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마처럼 비웃는 것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35
미쓰다 신조 지음, 권영주 옮김 / 비채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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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조 겐야 시리즈첫 편인 염매처럼 신들리는 것을 읽은 뒤 일주일도 채 되지 않아 읽어서 그런지 여러 가지 면에서 독자로서 누릴 수 있는 재미가 반감된 느낌입니다. 신간 미즈치처럼 가라앉는 것을 읽기 전에 순서대로 시리즈를 마스터하기 위해 연이어 읽은 것인데 예상치 못한 부작용(?)과 맞닥뜨리고 말았습니다.

주인공 도조 겐야의 풍부한 지적 유희와 기발한 추리 과정이라든가 초현실적인 현상들이 난무하는 가운데 벌어지는 참혹한 연쇄살인의 충격, 그리고 마지막 수십 페이지를 남겨놓고 벌어지는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진범 찾기 등 오랜만에 읽어야만 느낄 수 있는 미쓰다 신조 표 역사-호러-미스터리의 진가가 연이은 책읽기 때문에 상당 부분 희석된 것 같아 아쉬움이 남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코 페이지가 넘어가는 속도가 줄어들지는 않았습니다.

 

전작들과 마찬가지로 고립된 마을과 대립하는 가문들이 배경으로 설정됐고, 마을을 둘러싼 산과 강에 깃든 숭배와 공포의 대상이 등장했고, 오랜 구원(舊怨)과 인간의 탐욕이 시한폭탄처럼 마을 곳곳에 만연해 있으며 우연이든 필연이든 도조 겐야가 그 마을에 나타나면서부터 천벌 또는 지벌로 여겨지는 참혹한 시신들이 발견됩니다.

모든 등장인물의 알리바이는 입증 자체가 불가능하거나 아니면 반대로 너무 선명하고, 희생자들은 납득할 수 없는 밀실 상황에서 발견되거나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만큼 참혹한 상태로 훼손되어 있으며 험한 꼴을 당할 만한 이유가 전혀 없는 의외의 인물이 포함되기도 합니다.

특히 산마처럼~’에서는 요코미조 세이시의 악마의 공놀이 노래를 연상시키는 동요 살인이 등장하는데, 이는 범인의 범행 동기를 더욱 모호하게 만듦으로써 독자들의 호기심과 긴장감을 증폭시킵니다.

 

유일하게 아쉬웠던 부분은 조금은 억지스러워 보였던 마지막 해결장면입니다. , 마지막 희생자가 발견되는 순간까지 극도의 긴장감을 유지해오던 이야기가 도조 겐야의 최종 결과 발표에 이르러 급격히 그 힘을 잃어버렸다는 느낌입니다. 우선, 시종일관 독자를 혼란스럽게 만들었던 초자연적 현상들에 대한 설명이 누구나 쉽게 갖다 붙일 수 있는 해석수준에 머무른 점 때문이었고, 두 번째로 진범 확증 과정에서 일어난 몇 단계의 반전 중 적잖은 부분이 반전을 위한 반전처럼 작위적으로 설정된 느낌을 줬다는 점 때문입니다.

 

물론 미쓰다 신조에게 제대로 뒤통수를 맞은 대목들도 곳곳에 산재해있습니다. 별 생각 없이 읽었던 한두 줄의 문장 속에 숨어있던 힌트들, 도조 겐야의 기이한 뇌구조만이 추론해낼 수 있는 기상천외한 독특한 해석들, 그리고 마지막에 이르러 독자들의 예측을 한 방에 무너뜨리는 비장의 카드 등 적잖은 분량의 내용 곳곳에 공포, 재미, 호기심, 긴장감, 반전 등 다양한 종류의 지뢰를 잘 묻어 놓았습니다.

