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억관 옮김 / 민음사 / 2013년 7월
평점 :
하루키의 신작에 대한 폭발적인 사전 예약을 놓고 “우리는 하루키를 읽는 것인가? ‘하루키 읽기’를 읽는 것인가?”라는 다분히 독설 담긴 기사를 본 적이 있습니다. 하루키의 경우 개인적으로 작품에 따라 호볼호가 좀 극명해서인지 무척 공감되는 내용이었습니다. 오래 전 조금은 등 떠밀리듯 하루키를 읽기 시작한 게 맞고, ‘1973년의 핀볼’처럼 젊은 날들을 돌아보게 해준 수작도 있었지만, ‘1Q84’처럼 어떻게든 버티다가 결국 포기했던 작품들도 적지 않았습니다. ‘색채가 없는~’의 경우 “‘상실의 시대’의 속편이라는 부제가 더 어울릴...”이라는 한 기자의 100자 평 때문에 광풍 같은 사전 예약에 관한 독설에 공감하면서도 읽고 싶어진 작품입니다.
다자키 쓰쿠루가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이었던 16년 전의 이야기와 이제는 36살이 된 그가 오래된 상처와 정면으로 마주치는 이야기로 구성돼있습니다. 완벽한 오각형처럼 틈새 하나 없는 우정을 나누던 다섯 명의 친구들. 그중 네 명의 이름엔 색깔을 의미하는 한자가 들어있지만, 다자키 쓰쿠루의 이름만은 아무 색채도 들어있지 않습니다. 모두 고향인 나고야에서 대학에 진학했지만, 철도역을 만드는 엔지니어를 꿈꾸던 쓰쿠루는 홀로 도쿄로 향합니다. 그리고 2년 후, 고향 친구들로부터 갑작스런 절교를 선고받습니다. 영문 모를 일방적 절교는 쓰쿠루를 죽음의 문턱까지 밀어붙였고, 이후로도 그의 삶의 방향을 뒤흔드는 큰 사건으로 남습니다.
36살이 된 쓰쿠루는 두 살 연상의 연인 사라로부터 “이제는 그들에게 16년 전의 일을 물어볼 때가 된 것 같다”는 말을 듣곤 판도라의 상자를 향해 순례를 떠나는 기분으로 친구들을 만나기로 결심합니다. 하지만 쓰쿠루를 기다리고 있는 건 누군가의 죽음, 누군가의 충격적인 설명, 그리고 마지막 진실을 품고 있는 멀고 먼 핀란드로의 고통스런 여정이었습니다.
이 작품이 가장 어필할 계층은 쓰쿠루의 또래인 30대 중반입니다. 10대와 20대로부터 너무 멀지도, 너무 가깝지도 않은 나이. 추억할 친구들과 사건들이 너무 선명하지도, 너무 많이 잊히지도 않은 나이. 또 젊다고도 할 수 없고, 중년이라고 불리기엔 좀 억울한, 그런 나이.
하루키가 쓰쿠루의 나이를 서른여섯으로 설정한 것도 그런 맥락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 나이라면 서른痛도 겪었고, 그 덕분에 조금은 성숙한 관점으로 세상과 자신을 돌아볼 수 있기도 하고, 평생 기억에 남을 인물이나 사건을 한두 번쯤 겪기에 적당한 나이입니다.
인물, 소재, 사건 못잖게 이 작품에서 중요하고 의미 있는 장치는 프란츠 리스트의 ‘순례의 해’라는 피아노 소곡집입니다. 그 가운데 ‘Le Mal du Pays’라는 5분이 조금 넘는 피아노곡은 쓰쿠루의 친구 중 하나였던 시로가 가장 즐겨 쳤던 곡이자 쓰쿠루에게는 편안한 안식을 건네줬던 곡입니다. 직역하면 향수(鄕愁) 정도인데, 본문의 설명에 따르면 “전원 풍경이 사람의 마음에 불러일으키는 영문 모를 슬픔”이라고 합니다.
아카(赤), 아오(靑), 시로(白), 구로(黑) 등 이름에 들어간 색깔만큼 개성이 강했던 친구들 속에서 쓰쿠루는 스스로를 ‘색채도 없고, 개성도 없는 텅 빈 인간’이라고 여겨왔습니다. 그들로부터 버려진 후엔 그 어떤 인간관계도 일정 거리 이상으로 좁혀본 적이 없습니다. 여자들 역시 ‘적당한’ 선에서 만나고 헤어짐을 반복할 따름이었습니다. 그랬던 쓰쿠루가 마치 순례를 떠나듯 자신의 과거와 조우하려 할 때 그를 지배한 것은 과거에 대한 궁금함보다는 알 수 없는 긴장과 두려움입니다. 그 복잡한 감정들을 대변해주는 것이 바로 쓸쓸함이 진하게 배어있는 피아노곡 ‘Le Mal du Pays’입니다. 이 곡은 작품 곳곳에 수시로 등장하여 쓰쿠루의 심리와 감정을 설명하는데 꽤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책을 읽다가 더는 안 되겠다 싶어, 음원 서비스에서 이 곡을 찾아내선 내내 들으면서 남은 분량을 읽었습니다. 막연한 느낌이긴 하지만 쓰쿠루의 긴장과 두려움이 조금은 구체적으로 느껴졌다고 할까요?
이 작품의 비주얼 역시 무척 인상 깊었는데, 리스트의 피아노 소곡집이 청각적 즐거움을 선사했다면, 쓰쿠루의 취미인 수영, 쓰쿠루가 사랑하는 철도역, 쓰쿠루가 사먹거나 직접 만든 몇 가지 와인과 요리, 쓰쿠루-구로-시로가 뒤엉킨 꿈속의 쓰리섬 섹스, 구로가 살고 있는 핀란드 도심과 호숫가의 풍광 등은 직접 해보고 싶고, 먹어보고 싶고, 가보고 싶게 만들 정도로 생생하게 그려져서 마치 눈앞에서 지켜보는 듯한 시각적 즐거움을 제공했습니다.
쓰쿠루의 젊은 날의 비밀과 상처는 누구나 경험할 만한 보편적인 것들은 아니지만, 그 무렵 지독한 통과의례를 겪으면서 자신의 절망과 자기연민을 타인들에게 들키지 않으려 전전긍긍했던 많은 ‘쓰쿠루들’이 경험했을 법한 일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서른여섯이 된 ‘쓰쿠루들’이라면 ‘색채가 없는~’의 마지막 장을 덮은 후 아직은 완전히 풍화되지 않은 그 시절을 떠올리며 조금은 부끄럽기도, 조금은 그립기도, 조금은 회한에 잠기기도 할 것 같습니다.
하루키와 매번 궁합이 잘 맞는 편은 아니지만, ‘색채가 없는~’은 비교적 좋은 기억으로 남을 것 같습니다. 평범한 청춘물 혹은 성장소설에 머물 수도 있는 소재였지만, 쓰쿠루의 20여 년의 삶을 바느질하듯 꼼꼼히 그려냈고, 그의 인생의 결정적인 한 챕터가 열리고 닫히는 순간들을 하루키 특유의 건조하면서도 세밀한 문장들로 잘 포착해냈기 때문입니다. 느리고 정적인 듯 보이지만 실은 무척이나 격하게 요동치는 이야기를 담아낸 ‘색채가 없는~’은 언젠가 더 나이를 먹은 후 다시 읽는다면 또 다른 의미와 감흥을 전해줄 것만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