빙과 고전부 시리즈
요네자와 호노부 지음, 권영주 옮김 / 엘릭시르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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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원 청춘 미스터리는 가볍거나 치기 어린 애들 이야기라는 편견은 버린 지 오래지만,

매번 새로운 학원 청춘 미스터리 작품을 집어들 때마다 여전히 주저되는 것은 사실입니다.

빙과역시 서너 번을 집어들었다, 내려놓았다를 반복했던 작품인데,

그리고 숙청의 문을처럼 피비린내라도 진동한다거나

그녀가 죽은 밤처럼 맥주를 즐기는 대학생이라도 등장한다면 모를까,

왠지 달달한 사탕처럼 보이는 고1들의 고전부 시리즈는 정말 쉽게 손이 가지 않았습니다.

책꽂이에 꽂힌 빙과를 보며 늘 숙제처럼 부담감을 갖고 있었는데,

긴 연휴 덕분에 작심하고 밀린 숙제 하듯 빙과를 꺼내 읽었습니다.

 

● ● ●

 

안 해도 되는 일은 안 한다.’는 좌우명답게 애늙은이 같은 무심한 캐릭터인 오레키 호타로,

명가의 딸이며 우수한 성적을 자랑하지만 어딘가 신비함을 지닌 소녀 지탄다 에루,

호타로의 친구이자 어디로 튈지 모르는 특이한 박학다식 정보창고 후쿠베 사토시,

후쿠베를 좋아하는 조금은 다혈질인 도서위원 여학생 이바라 마야카 등

이런저런 사연으로 폐부(閉部) 직전의 고전부에 모이게 된 4명의 가미야마 고교 1년생들.

 

33년 전인 1967, 가미야마 고교에서 일어났던 사건을 추적하는

고전부 4인방의 활약이 주된 내용입니다.

이런저런 일에 끼어드는 것을 싫어하면서도 본능에 가까운 뛰어난 추리력을 지닌 오레키는

당시 사건의 중심에 있던 외삼촌의 행적을 알고 싶어 하는 지탄다에게 부탁을 받게 되고

결국 나머지 고전부 멤버들과 함께 진실 찾기에 나섭니다.

 

단서라고는 당시 사건과 관련된 몇몇 기록들뿐이었고,

그마저도 애매모호한 단편적 정보들에 지나지 않았지만,

머리를 맞댄 고전부 4인방은 각자의 가설을 통해 다양한 추론을 펼치게 되고,

오레키는 모든 정보와 가설을 정리한 끝에 나름 명확한 결론에 도달합니다.

하지만 진실을 위한 마지막 퍼즐 한 조각이 남아있음을 눈치 챈 오레키는

지금껏 당연한 사실로 여겨온 전제를 통째로 뒤집어야 한다는 점을 깨닫습니다.

 

● ● ●

 

고백하자면, 기대감이 크지 않았던 탓인지 의외로 재미있고 유쾌한 책읽기가 됐습니다.

오레키의 시니컬한 태도는 기분 나쁘지 않은 매력을 지니고 있고,

(해설을 보고 동감한 부분이지만) 어딘가 배배 꼬인 듯한 셜록 홈즈의 천재성까지 엿보여

고전부 멤버들뿐 아니라 독자들에게도 어필할 수 있는 폼나는 주인공 캐릭터입니다.

그런 오레키에게 의지하는 지탄다의 보호본능을 자극하는 청초함도,

투닥거리면서도 이야기의 균형을 잡아주는 후쿠베와 이바라의 통통 튀는 건강함도

모두 고전부 이야기가 시리즈로 이어지게끔 만들어준 매력적인 캐릭터들입니다.

 

4인방이 고전부에 합류하는 계기가 된 초반 에피소드들은 평범한 일상 미스터리에 불과하고,

메인 사건이라는 것도 피 한 방울 등장하지 않는 1’다운 이야기지만,

이상하게 웃음과 호기심, 적절한 긴장감을 끌어내는 힘이 있었습니다.

이런 평범함과 1’다운 메인 사건 때문에 실망감을 느낀 서평들을 많이 접할 수 있었는데

저의 경우는 오히려 그 또래에 걸맞는 리얼한 에피소드들이 마음에 와 닿는 편이었습니다.

