수사를 도와 눈길을 끌었습니다.

 

다만, 앞선 두 편과 마찬가지로 해머의 수사는 간혹 뜬금없는 비약과 개연성 부족한 급진전 때문에 몇몇 대목에서 위화감을 자아내곤 합니다. 자연스러운 흐름이라기보다는 작가가 설계해놓은 경로대로 인물과 사건이 움직이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복수는 나의 것은 전작들에 비해 그런 경향이 좀더 노골적이어서 초반부터 좀 헤맨 게 사실입니다. 주인공의 매력과는 무관하게 미스터리 서사 자체가 살짝 허술해 보인 건 가장 아쉬운 점이었습니다.

 

1950년에 출간된 작품이라 과학수사도, 인터넷도, 스마트폰도 없이 오로지 아날로그 방식으로 싸워야하는 해머의 처지가 안쓰러워 보이곤 하지만, 어쩌면 그 덕분에 해머의 카리스마와 매력이 더 빛났는지도 모릅니다. 이후 해머가 어떤 사건을 겪으면서 어떻게 성장해나갔는지 알 길은 요원하지만, 그래도 하드보일드의 살아있는 신화라 불리는 마이크 해머 시리즈가 언젠가는 한국에서 재조명받을 수도 있을 거란 기대를 쉽게 포기하고 싶진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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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펙트 커플
재키 캐블러 지음, 김효정 옮김 / 북플라자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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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을 떠나 브리스톨의 고급주택가 클리프턴에 자리를 잡은 30대 부부 젬마와 대니는 새 집과 주변 풍광에 만족하며 여유 있는 삶을 만끽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남편 대니가 사라지고, 젬마는 패닉 상태에 빠집니다. 그 무렵 대니와 비슷한 외모의 남자들이 연이어 살해당한 사건 때문에 초긴장상태에 있던 경찰은 대니 역시 동일범에 의한 피해자가 아닐까 추측합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모든 정황이 젬마를 가리키기 시작합니다. 경찰은 대니가 오래 전에 런던에서 살해됐을 지도 모른다는 추정과 함께 젬마를 의심하는데, 대니가 살아 돌아오지 않는 이상 혐의를 벗을 수 없음을 깨달은 젬마는 공포와 절망감에 사로잡힙니다.

 

여러 번 실망을 겪은 탓에 웬만해선 가족이나 부부가 등장하는 심리 스릴러는 읽지 않는 편인데, ‘나를 찾아줘와 비슷한 인상을 풍기는 홍보카피에 끌려 읽게 된 작품입니다. 100페이지 내에 확실한 미끼가 안 보이면 그만두겠다는 생각으로 첫 장을 펼쳤는데, 초반부터 연쇄살인사건이 벌어지고 흥미로운 경찰 주인공이 등장하면서 어떻게든 끝까지 달려보기로 마음을 고쳐먹었습니다.

이야기의 뼈대는 심플합니다. 멀쩡하던 남편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그와 비슷한 외모의 남자들이 연이어 살해되고, 경찰은 남편을 잃은 아내를 동정하다가 점차 그녀가 혹시 연쇄살인범이 아닐까?”라고 추정하게 되고, 그러다가 막판에 예기치 못한 상황이 벌어지면서 실종과 살인의 진상이 밝혀집니다.

 

사라진 남편 때문에 절망에 빠진 젬마의 공포와 불안정한 심리가 꽤 많은 분량에 걸쳐 반복적으로 묘사된 점은 읽기 전부터 각오한 바지만, 그래도 연쇄살인사건을 수사하는 경찰의 행보가 한 챕터씩 번갈아 전개된 덕분에 지루하고 실망스럽기만 했던 다른 심리 스릴러들에 비하면 페이지를 수월하게 넘길 수 있었습니다. 특히 생각지도 못한 단서들이 하나하나 밝혀지면서 젬마가 점차 유력한 용의자로 업그레이드되는 구성은 그 자체로 흥미롭기도 하거니와 혹시 젬마가 진짜 범인일까?”라는, 위화감 가득한 의구심까지 갖게 만들기도 합니다.

