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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긴 잠이여 ㅣ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50
하라 료 지음, 권일영 옮김 / 비채 / 2013년 10월
평점 :
400일 만에 탐정에 복귀한 사와자키를 찾아온 건 전직 야구선수인 30대 남성입니다. 그는 11년 전 아파트 6층에서 자살한 의붓 누이의 죽음의 진상을 알고 싶어 합니다. 자살, 그것도 11년 전의 일이라 다소 난감한 태도를 보였던 사와자키는 의뢰인이 괴한에게 피습 당하자 정식으로 사건에 뛰어듭니다. 누이의 자살을 직접 목격했다는 목격자들은 하나같이 애매한 진술만 늘어놓았고, 주변 인물들 역시 과거의 불행한 일을 들춰내는 일에 비협조적인데다 의뢰인을 비롯하여 사와자키 본인까지 괴한의 습격을 받는 등 험난한 곡절을 겪지만 사와자키는 기어이 11년 전의 진실에 다가섭니다. 하지만 거기엔 추악한 탐욕과 비열한 은폐 시도만이 남아있을 뿐, 결국 어느 누구도 행복해질 수 없는 결말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니시신주쿠의 해가 들지 않는 2층 사무실, 필터 없는 ‘피스’ 담배, 아직도 굴러가는 것이 신기한 낡은 애차 블루버드, 10년 넘게 악연으로 이어진 조연(사라진 옛 파트너 와타나베, 신주쿠 형사 니시고리, 폭력단 세이와카이의 중간간부 하시즈메) 등 시리즈 첫 편에서부터 꾸준히 사와자키의 캐릭터를 뒷받침해온 공간, 소품, 인물들은 이제 익숙함을 넘어 친숙함까지 느끼게 만듭니다.
반면, ‘안녕 긴 잠이여’의 시간적 배경은 시리즈 첫 편으로부터 8년의 시간이 흐른 것으로 설정돼있는데, 사와자키의 ‘노화’가 너무나도 아쉽게 느껴지는 대목입니다. 일본에서는 네 번째 작품(‘어리석은 자는 죽는다’)까지 출간된 것으로 아는데, 또 얼마나 많은 시간이 흘러 사와자키가 몇 살을 더 먹은 상태일지 염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저 과작(寡作)으로 유명한 하라 료를 원망하는 수밖에 없는 일이지만 말입니다.
하지만, 사와자키의 매력은 여전했고, 그의 집요하면서도 시크한 탐문 역시 언제나처럼 쾌감과 함께 카리스마를 만끽하게 해줍니다. 하라 료가 얼마나 많은 고민을 하며 집필했을지 쉽게 눈치 챌 수 있을 만큼 이야기와 캐릭터는 복잡한 거미줄처럼 얽혀있습니다. 때론 머릿속을 어지럽게 만들거나 모호함에 빠지게 만들기도 하지만 그것들을 하나씩 풀어가면서 사와자키의 특별한 재능을 만끽하는 것이야말로 이 시리즈에서 맛볼 수 있는 가장 큰 기쁨이라는 생각입니다. 또 사건을 해결하고도 마냥 좋아라 할 수 없는 사와자키의 씁쓸함 역시 이 시리즈의 고유한 매력이기도 합니다.
다만, 아쉬운 점을 몇 가지 꼽아보면... 우선, 전작들을 읽지 않은 독자에겐 사와자키의 공간과 소품과 조연들이 다소 생소하거나 뜬금없게 보일 수밖에 없다는 점입니다. 공간과 소품이야 논외로 칠 수 있지만 1~2편에 비해 역할이 훌쩍 커진 니시고리 형사나 폭력배 하시즈메의 경우 전작들의 정보 없이는 따라가기 쉽지 않아 보였습니다.
두 번째는 중반부에 느닷없이 전혀 새로운 이야기로 급선회한 점입니다. 비유하자면, 어찌어찌 어렵게 수사를 하다가 막다른 골목에 부딪혔는데, 그 돌파구라는 것이 ‘전혀 새로운 등장인물’을 통해, 그것도 우연히 얻어진 것은 물론 그때까지의 사와자키의 노력을 허무하게 만들며 전혀 새로운 방향으로 이야기를 틀어버린 것 같다는 뜻입니다.
세 번째는 전작과 비슷한 분량임에도 불구하고 이야기 구조가 상대적으로 심플하다는 점, 그래서 전개가 다소 느슨할 수밖에 없었는데 거기에다 동어반복적인 묘사가 자주 등장하는 바람에 지루하게 읽히는 대목이 적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실제로 이 작품으로 사와자키를 처음 만난 한 독자는 “지루해서 중도에 포기했다”라는 서평을 남겼는데, 그래서인지 사와자키와의 첫 만남으로 ‘안녕, 긴 잠이여’를 택하는 것은 만류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외에, 비교적 사소한 것들이지만, 노(能, 일본 전통 가면악극)에 대한 설명이 필요 이상 장황해 보인 점, (전작들과 마찬가지로) 초중반에는 그리 자주 눈에 띄지 않던 오타가 후반부로 갈수록 늘어난 점, 일부 조연들의 역할이나 그들이 안고 있는 비밀 또는 혐의점들이 마지막까지 깔끔하게 마무리되지 못한 점 등이 아쉬움으로 남았습니다.
하지만 이런저런 아쉬운 점에도 불구하고, 마지막 페이지를 덮었을 때, “이제 또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나?”라는 생각이 앞선 것은 비단 저만의 경험은 아닐 것입니다. 애정하는 작가와 주인공은 언제나 미스터리 독자에게 다음 이야기에 대한 갈증만 남겨놓곤 하는데, 그저 후속작인 ‘어리석은 자는 죽는다’의 출간 소식이 하루라도 빨리 들려오기를 기대할 뿐입니다.
사족 1.
시리즈 세 작품 모두 좋아하지만 굳이 호감도를 따진다면 ‘내가 죽인 소녀’ > ‘그리고 밤은 되살아난다’ > ‘안녕, 긴 잠이여’ 순이 될 것 같습니다.
사족 2.
‘안녕, 긴 잠이여’라는 제목을 보자마자 하라 료가 헌사를 바친 레이먼드 챈들러의 ‘필립 말로 시리즈’ 제목들 - ‘안녕, 내 사랑(Farewell, My Lovely)’과 ’빅 슬립(Big Sleep)‘ - 에서 따온 게 아닐까 추측했는데, 해설을 보니 역시나 헛짚은 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