미미 여사의 솔로몬의 위증이 굉장히 깊은 인상을 남겨줬음에도

마지막까지 이 또래 아이들의 이야기가 맞나?’라는 의문을 갖게 했던 것에 비하면

빙과는 캐릭터와 에피소드 모두 현실감 있게 설정됐다는 느낌입니다.

 

빙과는 파릇파릇한 성장기와 그 또래에 어울리는 미스터리를 겸비한 작품입니다.

안 해도 되는 일은 안 한다는 좌우명 덕분에 후쿠베에 의해 회색이라 불리던 오레키는

고전부에서 만난 의외의 친구들 덕분에 이런저런 일에 참견하기 시작하면서

자신이 정해놓은 규범에서 벗어나 장밋빛으로 삶의 색을 변화시키며 성장합니다.

오레키의 성장기와 나란히 병행되는 33년 전의 진실 찾기 미스터리는

뭐랄까... 좀 부풀려 이야기하자면 억지스럽지 않은 경쾌한 서술트릭?

또는 해설에 언급된 것처럼, 문헌에 얽힌 비밀을 푸는 비블리오 미스터리?

아무튼, 사소해 보이는 단서들을 통해 가설을 세우고 추론을 거듭하면서

적잖은 즐거움과 의외성, 때론 독자들에게 같이 한번 풀어보시지?’라는 메시지를 전합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기대가 크지 않았기에 만족감을 느낀 작품이었고,

당연히 이후의 고전부 시리즈에도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게 됐습니다.

빙과를 포함하여 5권이 일본에서 출간됐고, 그중 3권이 국내에 소개됐는데,

작가의 말대로라면 오레키가 졸업하기 전까지는 시리즈가 계속 이어질 예정이라니,

앞으로 이어질 고전부의 유쾌한 이야기들을 계속 기대해볼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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벚꽃 흩날리는 밤 가나리야 마스터 시리즈
기타모리 고 지음, 김미림 옮김 / 피니스아프리카에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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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작년 3월에 기타모리 고의 꽃 아래 봄에 죽기를을 다 읽고난 후

좀처럼 맛보기 힘든 묘한 고요함과 아스라함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실린 6편의 단편 가운데 호불호가 갈리긴 했어도

표제작인 꽃 아래 봄에 죽기를과 마지막 수록작 물고기의 교제

제목만큼이나 애틋하고 마음을 따뜻하게 만드는 수작이었습니다.

 

더불어 가나리야라는 아담한 맥주 바와 그곳의 주인장 구도 데쓰야의 캐릭터 덕분에

, 나에게도 그런 아늑한 아지트 같은 곳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할 수 있는 상대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아쉬워하기도 했습니다.

그 좋은 기억이 아직도 잔잔히 남아있는데,

구도 데쓰야의 맥주 바 가나리야를 무대로 삼은 같은 작가의 단편집이,

그것도 벚꽃 흩날리는 밤이라는 제목으로 출간됐다는 소식에

그때의 묘한 고요함과 아스라함을 다시 한 번 만끽할 수 있다는 기대감이 몰려왔고,

괜히 마음이 들뜨고 기분 좋을 만큼의 미열까지 느낄 수 있었습니다.

 

꽃 아래~’의 표지를 좌우로 반전시킨 듯한 디자인과 5편의 소제목을 보면서

마치 너무나 먹고 싶지만 그 예쁜 모양을 무너뜨리기 싫은 케이크를 눈앞에 둔 듯

설렌 마음으로 페이지를 넘겨 첫 수록작부터 읽어나가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기대가 너무 컸던 걸까요?

1년 만에 다시 만난 맥주 바 가나리야와 주인장 구도 데쓰야는 외양은 그대로였지만,

왠지 조금은 속세에 물든 느낌이랄까?

아니면 은밀하게 숨겨놓고 혼자 즐기고 싶었던 단골집이

사람들의 입을 탄 덕분에 고유의 향을 잃고 북적거리는 맛집으로 전락한 느낌이랄까?

