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니와 몬스터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48
가이도 다케루 지음, 권일영 옮김 / 비채 / 2013년 4월
평점 :
절판


(약간 상세한 줄거리가 포함된 서평입니다. 아직 읽지 않으신 분은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인구 800만의 거대 도시 나니와를 배경으로 세 챕터의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첫 챕터인 캐멀은 신종 인플루엔자에 대한 중앙정부의 과잉 대처와 첫 환자가 발생한 탓에 인적, 물적 교류를 봉쇄당한 나니와 시민들의 절망적인 상황을 다룹니다. 질병의 위력에 비해 지나칠 정도로 강경책을 주장하는 후생노동성과 매스컴의 호들갑은 거대한 음모론을 연상시킵니다.

두 번째 챕터인 가마이타치1년 전의 이야기를 다룹니다. 도쿄지검 특수부 에이스 가마가타 마사시는 나니와 특수부로 자리를 옮긴 뒤 나니와 지사 무라사메 고키, 정체불명의 인물 히코네와 조우하곤 중앙정부의 부당한 정책을 정면공격합니다. 나니와의 공격에 당황한 중앙정부는 비밀회의체인 불상사 뒷수습 회의를 통해 나니와를 철저히 뭉개버리기로 결정합니다.

마지막 챕터인 드래건은 다시 현재로 돌아와 나니와가 자신들만의 정치적 이상을 실현시키기 위해 중앙정부와 벌이는 전면전을 그립니다. 나니와의 정치적 이상의 근간은 이른바 의익(醫翼)주의입니다. 말하자면 국민의 행복을 위한 선결 과제는 완벽한 의료 시스템이며, 그러기 위해 의료는 사법을 통제할 수 있어야 하고, 그를 통해 중앙정부로부터 진정한 독립을 이뤄낸다.”는 것입니다. 무라사메 지사는 독단적으로 나니와에 대한 봉쇄를 푸는 것은 물론, 신종 인플루엔자의 발발과 확산에 담긴 중앙정부의 정치적 의도를 폭로합니다.

 

가이도 다케루의 작품을 읽고 별 두 개짜리 서평을 쓰려니 여러 가지로 아쉽고 속상합니다. ‘다구치-시라토리 시리즈에 푹 빠져 메디컬 엔터테인먼트의 진수를 맛봐온 독자 입장에서 나니와 몬스터는 무척 당혹스러운 작품이었습니다. 그동안 전작들을 통해 권력과 이익 중심으로 꾸려진 의료 체계의 문제점을 폭로하고 설득력 있는 대안을 제시해온 것에 반해, 이번 작품에서 가이도 다케루는 다소 과격하고 혁명적인 주장을 펼칩니다. 그러다 보니 소설이라기보다는 성명서를 읽는 듯한 느낌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두 번째 챕터 중반부까지만 해도, 신종 인플루엔자를 악용한 중앙정부의 음모에 맞서 특수부 에이스 검사 가마가타가 나니와의 소시민들과 함께 저항하는, 말 그대로 메디컬 엔터테인먼트가 전개될 것으로 기대했습니다. 암담한 상황에서도 소신껏 진료를 펼치는 기쿠마 의사 父子와 슈퍼 히어로 검사 가마가타의 연대는 다구치-시라토리 콤비를 능가할만한 매력을 품었고, 대학병원을 벗어나 일본 전역을 무대로 삼은 점이나 정계의 거물까지 대거 포진된 캐릭터들은 가이도 다케루의 전작들에 비해 훨씬 더 긴장감을 느낄 수 있는 설정들입니다.

하지만 나니와 지사 무라사메가 등장하면서 이야기는 엉뚱한 곳으로 흘러갑니다. ‘의료입국이라는 허황된 정치적 이상론과 함께 일본 3분할론이라는 비현실적인 주제가 이야기의 중심을 차지합니다. 대신 첫 챕터의 주인공 기쿠마 의사 父子는 두 번째 챕터부터 사라져버렸고, 두 번째 챕터의 주인공 가타가마 검사 역시 세 번째 챕터에서 꼬리를 내려버립니다. 나니와 지사 무라사메도 뜬금없는 캐릭터지만, 세 번째 챕터의 주인공이자 거물 정치인들을 만으로 좌지우지하는 정체불명의 히코네라는 인물은 황당함 그 자체였습니다.