미쓰다 신조의 도조 겐야 시리즈만의 중독성은 아마 이런 매력들에 기인하는 것 같습니다. 물론 어느 일본 미스터리보다 호불호의 경계선에 위태위태하게 놓여있는 시리즈이긴 하지만, 아무리 초현실적 역사-호러-미스터리와 담을 쌓고 사는 독자라고 하더라도 한번만 제대로 맛보면 미쓰다 신조처럼 중독되는 것의 진가를 느낄 수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연속으로 미쓰다 신조 읽기가 여러 가지 부작용을 전해준다는 것을 깨달았음에도 불구하고 이미 미즈치처럼 가라앉는 것의 첫 페이지를 열어버렸습니다. 미쓰다 신조의 신간을 곁에 둔 채 다른 작품을 집어 든다는 게 쉽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미즈치~’를 완독하고 나면 도조 겐야 시리즈가운데 제일 먼저 읽었던 잘린 머리처럼 불길한 것을 다시 한 번 읽어볼 생각입니다. 예상되는 부작용에도 불구하고, 한 번에 시리즈를 완주하는 재미도 남다른 일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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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매처럼 신들리는 것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44
미쓰다 신조 지음, 권영주 옮김 / 비채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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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전후 일본. 가가치와 가미구시가 양분하고 있는 가가구시촌은 허수아비님으로 일컬어지는 산신을 숭배하는 뿌리 깊은 민간신앙촌입니다. 자료 조사 차 가가구시촌을 찾은 도조 겐야는 도착과 동시에 연이은 괴사 사건에 휘말립니다. 특이한 모습으로 발견된 시신들 때문에 마을에서는 허수아비님 또는 염매의 징벌이라는 소문이 파다해집니다. 도조 겐야 역시 사건의 진상을 알아내기 위해 동분서주하지만, 자살인지 타살인지조차 제대로 구별하기 어려울 뿐 아니라, 심지어 그 자신이 가가구시촌의 미신에 공포를 느끼는 상황에 처하기도 합니다.

마지막 살인사건이 일어난 후 도조 겐야는 자신만의 논리로 범인을 지목하지만, 그 자리에서 반전에 반전을 거듭한 상황이 발생하고, 사건에 연루됐던 모든 이들은 도조 겐야의 최종 진술에 경악을 금치 못하게 됩니다.

 

요코미조 세이시의 긴다이치 코스케 시리즈를 읽으면서 역사적 사실과 문화적 특징이 가미된 일본 미스터리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는데, 우연히 눈에 확 띄는 표지를 발견한 덕분에 시리즈 두 번째 작품인 잘린 머리처럼 불길한 것'을 먼저 읽게 됐고, (사실 호러가 제 취향과는 거리가 먼 장르지만) 이런저런 좋은 기억 때문에 도조 겐야 시리즈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던 중 새 작품 미즈치처럼 가라앉는 것의 출간 소식을 들었는데, 크게 지장은 없겠지만 아무래도 전작들을 먼저 읽어야겠다는 생각에 몇 달 전에 구해놓고 계속 책장 신세를 못 벗어나고 있던 시리즈 첫 작품 염매처럼 신들리는 것을 꺼내 들었습니다.

 

하지만 잘린 머리~’에 비해 염매처럼~’은 초반부터 페이지를 넘기기가 조금은 버거웠는데, 가장 큰 이유는 역설적이게도 이 작품의 가장 큰 특징이자 장점인 방대한 민속학 자료때문이었습니다. 전후 일본이라는 무대, 외진 마을을 지배하는 가문의 독특한 내력, 조상의 지벌 등 주요 설정들은 잘린 머리~’와 비슷하지만, 그에 관한 상세한 설명이 과잉이라는 느낌을 받을 정도로 방대했고, 특히 일본 전역에 걸친 마귀에 얽힌 묘사는 백과사전을 읽는 느낌이었으며, 메인 줄거리를 이해하기 위한 배경 설명이라고 치더라도 그 도가 지나쳐 지적 자랑 또는 현학적인 과시로 여겨지는 부분이 적잖이 있었습니다.

 

또 한 가지 이유는 공간에 대한 설명이 불친절하거나 난해했던 점입니다. 물론 이는 작가가 의도한 바도 있지만 가끔은 짜증을 유발하기도 했습니다. 주요 무대인 가가구시촌의 경우 맨 앞에 첨부된 지도를 몇 번씩 들춰보게 만들었고, 건물의 내부를 설명하는 데 있어서도 (중간중간 평면도를 첨부했음에도 불구하고) 전후좌우 등 방향과 위치 묘사가 지나치게 상세하게 이루어져, 정작 사건과 본 내용의 이해를 방해한다는 느낌을 자주 받곤 했습니다.

