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르는 사람들 스토리콜렉터 107
마이크 오머 지음, 김지선 옮김 / 북로드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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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 경찰 최고의 인질협상가인 39세의 애비 멀린은 어느 날 아들이 납치됐다며 도와달라는 한 여자의 다급한 전화를 받습니다. 그리고 이내 그녀가 30여 년 전 사이비 종교집단에서 함께 지내다가 대규모 참사에서 자신과 더불어 가까스로 살아남았던 이든 플레처임을 알곤 깜짝 놀랍니다. 과거의 트라우마에서 자유롭지 못한 애비는 당시를 떠올리게 만드는 이든이 불편하지만 어쩔 수 없이 무거운 마음으로 그녀의 아들 네이선 납치 사건에 뛰어듭니다. 그리고 이 사건의 배후에 심상치 않은 사이비 종교집단이 존재한다는 걸 알곤 더욱 긴장합니다. 얼마 후 애비는 납치범이 이든의 딸이자 SNS 인플루언서인 개브리엘에게 집착하고 있음을 눈치 챕니다. 일반적인 납치와는 다른 행태를 보이는 범인 때문에 애비가 궁지에 몰린 무렵, 다른 지역에서 발생한 끔찍한 살인 현장에서 네이선의 흔적이 발견되어 애비를 큰 충격에 빠뜨립니다.

 

2020년 한국에 소개된 두 편의 조이 벤틀리 시리즈’(‘살인자의 사랑법’, ‘살인자의 동영상’)를 읽고 마이크 오머의 팬이 됐지만 2년 넘게 후속작 소식이 없어서 아쉬워하던 차에 인질협상가 애비 멀린을 앞세운 새로운 시리즈가 출간돼서 다소 의외였습니다. 검색해보니 조이 벤틀리 시리즈3편인 ‘Thicker Than Blood’에서 종료됐고, 이후 애비 멀린 시리즈2022년까지 모두 세 편이 출간된 상태입니다. 어쩌면 애비 멀린 시리즈역시 3편에서 종료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앞선 시리즈의 주인공 조이 벤틀리가 돌직구 스타일의 범죄심리학자라는 캐릭터 때문에 매력적이었다면 새로운 주인공 애비 멀린은 언론에도 여러 차례 노출될 정도로 유능한 인질협상가이자 골칫덩이 남매 때문에 고달픈 싱글맘이자 30여 년 전 사이비 종교집단에서 성장하다가 죽음의 위기를 가까스로 벗어났던 다채로운 이력의 소유자라 단번에 눈길을 사로잡았습니다. 특히 애비가 맡은 사건의 배후에 신흥 사이비 종교집단이 자리 잡고 있어서 아직도 과거의 트라우마에서 자유롭지 못한 그녀가 어떤 태도로 사건을 대할지 궁금증을 증폭시킵니다. 또한 충성도 높은 추종자를 거느렸다는 점에서 사이비 교주와 일면 닮은꼴이라 할 수 있는 SNS 인플루언서의 이야기가 병행되어 더욱 흥미를 자아내고 있습니다. “가장 위험하고 치명적인 두 우상(사이비교주, SNS 인플루언서)과 그들의 맹종자들(추종자, 팔로어) 사이에 놓인 어둠의 미로라는 출판사 소개글은 이런 맥락에서 나온 것입니다.

 

조이 벤틀리와 마찬가지로 애비 역시 형사가 아닌데다 인질협상가라는 캐릭터를 부여받은 탓에 그녀의 주된 활약은 을 통해 발휘되는 게 사실입니다. 하지만 애비는 파트너인 뉴욕경찰청 형사 조너선 카버와 함께 형사 못잖은 활약을 펼칩니다. 탐문은 물론 필요할 때는 고글과 글록을 휴대하고 적진에 뛰어들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상대방의 심리를 정확히 꿰뚫은 뒤 적절하고 신속한 상황 판단을 해야 하는 인질협상가의 재능을 유감없이 발휘합니다. 말하자면 추리도 잘 하고, 행동도 민첩하고, 협상까지 잘 하는 완벽한 주인공입니다.