딱히 정리하긴 힘들지만, 분명 예전의 묘한 고요함과 아스라함은 찾아보기 쉽지 않았습니다.

 

모든 수록작마다 낯선(?) 손님들이 가득했고, 그들의 대화는 왠지 수다스럽게 들렸으며,

그들의 입으로 전해지는 에피소드들은 어딘가 작위적인 냄새가 강하게 풍겼습니다.

치밀한 작전(?)으로 사람의 인연을 억지로 맺어주는 듯한 ‘15주년’,

지나친 비약 때문에 작가가 의도했던 애틋한 정서가 제대로 살지 못한 벚꽃 흩날리는 밤’,

풍자인지 판타지인지 구분할 수 없던 개의 통보등 앞의 세 편은

구도 데쓰야의 맥주 맛과 요리 솜씨 외에는 대체로 아쉬움과 실망만 남겨줬습니다.

 

그나마 뒤의 두 편인 나그네의 진실약속

다소 기타모리 고의 정서를 대변한 듯한 작품들이었는데,

꽃 아래~’에 실린 작품들이 대체로 미스터리를 읽는데 어느새 눈가가 붉어지는 이야기였다면,

이 두 작품은 미스터리 자체에 가까운, 말하자면 건조한 느낌이 더 강한 작품들이었습니다.

물론 기타모리 고만의 독특한 전개와 예상치 못한 반전 덕분에 흥미롭게 읽히긴 했지만,

적어도 어딘가 한 곳쯤에서 진한 애틋함이 솟아나

눈가를 붉게 만들어주기를 기다렸던 기대감은 결국 찾아낼 수 없었습니다.

 

단편집의 특성 상 모든 수록작에게 호평을 줄 수는 없지만,

전작 꽃 아래 봄에 죽기를이 그랬던 것처럼

적어도 한두 편이라도 마음을 움직이게 해줬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듭니다.

그랬다면, 이제 봄은 다 가버렸고, 벚꽃 역시 흔적도 없이 모두 사라졌지만,

짧지만 화려하고, 화려하지만 애틋하게 느껴졌던 그 순간을

잠시나마 조용히 음미할 수 있었을 텐데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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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녀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직업
사쿠라바 가즈키 지음, 박수지 옮김 / 노블마인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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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조금 상세한 줄거리와 캐릭터 설명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3년 전쯤 읽은 내 남자의 독특하고 묘한 분위기 때문에

계속 관심을 가져왔던 사쿠라바 가즈키의 작품입니다.

읽기 전부터 제목과 표지 디자인이 눈길을 끌었는데, 내용과 잘 매치됐을 뿐 아니라,

제가 나름 명명해본 서정적인 잔혹동화의 분위기를 잘 대변하고 있었습니다.

 

캐릭터와 설정 등에서 오츠 이치의 몇몇 작품을 연상시키기도 했지만,

오츠 이치의 작품들이 어둡고 스산한 분위기를 전면에 내세웠다면,

사쿠라바 가즈키는 가볍고 간결한 문장들을 통해

가공되지 않은 10대의 정서를 그대로 노출시켰다는 느낌을 전해줍니다.

 

주인공 오니시 아오이는 어디서나 마주칠 수 있는 평범한 10대 소녀이고,

그녀의 친구들 역시 수다스럽고, 장난끼 넘치는 캐릭터들입니다.

그녀가 살고 있는 시모노세키 인근의 섬은 계절마다 아름다운 풍광을 보여주고 있고,

게임센터와 맥도널드를 즐겨 찾기도 하지만, 버려진 구 일본군 요새와 등대에서

혼자만의 시간을 즐기기도 하는 10대 소녀의 삶은 오히려 낭만적으로 보이기까지 합니다.

하지만, 아오이의 평범했던 삶은 여름방학을 맞이하면서 큰 변화를 맞이합니다.

 

● ● ●

 

아오이의 유일한 불행은 과거에 얽매여 사는 엄마와 주정뱅이 폭력꾼 새 아빠입니다.

부딪히고 저항하기 보다는 눈치껏 피해가며 살아가는 법을 택했던 아오이였지만,

어느 날 갑자기 자신의 삶에 끼어든 시즈카 덕분에 그녀의 삶은 파란 속으로 휩쓸립니다.