 

아쉬운 점을 먼저 언급하게 돼서 유감이지만, 궁극적으로 하고 싶은 이야기는 도조 겐야 시리즈첫 편으로서의 염매처럼~’의 매력은 이 아쉬움들을 충분히 상쇄하고도 남는다는 점입니다.

온갖 흉흉한 전설을 간직하고 있어 누구도 접근하기를 꺼려하는 기괴한 형체의 구구, 마을을 감싼 채 괴기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내며 흐르고 있는 두 개의 강(히센천과 오주천), 가가치의 무신당을 비롯하여 허수아비님의 마성이 느껴지는 건축물 등 존재 자체가 호러라고 할 만한 가가구시촌은 말 그대로 매력이 철철 넘치는 미스터리의 무대입니다.

또한, 대대로 가가치쌍둥이 자매들이 그랬듯이 무녀와 혼령받이의 운명을 받아들여야만 했던 사기리 자매, 어릴 적 출입이 금기시 됐던 구구에 올랐다가 평생 잊지 못할 공포와 상처를 겪은 렌자부로를 비롯하여 오랜 구원(舊怨)과 비극적인 인연으로 묶인 가가구시촌의 구성원 하나하나를 집요할 정도로 세밀하게 그려냄으로써 공포와 공감을 동시에 전해주고 있습니다.


그 외에도 혼령을 맞이하고 보내는 기이한 의례, 빙의를 쫓기 위한 주술 의식, 신령납치로 여겨지는 아이들의 실종, 뱀을 비롯한 온갖 동물들과 연관된 마귀에 대한 전설 등 역사-호러-미스터리를 위한 디테일한 장치들이 곳곳에 배치되어 550여 페이지의 분량 어디에서도 긴장감을 놓치지 않게 해주고 있습니다.

물론 이런 설정과 특징들 때문에 호불호가 극명하게 갈릴 수도 있지만, 일본의 역사를 배경으로 한 호러 미스터리에 관심이 있는 독자라면 한번쯤 도전해볼만한 작품임엔 틀림없습니다.

 

미즈치처럼 가라앉는 것을 읽기 전에 앞선 도조 겐야 시리즈를 모두 읽을 생각이었지만, ‘염매처럼~’을 읽는 도중 문득 그러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잠시 들기도 했습니다. 정신건강(?)을 위해서라도 한 달에 한 권씩만 보든가, 다른 작가의 작품을 읽으며 휴식을 취해야겠다는 것이 그 이유였는데, 막상 마지막 페이지를 덮고 나니 어느새 다시 생각이 바뀌게 됐습니다. 이어서 시리즈 세 번째 작품인 산마처럼 비웃는 것을 읽을 계획인데, 미쓰다 신조만의 마귀 같은 매력덕분에 계절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호러물과 함께 연말을 보내게 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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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종증후군 증후군 시리즈 1
누쿠이 도쿠로 지음, 노재명 옮김 / 다산책방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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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통곡’, ‘우행록’(개정판 어리석은 자의 기록’), ‘후회와 진실의 빛등을 통해 사회적 문제를 미스터리 속에 묵직하게 녹여냈던 누쿠이 도쿠로의 증후군 시리즈의 첫 작품입니다. 2009년에 발간됐지만 시리즈를 한꺼번에 읽겠다는 생각에 계속 미뤄오다가 이제야 그 첫 권을 읽게 됐습니다.

 

경시청 인사과의 다마키는 형사부장으로부터 비밀임무를 직접 지시받는 특이한 존재입니다. 주위에서 볼 때는 한직으로 밀려난 무기력한 중년으로 보일 뿐이지만, 그는 전직 형사 하라다, 탁발승 무토, 노동자 구라모치 등으로 구성된 비밀수사팀의 수장이며, 겉모습만으로는 생각이나 감정을 종잡을 수 없는 인물입니다. 다마키의 팀이 맡게 된 사건은 최근 몇 년간 도쿄에서 벌어진 20대 남녀의 실종입니다. 딱히 사건이라 할 만한 정황은 없지만, 다마키는 팀원들에게 집요한 탐문을 지시합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실종자들 사이에 독특한 관계가 있음을 포착합니다. 하지만 수사가 진행되던 중 실종자 가운데 한 명이 피살된 채 발견됩니다. 수사팀은 용의자를 뒤쫓는 한편, 살인사건에 연루된 것으로 보이는 폭력적인 인디밴드와 그들이 거래한 것으로 추정되는 마약류의 거래루트를 파헤칩니다.

