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녀 동지여 적을 쏴라
아이사카 토마 지음, 이소담 옮김 / 다산책방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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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소(獨蘇)전쟁은 2차 대전 중이던 1941~1945년에 벌어진 독일과 소련의 전쟁으로 인류 역사상 최대 규모의 단일 전쟁이자 가장 참혹한 전쟁으로 기록돼있습니다. 4년 가까운 전쟁 기간 동안 독일은 900만 명, 소련은 2,000만 명 이상의 사망자가 발생했습니다. ‘소녀 동지여 적을 쏴라는 이 독소전쟁을 배경으로 소련의 여성 저격수 세라피마와 그녀의 동료들이 겪은 지옥도와도 같은 참상을 그린 반전소설이자 여성소설입니다.

 

주민 40여 명의 작은 마을 이바노프스카야가 독일군에 의해 몰살당합니다. 눈앞에서 어머니의 죽음을 목도한 18살 소녀 세라피마는 저격병 훈련교관 이리나에 의해 구조된 뒤 저격병 훈련을 받게 됩니다. 세라피마는 침략자인 독일에 대한 복수는 물론 어머니를 죽인 독일 저격수 한스 예거, 자신을 구해줬지만 어머니의 시신을 모욕하고 마을을 불태운 교관 이리나를 죽이겠다는 일념으로 훈련에 몰두합니다. 고된 훈련 끝에 저격병여단 제39독립소대가 된 세라피마와 동료들은 스탈린그라드 탈환 작전을 시작으로 죽음이 지천에 널린 전쟁에 투입됩니다.

 

나는 이리나를 따라 살인자가 되었다. 나는 살아남기 위해 싸우는 길을 선택했다. 나는 살아가는 의미를 얻기 위해 복수를 갈망했다. 전부 틀렸다. 죽이기를 거절하고 살아가는 삶, 그쪽을 선택하는 길이 눈앞에 있었다.” (p509)

 

외교관을 꿈꿨지만 저격병이자 살인자가 되고만 세라피마의 이야기는 전쟁의 비극을 다룬 그 어떤 픽션보다도 묵직하고 가슴 아프게 읽힙니다. 눈앞에서 어머니를 잃은 뒤 동료를 지키고 여성을 지키고 복수를 완수하기 위해 피도 눈물도 없는 저격병이 된 세라피마는 숱한 위기를 겪으면서도 혁혁한 전과를 올리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감당하기 어려운 혼란을 겪습니다. 인간을 악마로 만드는 전쟁의 화마 속에서 언제부터인가 웃으면서 적병을 쏘고, 죽인 적의 숫자를 자랑하듯 떠벌리며 살인을 즐기는 괴물이 돼버렸음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동시에 괴물이 아니면 이 전쟁에서 살아남을 수 없기에 세라피마의 혼란은 더욱 더 극심해집니다.

 

또한 저격 말고는 어떠한 능력도 없는데다 전쟁이 끝나도 돌아갈 마을도 없고, 무엇을 해야 할지도 모르겠는 세라피마는 애초 자신이 왜 저격병이 됐는지에 대한 깊은 회의와 절망에 빠진 채 허우적댑니다. 세라피마의 혼란과 회의와 절망은 너무나도 생생한 전쟁 장면 묘사 덕분에 마치 독자 자신이 겪는 것처럼 절절하게 피부에 와닿습니다. 새삼 전쟁의 비극이란 것이 얼마나 깊고 지독한 것인지 깨닫게 되면서 말입니다.