 

메디컬로 시작해서 허황된 정치 드라마로 마무리되는 것을 지켜보면서 가이도 다케루의 무리수에 대해 의문점과 동시에 큰 아쉬움을 느꼈습니다. ‘다구치-시라토리 시리즈를 통해 제기해온 의료 현장의 문제점은 한국의 현실과는 조금은 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깊이 공감할 수 있는 내용들이었습니다. 하지만 나니와 몬스터는 한발 더 나아가 의료만이 사법을 통제할 수 있고, 의료만이 제대로 된 입국(立國)의 기반이라는 납득하기 쉽지 않은 주장을 일관되게 제기합니다. 소설보다 성명서에 가깝다고 느낀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정제되지 않은 작가의 감정 폭발, , 후생노동성으로 대표되는 중앙 관료체제에 대한 증오심, 의료입국의 당위성과 사법에 대한 불신 등 현직 의료인으로서 자신이 꿈꾸는 이상과 주장들을 치기어린 이야기를 통해 드러낸 것이 전부였습니다. ‘의익주의자이자 의료 신격화를 주장하던 정체불명의 히코네라는 인물은 그저 가이도 다케루의 분신에 다름 아니었을 뿐입니다. 그의 팬으로서 많이 실망스럽고, 그만큼 아쉬움이 큰 작품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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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라이머즈 하이
요코야마 히데오 지음, 박정임 옮김 / 북폴리오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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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올해(2013)는 말 그대로 요코야마 히데오의 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 같습니다. 오래 전부터 읽고 싶은 목록에 그의 여러 작품들을 올려놓고도 정작 올해 들어서야 종신검시관얼굴()’로 첫 테이프를 끊었는데, ‘64’클라이머즈 하이로 이어지는 연이은 대작을 통해 그동안 과소평가했던 요코야마 히데오의 진면목을 발견하게 된 것은 큰 행운이었습니다.

이미 2005년에 1~2권으로 발간된 적이 있지만 카페나 블로그, 인터넷 서점에서도 그다지 눈에 띄지 않았던 것이 오히려 신기하게 여겨집니다. ‘64’의 영향 때문에 새삼 새 번역본이 나왔다고 하기엔 왠지 오비이락 같고, 그의 작품들이 최근 여러 출판사에서 출간되는 것을 보면 올해가 한국에서 요코야마 히데오를 제대로 조명하기 시작한 첫해라는 느낌이 듭니다.

 

군마 현의 지방지 긴타칸토의 기자 유키 가즈마사가 주인공입니다. 이야기는 크게 두 갈래로 진행되는데, 1985년 군마 현 산악지대에 추락한 일본항공 사고를 둘러싼 긴타칸토의 긴박한 1주일간의 취재 전쟁이 하나이고, 또 하나는 그로부터 17년이 지난 현재, 유키 가즈마사가 57세의 나이에 쓰이타테이와라는 험준한 암벽등반에 도전하는 이야기입니다.

520명의 사상자를 낸 세계 최대 항공사고는 긴타칸토라는 지방지를 거의 전쟁터를 방불케 하는 고도의 긴장상태로 몰아갑니다. 총괄데스크를 맡은 유키는 부서 간 이기주의, 개인 간의 이해의 충돌, 사내의 정치적 대립구조 등 전쟁터에 다름 아닌 편집국 속에서 특종과 언론의 사명을 위한 총성 없는 전쟁을 진두지휘합니다. 사고 뉴스를 한 줄이라도 더 싣기 위해 광고를 전격 삭제하기도 하고, 최신 뉴스를 싣기 위해 윤전기를 멈추거나 배급트럭의 키를 훔치기도 하고, 유족들의 분노를 일으킬 독자 투고를 모두의 반대를 무릅쓰고 게재하기도 하고, 후배 기자의 특종을 위해 상사들과 멱살잡이도 마다하지 않습니다.