 

그동안 읽었던 누쿠이 도쿠로의 작품에 대한 만족도가 꽤 높았기 때문에 증후군 시리즈에 대한 기대감 역시 그만큼 높았지만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적어도 실종증후군은 조금은 의외다 싶을 정도로 실망감을 느낀 작품이었습니다.

 

제목부터 실종에 관한 이야기임을 표방하고 있지만, 정작 실종자체는 도입부 역할만 할뿐 메인 스토리는 그와는 관련 없어 보이는 평범한 폭력과 살인사건을 다루고 있습니다. 물론 특이한 형태의 실종이라는 사회적 현상을 소재로 삼은 점이나, 다마키를 비롯한 수사팀의 캐릭터들에 대한 묘사는 사실감과 치밀함 덕분에 매력적이었지만, 굳이 실종을 끌어들이지 않았더라도 나머지 이야기의 진행에 무리가 없었을 정도로 마치 앞과 뒤가 다른 이야기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러다 보니 엔딩으로 갈수록 의문점만 쌓일 뿐이었습니다. “왜 이 책의 제목을 실종증후군이라고 지었는가?”, “다마키와 그의 팀원들은 은밀하면서도 터프하고, 각자만의 탁월한 능력을 지니고 있음에도 왜 이런 식의 수사를 진행할 수밖에 없는가?”, “이렇게 우수한 팀원들이 몇날며칠을 고생해가면서 수사한 사건의 실체는 무엇인가?” 등등...

정리하자면, ‘실종으로 시작됐지만 살인사건의 발생을 기점으로 이야기는 실종과는 먼 방향으로 급전환됐고, 결국 뛰어난 수사팀들의 평범한 범인잡기에 그쳤다고 해야 할까요? 누쿠이 도쿠로가 곳곳에서 반복적으로 언급한 이 작품의 메시지 가족에게서, 자신을 둘러싼 환경에게서 벗어난다고 해도 '스스로'에게서는 벗어날 수 없다 가 왠지 공허하게만 들리는 것은 정작 이 메시지를 담고 있어야 할 내용 자체가 너무 빈약했기 때문입니다.

 

기대가 컸기 때문에 실망감이 크게 느껴졌을 수도 있지만, 곧이어 읽을 살인증후군이나 유괴증후군에서는 증후군 시리즈에 대한 호평을 공감할 수 있기를 기대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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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드맨 데드맨 시리즈
가와이 간지 지음, 권일영 옮김 / 작가정신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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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프로야구 두산의 시스템을 화수분 야구라고들 칭하는데, 일본 미스터리 역시 화수분이라는 표현이 잘 어울린다는 생각을 종종 하곤 합니다.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새로운 소재와 캐릭터, 기발한 발상으로 무장한 신인들의 작품이 매년 풍성하게 쏟아지는 일본 미스터리 문단을 지켜보고 있으면 그저 부러울 따름입니다. 한국도 최근 들어 수준 높은 신작과 신인들이 독자들을 찾고 있지만, 장르물 자체를 가볍게 여기는 풍토 때문인지 일본만큼의 화수분을 기대하긴 아직은 이르다는 생각입니다.

 

아무튼... 가와이 간지라는 걸출한 신인이 자아낸 독특한 데뷔작 데드맨32회 요코미조 세이시 미스터리 대상을 수상하기에 조금도 모자라지 않은 수작입니다. 신체의 일부가 훼손된 채 발견된 여섯 구의 연쇄살인 피해자들, 시마다 소지의 점성술 살인사건속 아조트를 연상시키는 엽기적 살해수법, 그리고 자신을 피살자들의 조각난 신체부위로 접합된 데드맨이라 여기는 정체불명의 남자 등 어디로 튈지 모르는 상상력의 산물들이 작품 곳곳에 포진하고 있어서 읽으면서 내내 긴장감 속에 다음 상황을 기대하게 만들 뿐 아니라, 장르의 정체성(?)에 대해 고민하게 만드는 묘한 매력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또한 차분하면서도 엉뚱한 발상을 지닌 중년의 가부라기를 비롯, 괴짜 영건 히메노, 불만분자 마사키, 프로파일러이면서도 프로파일링을 불신하는 사와다 등 개성 강한 캐릭터로 뭉친 4인조 경시청 형사들의 활약 역시 너무 무겁지도, 가볍지도 않게 적절한 굴곡을 지닌 채 이야기를 이끌고 있습니다.