 

전쟁의 화마에 휘말려 삶이 붕괴된 한 저격병의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소녀 동지여 적을 쏴라는 여성소설로서의 미덕도 갖추고 있습니다. 작가 스스로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2015년 노벨문학상 수상)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500명 이상의 여성 병사들의 증언을 읽고 그것을 모티브로 삼았다.”라고 밝힌 것처럼, 이 작품에는 여성만이 감내해야 하는 전쟁의 참극이 다양하게 묘사돼있습니다. 오늘날까지도 여성을 약탈과 무시의 대상으로 전락시키는 전쟁의 악마성은 80여 년 전에는 훨씬 더 날것 같은 잔인함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저항 한 번 못해보고 짓밟히는 사람부터 살아남기 위해 적군의 연인이 된 사람에 이르기까지 작가는 세라피마의 눈을 통해 전쟁이 여성에게 가한 갖가지 비극을 상세하게 묘사합니다. 물론 마녀부대로 불릴 정도로 무시무시한 활약을 펼친 세라피마와 동료들 역시 여성이기에 겪을 수밖에 없는 참혹한 상황에 수시로 내몰리곤 합니다. 그래선지 여성은 약자가 아니라 스스로 싸울 수 있는 자임을 증명하기 위해 저격병이 됐다.”고 당당하게 밝힌 세라피마의 동료 샤를로타의 일성은 지금도 깊은 여운으로 남아있습니다.

 

인간을 악마로 만드는 전쟁의 참상, 그 안에서 똑같이 적군을 죽이고도 유독 살인자소리를 들어야만 하는 저격수의 운명, 그리고 여성으로서 지옥과도 같은 전쟁의 한복판을 가로질러야만 했던 한 소녀의 비극. ‘소녀 동지여 적을 쏴라는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전쟁의 또 다른 민낯을 소름 끼칠 정도로 생생하게 그린 작품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과거의 일만은 절대 아닙니다.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는 크고 작은 전쟁들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소녀 동지여 적을 쏴라에 그려진 비극은 그 전쟁들 속에서 여전히 현재진행형입니다. 작은 메아리에 불과하겠지만 소녀 동지여 적을 쏴라가 전하는 반전과 평화의 메시지가 조금이라도 더 많은 사람들에게 전달되기를 바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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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지, 개미지옥
모치즈키 료코 지음, 천감재 옮김 / 모모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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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나이부터 성매매를 일삼아온 20대 여성 두 명이 연이어 살해당합니다. 수사본부가 우왕좌왕하는 사이 한 식품회사에 세 번째 희생자를 내기 싫으면 2억엔을 준비하라.”는 협박문이 도착합니다. 전혀 연관성이 없어 보이던 두 사건 사이에 접점이 생기자 수사는 오히려 더 큰 혼선을 빚습니다. 프리랜서 기자인 기베 미치코는 자신이 취재해오던 식품회사 협박 건 때문에 성매매 여성 살인사건에 관심을 갖게 됐고, 특유의 부지런함과 촉을 발휘하여 수사본부조차 파악하지 못하는 사건 이면의 진실을 하나하나 밝혀냅니다.

 

2013대회화전’, 2014신의 손에 이어 세 번째로 만난 모치즈키 료코의 작품입니다. 두 작품 모두 흥미롭게 읽어서 그 뒤로 신작을 기대했었는데, 무려 10년 가까이 지나서야 새 작품을 만나게 됐습니다. ‘옮긴이의 말을 읽고서야 이 작품이 기베 미치코 시리즈의 다섯 번째 작품(일본출간 2018)이란 걸 알게 됐는데, 2014년에 한국에 소개된 신의 손이 이 시리즈의 첫 번째 작품(일본 출간 2004)이라고 합니다. 다른 작품들도 한국에 꼭 소개됐으면 좋겠는데, 다소 무겁고 어두운 소재들을 다루고 있어서 한국 독자들에게 얼마나 호응을 얻어낼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프리랜서 기자인 기베 미치코가 미궁에 빠진 살인사건과 협박사건을 취재하며 진상을 파헤친다는 게 큰 줄기이긴 하지만, 작가는 기베 미치코를 슈퍼 히로인으로 묘사하지도, 자칫 자극적일 수 있는 소재를 흥미 위주의 미스터리로 포장하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읽는 동안 소설이라기보다 르포에 가깝다는 인상을 자주 받을 정도로 냉정하고 객관적인 시선을 견지합니다. 또한 성매매, 아동학대, 빈곤 등 사회적 문제들을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정면으로 다루고 있어서 주인공 기베 미치코가 어떤 진상을 밝혀내든 결코 가벼운 마음으로 마지막 장을 덮을 수 있는 작품이 아니라는 걸 쉽게 예상할 수 있습니다.

