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N의 비극
다카노 가즈아키 지음, 김아영 옮김 / 황금가지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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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베스트셀러로 약간의 부와 명예를 거머쥔 나쓰키 슈헤이는 아내 가나미의 예상치 못한 임신으로 인해 고민에 빠집니다. 경제적 상황으로 보나 작가로서 막 발돋움 하려는 자신의 처지로 보나 현재는 아이를 키울 상황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결국 가나미를 설득해서 낙태를 결정하지만, 그 직후 이상한 일이 벌어집니다. 가나미에게 정체를 알 수 없는 여인이 빙의된 것입니다. 가나미를 진료한 정신과 의사 이소가이는 가나미 속의 또 다른 그녀를 지켜보며 혼란에 빠집니다. 해리성 빙의 장애라는 명백한 의학적 소견이 나왔지만, 동시에 사령(死靈)이 깃들었을지도 모른다는 미신적 판단을 무시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던 중 우연한 기회에 또 다른 그녀의 정체를 파악한 슈헤이와 이소가이는 큰 충격을 받고, 어떻게든 해법을 찾기 위해 동분서주하지만 사태는 점점 나쁜 쪽으로만 치닫습니다.

 

다카노 가즈아키의 마니아라서 신작 ‘KN의 비극에 대한 기대가 무척 컸습니다. 2012년을 휩쓴 제노사이드이전부터 ‘13계단그레이브 디거를 통해 탄탄한 문체와 묵직한 스토리텔링,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메시지 등 미스터리와 휴머니즘을 적절히 배합할 줄 아는 탁월한 작가임을 알게 됐기 때문입니다.

‘KN의 비극의 마지막 장을 덮은 후의 첫 느낌은 다카노 가즈아키가 정말 써보고 싶었던 소재와 함께 마음껏 달렸네.”였습니다. ‘제노사이드와 그 전작들의 성공이 가져다 준 해방구 안에서 평소라면 출판사가 고개를 갸웃거렸을 덜 대중적인 소재를 마음껏 요리했다는 뜻입니다.

 

가나미의 빙의로 인해 남편 슈헤이와 의사 이소가이가 겪는 충격은 독자에게도 고스란히 전달됩니다. 지금 읽고 있는 내용이 실제 정신의학 증례가 있는 현실적인 이야기인지, 아니면 다카노 가즈아키가 지어낸 호러성 귀신 픽션인지 너무나도 헷갈립니다. 전자라고 하기엔 가나미의 마음속에 깃든 또 다른 그녀가 과학적 근거가 있는 빙의라기보다는 미신쪽에 가깝고, 후자라고 하기엔 설마 다카노 가즈아키가 호러 픽션을?”이란 편견이 앞서게 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에필로그까지 읽고 나면 그 충격과 혼란은 다카노 가즈아키가 궁극적으로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이해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했던 통과의례임을 깨닫게 됩니다. 스포일러가 될 수 있어 중반 이후의 이야기를 언급할 수는 없지만, 이 작품의 핵심은 과학이냐? 귀신이냐?”가 아니라 생명에 관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임신과 출산이라는 존귀한 과정에 대해 우리가 얼마나 무감각하며 심지어 하찮게 여기고 있는 것은 아닌지 다카노 가즈아키는 전작들에 맞먹는 묵직한 목소리로 독자에게 질문을 합니다.

부주의한 섹스와 그로 인한 임신, “아이냐, 맨션이냐?”를 놓고 낙태의 손익을 계산하는 남자, 임신 21주가 넘은 여고생의 낙태를 시술했던 의사, 불임으로 인한 스트레스로 병원 옥상에서 투신한 여인, 그리고 임신을 이유로 남자친구에게 버림받았다가 만삭의 몸으로 비참하게 죽어간 여인 등 주조연으로 등장한 대부분의 캐릭터들이 임신과 출산 과정에서 다양한 사건들을 겪는데 바로 이런 설정 속에 다카노 가즈아키의 진심이 숨어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카노 가즈아키가 굳이 빙의라는 과학이면서도 과학이 아닌 듯한초자연적 현상을 끌어들인 건 생명의 탄생이라는 존엄한 과정과 그에 대처하는 인간들의 이중적 태도를 좀 더 극적으로 표현하기 위한 것으로 해석됩니다.