 

하지만 신인의 데뷔작을 비범하게 만드는 것은 역시 예측불허의 이야기 전개입니다. 조금씩 드러나는 데드맨과 그를 간호하는 여의사의 정체, 몇 달이 지나도록 오리무중인 상태에서 가부라기에게 날아든 의문의 이메일, 그를 기반으로 가부라기 4인조가 밝혀내는 오래된 구원(舊怨)의 히스토리, 그리고 진범 확증과 함께 폭로된, 그릇된 탐욕이 야기한 참혹한 연쇄살인의 진실 등 새로운 스토리텔러의 진가를 목격할 수 있는 다양한 에피소드들이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진행되고 있어서 반나절도 채 안 돼 마지막 페이지까지 달릴 수 있었습니다.

 

번역자의 후기를 보면 작가의 변을 짧게나마 접할 수 있는데, 가장 인상적이었던 대목은 미스터리를 쓸 거라면 점성술 살인사건을 쓰던 즈음의 시마다 선생이 지녔던 기개에 지고 싶지 않았습니다.”였습니다. ‘점성술 살인사건에 대한 오마주에 가까운 작품을 쓰면서 이만큼 자신감 있는 변을 내놓은 걸 보면 후속작에 대한 기대를 해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올해 7, 일본에서 가부라기 4인조가 활약하는 드래곤플라이가 출간됐다고 하는데, 내년쯤엔 한국에서도 만나볼 수 있으리라 기대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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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긴 잠이여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50
하라 료 지음, 권일영 옮김 / 비채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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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0일 만에 탐정에 복귀한 사와자키를 찾아온 건 전직 야구선수인 30대 남성입니다. 그는 11년 전 아파트 6층에서 자살한 의붓 누이의 죽음의 진상을 알고 싶어 합니다. 자살, 그것도 11년 전의 일이라 다소 난감한 태도를 보였던 사와자키는 의뢰인이 괴한에게 피습 당하자 정식으로 사건에 뛰어듭니다. 누이의 자살을 직접 목격했다는 목격자들은 하나같이 애매한 진술만 늘어놓았고, 주변 인물들 역시 과거의 불행한 일을 들춰내는 일에 비협조적인데다 의뢰인을 비롯하여 사와자키 본인까지 괴한의 습격을 받는 등 험난한 곡절을 겪지만 사와자키는 기어이 11년 전의 진실에 다가섭니다. 하지만 거기엔 추악한 탐욕과 비열한 은폐 시도만이 남아있을 뿐, 결국 어느 누구도 행복해질 수 없는 결말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니시신주쿠의 해가 들지 않는 2층 사무실, 필터 없는 피스담배, 아직도 굴러가는 것이 신기한 낡은 애차 블루버드, 10년 넘게 악연으로 이어진 조연(사라진 옛 파트너 와타나베, 신주쿠 형사 니시고리, 폭력단 세이와카이의 중간간부 하시즈메) 등 시리즈 첫 편에서부터 꾸준히 사와자키의 캐릭터를 뒷받침해온 공간, 소품, 인물들은 이제 익숙함을 넘어 친숙함까지 느끼게 만듭니다.

반면, ‘안녕 긴 잠이여의 시간적 배경은 시리즈 첫 편으로부터 8년의 시간이 흐른 것으로 설정돼있는데, 사와자키의 노화가 너무나도 아쉽게 느껴지는 대목입니다. 일본에서는 네 번째 작품(‘어리석은 자는 죽는다’)까지 출간된 것으로 아는데, 또 얼마나 많은 시간이 흘러 사와자키가 몇 살을 더 먹은 상태일지 염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저 과작(寡作)으로 유명한 하라 료를 원망하는 수밖에 없는 일이지만 말입니다.