 

살인사건이 등장하긴 하지만 소년 납치사건이 중심이다 보니 여러 명의 참혹한 희생자가 발생했던 조이 벤틀리 시리즈에 비해 사건성은 다소 약합니다. 또한 30여 년 전 애비가 사이비 종교집단에서 겪었던 과거사도 적잖은 분량을 차지하고 있고, 10대 남매를 키우는 고달픈 싱글맘 사연까지 심심찮게 등장해서 마이크 오머 특유의 잔혹한 스릴러를 기대했던 독자라면 조금은 싱겁게 읽힐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영화에서는 제대로 맛볼 수 없는 인질협상가의 고뇌와 결단과 고도의 심리전은 이 작품의 가장 큰 미덕이며, 그런 면에서 조이 벤틀리 시리즈와는 사뭇 결이 다른 재미를 만끽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슈퍼 히로인이 아니면서도 캐릭터의 힘을 최대치로 발휘하는 애비 멀린의 매력은 이 작품의 거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압권입니다.

 

이야기는 예상치 못한 떡밥을 남겨놓은 채 마무리됩니다. 그 떡밥이 애비의 과거 트라우마와 연결된 것인지 아니면 새로운 사건을 위한 교두보 역할을 할 것인지는 후속작이 나와 봐야 알 수 있겠지만, 어쨌든 벌써부터 출간소식이 기다려지는 건 저만의 기대는 아닐 것입니다. 다만 한 가지 바람이 있다면 한국에 출간되지 않은 조이 벤틀리 시리즈의 마지막 작품 ‘Thicker Than Blood’도 꼭 출간됐으면 하는 점입니다. 피해자의 피를 마시는 무자비한 소시오패스가 등장하는 걸로 알고 있는데, 그를 상대하는 조이의 마지막 활약은 꼭 지켜보고 싶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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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려 마땅한 사람들
피터 스완슨 지음, 이동윤 옮김 / 푸른숲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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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가제본을 제공받아 읽고 쓴 서평입니다.)

 

피터 스완슨은 2016년 한국에 소개된 죽여 마땅한 사람들’(이하 죽마사’, 원제 The Kind Worth Killing, 2015)로 독자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긴 작가입니다. 13살 때부터 죽여 마땅한 사람들을 완벽한 방법으로 살해하는 여주인공 릴리 킨트너의 맹활약(?)은 지금도 기억에 생생한데, 7년 만에 그 후속작인 살려 마땅한 사람들’(원제 The Kind Worth Saving, 2023)이 출간돼서 무척 반가웠습니다.

 

살려 마땅한 사람들은 전작과 마찬가지로 여러 인물이 화자를 맡습니다. 그중에서도 전작에서 연쇄살인 용의자 릴리 킨트너를 추격하면서도 미묘한 감정에 휩싸이고 만 형사 헨리 킴볼(이 작품에선 사립탐정)이 메인 화자를 맡았고, 30대 중반이 된 릴리 킨트너는 킴볼을 도와 자신의 능력을 또 한 번 유감없이 발휘하는 역할을 맡습니다. 그 외에도 10대 시절부터 비밀 친구가 되어 수차례에 걸쳐 완벽한 살인을 저질러온 남녀가 중요한 화자로 등장합니다.

죽마사가 응원하고 싶은 마음이 저절로 들게 만드는 연쇄살인마 릴리 킨트너의 통쾌하고 속 시원한 폭주 스토리였다면, ‘살려 마땅한 사람들은 차분한 분위기 속에서도 긴장감을 고조시키는 심리스릴러의 면모를 갖춘 작품입니다. 사건 자체보다는 각 인물들의 심리와 동기가 강조되고 있고, 킴볼과 릴리가 상대해야 할 범인이 일찌감치 노출되기 때문에 ?’어떻게?’에 서사가 집중되기 때문입니다.

 

전작에서 릴리를 쫓던 형사 킴볼은 이제 고만고만한 사립탐정이 돼있습니다. 소소한 일거리 외에 무기력한 삶을 살던 킴볼은 과거 딱 1년 동안 재직했던 교사 시절의 제자 조앤이 나타나 남편의 불륜을 입증해달라는 의뢰를 하자 당혹감 속에서도 일을 맡습니다. 하지만 예상치 못한 살인사건이 벌어지는 바람에 킴볼의 조사는 개운치 못한 상태에서 마무리되고 맙니다. 끝내 의심을 지우지 못한 킴볼은 여전히 연락을 주고받고 있던 릴리를 찾아가 의견을 나눈 끝에 살인사건의 진상을 찾기로 결심합니다.