 

다만, 377페이지에 달하는 적잖은 분량에 담기에는 이야기의 크기가 좀 작았다는 느낌입니다. 말하자면, 가나미 속의 또 다른 그녀이야기는 동어반복처럼 보였고, 나머지 인물들도 계속 전전긍긍하는 모습만으로 상당한 분량을 차지합니다. 병행되는 조연급 에피스드들도 주제를 위해 다소 억지로 동원된 듯 보였습니다. 그러다 보니 중반쯤에 이르러 눈꺼풀이 무거워지기도 했고 지루함도 살짝 느껴지는 등 다카노 가즈아키 작품들을 읽으면서 전혀 경험해보지 못한 불의의 사태를 겪기도 했습니다.

 

몇몇 아쉬움들이 남았지만, 이 이야기를 꼭 써보고 싶었다는 애착을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어서 다카노 가즈아키의 의외의 도전 그 자체에 경의를 표하고 싶어졌습니다. 성급한 기대이긴 하지만, 그의 신작이 빨리 출간되기를 고대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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킹을 찾아라 노리즈키 린타로 탐정 시리즈
노리즈키 린타로 지음, 최고은 옮김 / 엘릭시르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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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안 본격 미스터리에 소원했던 탓인지 최근 연이어 읽은 본격 미스터리 작품들에게 잘 적응을 못하고 있습니다. 사건 풀이에만 너무 집중하다 보니 현실감이나 몰입도도 떨어지고, 울컥하게 만들거나 분노를 자아내게 만드는 캐릭터들의 감정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고 할까요? 애초 본격 미스터리에서 그런 걸 기대해선 안 되지만 새삼 아쉽게 느껴지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킹을 찾아라는 데뷔 이래 본격 미스터리의 길을 걸어왔다는 노리즈키 린타로의 최신작입니다. 4중 교환살인이라는 희대의 사건을 탐정이자 추리 작가인 노리즈키 린타로와 그의 아버지인 사다오 총경이 함께 풀어가는 이야기입니다.

 

우울증에 걸린 아내, 구두쇠 삼촌, 히키코모리 형 등을 교환 살해하기 위해 모인 네 사람은 트럼프 카드를 통해 대상자와 살해 순서를 정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뽑은 두 장의 카드를 일종의 계약서처럼 소지합니다. 교환살인 계획은 첫 희생자의 등장으로 무난히 진행되는 것처럼 보였지만, 단 한 번의 불운으로 인해 명탐정 린타로의 레이더에 걸려듭니다. 물론 린타로의 행보 역시 순탄하게 진행되진 않습니다. 엉뚱한 인물 탓에 정보가 언론에 유출됐고, 그로 인해 교환 살해범들의 행적은 예상과 다른 방향으로 전개됐기 때문입니다.

 

한순간도 놓칠 수 없는 긴장감 덕분에 페이지는 잘 넘어갑니다. 사건 현장이라고 해봐야 딱 한 번 방문한 것이 전부인 린타로의 추리는 감탄을 자아내고, 트럼프 카드에 감춰진 비밀은 밀실에 버금가는 트릭을 담고 있습니다. 또한 킹을 찾아라는 독자들의 예상을 깔끔하게 배반할 만큼 역설적인 제목입니다.

이 모든 장점에도 불구하고 마지막 장을 덮었을 때의 느낌은 그저 덤덤한 정도였습니다. “, 이렇게 사건이 해결됐구나.”라는 느낌 뿐 그 이상의 감흥은 없었습니다. 말하자면, 교환살인에 참가한 범인들에 대한 증오심이나 동정심도 없었고, 살해된 피해자들 역시 통쾌하다든가, 안타깝다든가 하는 느낌을 주지 못했습니다. 소설이라기보다 팩트 체크를 본 느낌이랄까요?

