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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주의보 ㅣ 이판사판
리사 주얼 지음, 김원희 옮김 / 북스피어 / 2023년 5월
평점 :
25번째 생일을 맞은 리비는 변호사로부터 편지를 한 통 받습니다. 거기엔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친부모가 자신에게 대저택을 유산으로 남겼다는 내용이 적혀 있습니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리비는 오래 전 그 저택에서 세 사람이 동반자살했다는 신문기사를 발견합니다. 시신은 주인 부부와 정체불명의 한 남자였는데, 더욱 이상한 점은 저택의 외진 방에서 갓난아기가 발견됐다는 점입니다. 영양 상태도 좋고 방금 전까지 보살핌을 받은 듯한 아기의 이름은 ‘서레니티 램’. 리비는 그 아기가 자신임을 깨닫곤 큰 충격에 빠지고, 그때부터 대저택의 비밀에 한걸음씩 다가가기 시작합니다. (출판사 소개글을 일부 수정 후 인용했습니다.)
2022년에 출간된 ‘엿보는 마을’, ‘다크 플레이스의 비밀’에 이어 세 번째로 만난 리사 주얼의 작품입니다. 고백하자면, 요 몇 년 동안 도메스틱 스릴러 또는 심리 스릴러에 살짝 질린 탓에 리사 주얼의 신작 소식을 듣고도 “이번엔 패스”라고 다짐했지만, 북스피어에서 출간했다는 걸 알곤 마음을 고쳐먹었습니다. 삼송 김사장 님의 야심찬(?) ‘이판사판 시리즈’라면 기존 작품과는 조금은 색다른 느낌일 거란 막연한 기대 때문이었습니다.
20여 년 전 런던의 첼시에 자리 잡은 대저택에서는 요즘 말로 ‘가스라이팅’이 불리는 어이없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물려받은 부유한 유산을 지닌 남편과 사교계의 명사로 불리던 아내, 그리고 그들의 10대 자녀들은 어느 날 저택을 찾아온 한 여자와 그녀가 끌어들인 부부로 인해 모든 것을 잃게 됩니다. 그리고 몇 년에 걸친 가스라이팅으로 파멸을 코앞에 둔 어느 날, 이 저택에는 아기 울음소리가 울려 퍼졌고, 그로부터 채 1년도 되기 전에 세 구의 시신이 발견되는 참극이 벌어지고 맙니다. 경찰은 이 저택에 살고 있던 것으로 추정되는 네 명의 10대가 흔적도 없이 사라진 사실에 놀라지만 결국 그 누구도 찾아내지 못합니다. 그리고 25년이 흐른 현재, 당시 저택에서 발견됐던 ‘아기’ 리비에게 의문의 상속 편지가 날아든 것입니다.
‘가족주의보’는 가스라이팅을 소재로 한 심리 스릴러이자 당시 사라진 네 명의 10대 소년 소녀와 이제 25살이 된 ‘아기’ 리비가 이끌어가는 극적인 서스펜스 작품입니다. 20여 년 전의 충격적인 가스라이팅의 비극이 한 축이고, 이제는 중년에 이른 당시 10대들과 어느 날 갑자기 대저택의 상속인이 된 리비의 ‘진실 찾기’가 또 다른 한 축입니다. 같은 날, 같은 장소에서 참극을 겪었지만 진실의 일부밖에 모른 채 각자의 삶을 살던 당시 10대들은 리비가 25살이 된 현재에 와서야 비로소 과거의 참극의 실체와 마주하게 됩니다.
리비를 포함하여 여러 명의 화자가 번갈아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이야기를 풀어가고 있어서 극적인 사건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500여 페이지의 분량 내내 빠른 템포와 높은 긴장감을 놓치지 않습니다. 특히 복잡하게 꼬였지만 한눈에 확 들어오는 비극적인 인간관계와 그 과정에서 태어난 ‘아기’ 리비의 사연은 마지막 반전에 이를 때까지 독자의 눈길을 사로잡습니다. 오히려 가스라이팅은 부차적인 소재일 뿐 네 명의 10대 소년 소녀와 리비에게 닥친 비극적인 서사가 이 작품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앞서 읽은 리사 주얼의 두 작품이 전형적인 도메스틱+심리 스릴러였다면 ‘가족주의보’는 다소 막장스러운 면이 있긴 하지만 여러 가지 장르가 복합된 좀더 고급스러운 작품이라고 할까요? (사족으로, 이 작품의 가스라이팅 설정에 대해 “비현실적이다.”라고 비판하는 서평들이 있긴 하지만, 현실에서는 이보다 더 말도 안 되는 일들이 버젓이 벌어지고 있어서인지 개인적으로는 전혀 위화감이 들지 않았습니다.)
여전히 도메스틱+심리 스릴러에 대해 경계심(?)을 갖고 있지만 리사 주얼의 작품이라면 일단 무슨 이야기인지는 살펴보게 될 것 같습니다. 앞선 작품들에서도 충분히 느꼈지만 ‘가족주의보’는 여러 면에서 리사 주얼이 대단한 이야기꾼이라는 걸 확실히 각인시켜줬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