 

마지막에 밝혀진 대니 실종 사건의 진실이나 비슷한 외모를 가진 남자들이 연이어 살해당한 사건의 진상은 충격적인 반전이라고 하기엔 조금 무리지만, 진범의 범행동기 자체는 예상 밖의 신선함(?)을 제공합니다. 미스터리를 푸는 과정에 운이 과도하게 영향을 미치긴 했어도 뜻밖의 범행동기 덕분에 큰 허점으로 보이진 않았습니다. 물론 독자에 따라 클라이맥스와 엔딩을 무리수로 평가하는 경우도 적지 않을 것이고, 제 경우엔 심리 스릴러를 향해 한껏 낮아진 눈높이 때문에 상대적으로 기대보다 괜찮았다고 느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눈물과 한숨과 자책이 뒤섞인 젬마의 절망감에 대한 반복적 묘사라든가 경찰과 젬마 모두 각자 억지라는 걸 알면서도 거듭 이리저리 가설을 세워보는 장면들이 간혹 짜증을 일으키긴 했지만 심리 스릴러와 연쇄살인 미스터리가 적절하게 안배돼서 큰 거부감 없이 마지막까지 한 번에 완주할 수 있었습니다. 더불어 그 매력이 온전히 발휘되지 않아 아쉽긴 했지만 에이번 경찰서의 헬레나 경감과 데번 경사 콤비는 시리즈가 기대될 만큼 눈길을 끈 캐릭터였습니다.

 

그리 높은 평점을 주진 못했지만, 심리 스릴러에 지친 독자라도 충분히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작품이니 다른 분들의 서평도 참고해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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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자와 죽은 자 스토리콜렉터 32
넬레 노이하우스 지음, 김진아 옮김 / 북로드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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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 크리스토프와 긴 여행을 준비하던 호프하임 경찰서 강력11반의 피아 키르히호프는 크리스마스 시즌에 벌어진 연이은 살인사건 탓에 여행을 포기하고 수사에 합류합니다. 희생자들은 평범하고 원만한 사람들이었지만, 파괴력이 큰 총알에 의해 뇌와 심장을 관통당합니다. 단서 하나 못 잡고 당황하던 피아와 강력11반 반장 보덴슈타인은 어느 날 부고장으로 꾸며진 범인의 메시지를 받습니다. 그리고 범인이 10년 전 장기이식수술 과정에서 일어난 비극에 대한 복수를 벌이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하지만 무수한 용의자만 수면 위로 떠올랐을 뿐 그 누구도 범인으로 특정하기 힘든 난감한 상황이 이어집니다. ‘타우누스 스나이퍼로 별명 붙은 범인의 복수극은 크리스마스 시즌을 지나 새해가 돼서도 멈출 줄 모릅니다.

 

타우누스 시리즈가운데 뿌리 깊은 원한에 기인한 복수극을 그린 깊은 상처와 여러 모로 비슷한 느낌을 준 작품입니다. 목적을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잔인함에다 결코 만족할 줄 모르는 탐욕까지 장착한 추악한 인간들, 그들로 인해 몸과 마음에 치유 불가능한 상처를 입고 지옥 같은 삶을 살아야했던 사람들, 그리고 자신이 상처받은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탐욕의 화신들을 향해 복수하는 범인 등 캐릭터와 사건은 물론 정서나 여운에 이르기까지 닮은 부분이 무척 많기 때문입니다.

 

작가는 초반부터 범인이 뛰어난 저격수라는 점은 물론 그 정체가 주요 등장인물 중 한 명이라는 점을 명백히 밝히지만, ‘누구나범인이 될 가능성과 동기를 지니고 있기에 독자는 마지막까지 인물 하나하나에 집중해야만 합니다. 또한 피해자 가족에게 전달된 부고장 형식의 메시지를 통해 범인의 의중과 희생자들 사이의 연관성까지 공개함으로써 경찰과 독자에게 일종의 도전장을 던지기도 합니다.

 

죄 지은 자들은 고통을 맛보아야 한다. 그들이 무관심, 욕심, 허영, 부주의를 통해 초래한 것과 똑같은 고통을... 나는 산 자와 죽은 자를 가리러 왔으니 죄를 짊어진 자들은 두려움에 떨 것이다.” (p214)

 

하지만 피아와 보덴슈타인을 비롯한 호프하임 경찰서 강력11반은 희생자들의 면면이 범인의 주장처럼 죄를 짊어진 자들이 아닌 탓에 혼란에 빠집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범인의 목적이 단순한 복수가 아니라 자신이 겪었던 것과 똑같은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상처를 남기는 것이라는 걸 깨닫곤 큰 충격에 빠집니다.

 

범행 자체는 끔찍하고 잔혹하지만, 범인의 정체가 드러나는 순간 피아와 보덴슈타인은 물론 독자마저도 출판사의 소개글대로 배신감과 더불어 깊은 슬픔과 공감이라는 복잡하고 역설적인 감정에 빠지게 됩니다. 누구를 혐오해야 할지, 누구를 동정해야 할지, 정답을 알면서도 선뜻 답을 낼 수 없는 난감한 상황이라고 할까요? 착각일지도 모르지만, 좀처럼 감정을 드러내지 않던 보덴슈타인이 여러 차례 순도 100%의 과격한 분노를 쏟아낸 건 어쩌면 복잡하고 역설적인 감정에 빠진 독자를 대변하고 위로하기 위해선지도 모르겠습니다.