 

스포일러가 될 대목이 여러 곳이라 애매한 줄거리 요약이 되고 말았는데, 킴볼과 릴리의 미묘한 관계 역시 죽마사의 스포일러가 될 수 있어서 더는 자세히 소개하기가 어렵습니다. 다만 큰 뼈대는 오래 전부터 잔인하고 교묘하게 살인을 저질러온 두 남녀의 행각을 킴볼과 릴리가 파헤치는 내용입니다.

사실 두 남녀의 행각도 그렇고 킴볼과 릴리의 조사 과정 역시 스펙타클하거나 반전이 거듭되는 숨 가쁜 이야기는 아닙니다. 오히려 차분한 전개 속에 각 인물들의 심리가 더 도드라져 보이는 작품입니다. ‘죽마사의 속사포 같은 서사를 기대한 독자라면 초반에 다소 처진다는 느낌을 받을 수도 있지만 이 작품의 진짜 미덕은 페이지를 넘길수록 점차 고조되는 긴장감입니다.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진실에 다가가는 킴볼과 릴리의 조사, 마음에 안 드는 상대를 완벽하게 살해해온 두 남녀의 뒤틀린 심리와 공포, 그리고 킴볼에게 닥치는 거대한 위기와 릴리의 끝내주는 마지막 한 방에 이르기까지 작가는 결코 서두르지 않고 완만한 전개 속에 긴장감을 고조시킵니다. ‘죽마사와는 사뭇 다른 스타일이지만 마지막 장을 덮고 나면 죽마사를 다시 한 번 읽어보고 싶게 만드는 작품이랄까요?

 

죽마사이후 피터 스완슨의 팬이 되어 지금까지 한국에 출간된 작품들을 전부 읽었지만 매번 아쉬움을 느껴온 게 사실입니다. 데뷔작의 인상이 너무 강렬했기 때문인데, ‘살려 마땅한 사람들역시 릴리의 대폭주를 다시 한 번 보고 싶은 마음이 너무 컸던 탓인지 살짝 아쉽게 느껴지긴 했습니다. 그래도 애착 캐릭터 중 하나였던 릴리를 다시 볼 수 있었던 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스러운 책읽기가 됐습니다. ‘릴리 킨트너 시리즈가 세 번째 작품까지 이어질지는 모르겠지만, 카메오로라도 좋으니 피터 스완슨의 다른 작품에서 한번쯤은 재회할 수 있기를 기대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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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 걸 배드 걸 스토리콜렉터 106
마이클 로보텀 지음, 최필원 옮김 / 북로드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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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혹한 범죄가 벌어진 현장에서 이름도 나이도 알 수 없는 어린 소녀가 발견된다. 6년 후, ‘이비 코맥이라는 이름으로 소년원에 수감돼있는 소녀는 법적으로 성인임을 인정받아 소년원에서 벗어나고자 하지만 상황은 여의치 않다. 그때 사이러스 헤이븐이라는 경찰 심리학자가 나타나 이비의 후견인을 자처하고, 진실을 볼 수 있는 소녀의 특별한 능력에 관심을 가진 그의 도움으로 이비는 마침내 소년원을 벗어난다. 그렇게 두 사람의 기묘한 동거가 시작된다. 한편, 15세 소녀 조디 시핸이 숲속에서 주검으로 발견된다. 용의자는 곧 체포되지만, 사이러스는 의구심을 품고 조디 시핸의 가족들을 상대로 조사를 벌인다. 이비는 자신의 특별한 능력을 사용해 그를 도우려 하는데... (출판사 소개글을 일부 수정 후 인용했습니다.)