 

하지만, 사와자키의 매력은 여전했고, 그의 집요하면서도 시크한 탐문 역시 언제나처럼 쾌감과 함께 카리스마를 만끽하게 해줍니다. 하라 료가 얼마나 많은 고민을 하며 집필했을지 쉽게 눈치 챌 수 있을 만큼 이야기와 캐릭터는 복잡한 거미줄처럼 얽혀있습니다. 때론 머릿속을 어지럽게 만들거나 모호함에 빠지게 만들기도 하지만 그것들을 하나씩 풀어가면서 사와자키의 특별한 재능을 만끽하는 것이야말로 이 시리즈에서 맛볼 수 있는 가장 큰 기쁨이라는 생각입니다. 또 사건을 해결하고도 마냥 좋아라 할 수 없는 사와자키의 씁쓸함 역시 이 시리즈의 고유한 매력이기도 합니다.

 

다만, 아쉬운 점을 몇 가지 꼽아보면... 우선, 전작들을 읽지 않은 독자에겐 사와자키의 공간과 소품과 조연들이 다소 생소하거나 뜬금없게 보일 수밖에 없다는 점입니다. 공간과 소품이야 논외로 칠 수 있지만 1~2편에 비해 역할이 훌쩍 커진 니시고리 형사나 폭력배 하시즈메의 경우 전작들의 정보 없이는 따라가기 쉽지 않아 보였습니다.

두 번째는 중반부에 느닷없이 전혀 새로운 이야기로 급선회한 점입니다. 비유하자면, 어찌어찌 어렵게 수사를 하다가 막다른 골목에 부딪혔는데, 그 돌파구라는 것이 전혀 새로운 등장인물을 통해, 그것도 우연히 얻어진 것은 물론 그때까지의 사와자키의 노력을 허무하게 만들며 전혀 새로운 방향으로 이야기를 틀어버린 것 같다는 뜻입니다.

세 번째는 전작과 비슷한 분량임에도 불구하고 이야기 구조가 상대적으로 심플하다는 점, 그래서 전개가 다소 느슨할 수밖에 없었는데 거기에다 동어반복적인 묘사가 자주 등장하는 바람에 지루하게 읽히는 대목이 적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실제로 이 작품으로 사와자키를 처음 만난 한 독자는 지루해서 중도에 포기했다라는 서평을 남겼는데, 그래서인지 사와자키와의 첫 만남으로 안녕, 긴 잠이여를 택하는 것은 만류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외에, 비교적 사소한 것들이지만, (, 일본 전통 가면악극)에 대한 설명이 필요 이상 장황해 보인 점, (전작들과 마찬가지로) 초중반에는 그리 자주 눈에 띄지 않던 오타가 후반부로 갈수록 늘어난 점, 일부 조연들의 역할이나 그들이 안고 있는 비밀 또는 혐의점들이 마지막까지 깔끔하게 마무리되지 못한 점 등이 아쉬움으로 남았습니다.

 

하지만 이런저런 아쉬운 점에도 불구하고, 마지막 페이지를 덮었을 때, “이제 또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나?”라는 생각이 앞선 것은 비단 저만의 경험은 아닐 것입니다. 애정하는 작가와 주인공은 언제나 미스터리 독자에게 다음 이야기에 대한 갈증만 남겨놓곤 하는데, 그저 후속작인 어리석은 자는 죽는다의 출간 소식이 하루라도 빨리 들려오기를 기대할 뿐입니다.

 

사족 1.

시리즈 세 작품 모두 좋아하지만 굳이 호감도를 따진다면 내가 죽인 소녀’ > ‘그리고 밤은 되살아난다’ > ‘안녕, 긴 잠이여순이 될 것 같습니다.

 

사족 2.

안녕, 긴 잠이여라는 제목을 보자마자 하라 료가 헌사를 바친 레이먼드 챈들러의 필립 말로 시리즈제목들 - ‘안녕, 내 사랑(Farewell, My Lovely)’빅 슬립(Big Sleep)‘ - 에서 따온 게 아닐까 추측했는데, 해설을 보니 역시나 헛짚은 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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