그로부터 17년이 흐른 현재, 유키는 자신의 인생에 큰 궤적을 남긴 친구의 아들과 함께 수백 명의 산악인의 목숨을 앗아간 쓰이타테이와 암벽등반에 나섭니다. 그것은 단순히 등반이란 행위가 아니라 유키 가즈마사 일생의 화두 - 내려가기 위해 올라간다 를 실천하기 위한 일종의 고행입니다. 더불어, 30년이 넘는 기자로서의 삶을 정리하는 참회이기도 합니다.

 

이 작품에 잘 어울리는 한마디 평“‘64’의 신문사 버전!”입니다. ‘범인 찾기미스터리는 아니지만 그 이상의 긴장감과 속도감이 있습니다. 비록 작은 규모의 지방신문이지만, 그 안에서 벌어지는 부서 간의 격렬한 대결과 특종을 위한 기자들의 필사적인 노력은 희대의 연쇄살인마와 그를 쫓는 주인공의 이야기보다 더 강력한 페이지터너입니다. 주인공 유키를 비롯하여 너무나도 생생하고 개성 강한 캐릭터들은 피아를 떠나 자신만의 카리스마를 온전히 발휘하여 작품 자체를 뜨거운 용광로로 만듭니다. 그리고, 요코야마 히데오의 가장 큰 매력인 휴머니즘은 마지막 방점처럼 빛납니다. 가슴을 먹먹하게 만들 뿐만 아니라 눈물까지 쏙 빼놓는 진하고 묵직한 감동이 유키를 통해 수시로 전해집니다.

 

유키의 이야기는 불가능한 미션을 성공시킨 영웅담도 아니고, 눈물을 짜내기 위한 억지 휴먼스토리도 아닙니다. 오히려 작지만 소중한 가치들에 대한 애정, 잔머리보다는 열정을 앞세우는 순수함, 무모하게 보일 수도 있는 올곧음 등이 유키가 끌고 가는 이야기의 핵심입니다.

더불어, 방대한 서사 중에 유키의 개인사 역시 눈길을 끄는데, 불행한 가족사와 가족관계, 산에 대한 사랑과 조직에서의 미션 사이에서 고민하던 안자이 교이치로와의 우정과 회한, 수년 전 자신 때문에 죽음으로 내몰린 후배 기자에 대한 죄책감 등 평범한 개인 유키의 어깨를 짓누르는 주변 요소들 덕분에 단순히 반항적인 슈퍼 히어로가 아니라 고민하는 인간에 대한 성찰이 작품 전체에서 살아 숨 쉬는 듯 전해집니다.

 

실은 읽으면서 서평에 인용하기 위해 몇 개의 문장을 적어놓았는데, 막상 서평을 쓰다 보니 굳이 필요한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무리 훌륭한 문장이더라도 직접 마지막 장까지 달리고 난 후에야 그 맛과 깊이를 제대로 느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입니다.

