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N의 비극
다카노 가즈아키 지음, 김아영 옮김 / 황금가지 / 2013년 6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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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베스트셀러로 약간의 부와 명예를 거머쥔 나쓰키 슈헤이는 아내 가나미의 예상치 못한 임신으로 인해 고민에 빠집니다. 여러 가지 면에서 아이를 키울 상황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결국 가나미를 설득해서 낙태를 결정하지만, 그 직후부터 이상한 일이 벌어집니다. 가나미에게 정체를 알 수 없는 여인이 빙의된 것입니다. 정신과 의사 이소가이는 가나미 속의 또 다른 그녀를 지켜보며 혼란에 빠집니다. 해리성 빙의 장애라는 명백한 의학적 소견이 나왔지만, 동시에 사령(死靈)이 깃들었을지도 모른다는 미신적 판단을 무시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던 중 우연한 기회에 또 다른 그녀의 정체를 파악한 슈헤이와 이소가이는 큰 충격을 받고, 어떻게든 해법을 찾기 위해 동분서주하지만 사태는 점점 나쁜 쪽으로만 치닫습니다.

 


다카노 가즈아키의 마니아라서 신작 ‘KN의 비극에 대한 기대가 무척 컸습니다. 2012년을 휩쓴 제노사이드이전부터 ‘13계단그레이브 디거를 통해 탄탄한 문체와 묵직한 스토리텔링,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메시지 등 미스터리와 휴머니즘을 적절히 배합할 줄 아는 탁월한 작가임을 알게 됐기 때문입니다.

‘KN의 비극의 마지막 장을 덮은 후의 첫 느낌은 다카노 가즈아키가 정말 써보고 싶었던 소재와 함께 마음껏 달렸네.”였습니다. ‘제노사이드와 그 전작들의 성공이 가져다 준 해방구 안에서 평소라면 출판사가 고개를 갸웃거렸을 덜 대중적인 소재를 마음껏 요리했다는 뜻입니다.

 

가나미의 빙의로 인해 남편 슈헤이와 의사 이소가이가 겪는 충격은 독자에게도 고스란히 전달됩니다. 지금 읽고 있는 내용이 실제 정신의학 증례가 있는 현실적인 이야기인지, 아니면 다카노 가즈아키가 지어낸 호러 픽션인지 너무나도 헷갈립니다. 전자라고 하기엔 가나미의 마음속에 깃든 또 다른 그녀가 미신에 가깝고, 후자라고 하기엔 설마 다카노 가즈아키가 호러 픽션을 썼다고?”라는 편견이 앞서게 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에필로그까지 읽고 나면 그 충격과 혼란은 다카노 가즈아키의 의도를 이해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했던 통과의례임을 깨닫게 됩니다. 스포일러가 될 수 있어 중반 이후의 이야기를 언급할 수는 없지만, 이 작품의 핵심은 과학이냐? 귀신이냐?”가 아니라 생명에 관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카노 가즈아키는 전작들에 맞먹는 묵직한 목소리로 임신과 출산의 존귀함이라는 메시지를 독자에게 던집니다. 부주의한 섹스와 그로 인한 임신, “아이냐, 맨션이냐?”를 놓고 낙태의 손익을 계산하는 남자, 임신 21주가 넘은 여고생의 낙태를 시술했던 의사, 불임으로 인한 스트레스로 병원 옥상에서 투신한 여인, 그리고 임신을 이유로 남자친구에게 버림받았다가 만삭의 몸으로 비참하게 죽어간 여인 등 주조연으로 등장한 대부분의 캐릭터들이 임신과 출산 과정에서 다양한 사건들을 겪는데, 바로 이런 설정 속에 다카노 가즈아키의 진심이 숨어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카노 가즈아키가 굳이 빙의라는 과학이면서도 과학이 아닌 듯한초자연적 현상을 끌어들인 건 생명의 탄생이라는 존엄한 과정과 그에 대처하는 인간들의 이중적 태도를 좀 더 극적으로 표현하기 위한 것으로 해석됩니다.

 

다만, 377페이지라는 분량에 담기엔 이야기의 크기가 좀 작았다는 느낌입니다. 말하자면, 가나미 속의 또 다른 그녀이야기는 동어반복처럼 보였고, 나머지 인물들도 계속 전전긍긍하는 모습만으로 상당한 분량을 차지합니다. 병행되는 조연급 에피스드들도 주제를 위해 다소 억지로 동원된 듯 보였습니다. 그러다 보니 중반쯤에 이르러 눈꺼풀이 무거워지기도 했고 지루함도 살짝 느껴지는 등 다카노 가즈아키 작품들을 읽으면서 전혀 경험해보지 못한 불의의 사태(?)를 겪기도 했습니다.

 

몇몇 아쉬움들이 남았지만, 이 이야기를 꼭 써보고 싶었다는 애착을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어서 다카노 가즈아키의 의외의 도전 그 자체에 경의를 표하고 싶어졌습니다. 성급한 기대이긴 하지만, 그의 신작이 빨리 출간되기를 고대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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