 

작가는 초반부터 범인으로 보이는 일군의 인물들을 공개합니다. 어떻게든 양지로 나가고 싶었지만 빈곤과 범죄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막장에 갇힌 요시자와 스에오, 번듯한 의사 집안의 장남이자 명문대 학생이지만 도박과 폭력과 기행에 빠진 반사회적 인물 하세가와 쓰바사, 성매매를 일삼으면서 숱한 인간들에게 무시와 경멸을 받지만 그에 대한 인식 자체가 없어 보이는 노가와 아이리, 그리고 조폭 출신처럼 보이는 불량배 산토 가이토가 그들입니다.

작가는 이들의 과거와 현재를 통해 이른바 개미지옥’(원제 개미가 사는 집이란 뜻입니다), 즉 아무리 탈출하려 발버둥 쳐도 더 깊은 수렁으로 가라앉기만 하는 지독한 현실을 적나라하게 묘사합니다. 독자 입장에선 누가 범인인가?’보다도 개미지옥의 참상에 더 눈길이 끌릴 수밖에 없게 되는데, 바로 이런 점 때문에 미스터리 소설보다는 르포에 가깝게 읽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개인적으론 이 작품의 가장 큰 미덕이 바로 이런 점이라는 생각입니다.

 

될 수 있으면 모르고 지나치고 싶은 일, 보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일을 독자의 목덜미를 붙잡고 억지로 눈앞에다 들이민다.”는 평을 들을 정도로 기베 미치코 시리즈는 지독한 사회파 미스터리로 분류된다고 합니다. ‘출생지, 개미지옥역시 결코 뒷맛이 개운한 작품은 아니지만, 읽고 돌아서면 금세 기억에서 휘발되고 마는 가벼운 작품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짙은 여운을 남깁니다. 작가가 그린 개미지옥은 비록 나의 일은 아닐지라도, 세상 어딘가에 존재하는, 그래서 외면하고 무시할 수만은 없는 명확한 현실이기 때문입니다. 사회파 미스터리에 관심 있는 독자라면 적극 추천하고 싶은 작품입니다.

 

- ‘기베 미치코 시리즈’ (원제, 일본 출간년도)

1. 신의 손 (, 2004, 한국 출간)

2. 살인자 (殺人者, 2004)

3. 저주인형 (人形, 2004)

4. 부엽토 (腐葉土, 2013)

5. 출생지, 개미지옥 (, 2018, 한국 출간)

6. 들불의 밤 (野火,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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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하늘에 별을 뿌리다
구보 미스미 지음, 이소담 옮김 / 시공사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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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르물, 특히 미스터리와 스릴러 편식이 과하게 심한 독자지만, 가끔씩 사람 사는 이야기에 대한 갈증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물론 따뜻하고 뭉클하고 건전한(?) 이야기보다는 다소 무겁고 어둡고 파괴적인 이야기에 더 끌리는 게 사실이긴 합니다. 그럴 때마다 신작 소식을 기다리게 되는 일본 작가 두 명이 있는데 사쿠라기 시노와 구보 미스미가 그들입니다.

 

무슨 일이 벌어져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은 불온한 기운도 느껴지는가 하면, 어딘가 서정적이거나 애틋한 감상에 젖게 만들기도 하고, , 짙은 해무 속에 무엇이든 감출 수 있을 것 같은 관능적인 분위기도 감지되는 훗카이도의 소도시 구시로를 배경으로 다양한 군상들의 이야기를 펼치는 게 사쿠라기 시노의 작풍이라면, “인간의 가장 순수한 본능인 성()을 매개로 상처와 상실에 잠식된 사람들의 삶을 그리는 것이 구보 미스미의 특징입니다.