 

굿 걸 배드 걸은 마이클 로보텀이 새롭게 런칭한 사이러스 헤이븐 시리즈의 첫 작품입니다. 그의 대표작인 조 올로클린 시리즈역시 임상심리학자가 경찰을 도와 사건을 해결하는 스릴러였던 점을 감안하면 주조연의 직업과 캐릭터는 물론 서사 역시 큰 틀에서 비슷한 모양새를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한 가지 큰 차이점이라면 사이러스의 파트너 역할을 맡게 된 정체불명의 소녀 이비 코맥의 존재입니다. 끔찍한 살인사건 현장에서 발견된 그녀는 이름도, 나이도 알 수 없는 것은 물론 난독증에 반사회적이고 폭력적인 성격 때문에 소년원에서도 위험한 인물로 분류돼있습니다. 심리학자인 사이러스의 관심을 끈 건 이비가 진실 마법사’, 즉 상대방이 진실을 말하는지 거짓을 말하는지 알아보는 능력을 가진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 자신이 참혹한 가족사 약에 취한 형이 부모와 여동생들을 잔인하게 살해한 를 지닌 사이러스는 이름도, 나이도, 가족도 기억하지 못하는 이비에게서 연민 이상의 공통점을 느끼기도 합니다. 그런 이유로 모두가 반대하는 가운데 그녀의 보호자를 자처한 사이러스는 이비를 소년원에서 빼내 자신의 집에 머물게 하며 정상인으로서 살아갈 수 있게끔 도와주려 합니다.

 

사이러스와 이비의 기묘한 동거와 탐색전이 펼쳐지는 가운데 15세 소녀가 잔인하게 살해당한 사건이 병행됩니다. 지역사람 모두가 사랑스러운 소녀이자 유망한 피겨스케이팅 선수로 칭송하던 조디의 잔혹한 죽음은 큰 충격을 몰고 옵니다. 용의자가 금세 체포되긴 하지만 사이러스는 심문 영상을 지켜보던 중 의구심을 품게 되고, 소녀의 가족과 지인에 대한 탐문에 나섭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본의 아니게 이비의 도움을 받게 됩니다. 그 자신이 유능한 심리학자지만 진실 마법사라 불릴 정도로 촉이 뛰어난 이비의 거짓말 탐지 능력은 사이러스에게 큰 힘이 돼줍니다.

 

유일하게 중도 포기했던 완벽한 삶을 훔친 여자를 제외하곤 마이클 로보텀의 작품은 조 올로클린 시리즈와 스탠드얼론 모두 높은 평점을 주며 재미있게 읽어왔습니다. 새로운 시리즈의 런칭이라 기대감이 너무 높았던 탓인지 모르겠지만 굿 걸 배드 걸은 재미있게 읽었음에도 불구하고 분량 면에서 살짝 아쉬움이 남은 작품입니다. 시리즈 첫 작품이다 보니 두 주인공의 캐릭터 설명과 관계 설정에 꽤 많은 분량이 할애됐습니다. 살인사건은 복잡하고 지난한 과정을 거쳐 해결되긴 하지만 600페이지에 육박하는 분량에 비해 다소 단선적인 구성이라 긴장감을 극대화시키지는 못합니다. 물론 거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사이러스와 이비의 이야기가 끊임없이 궁금증과 긴장감을 자아내 마지막 페이지까지 한 번에 읽게 만들지만 말입니다.

 

끔찍한 과거사와 트라우마는 물론 상대의 마음속을 들여다볼 수 있는 공통점을 지닌 사이러스와 이비의 콤비 플레이는 이미 3편까지 나와 있다고 합니다. 작가는 이비의 과거에 관한 결정적인 정보 몇 가지를 일부러 공개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사이러스가 조 올로클린의 제자라는 에필로그의 한 줄을 통해 어쩌면 후속작에서 조 올로클린이 특별출연을 할지도 모른다는 기대감도 갖게 만듭니다. 이 두 가지 점 때문에라도 후속작을 기다릴 수밖에 없게 되는데, 한 가지만 더 바란다면 두 사람이 마주치게 될 사건들이 조금은 더 세고 독했으면 하는 점입니다. 그야말로 마이클 로보텀다운 스릴러를 만끽하고 싶은 작은 욕심이라고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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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주의보 이판사판
리사 주얼 지음, 김원희 옮김 / 북스피어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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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번째 생일을 맞은 리비는 변호사로부터 편지를 한 통 받습니다. 거기엔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친부모가 자신에게 대저택을 유산으로 남겼다는 내용이 적혀 있습니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리비는 오래 전 그 저택에서 세 사람이 동반자살했다는 신문기사를 발견합니다. 시신은 주인 부부와 정체불명의 한 남자였는데, 더욱 이상한 점은 저택의 외진 방에서 갓난아기가 발견됐다는 점입니다. 영양 상태도 좋고 방금 전까지 보살핌을 받은 듯한 아기의 이름은 서레니티 램’. 리비는 그 아기가 자신임을 깨닫곤 큰 충격에 빠지고, 그때부터 대저택의 비밀에 한걸음씩 다가가기 시작합니다. (출판사 소개글을 일부 수정 후 인용했습니다.)