 

스나이퍼에 의한 연쇄살인사건 만큼이나 피아와 보덴슈타인이 겪는 가족 문제가 적잖은 분량에 걸쳐 묘사됩니다. 결혼을 앞둔 설렘, 아직도 앙금이 남은 전 남편 헤닝과의 관계, 그리고 20년 넘게 벽을 쌓아놓고 살아온 부모형제에 대한 증오심 등 피아의 마음속에서 복잡하게 자리 잡은 가족에 대한 애증이 그려지는가 하면, 이혼 후 삶의 뿌리가 흔들렸지만 이제는 거의 제자리로 돌아온 것처럼 보였던 보덴슈타인이 실은 여전히 혼란의 한복판에 놓여있음을 여러 가지 에피소드를 통해 보여줍니다. 가족에 대한 두 사람의 애증과 혼란은 범인에게 살해당한 희생자들의 사연과 맞물려 가족이란 무엇인지, 언제나 기대고 의지할 수 있는 소중한 존재인지, 혹시 서로에게 상처만 남기는 존재는 아닌지 등 어려운 질문들을 연이어 던집니다.

 

타우누스 시리즈의 가장 큰 매력은 개인적인 수준의 사건들을 좀더 큰 맥락의 서사 - 역사적 배경, 사회구조적 문제, 지도층의 도덕적 부패 등과 연관시킴으로써 단순히 범인 찾기에 그치지 않고 묵직한 여운과 생각할 여지를 남겨주는데 있습니다. ‘산 자와 죽은 자역시 그런 점에서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는데, 시리즈가 거듭될수록 야금야금 늘어나다가 이제는 가뿐히 600페이지를 넘기는 게 당연시된 분량이 살짝 부담스럽긴 했지만,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사적 복수라는 소재에다 사회파 미스터리의 미덕까지 겸비한 덕분에, 또 평소보다 더 많이 힘들어하고 더 많이 괴로워하고 더 날것 같은 감정들을 쏟아낸 피아와 보덴슈타인의 매력적인 콤비 플레이 덕분에 시리즈 가운데 랭킹을 매긴다면 꽤 상위권에 올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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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악한 늑대 스토리콜렉터 16
넬레 노이하우스 지음, 김진아 옮김 / 북로드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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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프하임 경찰서 강력 11팀의 피아와 보덴슈타인은 연이어 터진 미스터리한 사건들 때문에 곤혹스런 지경에 빠집니다. 성폭행과 학대의 흔적을 지닌 채 익사체로 발견된 소녀 사건은 신원확인조차 안 돼 막다른 벽에 부딪혔고, 유명 방송인 한나 헤르츠만이 지독하게 폭행당한 뒤 차 트렁크에서 발견된 사건 역시 단서 하나 잡아내기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2년 전 정직 당했던 악명 높은 동료 프랑크 벤케가 갑자기 지역범죄수사국 내사팀이 되어 나타나선 복수를 다짐하는 일까지 벌어지자 피아와 보덴슈타인은 당황스럽기만 합니다. 아무런 관련이 없어 보이던 세 개의 사건은 시간이 갈수록 한 방향을 가리키기 시작하고, 피아는 지금껏 한 번도 접해본 적 없는 끔찍한 아동 성범죄가 이 모든 사건의 배후에 있음을 알게 됩니다.

 

미스터리나 스릴러를 좋아하지만 어린 소년, 소녀가 피해자로 등장하는 이야기는 아무리 재미있어도 읽는 내내 마음이 불편할 수밖에 없습니다. 더구나 학대와 성범죄라면 더 말할 것도 없는데, ‘사악한 늑대는 이른바 아동 포르노 마피아의 끔찍한 만행을 정면으로 다룬 작품이라 두 번째 읽는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무겁고 불편한 책읽기가 되고 말았습니다.

 

앞선 시리즈들이 늘 그랬듯 굉장히 많은 등장인물과 동시다발적으로 터지는 여러 사건이 초반부터 독자의 머리를 혼란스럽게 만듭니다. 특히 사악한 늑대는 세 개의 사건이 하나 같이 복잡하게 설정돼있어서 더 어지러웠는데, 누구나 막판에 이 사건들이 한 방향으로 수렴될 거란 걸 쉽게 짐작할 수 있지만, 중반까지만 해도 과연 어떤 식으로 접점을 이룰지 예상할 수 없을 정도로 이야기는 제각각 흘러가기만 합니다.