투명인간처럼 지내던 학기 중과는 정반대로, 여름방학이 시작되자마자

검은 드레스와 특이한 목걸이 등 고딕 롤리타풍으로 치장한 시즈카는

의식적으로 아오이의 곁을 맴돌며 그녀 마음속에 농축되어 있던 분노를 이끌어냅니다.

절대로 안 들키는 살인 방법, 가르쳐줄까?”

 

여름방학의 첫 살인 이후 알게 모르게 시즈카에게 속박을 느낀 아오이는 그녀를 멀리 하지만,

2학기에 접어든 시즈카는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투명인간으로 돌아갑니다.

그런 시즈카가 아오이에게 두 번째 살인을 제안한 것은 겨울방학이 시작된 이후입니다.

나도 죽이고 싶은 사람이 있어.”

 

아오이는 고민 끝에 시즈카의 살인계획에 동참하기로 했지만,

그 과정 중에 베일 속에 감춰져있던 시즈카의 실체를 눈치 채게 되면서,

두 소녀의 두 번째 살인 계획은 예정된 경로를 벗어나 파국으로 치닫게 됩니다.

 

● ● ●

 

읽는 독자에 따라 통제 불능에 빠진 10대들의 살인극으로 가볍게 치부할 수도 있고,

나름대로 여러 가지 의미를 담은 현실 반영물 또는 사회물로 여길 수도 있는 작품입니다.

혹시 작가 사쿠라바 가즈키가 어떤 주장을 강조하고자 했다면,

10대들의 삶을 망쳐놓은 기성세대를 거세게 비판했거나,

반대로 철없고 과격한 10대들의 범법 행위를 비판하려는 논조를 보였다면

이 작품은 평범하고 상투적인 클리셰에서 벗어나지 못 했을 것입니다.

 

물론 딱 그런 이야기 아닌가?’라고 평가하는 독자도 있겠지만,

개인적으로는, 등 떠밀리듯 불행한 삶에 발을 들여놓아야 했던 두 소녀를 지켜보며

안타까움과 공감을 함께 느낄 수 있었던 작품이었습니다.

좀 비약일 수도 있지만, 영화 델마와 루이스소녀 버전이랄까요?

 

아오이와 시즈카 두 소녀의 관계는 보는 입장에 따라

거래라고도 할 수 있고, ‘연대라고도 볼 수 있는데,

이 미묘한 차이가 이야기를 긴장감 있게 만드는 중요한 요소입니다.

표면상으로는 교차 살인 내지는 알리바이 조작 등의 거래적 요소가 강하지만,

두 소녀의 보이지 않는 감정적 교류에 주목하면 연대의 의미가 더 크게 보입니다.

 

한편, 물과 기름 같은 두 소녀의 연대를 묘사하기 위해

작가는 원시인의 슬픔이라는 옛이야기를 인용합니다.

 

원시인은 슬플 때는 가만히 있는대.

동굴 밖은 소중한 사람을 죽여 버린 커다란 곰이 있으니까.

나를 지키기 위해 숨죽인 채, 모든 욕구를 억누르며

그저 눈에 띄지 않도록 사는 거야.

 

아오이에게는 철없는 엄마와 주정뱅이 아빠가 동굴 밖의 곰이었고,

시즈카에게는 괴팍한 할아버지와 사촌오빠가 그런 존재였습니다.

어른들에게 속박당해야 하는 10대라는 생물학적 나이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런 두 소녀가 눈에 띄지 않게 숨어 사는 소극적인 삶 대신

좀더 적극적으로 동굴 밖의 곰을 물리치고 세상 밖으로 나가기 위해 생각해낸 것이

두 번의 방학에 걸친 두 차례의 살인이었던 것입니다.

 

아오이는 첫 번째 살인 이후의 자신의 삶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마음이 쨍그랑 소리를 내며 깨진 그날부터 (중략) 나는 인형 같다고 생각했다.”

둘이 있으면 위험한 놀이를 하는 기분... 그러면서도 맛들이면 벗어나기 어려울 것 같은..”