물론 주요 인물들의 캐릭터와 감정에 대한 묘사는 결코 부족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사회파 미스터리나 사연 있는 이야기를 좋아하는 취향 때문인지 대체로 기계적인 느낌을 많이 받았고, ‘안방 탐정린타로의 뛰어난 추리에 의존하는 스토리 역시 그리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재미있게 읽은 건 맞는데, 어쩐지 남는 것이 없는 허전함만 기억하게 될 것 같습니다. 노리즈키 린타로와는 처음 만난 작품인데, 책장에 오래 소장 중이라 다음에 만나게 될 게 분명한 잘린 머리에게 물어봐에서는 킹을 찾아라보다는 조금은 더 남는 것을 만끽할 수 있기를 기대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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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억관 옮김 / 민음사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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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키의 신작에 대한 폭발적인 사전 예약을 놓고 우리는 하루키를 읽는 것인가? ‘하루키 읽기를 읽는 것인가?”라는 다분히 독설 담긴 기사를 본 적이 있습니다. 하루키의 경우 개인적으로 작품에 따라 호볼호가 좀 극명해서인지 무척 공감되는 내용이었습니다. 오래 전 조금은 등 떠밀리듯 하루키를 읽기 시작한 게 맞고, ‘1973년의 핀볼처럼 젊은 날들을 돌아보게 해준 수작도 있었지만, ‘1Q84’처럼 어떻게든 버티다가 결국 포기했던 작품들도 적지 않았습니다. ‘색채가 없는~’의 경우 “‘상실의 시대의 속편이라는 부제가 더 어울릴...”이라는 한 기자의 100자 평 때문에 광풍 같은 사전 예약에 관한 독설에 공감하면서도 읽고 싶어진 작품입니다.

 

다자키 쓰쿠루가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이었던 16년 전의 이야기와 이제는 36살이 된 그가 오래된 상처와 정면으로 마주치는 이야기로 구성돼있습니다. 완벽한 오각형처럼 틈새 하나 없는 우정을 나누던 다섯 명의 친구들. 그중 네 명의 이름엔 색깔을 의미하는 한자가 들어있지만, 다자키 쓰쿠루의 이름만은 아무 색채도 들어있지 않습니다. 모두 고향인 나고야에서 대학에 진학했지만, 철도역을 만드는 엔지니어를 꿈꾸던 쓰쿠루는 홀로 도쿄로 향합니다. 그리고 2년 후, 고향 친구들로부터 갑작스런 절교를 선고받습니다. 영문 모를 일방적 절교는 쓰쿠루를 죽음의 문턱까지 밀어붙였고, 이후로도 그의 삶의 방향을 뒤흔드는 큰 사건으로 남습니다.

36살이 된 쓰쿠루는 두 살 연상의 연인 사라로부터 이제는 그들에게 16년 전의 일을 물어볼 때가 된 것 같다는 말을 듣곤 판도라의 상자를 향해 순례를 떠나는 기분으로 친구들을 만나기로 결심합니다. 하지만 쓰쿠루를 기다리고 있는 건 누군가의 죽음, 누군가의 충격적인 설명, 그리고 마지막 진실을 품고 있는 멀고 먼 핀란드로의 고통스런 여정이었습니다.

 

이 작품이 가장 어필할 계층은 쓰쿠루의 또래인 30대 중반입니다. 10대와 20대로부터 너무 멀지도, 너무 가깝지도 않은 나이. 추억할 친구들과 사건들이 너무 선명하지도, 너무 많이 잊히지도 않은 나이. 또 젊다고도 할 수 없고, 중년이라고 불리기엔 좀 억울한, 그런 나이.

하루키가 쓰쿠루의 나이를 서른여섯으로 설정한 것도 그런 맥락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 나이라면 서른도 겪었고, 그 덕분에 조금은 성숙한 관점으로 세상과 자신을 돌아볼 수 있기도 하고, 평생 기억에 남을 인물이나 사건을 한두 번쯤 겪기에 적당한 나이입니다.

 

인물, 소재, 사건 못잖게 이 작품에서 중요하고 의미 있는 장치는 프란츠 리스트의 순례의 해라는 피아노 소곡집입니다. 그 가운데 ‘Le Mal du Pays’라는 5분이 조금 넘는 피아노곡은 쓰쿠루의 친구 중 하나였던 시로가 가장 즐겨 쳤던 곡이자 쓰쿠루에게는 편안한 안식을 건네줬던 곡입니다. 직역하면 향수(鄕愁) 정도인데, 본문의 설명에 따르면 전원 풍경이 사람의 마음에 불러일으키는 영문 모를 슬픔이라고 합니다.