취향의 차이 때문에 웬만해선 남들에게 책을 강추하는 경우가 잘 없는데, ‘클라이머즈 하이는 올 여름 must-read 목록에 자신 있게 추천할 수 있는 작품입니다. 유키 가즈마사의 전쟁 같은 1주일을 통해 ‘64’ 이상의 감동과 여운을 느껴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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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N의 비극
다카노 가즈아키 지음, 김아영 옮김 / 황금가지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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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베스트셀러로 약간의 부와 명예를 거머쥔 나쓰키 슈헤이는 아내 가나미의 예상치 못한 임신으로 인해 고민에 빠집니다. 경제적 상황으로 보나 작가로서 막 발돋움 하려는 자신의 처지로 보나 현재는 아이를 키울 상황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결국 가나미를 설득해서 낙태를 결정하지만, 그 직후 이상한 일이 벌어집니다. 가나미에게 정체를 알 수 없는 여인이 빙의된 것입니다. 가나미를 진료한 정신과 의사 이소가이는 가나미 속의 또 다른 그녀를 지켜보며 혼란에 빠집니다. 해리성 빙의 장애라는 명백한 의학적 소견이 나왔지만, 동시에 사령(死靈)이 깃들었을지도 모른다는 미신적 판단을 무시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던 중 우연한 기회에 또 다른 그녀의 정체를 파악한 슈헤이와 이소가이는 큰 충격을 받고, 어떻게든 해법을 찾기 위해 동분서주하지만 사태는 점점 나쁜 쪽으로만 치닫습니다.

 

다카노 가즈아키의 마니아라서 신작 ‘KN의 비극에 대한 기대가 무척 컸습니다. 2012년을 휩쓴 제노사이드이전부터 ‘13계단그레이브 디거를 통해 탄탄한 문체와 묵직한 스토리텔링,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메시지 등 미스터리와 휴머니즘을 적절히 배합할 줄 아는 탁월한 작가임을 알게 됐기 때문입니다.

‘KN의 비극의 마지막 장을 덮은 후의 첫 느낌은 다카노 가즈아키가 정말 써보고 싶었던 소재와 함께 마음껏 달렸네.”였습니다. ‘제노사이드와 그 전작들의 성공이 가져다 준 해방구 안에서 평소라면 출판사가 고개를 갸웃거렸을 덜 대중적인 소재를 마음껏 요리했다는 뜻입니다.

 

가나미의 빙의로 인해 남편 슈헤이와 의사 이소가이가 겪는 충격은 독자에게도 고스란히 전달됩니다. 지금 읽고 있는 내용이 실제 정신의학 증례가 있는 현실적인 이야기인지, 아니면 다카노 가즈아키가 지어낸 호러성 귀신 픽션인지 너무나도 헷갈립니다. 전자라고 하기엔 가나미의 마음속에 깃든 또 다른 그녀가 과학적 근거가 있는 빙의라기보다는 미신쪽에 가깝고, 후자라고 하기엔 설마 다카노 가즈아키가 호러 픽션을?”이란 편견이 앞서게 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에필로그까지 읽고 나면 그 충격과 혼란은 다카노 가즈아키가 궁극적으로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이해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했던 통과의례임을 깨닫게 됩니다. 스포일러가 될 수 있어 중반 이후의 이야기를 언급할 수는 없지만, 이 작품의 핵심은 과학이냐? 귀신이냐?”가 아니라 생명에 관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임신과 출산이라는 존귀한 과정에 대해 우리가 얼마나 무감각하며 심지어 하찮게 여기고 있는 것은 아닌지 다카노 가즈아키는 전작들에 맞먹는 묵직한 목소리로 독자에게 질문을 합니다.

부주의한 섹스와 그로 인한 임신, “아이냐, 맨션이냐?”를 놓고 낙태의 손익을 계산하는 남자, 임신 21주가 넘은 여고생의 낙태를 시술했던 의사, 불임으로 인한 스트레스로 병원 옥상에서 투신한 여인, 그리고 임신을 이유로 남자친구에게 버림받았다가 만삭의 몸으로 비참하게 죽어간 여인 등 주조연으로 등장한 대부분의 캐릭터들이 임신과 출산 과정에서 다양한 사건들을 겪는데 바로 이런 설정 속에 다카노 가즈아키의 진심이 숨어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카노 가즈아키가 굳이 빙의라는 과학이면서도 과학이 아닌 듯한초자연적 현상을 끌어들인 건 생명의 탄생이라는 존엄한 과정과 그에 대처하는 인간들의 이중적 태도를 좀 더 극적으로 표현하기 위한 것으로 해석됩니다.