 

구보 미스미는 파격적인 성애묘사 때문에 19금 판정을 받은 한심한 나는 하늘을 보았다’(2011)로 한국 독자와 처음 만난 이후 밤하늘에 별을 뿌리다까지 모두 다섯 편을 선보였습니다. 앞선 작품들의 경우 조금씩 수위의 차이는 있지만 대체로 성()이 중요한 코드로 작용하고 캐릭터 대부분은 상처투성이이며, 연작단편이라는 형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그에 비해 밤하늘에 별을 뿌리다(옮긴이의 말에 따르면) “밤하늘에 뜬 별을 장치로 삼아 등장인물의 복잡한 마음, 현실과 바람을 보여주는 단편집”, “힘들어도 슬퍼도 괴로워도 상실감을 품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과 연작단편이라는, 구보 미스미의 가장 큰 매력이 빠진 탓에 아쉬움이 남긴 했지만, 그녀답지 않게(?) ‘희망의 기운을 담은 수록작들은 색다른 맛을 만끽할 수 있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다섯 편의 수록작의 주인공들은 하나같이 상처와 상실에 잠식된 채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각자 소중히 여기는 밤하늘의 별을 품고 있습니다. 쌍둥이 여동생을 뇌출혈로 잃고, 애인으로 여겼던 남자마저 잃어버린 32살의 아야에게는 쌍둥이 별자리가(한밤중의 아보카도), 여름방학 중 바닷가에서 잠시 만난 터무니없는 첫사랑을 허망하게 잃은 16살 마코토에게는 남쪽하늘의 안타레스가(은종이색 안타레스), 교통사고로 엄마를 잃고 집단 괴롭힘에 시달리는 중학생 미치루에게는 처녀자리의 별 스피카가(진주별 스피카), 아내와 딸을 이혼으로 잃은 뒤 가까이 지내던 이웃의 모녀마저 잃은 37살 영업사원 사와타리에게는 밤하늘의 달이(습기의 바다), 그릐고 부모의 이혼으로 엄마를 잃은데다 자신을 보살펴준 이웃의 할머니까지 잃은 초등학교 4학년 소우에게는 언제나 제자리를 지키고 있는 흐드러진 별들이(별의 뜻대로) 따뜻한 위안이자 의지처로 마음 한쪽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 별들을 지켜보며 힘들어도 슬퍼도 괴로워도 상실감을 품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바로 밤하늘에 별을 뿌리다입니다.

 

이 작품은 2022년 상반기 나오키 상을 수상했습니다. 솔직하게 말하면, “이 작품이 나오키 상을 수상할 만했나?”라는 의문을 가질 정도로 딱히 개성이나 특징이 있는 작품은 아닙니다. 오히려 자주 볼 수 있는 전형적인 일본 소설에 가까운 게 사실입니다. 다만 저의 경우, 구보 미스미의 광팬이다 보니 사심이 잔뜩 들어갈 수밖에 없어서 문장 하나하나를 애틋한 심정으로 읽게 됐는데, 혹시라도 이 작품으로 구보 미스미를 처음 만난 독자라면, 그래서 그녀의 진면목을 맛보고 싶은 욕심이 생겼다면 지금은 절판된 한심한 나는 하늘을 보았다를 중고로라도 찾아 읽어볼 것을 권하고 싶습니다. 나머지 작품들도 모두 매력적이지만 한심한 나는 하늘을 보았다는 압권 중의 압권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지독한 성애 묘사가 거북한 독자라면 다른 작품들을 먼저 만나보기를 추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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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시의 집
나카야마 시치리 지음, 민현주 옮김 / 블루홀식스(블루홀6)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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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직 중학교 교사인 호카리 신이치는 한 여학생이 고발해온 학급 내 집단 괴롭힘 문제 때문에 고심 중입니다. 은폐를 암시하는 교장의 압력, 이런저런 후폭풍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보신주의에 가까운 소심함으로 인해 결국 호카리는 이도저도 아닌 애매한 태도를 취하고 맙니다. 그런데 12살 딸 유카가 집단 괴롭힘으로 인해 자살을 시도하는 사건이 벌어지면서 호카리의 삶은 엉망진창이 되고 맙니다. 집단 괴롭힘의 주동자가 누군지 알게 됐지만 호카리는 자신과 똑같이 애매한 태도만 취하는 유카의 담임에게 격분하게 되고, 결국 이 일을 세상에 알리기로 결심합니다. 하지만 오히려 사태는 더욱 최악으로 치닫기 시작하고, 예기치 못한 살인사건이 벌어지면서 호카리는 물론 그의 가족들은 붕괴 직전의 위기에 빠집니다.