 

익사체로 발견된 소녀 사건이 3주가 되도록 성과가 없자 피아와 보덴슈타인은 유명 방송인 한나 헤르츠만의 납치-폭행 사건에 투입됩니다. 유력한 용의자를 두 명이나 포착했지만 행방이 묘연하거나 혐의점을 찾지 못해 더 이상 진전이 없는 상태에서 또 다른 희생자가 나타나자 피아와 보덴슈타인의 스트레스는 극에 달합니다.

이번 사건은 정말이지 꼬이고 꼬여서 풀릴 줄 몰랐다.”(p323)는 피아의 푸념처럼 중반부에 이르기까지 사건은 좀처럼 활로를 찾지 못합니다. 그만큼 난감한 사건들이 연이어 터지면 당연히 흥미진진하고 긴장감이 넘쳐야 하는데, 실은 이 작품이 넬레 노이하우스의 작품이 아니었다면, 3/4지점쯤부터 폭발적으로 전개되지 않았다면 꽤나 야박한 점수를 주고도 남았을 만큼 중반까지의 이야기는 산만하고 느슨하고 지루하게 읽힙니다. 뭐랄까... 충격적인 클라이맥스와 엔딩을 위해 과도할 정도로 기초공사를 탄탄하게 한 느낌이랄까요?

 

아무튼... 세 사건의 접점이 조금씩 그 모습을 드러내면서, 그리고 그 접점이 다름 아닌 독일과 유럽의 권력층과 부유층으로 구성된 아동 포르노 마피아라는 게 드러나면서 이야기는 갑자기 폭주하기 시작합니다. 무엇보다 독자를 긴장하게 만든 건 피아와 보덴슈타인을 비롯하여 중요한 조연들에게 피해자 또래의 딸이 있다는 점, 그래서 그들 모두 진상에 다가갈수록 자신의 딸들도 늑대들의 먹잇감이 될 수 있다는 점을 인식하면서 겁에 질리는 모습들입니다. 또 사방팔방에 인맥과 조직을 갖춘 아동 포르노 마피아가 자신들에게 위협이 되는 인물들을 가차 없이 파멸시키는 대목이나 어렸을 적 학대를 당했지만 성장하면서 더 끔찍한 가해자가 돼버린 인물, 그리고 늑대들에게 삶과 인격이 완전히 파괴당한 피해자들의 사연 등은 무거움이나 불편함 이상의 착잡한 감정을 독자의 마음속에 깊이 새겨놓습니다.

 

아동 포르노 마피아 이야기만큼 독자의 눈길을 끈 건 피아와 보덴슈타인에게 복수를 선언한 예전 동료 프랑크 벤케의 과거사입니다. (사실 아동 포르노 마피아와 벤케의 과거사를 하나로 엮은 건 살짝 무리수처럼 보이긴 했습니다.) 애초 전직 군인 출신으로 유능한 형사였던 벤케를 개망나니에 악의로 가득 찬 인물로 만든 10여 년 전의 사건은 그 자체로 무척 흥미진진한데, 특히 그 사건이 아동 포르노 마피아 사건으로 인해 수면 위로 떠오른 덕분에 피아와 보덴슈타인 사이에 갈등이 불거진 건 물론 그들의 상관인 니콜라 엥겔 수사과장의 과거까지 폭로된다는 설정은 독자의 궁금증을 한껏 고조시키고도 남을 만큼 흥미롭습니다.

 

시리즈가 거듭될수록 점점 분량이 늘어나더니 사악한 늑대에선 기어이 600페이지를 찍고 말았습니다. 중반까지의 산만하고 느슨한 전개만 아니었다면 아동 성범죄라는, 불편하지만 몰입할 수밖에 없는 묵직한 주제가 좀더 독자의 공감을 살 수 있었을 거란 아쉬움이 남았는데, 주제가 주제이다 보니 넬레 노이하우스로서도 다소 과하더라도 탄탄한 기초공사를 하고 싶었던 게 아닌가, 그저 막연하게나마 추정할 뿐입니다.

사악한 늑대는 완결되지 않은 거대한 두 개의 떡밥을 남긴 채 마무리됩니다. 비록 읽은 지 7년이 지나긴 했지만 다음 작품인 산 자와 죽은 자는 별개의 사건을 다룬 것으로 기억하는데, 과연 남겨진 두 개의 떡밥이 어떤 식으로 해소될지 다시 한 번 읽으면서 확인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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