 

다만, 377페이지에 달하는 적잖은 분량에 담기에는 이야기의 크기가 좀 작았다는 느낌입니다. 말하자면, 가나미 속의 또 다른 그녀이야기는 동어반복처럼 보였고, 나머지 인물들도 계속 전전긍긍하는 모습만으로 상당한 분량을 차지합니다. 병행되는 조연급 에피스드들도 주제를 위해 다소 억지로 동원된 듯 보였습니다. 그러다 보니 중반쯤에 이르러 눈꺼풀이 무거워지기도 했고 지루함도 살짝 느껴지는 등 다카노 가즈아키 작품들을 읽으면서 전혀 경험해보지 못한 불의의 사태를 겪기도 했습니다.

 

몇몇 아쉬움들이 남았지만, 이 이야기를 꼭 써보고 싶었다는 애착을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어서 다카노 가즈아키의 의외의 도전 그 자체에 경의를 표하고 싶어졌습니다. 성급한 기대이긴 하지만, 그의 신작이 빨리 출간되기를 고대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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킹을 찾아라 노리즈키 린타로 탐정 시리즈
노리즈키 린타로 지음, 최고은 옮김 / 엘릭시르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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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안 본격 미스터리에 소원했던 탓인지 최근 연이어 읽은 본격 미스터리 작품들에게 잘 적응을 못하고 있습니다. 사건 풀이에만 너무 집중하다 보니 현실감이나 몰입도도 떨어지고, 울컥하게 만들거나 분노를 자아내게 만드는 캐릭터들의 감정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고 할까요? 애초 본격 미스터리에서 그런 걸 기대해선 안 되지만 새삼 아쉽게 느껴지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킹을 찾아라는 데뷔 이래 본격 미스터리의 길을 걸어왔다는 노리즈키 린타로의 최신작입니다. 4중 교환살인이라는 희대의 사건을 탐정이자 추리 작가인 노리즈키 린타로와 그의 아버지인 사다오 총경이 함께 풀어가는 이야기입니다.

 

우울증에 걸린 아내, 구두쇠 삼촌, 히키코모리 형 등을 교환 살해하기 위해 모인 네 사람은 트럼프 카드를 통해 대상자와 살해 순서를 정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뽑은 두 장의 카드를 일종의 계약서처럼 소지합니다. 교환살인 계획은 첫 희생자의 등장으로 무난히 진행되는 것처럼 보였지만, 단 한 번의 불운으로 인해 명탐정 린타로의 레이더에 걸려듭니다. 물론 린타로의 행보 역시 순탄하게 진행되진 않습니다. 엉뚱한 인물 탓에 정보가 언론에 유출됐고, 그로 인해 교환 살해범들의 행적은 예상과 다른 방향으로 전개됐기 때문입니다.

 

한순간도 놓칠 수 없는 긴장감 덕분에 페이지는 잘 넘어갑니다. 사건 현장이라고 해봐야 딱 한 번 방문한 것이 전부인 린타로의 추리는 감탄을 자아내고, 트럼프 카드에 감춰진 비밀은 밀실에 버금가는 트릭을 담고 있습니다. 또한 킹을 찾아라는 독자들의 예상을 깔끔하게 배반할 만큼 역설적인 제목입니다.

이 모든 장점에도 불구하고 마지막 장을 덮었을 때의 느낌은 그저 덤덤한 정도였습니다. “, 이렇게 사건이 해결됐구나.”라는 느낌 뿐 그 이상의 감흥은 없었습니다. 말하자면, 교환살인에 참가한 범인들에 대한 증오심이나 동정심도 없었고, 살해된 피해자들 역시 통쾌하다든가, 안타깝다든가 하는 느낌을 주지 못했습니다. 소설이라기보다 팩트 체크를 본 느낌이랄까요?