딱히 어렵거나 현학적인 표현 없이도 아오이의 현실은 적나라하게 드러납니다.

맥락 없이 뚝 떼어놓은 문장들이라 잘 이해 안될 수도 있지만,

사쿠라바 가즈키의 내 남자에서도 그런 비슷한 느낌을 받은 기억이 납니다.

본인은 웃지 않으면서 남을 웃기는 개그맨의 연기가 최고의 웃음을 유발하듯,

간결하고 맑아 보이는 문장들로 표현되는 깊이를 알 수 없는 살의와 그것의 실천은

작심하고 동원한 잔혹한 단어와 문장들보다 훨씬 더 깊게 각인됩니다.

 

급작스런 (그리고 조금은 안이해보였던) 엔딩이 무척 아쉬웠는데,

살아남은 자들의 그 이후의 삶이 어떻게 흘러갔을지 무척 궁금해졌습니다.

그런 내상과 트라우마를 지닌 채 온전한 삶을 누릴 수 있을지 염려되기도 했구요.

 

짧고 읽기 쉬운 문장들이라 조금 성급하게 읽힐 수 있는 작품인데,

혹시 이 작품을 읽을 독자라면 꼭꼭 씹어가며(?) 읽어보실 것을 권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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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여름의 방정식 탐정 갈릴레오 시리즈 6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이혁재 옮김 / 재인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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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녀의 구제이후 오랜만에 갈릴레오 시리즈를 접하게 됐습니다.

갈릴레오의 고뇌를 건너뛰고 몇 년 만에 읽은 셈이지만

유가와, 구사나기, 가오루 등 갈릴레오 시리즈를 끌고 가는 캐릭터들은

자주 만나온 사이처럼 친숙하게 느껴졌습니다.

 

갈릴레오의 공백기 동안 읽은 히가시노 게이고의 작품들에 대한 만족도가

조금은 널뛰기 하듯 진폭이 커서 늘 신간이 나올 때마다 고민하곤 했는데,

이번엔 갈릴레오라는 브랜드 덕분에 별 고민 없이 한여름의 방정식을 집어들게 됐습니다.

 

● ● ●

 

해저광물자원 설명회 때문에 바닷가 마을 하리가우라의 로쿠간소 여관에 머물던 유가와는

같은 여관에 머물던 전직 경시청 형사의 죽음 때문에 본의 아니게 사건에 휘말립니다.

열차 안에서 만난 초등학생 교헤이와의 인연으로

그의 고모 내외가 운영하는 로쿠간소 여관에 머물게 됐던 것인데,

하필 그 여관의 투숙객, 그것도 전직 경시청 형사가 의문의 죽음을 당하게 되자,

유가와 입장에서는 도리 없이 사건에 관심을 갖게 된 것입니다.

 

실족이나 자살로 결론이 날 것 같던 쓰카하라의 죽음은

그가 아무런 연고도 없는 하리가우라를 방문했던 이유가 밝혀지고,

, 그 이유가 16년 전에 일어났던 한 살인사건과 관련이 있다는 점이 드러나면서

피살의 가능성이 제기되는 등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됩니다.

 

도쿄의 구사나기-가오루 콤비는 하리가우라에 머물고 있는 유가와와 정보를 주고받으면서

16년 전 살인사건의 이면에 감춰진 진실을 밝히기 위해 광범위한 탐문을 벌이고,

그 결과 쓰카하라를 비롯한 여러 사람의 삶을 비극으로 내몬 그날의 진실과 마주하게 됩니다.

그 사이, 하리가우라에 머물던 유가와 역시 쓰카하라의 죽음의 진상을 알게 되지만,

한 사람의 인생을 뒤틀리게 할 가능성때문에 고민에 빠지게 됩니다.

 

● ● ●

 

과거 쓰카하라가 수사했던 사건의 진상 파악과

현재 쓰카하라가 피살된 사건의 수사 과정이 나란히 진행되면서

이야기는 책 두께(551페이지)만큼이나 방대해집니다.