 

학교폭력의 문제와 함께 그것이 파생시키는 수많은 악의와 비극을 정면으로 다룬 나카야마 시치리의 사회파 미스터리입니다. 가해자를 단순히 악당으로만 그리는 것도 아니고, 어정쩡한 태도를 취하는 학교 당국을 무작정 비난만 하지도 않습니다. 복수를 다루고 있지만 그것이 결코 정답도 아니며 만족감을 얻게 해주지도 않는다는 점을 강조하기도 합니다. 말하자면 학교폭력은 그 자체만이 문제가 아니며, 직접 겪지 않으면 상상하기 어려운 숱한 갈등과 비극들을 야기한다는 점을 적나라하게 그린 작품이란 뜻입니다.

 

중학교 교사인 호카리는 이 작품에서 여러 입장을 오갑니다. 학급 내 집단 괴롭힘 문제를 외면하는 비겁한 담임이었다가, 딸 유카의 자살 미수를 겪으며 집단 괴롭힘의 피해자가 됐다가 얼마 후엔 거꾸로 가해자로 비난받는 위치에 서게 됩니다. 주인공으로선 실격에 가까운 인물이지만 오히려 그래서 더 현실감을 발휘하기도 합니다. 또한 학교폭력을 다루는 과정에서 가장 큰 문제가 가해자가 피해자로, 피해자가 가해자로 순식간에, 그것도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뒤바뀔 수 있다는 점을 시사하는 인물이기도 합니다.

 

학교폭력이 발진시킨 이야기는 예상치 못한 살인사건이 터지면서 더욱 긴장감을 고조시킵니다. 이 사건으로 인해 호카리와 그의 가족들은 세간의 비난과 손가락질 속에서 최악의 궁지에 몰리고 맙니다. 나카야마 시치리 특유의 반전으로 마무리되는 이 살인사건 미스터리에는 학교폭력에 관한 구조적인 문제들까지 진지하고 절묘하게 녹아있어서 독자는 읽는 내내 단순한 흥미 이상의 심정을 품게 됩니다. 살인사건이 제대로 해결된다 하더라도 호카리와 그의 가족들은 평생 지워지지 않을 상처를 안게 되는 것은 물론 그 시발점이 된 학교폭력의 악몽에서 절대 벗어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 작품은 학교폭력은 나쁜 것!”이라는 교훈을 강조하는 것도 아니고, “가해자에게 응징을!”을 정당화하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학교폭력은 학교도, 경찰도, 언론도 해결할 수 없는 뜨거운 감자이자 불가해한 난제라고 하소연하는 듯한 느낌이 더 강합니다. 호카리 가족이 결코 행복할 수 없는 해피엔딩을 맞이하는 장면에서 책장을 덮을 때 개운함 따윈 생각나지도 않고 거꾸로 가슴 한쪽이 한없이 무거워지는 느낌을 받은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물론 그것은 사회파 미스터리의 숙명이지만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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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가 마지막에 본 것은 그날, 너는 무엇을 했는가
마사키 도시카 지음, 이정민 옮김 / 모로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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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점 ★★★★☆

 

누구나 행복해야 할 크리스마스이브, 노숙인으로 추정되는 신원 미상의 중년 여성이 시신으로 발견된다. 딱딱한 콘크리트 바닥에 반듯하게 누워 있는 여성의 옷은 흐트러졌고 머리에는 둔기로 맞은 흔적이 있다. 사건을 담당한 괴짜 형사 미쓰야와 신입 형사 다도코로는 살해당한 노숙인 여성의 삶과 죽음을 조사하며 얽히고설킨 불행을 발견하는데... (출판사 소개글을 인용했습니다.)