물론 주요 인물들의 캐릭터와 감정에 대한 묘사는 결코 부족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사회파 미스터리나 사연 있는 이야기를 좋아하는 취향 때문인지 대체로 기계적인 느낌을 많이 받았고, ‘안방 탐정린타로의 뛰어난 추리에 의존하는 스토리 역시 그리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재미있게 읽은 건 맞는데, 어쩐지 남는 것이 없는 허전함만 기억하게 될 것 같습니다. 노리즈키 린타로와는 처음 만난 작품인데, 책장에 오래 소장 중이라 다음에 만나게 될 게 분명한 잘린 머리에게 물어봐에서는 킹을 찾아라보다는 조금은 더 남는 것을 만끽할 수 있기를 기대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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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억관 옮김 / 민음사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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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키의 신작에 대한 폭발적인 사전 예약을 놓고 우리는 하루키를 읽는 것인가? ‘하루키 읽기를 읽는 것인가?”라는 다분히 독설 담긴 기사를 본 적이 있습니다. 하루키의 경우 개인적으로 작품에 따라 호볼호가 좀 극명해서인지 무척 공감되는 내용이었습니다. 오래 전 조금은 등 떠밀리듯 하루키를 읽기 시작한 게 맞고, ‘1973년의 핀볼처럼 젊은 날들을 돌아보게 해준 수작도 있었지만, ‘1Q84’처럼 어떻게든 버티다가 결국 포기했던 작품들도 적지 않았습니다. ‘색채가 없는~’의 경우 “‘상실의 시대의 속편이라는 부제가 더 어울릴...”이라는 한 기자의 100자 평 때문에 광풍 같은 사전 예약에 관한 독설에 공감하면서도 읽고 싶어진 작품입니다.

 

다자키 쓰쿠루가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이었던 16년 전의 이야기와 이제는 36살이 된 그가 오래된 상처와 정면으로 마주치는 이야기로 구성돼있습니다. 완벽한 오각형처럼 틈새 하나 없는 우정을 나누던 다섯 명의 친구들. 그중 네 명의 이름엔 색깔을 의미하는 한자가 들어있지만, 다자키 쓰쿠루의 이름만은 아무 색채도 들어있지 않습니다. 모두 고향인 나고야에서 대학에 진학했지만, 철도역을 만드는 엔지니어를 꿈꾸던 쓰쿠루는 홀로 도쿄로 향합니다. 그리고 2년 후, 고향 친구들로부터 갑작스런 절교를 선고받습니다. 영문 모를 일방적 절교는 쓰쿠루를 죽음의 문턱까지 밀어붙였고, 이후로도 그의 삶의 방향을 뒤흔드는 큰 사건으로 남습니다.

36살이 된 쓰쿠루는 두 살 연상의 연인 사라로부터 이제는 그들에게 16년 전의 일을 물어볼 때가 된 것 같다는 말을 듣곤 판도라의 상자를 향해 순례를 떠나는 기분으로 친구들을 만나기로 결심합니다. 하지만 쓰쿠루를 기다리고 있는 건 누군가의 죽음, 누군가의 충격적인 설명, 그리고 마지막 진실을 품고 있는 멀고 먼 핀란드로의 고통스런 여정이었습니다.

 

이 작품이 가장 어필할 계층은 쓰쿠루의 또래인 30대 중반입니다. 10대와 20대로부터 너무 멀지도, 너무 가깝지도 않은 나이. 추억할 친구들과 사건들이 너무 선명하지도, 너무 많이 잊히지도 않은 나이. 또 젊다고도 할 수 없고, 중년이라고 불리기엔 좀 억울한, 그런 나이.

하루키가 쓰쿠루의 나이를 서른여섯으로 설정한 것도 그런 맥락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 나이라면 서른도 겪었고, 그 덕분에 조금은 성숙한 관점으로 세상과 자신을 돌아볼 수 있기도 하고, 평생 기억에 남을 인물이나 사건을 한두 번쯤 겪기에 적당한 나이입니다.