그만큼 등장하는 캐릭터도 많고, 전개되는 이야기도 여러 갈래이다 보니

최대한 줄거리를 요약한다고 해도 이 정도 분량이 나오네요.

읽지 않은 독자들이 호기심을 가질만한 떡밥성 서평을 쓸 수도 있지만,

여기저기 스포일러로 변신할 수 있는 지뢰들이 산재해있어서

전부 다 설명할 게 아니라면 인물 하나 언급하기도 무척 조심스러워집니다.

 

만 하루도 안 되어 마지막 페이지에 이를 만큼 페이지 터너로서의 위력은 대단했고,

덕분에 그동안 히가시노 게이고의 몇몇 작품 때문에 상처(?)받았던 기억들이

조금은위로받을 수 있었습니다.

굳이 조금은이라는 말을 덧붙인 이유는 재미-긴장-반전이라는 종합선물세트에도 불구하고,

한여름의 방정식에서 느낀 몇 가지 아쉬움 때문입니다.

 

우선은 갈릴레오 시리즈의 강점이자 동시에 약점인 유가와의 캐릭터입니다.

용의자 X의 헌신을 제외한 대부분의 작품에서 유가와의 활약은 공상에 가까울 정도입니다.

그의 뛰어난 추리가 그저 좋은 머리 때문만이 아니라

그것을 객관적으로 뒷받침하는 물리학 지식에 기인한다는 점은 이해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실 속의 사람같지 않은 그의 캐릭터로 인해

때론 경탄해야 할 지점에서 엉뚱하게도 물음표(저런 추리가 가능해?)가 연상되곤 합니다.

한여름의 방정식에서도 물리학 박사이자 천재 추리가인 유가와의 활약이 돋보이는데,

몇몇 지점에선 어쩐지 땀과 노력 없이 얻어진 공짜 성과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습니다.

 

또 한 가지는 도쿄에서 활약한 구사나기와 가오루 콤비의 탐문에 관한 것인데,

이들에게는 늘 행운의 여신이라도 따라다니는 듯

원하는 장소, 원하는 인물, 원하는 증거들이 때맞춰 등장해줍니다.

더구나 1-2년도 아니고 16년이 지난 사건의 관련자들이

마치 며칠 전에 본 것처럼 당시의 정황을 설명하는 부분들은

한두 번이라면 모르겠지만 여러 차례 반복되다 보니 공감하기 쉽지 않았습니다.

 

아무튼...

히가시노 게이고의 필력은 방대한 재료들을 효율적으로 요리해냈고,

재미와 긴장 뿐 아니라 반전에 이르기까지 종합선물세트 같은 미스터리를 완성했습니다.

개인적인 취향은 여전히 그의 묵직하거나 애틋함이 넘치는 작품들을 선호하는 편이지만,

재미로 범벅된 상업성 짙은 작품이라도 한여름의 방정식만큼의 완성도를 지녔다면

언제든 환영할 마음의 준비가 되어있습니다.

(사실 최근 몇몇 작품에서 경험한 실망감이 워낙 컸던 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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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마 잭의 고백 이누카이 하야토 형사 시리즈 1
나카야마 시치리 지음, 복창교 옮김 / 오후세시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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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기가 사라진 채 참혹하게 훼손된 시체들이 연이어 발견됩니다. 신장 이식이 필요한 어린 딸을 둔 경시청 수사1과의 이누카이 하야토는 관할서 파트너 고테가와와 함께 범행 동기조차 파악하기 힘든 이 연쇄살인 수사에 뛰어듭니다. 끈질긴 탐문으로 두 희생자의 공통점을 알아냈지만, 이런저런 이유로 이누카이의 수사가 장벽에 막혀있는 사이 결국 세 번째 희생자가 등장합니다. 얼마 후 다음 희생자로 예상된 자에게 진범의 전화가 걸려오자 이누카이와 담당 형사들이 총출동하지만 그들이 맞닥뜨린 것은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충격적인 엔딩이었습니다.