 

2022년에 출간된 엿보는 마을’, ‘다크 플레이스의 비밀에 이어 세 번째로 만난 리사 주얼의 작품입니다. 고백하자면, 요 몇 년 동안 도메스틱 스릴러 또는 심리 스릴러에 살짝 질린 탓에 리사 주얼의 신작 소식을 듣고도 이번엔 패스라고 다짐했지만, 북스피어에서 출간했다는 걸 알곤 마음을 고쳐먹었습니다. 삼송 김사장 님의 야심찬(?) ‘이판사판 시리즈라면 기존 작품과는 조금은 색다른 느낌일 거란 막연한 기대 때문이었습니다.

 

20여 년 전 런던의 첼시에 자리 잡은 대저택에서는 요즘 말로 가스라이팅이 불리는 어이없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물려받은 부유한 유산을 지닌 남편과 사교계의 명사로 불리던 아내, 그리고 그들의 10대 자녀들은 어느 날 저택을 찾아온 한 여자와 그녀가 끌어들인 부부로 인해 모든 것을 잃게 됩니다. 그리고 몇 년에 걸친 가스라이팅으로 파멸을 코앞에 둔 어느 날, 이 저택에는 아기 울음소리가 울려 퍼졌고, 그로부터 채 1년도 되기 전에 세 구의 시신이 발견되는 참극이 벌어지고 맙니다. 경찰은 이 저택에 살고 있던 것으로 추정되는 네 명의 10대가 흔적도 없이 사라진 사실에 놀라지만 결국 그 누구도 찾아내지 못합니다. 그리고 25년이 흐른 현재, 당시 저택에서 발견됐던 아기리비에게 의문의 상속 편지가 날아든 것입니다.

 

가족주의보는 가스라이팅을 소재로 한 심리 스릴러이자 당시 사라진 네 명의 10대 소년 소녀와 이제 25살이 된 아기리비가 이끌어가는 극적인 서스펜스 작품입니다. 20여 년 전의 충격적인 가스라이팅의 비극이 한 축이고, 이제는 중년에 이른 당시 10대들과 어느 날 갑자기 대저택의 상속인이 된 리비의 진실 찾기가 또 다른 한 축입니다. 같은 날, 같은 장소에서 참극을 겪었지만 진실의 일부밖에 모른 채 각자의 삶을 살던 당시 10대들은 리비가 25살이 된 현재에 와서야 비로소 과거의 참극의 실체와 마주하게 됩니다.

 

리비를 포함하여 여러 명의 화자가 번갈아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이야기를 풀어가고 있어서 극적인 사건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500여 페이지의 분량 내내 빠른 템포와 높은 긴장감을 놓치지 않습니다. 특히 복잡하게 꼬였지만 한눈에 확 들어오는 비극적인 인간관계와 그 과정에서 태어난 아기리비의 사연은 마지막 반전에 이를 때까지 독자의 눈길을 사로잡습니다. 오히려 가스라이팅은 부차적인 소재일 뿐 네 명의 10대 소년 소녀와 리비에게 닥친 비극적인 서사가 이 작품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앞서 읽은 리사 주얼의 두 작품이 전형적인 도메스틱+심리 스릴러였다면 가족주의보는 다소 막장스러운 면이 있긴 하지만 여러 가지 장르가 복합된 좀더 고급스러운 작품이라고 할까요? (사족으로, 이 작품의 가스라이팅 설정에 대해 비현실적이다.”라고 비판하는 서평들이 있긴 하지만, 현실에서는 이보다 더 말도 안 되는 일들이 버젓이 벌어지고 있어서인지 개인적으로는 전혀 위화감이 들지 않았습니다.)