아카(), 아오(), 시로(), 구로() 등 이름에 들어간 색깔만큼 개성이 강했던 친구들 속에서 쓰쿠루는 스스로를 색채도 없고, 개성도 없는 텅 빈 인간이라고 여겨왔습니다. 그들로부터 버려진 후엔 그 어떤 인간관계도 일정 거리 이상으로 좁혀본 적이 없습니다. 여자들 역시 적당한선에서 만나고 헤어짐을 반복할 따름이었습니다. 그랬던 쓰쿠루가 마치 순례를 떠나듯 자신의 과거와 조우하려 할 때 그를 지배한 것은 과거에 대한 궁금함보다는 알 수 없는 긴장과 두려움입니다. 그 복잡한 감정들을 대변해주는 것이 바로 쓸쓸함이 진하게 배어있는 피아노곡 ‘Le Mal du Pays’입니다. 이 곡은 작품 곳곳에 수시로 등장하여 쓰쿠루의 심리와 감정을 설명하는데 꽤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책을 읽다가 더는 안 되겠다 싶어, 음원 서비스에서 이 곡을 찾아내선 내내 들으면서 남은 분량을 읽었습니다. 막연한 느낌이긴 하지만 쓰쿠루의 긴장과 두려움이 조금은 구체적으로 느껴졌다고 할까요?

 

이 작품의 비주얼 역시 무척 인상 깊었는데, 리스트의 피아노 소곡집이 청각적 즐거움을 선사했다면, 쓰쿠루의 취미인 수영, 쓰쿠루가 사랑하는 철도역, 쓰쿠루가 사먹거나 직접 만든 몇 가지 와인과 요리, 쓰쿠루-구로-시로가 뒤엉킨 꿈속의 쓰리섬 섹스, 구로가 살고 있는 핀란드 도심과 호숫가의 풍광 등은 직접 해보고 싶고, 먹어보고 싶고, 가보고 싶게 만들 정도로 생생하게 그려져서 마치 눈앞에서 지켜보는 듯한 시각적 즐거움을 제공했습니다.

 

쓰쿠루의 젊은 날의 비밀과 상처는 누구나 경험할 만한 보편적인 것들은 아니지만, 그 무렵 지독한 통과의례를 겪으면서 자신의 절망과 자기연민을 타인들에게 들키지 않으려 전전긍긍했던 많은 쓰쿠루들이 경험했을 법한 일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서른여섯이 된 쓰쿠루들이라면 색채가 없는~’의 마지막 장을 덮은 후 아직은 완전히 풍화되지 않은 그 시절을 떠올리며 조금은 부끄럽기도, 조금은 그립기도, 조금은 회한에 잠기기도 할 것 같습니다.

 

하루키와 매번 궁합이 잘 맞는 편은 아니지만, ‘색채가 없는~’은 비교적 좋은 기억으로 남을 것 같습니다. 평범한 청춘물 혹은 성장소설에 머물 수도 있는 소재였지만, 쓰쿠루의 20여 년의 삶을 바느질하듯 꼼꼼히 그려냈고, 그의 인생의 결정적인 한 챕터가 열리고 닫히는 순간들을 하루키 특유의 건조하면서도 세밀한 문장들로 잘 포착해냈기 때문입니다. 느리고 정적인 듯 보이지만 실은 무척이나 격하게 요동치는 이야기를 담아낸 색채가 없는~’은 언젠가 더 나이를 먹은 후 다시 읽는다면 또 다른 의미와 감흥을 전해줄 것만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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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개 달린 어둠 - 메르카토르 아유 최후의 사건
마야 유타카 지음, 박춘상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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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마카가미 가문의 본거지인 창아성의 이토로부터 사건 의뢰와 협박장을 동시에 받은 탐정 기사라즈와 조수격인 추리소설가 는 창아성 도착과 동시에 목이 잘린 두 구의 시신과 마주칩니다. 그리고 그 이후로 창아성에 거주하던 사람들이 차례로 살해당합니다. 하나같이 목이 잘린 채 발견되지만, 매번 서로 다른 상징들이 사체 곁에서 발견됩니다. 얼마 후 진범을 밝히겠다며 관계자들을 한 자리에 모았다가 엉뚱한 사태를 맞이한 기사라즈는 그 직후 모습을 감추고, 그와 동시에 기이한 외모의 탐정 메르카토르 아유가 창아성에 등장합니다. 하지만 살인은 쉴 새 없이 계속 일어나고, 이제 창아성의 생존자는 얼마 남지 않게 됩니다.