 

“‘반전의 제왕이라 불릴 정도로 매 작품마다 끝까지 마음을 놓을 수 없게 만든다.”, 아직은 낯선 작가 나카야마 시치리에 대한 출판사의 격찬, 아직 못 읽었지만 그의 한국 첫 출간작 안녕, 드뷔시가 제8'이 미스터리가 대단하다!' 대상 수상작이란 점, 또 이 작품이 전설의 살인마 잭을 제목으로 차용할 만큼 잔혹한 연쇄살인물이라는 점, 그리고 사회파 미스터리이자 늘 관심을 갖고 있는 메디컬 미스터리라는 점 등 작가의 이력과 장르의 성격 모두 개인적인 취향에 비춰볼 때 안 읽고는 못 넘어갈 정도의 화려한 유혹이 난무했던 작품입니다.

 

참혹한 연쇄살인과 그 진범 찾기가 주된 내용인 군더더기 없는 정통 미스터리지만 이 작품이 사회파+메디컬 미스터리로 정의될 수 있는 이유는 이 작품에 등장하는 참혹한 연쇄살인이 쾌락을 즐기는 소시오패스의 만행이거나 복수심에 불타는 개인의 무자비한 살인극이 아니라 뇌사자의 장기 기증이라는 논쟁의 여지가 많은 사회적 이슈와 밀접하게 연관돼있기 때문입니다.

장기 이식에 관련된 여러 주체들(기증자, 수혜자, 의료관계자 등)의 딜레마 혹은 탐욕과 함께 선정적인 보도를 일삼는 언론과 경직된 경찰의 태도에 대한 신랄한 비판까지 가미된 덕분에 장기 적출 연쇄살인이라는 다분히 자극적인 사건은 기대 이상의 볼륨감을 갖추게 됩니다. 거기에다 주인공인 이누카이 하야토에게 신장 이식이 필요한 딸이 있다는 설정까지 곁들여지면서 독자는 장기 이식이라는 사회적 이슈에 대해 좀더 깊은 감정이입을 경험하게 됩니다.

 

뇌사자는 뇌는 죽어 있지만 피가 흐르고 살도 따뜻합니다.”, “다른 사람을 희생시켜 가며 살아남을 자격은 누구한테 있는 거야?” 등 본문 곳곳에서 뇌사와 장기 이식에 관한 무거운 논쟁이 벌어집니다. 또 일반인이 뉴스를 통해 접하는 장기 이식의 전후 사정은 대부분 미담으로 포장돼있지만 실상 기증자 가족에게 장기 적출이란 사람을 두 번 죽이는 일과 다름 아닌 일이란 점도 여러 차례 강조됩니다. 사랑하는 가족의 장기가 뿔뿔이 흩어진 채 누군가의 몸 안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건 잊을 수도, 떠올리고 싶지도 않은 고통스런 일입니다. 흔히 미화되듯 기증자의 가족은 자신의 혈육이 누군가를 살리고 떠났다는 보람과 행복감만으로 남은 삶을 편안하게 살아갈 수 있을까요? 작가는 이런 극렬한 갈등과 고통을 디테일하게 그리면서 그것들이 끔찍한 연쇄살인의 기폭제로 작동하게 된 과정을 생생한 리얼리티와 함께 묘사합니다.

 

반전을 위해 다소 뜬금없이 급선회한 엔딩의 위화감이 아쉬움으로 남긴 했지만 그저 훈훈한 미담으로만 여겨졌던 장기 이식의 이면을 제대로 바라볼 수 있었던 점이나 그 이면의 문제들을 연쇄살인 미스터리와 엮어낸 작가의 필력은 무척 만족스러웠습니다.

더불어, 물과 기름처럼 어울리지 않을 것 같던 이누카이와 (관할서 형사) 고테가와 콤비가 눈길을 끌었는데, 전혀 극단적이지도, 억지스럽게 포장되지도 않은 캐릭터들이지만 두 사람의 조합은 적절한 긴장과 휴식을 제공하며 묘한 매력을 발휘했습니다. 그래선지 이들을 주인공으로 한 시리즈를 기대해보는 것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아직 한국에는 두 편밖에 소개되지 않았지만 왠지 앞으로 꽤 주목하게 될 것 같은 나카야마 시치리의 후속작이 이누카이&고테가와 시리즈라면 더욱 반가울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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