 

마사키 도시카는 20226월에 출간된 그날, 너는 무엇을 했는가로 처음 만난 작가입니다. 이 작품까지 단 두 편만 소개된 작가인데, 두 작품 모두 미쓰야&다도코로 시리즈로 불립니다. 경시청 수사1과 소속의 괴짜 형사 미쓰야 슈헤이와 관할서 신참 형사 다도코로 가쿠토 콤비가 이끄는 미스터리인데, 두 작품 모두 단순히 범인은 누구?’보다는 조금 더 묵직하고 어두운 주제를 다루고 있어서 각별하게 읽혔습니다.

 

그날, 너는 무엇을 했는가자식 때문에 인생의 방향이 크게 뒤틀어진 여러 어머니가 이야기를 이끌어갔다면, 이번 작품은 불의의 사고 혹은 사건 때문에 비극을 맞이하게 된 여러 부부가 중심에 놓여있습니다. 남편을 살해한 범인이 1년도 넘게 잡히지 않고 있는 상황에서 슬픔에 빠진 아내역할에 충실하면서도 이제는 행복해지고 싶어.”라는 욕망을 감추지 못하는 여자, 부유하진 않아도 행복한 삶을 누리던 어느 날, 남편이 급사하면서 순식간에 막장으로 내몰린 여자, 그리고 자신의 잘못이 아닌데도 사람을 죽였다는 심한 죄책감에 빠진 나머지 가족에게 등을 돌린 남자 등 한순간에 눈앞의 세상이 뒤집어져버린 여러 부부가 복잡한 미스터리 속에 얽혀있습니다.

 

별개로 보이던 두 사건 - 크리스마스이브에 살해당한 중년 노숙여성과 1년 전 귀갓길에 살해당한 한 직장인 이 의외의 지점에서 접점을 이루면서 미스터리는 무척이나 복잡한 양상으로 전개됩니다. 꽤 많은 인물이 등장하기 때문에 인물관계도를 메모하면서 읽는다면 이 작품의 매력을 좀더 만끽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안 그러면 엄청난 기억력과 추리력을 발휘하며 혼자서 폭주하는 괴짜 형사 미쓰야의 추리를 쫓아가기가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등장인물들은 단순히 미스터리 속 캐릭터에 그치지 않고 삶을 대하는 극과 극의 태도들을 극명하게 보여줍니다. 오로지 타인의 불행만을 바라거나 분수에 맞지 않는 이기적인 행복을 바라거나 현실에 만족하지 못하고 온통 거짓뿐인 허상에 사로잡히거나 그도 아니면 세상 모든 것이 파멸에 이르기만을 기다리는 등 일그러질대로 일그러진 군상들이라고 할까요? 그래서 다 읽은 뒤에는 그녀가 마지막에 본 것은이라는 제목이 얼마나 많은 것을 의미하고 있는지 새삼 절감하게 됩니다.

 

다만 너무 많은 인물들과 그만큼 복잡한 관계들이 이야기에의 몰입을 방해하기도 하고 현실감을 떨어뜨린 아쉬움은 분명히 있습니다. 쉽게 말하면 어떻게 저렇게들 엮일 수가 있지?”라고 할까요? 또 괴짜 형사 미쓰야의 엄청난 능력이 때론 지나친 비약으로 보이는 경우도 종종 있어서 한참 이야기에 빠져 있다가 갑자기 훅 하고 소외되는 느낌을 받곤 했습니다. 미쓰야가 조금만 더 사실감 있는 능력자로 그려졌다면 더 매력적인 캐릭터가 됐을 거란 생각입니다.

 

검색을 해보면 이 작품 이후에도 レッドクローバー’(레드 클로버, 2022)가 출간된 걸로 나오는데, 혹시 이 작품도 미쓰야&다도코로 시리즈라면 꼭 한국에 출간됐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사회파 미스터리는 아니지만 단순한 범인 찾기를 넘어 묵직한 여운을 남겨주는 마사키 도시카의 작품을 다시 한 번 맛보고 싶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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