 

애꾸눈 소녀는 아직 읽지 못했지만 좋은 평을 받았다는 소문을 들은 적이 있어서, 그 작가의 데뷔작이라는 날개 달린 어둠을 나름 기대를 갖고 읽게 됐습니다. 오랜만에 읽는 본격 미스터리라 그런지 창아성이라는 서양식 저택이 등장하는 순간 반갑기도 하고, 반대로 약간 맥이 빠지기도 했습니다. 서양식 저택이 주 무대인 미스터리에서 그다지 재미를 보지 못한 것이 가장 큰 이유였고, 이 작품이 쓰인 시기가 1991년이라는 점 때문에 왠지 올드한 전개나 결말을 만나게 되지 않을까, 라는 우려가 두 번째 이유였습니다.

 

결론부터 얘기하면, 읽는 내내 불편함과 불만을 떨쳐내기 힘들었고, 1991년에 출간된 데뷔작이란 점을 감안하더라도 좋은 평을 하기는 어려워 보였습니다. 하지만 줄거리를 정리하느라 한 발 떨어져서 이라는 작품 전체를 바라보자 읽는 동안 느낀 불편과 불만이 대체로 나무에서 기인했다는 점을 알게 됐습니다. 말하자면, 얼개 자체는 본격 미스터리로서 적절히 짜였지만 디테일에서 아쉽고 부족한 부분이 많았다는 뜻입니다. 서평을 쓰기 전만 해도 별 두 개를 염두에 뒀지만 나중에 한 개를 추가한 건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가장 아쉬웠던 점을 두 가지만 얘기하면, 우선, 지나치게 작위적인 캐릭터와 억지스러운 전개입니다. 창아성의 이마카가미 가문 사람들은 캐릭터 자체도 작위적이지만, 이야기에 걸맞게 살해당하는 게 아니라 작가의 목적 혹은 정해진 엔딩을 위해 억지스럽게 죽어나갑니다. 전개 면에서도 막판 반전은 뒤통수를 치는 느낌이 아니라 말 그대로 반전을 위한 반전일 뿐입니다. 특히 마지막 반전은 앞서 습득한 정보들을 모조리 무용지물로 전락시킬 정도입니다.

두 번째는 작가의 지적 유희의 과잉또는 허세에 가까운 현학입니다. 그리스-로마 신화에서부터 기독교와 러시아정교를 거쳐 서유럽의 음악과 미술까지 망라하는 천재적인 기사라즈의 말장난은 심하게 말하면 무식한독자를 희롱하는 느낌까지 들게 만듭니다.

 

서랍장 겉면에는 칼레발라의 한 장면을 묘사한 듯한 조각이 새겨져 있다.”

천진난만한 웃음이다. 큐폴라스의 동신(童神)을 연상케 하는 순진무구한 몸짓이다.”

그 모습은 딸을 하데스에게 빼앗긴 데메테르 같았다.”

 

이외에도 수없는 인용과 비유, 부속설명들이 곳곳에서 발견되는데, 어느 시점부터는 짜증을 넘어 이 무절제한 현학적 태도에 화가 나기 시작합니다. 굳이 지적 허영 없이도 충분히 묘사할 수 있는 내용들을 과대 포장한 셈인데, 결과적으론 이야기에의 몰입을 방해한 훼방꾼이 되고 말았습니다. 자해 행위나 다름없는 작가의 자충수라고 할까요?