 

여전히 도메스틱+심리 스릴러에 대해 경계심(?)을 갖고 있지만 리사 주얼의 작품이라면 일단 무슨 이야기인지는 살펴보게 될 것 같습니다. 앞선 작품들에서도 충분히 느꼈지만 가족주의보는 여러 면에서 리사 주얼이 대단한 이야기꾼이라는 걸 확실히 각인시켜줬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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핸디맨
프리다 맥파든 지음, 조경실 옮김 / 북플라자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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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오리건주의 한 주택에서 애런 니어링이라는 남자가 살인 용의자로 체포됩니다. 그의 지하 작업실에서는 25살 맨디 요한슨의 시신뿐 아니라 지난 10년간 실종된 여성 17명의 잘린 손이 추가로 발견됩니다. 언론에서는 그에게 핸디맨이라는 별명을 붙였습니다. 그리고 26년이 지난 현재, 애런 니어링의 딸이자 외과의사인 노라 주변에서 다시 손목이 잘린 시체들이 발견되기 시작합니다. (출판사 소개글을 일부 수정 후 인용했습니다.)

 

끔찍한 연쇄살인마로 밝혀진 아버지가 체포될 당시 노라는 불과 11살이었습니다. 방조범으로 체포된 어머니마저 구치소에서 자살한 뒤 노라는 성()을 데이비스로 바꾸곤 철저히 자신의 과거를 숨기며 살아왔습니다. 유능한 외과의사가 됐지만 노라는 연애나 결혼 같은 건 생각조차 하지 않은 채 살아갑니다. 평생을 비밀로 해야 할 과거 때문이기도 하지만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끔찍한 연쇄살인마의 피를 후대에 물려주는 건 상상조차 하기 싫은 일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아버지의 범행을 완벽하게 모방한 듯한 연쇄살인마가 등장하고, 하필 그 피해자들이 자신과 연관 있는 여자들로 밝혀지면서 노라는 세상이 무너질 듯한 충격에 빠집니다.

 

연쇄살인마의 자식자체는 특별히 새로운 설정은 아니지만 핸디맨이 흥미롭게 읽힌 이유 중 하나는 노라가 보호받아 마땅한 가련한 주인공만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작가는 11살 시절의 노라 이야기를 간주처럼 끼워 넣으면서 혹시 연쇄살인마의 피는 정말로 유전되는 것인가?”라는 흥미로운 도발을 툭툭 던지곤 합니다. 더구나 노라가 인간의 몸에 직접 메스를 대는 외과의사가 된 게 단순한 우연은 결코 아니라는 인상도 지울 수 없어서 독자는 마지막까지 노라에 대한 의심의 시선을 거둘 수 없게 됩니다.

 

또 한 가지 흥미를 유발한 것은 이런 설정으로 시작된 스릴러가 막판에 가서 난데없이 나타난 범인을 지목하지는 않는다는 점, 즉 노라 혹은 노라의 주변인물 가운데 범인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실제로 작가는 용의선상에 오를 법한 인물을 여럿 배치해놓았고, 독자는 그들의 일거수일투족을 면밀하게 지켜볼 수밖에 없게 됩니다. 전체적으로 전개가 다소 느려 보이긴 하지만 막판에 두어 명으로 좁혀진 용의자들의 행적들을 돌이켜보면 제법 설계가 잘 된 스릴러임을 인정하게 됩니다.

 

분량도 적당하고, 페이지도 잘 넘어가고, 클라이맥스와 엔딩도 나쁘지 않았지만 그래도 아쉬움이 남았던 건 사건이 몇 개 없다는 점, 경찰의 압박과 조사가 다소 느슨했다는 점, 그리고 사족이 많았던 게 아님에도 불구하고 느린 만연체처럼 읽혔다는 점 때문입니다. 딱 필요한 하이라이트만 정리된 느낌이라고 할까요?

 

올해 엇비슷한 시기에 출간된 하우스메이드역시 이 작가의 작품인데, 고백하자면 어지간히 호평을 받은 작품이 아니라면 더는 심리스릴러를 읽고 싶지 않아서 독서목록에서 제외시켰던 작품입니다. ‘핸디맨을 읽은 뒤에 어느 정도 관심이 생긴 건 사실인데, 일단은 다른 독자들의 평가를 지켜본 뒤에 읽을지 여부를 결정하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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