 

인물, 소재, 사건 못잖게 이 작품에서 중요하고 의미 있는 장치는 프란츠 리스트의 순례의 해라는 피아노 소곡집입니다. 그 가운데 ‘Le Mal du Pays’라는 5분이 조금 넘는 피아노곡은 쓰쿠루의 친구 중 하나였던 시로가 가장 즐겨 쳤던 곡이자 쓰쿠루에게는 편안한 안식을 건네줬던 곡입니다. 직역하면 향수(鄕愁) 정도인데, 본문의 설명에 따르면 전원 풍경이 사람의 마음에 불러일으키는 영문 모를 슬픔이라고 합니다.

아카(), 아오(), 시로(), 구로() 등 이름에 들어간 색깔만큼 개성이 강했던 친구들 속에서 쓰쿠루는 스스로를 색채도 없고, 개성도 없는 텅 빈 인간이라고 여겨왔습니다. 그들로부터 버려진 후엔 그 어떤 인간관계도 일정 거리 이상으로 좁혀본 적이 없습니다. 여자들 역시 적당한선에서 만나고 헤어짐을 반복할 따름이었습니다. 그랬던 쓰쿠루가 마치 순례를 떠나듯 자신의 과거와 조우하려 할 때 그를 지배한 것은 과거에 대한 궁금함보다는 알 수 없는 긴장과 두려움입니다. 그 복잡한 감정들을 대변해주는 것이 바로 쓸쓸함이 진하게 배어있는 피아노곡 ‘Le Mal du Pays’입니다. 이 곡은 작품 곳곳에 수시로 등장하여 쓰쿠루의 심리와 감정을 설명하는데 꽤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책을 읽다가 더는 안 되겠다 싶어, 음원 서비스에서 이 곡을 찾아내선 내내 들으면서 남은 분량을 읽었습니다. 막연한 느낌이긴 하지만 쓰쿠루의 긴장과 두려움이 조금은 구체적으로 느껴졌다고 할까요?

 

이 작품의 비주얼 역시 무척 인상 깊었는데, 리스트의 피아노 소곡집이 청각적 즐거움을 선사했다면, 쓰쿠루의 취미인 수영, 쓰쿠루가 사랑하는 철도역, 쓰쿠루가 사먹거나 직접 만든 몇 가지 와인과 요리, 쓰쿠루-구로-시로가 뒤엉킨 꿈속의 쓰리섬 섹스, 구로가 살고 있는 핀란드 도심과 호숫가의 풍광 등은 직접 해보고 싶고, 먹어보고 싶고, 가보고 싶게 만들 정도로 생생하게 그려져서 마치 눈앞에서 지켜보는 듯한 시각적 즐거움을 제공했습니다.

 

쓰쿠루의 젊은 날의 비밀과 상처는 누구나 경험할 만한 보편적인 것들은 아니지만, 그 무렵 지독한 통과의례를 겪으면서 자신의 절망과 자기연민을 타인들에게 들키지 않으려 전전긍긍했던 많은 쓰쿠루들이 경험했을 법한 일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서른여섯이 된 쓰쿠루들이라면 색채가 없는~’의 마지막 장을 덮은 후 아직은 완전히 풍화되지 않은 그 시절을 떠올리며 조금은 부끄럽기도, 조금은 그립기도, 조금은 회한에 잠기기도 할 것 같습니다.

 

하루키와 매번 궁합이 잘 맞는 편은 아니지만, ‘색채가 없는~’은 비교적 좋은 기억으로 남을 것 같습니다. 평범한 청춘물 혹은 성장소설에 머물 수도 있는 소재였지만, 쓰쿠루의 20여 년의 삶을 바느질하듯 꼼꼼히 그려냈고, 그의 인생의 결정적인 한 챕터가 열리고 닫히는 순간들을 하루키 특유의 건조하면서도 세밀한 문장들로 잘 포착해냈기 때문입니다. 느리고 정적인 듯 보이지만 실은 무척이나 격하게 요동치는 이야기를 담아낸 색채가 없는~’은 언젠가 더 나이를 먹은 후 다시 읽는다면 또 다른 의미와 감흥을 전해줄 것만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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