 

얼마든지 훌륭한 본격 미스터리의 대열에 들어갈 수 있는 얼개를 갖췄음에도 불구하고 날개 달린 어둠은 위에서 언급한 점들 때문에 나중에라도 다시 읽을 생각은 전혀 들지 않을 것 같습니다. 다만, 호평을 들었다는 애꾸눈 소녀를 통해 마야 유타카의 진면목을 만나볼 수 있기를 기대할 따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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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문의 여자
오쿠다 히데오 지음, 양윤옥 옮김 / 오후세시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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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원해주고 싶은 팜므 파탈이 떴다

 

책의 띠지에 적힌 카피입니다. 오쿠다 히데오의 광팬임에도 불구하고 다 읽고 난 후 뭔가 허전함을 지울 수가 없었는데, 뒤늦게 띠지의 카피를 보고 나서야 이 책을 읽은 보람(?)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미리 카피를 봤더라면 좀더 흥미진진하게 읽었을 텐데, 라는 생각이 들만큼 소문의 여자를 함축적으로 표현한 잘 만들어진 카피입니다.

 

10장의 챕터로 구성된 소문의 여자는 주인공 이토이 미유키의 기이한 삶을 시간의 흐름에 따라 서술하고 있습니다. 모든 챕터에서 미유키는 말 그대로 소문의 여자로만 등장할 뿐 스스로 주체가 되는 경우는 한 번도 없습니다. 8장까지만 보면 매 챕터마다 4명의 인물이 등장하여 그들만의 화제를 늘어놓는데 항상 그 중심에는 미유키가 있습니다.

중고차 판매점, 마작장, 요리교실, 파친코 가게, 건설업자들의 모임 등 챕터마다 제각각의 무대가 펼쳐지는데, 그때마다 미유키는 달라지거나 진화된 모습으로 무대 위에 등장합니다. 중고차 판매점의 초라한 사무원이었다가, 마작장에서는 손님들을 끌어들이는 묘한 분위기의 여인으로 변신하고, 요리교실에서는 예비 신부로서 부조리에 항거하는 리더가 됐다가, 어느 순간 유흥가 최고의 클럽의 마담으로 급성장하기도 합니다.

 

등장인물들이 이러쿵저러쿵 떠들어대는 미유키에 관한 소문을 통해 독자들은 그녀가 어떻게 팜므 파탈로 성장해 가는지 짐작하게 됩니다. ‘미유키의 성장은 마지막 두 챕터에서 경찰이 개입하면서부터 위기를 맞이하게 되지만, 보통의 미스터리와는 전혀 다른 조금은 황당하기까지 한 엔딩으로 달려갑니다. 결국 마지막 한 장밖에 남지 않았을 때 무척 당황스러웠습니다. “어떻게 끝내려고 이러는 걸까?”라는 혼잣말이 저절로 나올 정도였습니다. 그리고 앞서 언급한 대로 책을 덮은 후 뒤늦게 띠지의 홍보문구를 보곤 그제야 오쿠다 히데오의 의도를 깨닫게 됐습니다.

 

저의 경우엔 비교적 관대한(?) 평가 쪽으로 기울었지만, 독자에 따라서는 뭐야 이게?” 소리가 나오는 경우도 적지 않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띠지의 홍보문구대로 응원해주고 싶게 할 거면 제대로 된 미유키의 엔딩을 보여주든가 아니면 보통의 미스터리처럼 미유키의 행적들에 대해 정당한 판결을 내리든가, 그것도 아니라면 뒤통수를 칠 만한 반전이라도 내놓든가!!! 이런 불만들이 쏟아져 나올 여지가 많다는 뜻입니다.

 

오쿠다 히데오만의 무겁지 않은 문체와 사실감 있는 캐릭터들이 함께 잘 버무려져서 소소한 명품을 만들어낸 것은 사실이지만, 어딘가 허전함과 아쉬움이 느껴지는 가장 큰 이유는 해학성의 부족이 아닐까 싶습니다. 좀더 역설적인 웃음을 곳곳에 포진시켰더라면, 또 미유키의 행위들 하나하나에 그녀만의 유쾌한 동기라도 설정되어 있었더라면, 그래서 그것이 불법이나 범법이라기보다는 풍자로 느낄 수 있었더라면 좀더 재미있는 책읽기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물론 엔딩에서 느끼게 되는 당혹스러움도 조금은 줄어들었을 거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해학, 풍자, 반전이야말로 오쿠다 히데오의 최고의 무기이기에 허전함과 아쉬움이 조금은 더 크게 느껴졌는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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