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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녀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직업
사쿠라바 가즈키 지음, 박수지 옮김 / 노블마인 / 2007년 6월
평점 :
절판
(조금 상세한 줄거리와 캐릭터 설명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3년 전쯤 읽은 ‘내 남자’의 독특하고 묘한 분위기 때문에
계속 관심을 가져왔던 사쿠라바 가즈키의 작품입니다.
읽기 전부터 제목과 표지 디자인이 눈길을 끌었는데, 내용과 잘 매치됐을 뿐 아니라,
제가 나름 명명해본 ‘서정적인 잔혹동화’의 분위기를 잘 대변하고 있었습니다.
캐릭터와 설정 등에서 오츠 이치의 몇몇 작품을 연상시키기도 했지만,
오츠 이치의 작품들이 어둡고 스산한 분위기를 전면에 내세웠다면,
사쿠라바 가즈키는 가볍고 간결한 문장들을 통해
가공되지 않은 10대의 정서를 그대로 노출시켰다는 느낌을 전해줍니다.
주인공 오니시 아오이는 어디서나 마주칠 수 있는 평범한 10대 소녀이고,
그녀의 친구들 역시 수다스럽고, 장난끼 넘치는 캐릭터들입니다.
그녀가 살고 있는 시모노세키 인근의 섬은 계절마다 아름다운 풍광을 보여주고 있고,
게임센터와 맥도널드를 즐겨 찾기도 하지만, 버려진 구 일본군 요새와 등대에서
혼자만의 시간을 즐기기도 하는 10대 소녀의 삶은 오히려 낭만적으로 보이기까지 합니다.
하지만, 아오이의 평범했던 삶은 여름방학을 맞이하면서 큰 변화를 맞이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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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오이의 유일한 불행은 과거에 얽매여 사는 엄마와 주정뱅이 폭력꾼 새 아빠입니다.
부딪히고 저항하기 보다는 눈치껏 피해가며 살아가는 법을 택했던 아오이였지만,
어느 날 갑자기 자신의 삶에 끼어든 시즈카 덕분에 그녀의 삶은 파란 속으로 휩쓸립니다.
투명인간처럼 지내던 학기 중과는 정반대로, 여름방학이 시작되자마자
검은 드레스와 특이한 목걸이 등 ‘고딕 롤리타’ 풍으로 치장한 시즈카는
의식적으로 아오이의 곁을 맴돌며 그녀 마음속에 농축되어 있던 분노를 이끌어냅니다.
“절대로 안 들키는 살인 방법, 가르쳐줄까?”
여름방학의 첫 살인 이후 알게 모르게 시즈카에게 속박을 느낀 아오이는 그녀를 멀리 하지만,
2학기에 접어든 시즈카는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투명인간으로 돌아갑니다.
그런 시즈카가 아오이에게 두 번째 살인을 제안한 것은 겨울방학이 시작된 이후입니다.
“나도 죽이고 싶은 사람이 있어.”
아오이는 고민 끝에 시즈카의 살인계획에 동참하기로 했지만,
그 과정 중에 베일 속에 감춰져있던 시즈카의 실체를 눈치 채게 되면서,
두 소녀의 두 번째 살인 계획은 예정된 경로를 벗어나 파국으로 치닫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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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는 독자에 따라 ‘통제 불능에 빠진 10대들의 살인극’으로 가볍게 치부할 수도 있고,
나름대로 여러 가지 의미를 담은 현실 반영물 또는 사회물로 여길 수도 있는 작품입니다.
혹시 작가 사쿠라바 가즈키가 어떤 ‘주장’을 강조하고자 했다면,
즉 10대들의 삶을 망쳐놓은 기성세대를 거세게 비판했거나,
반대로 철없고 과격한 10대들의 범법 행위를 비판하려는 논조를 보였다면
이 작품은 평범하고 상투적인 클리셰에서 벗어나지 못 했을 것입니다.
물론 ‘딱 그런 이야기 아닌가?’라고 평가하는 독자도 있겠지만,
개인적으로는, 등 떠밀리듯 불행한 삶에 발을 들여놓아야 했던 두 소녀를 지켜보며
안타까움과 공감을 함께 느낄 수 있었던 작품이었습니다.
좀 비약일 수도 있지만, 영화 ‘델마와 루이스’ 소녀 버전이랄까요?
아오이와 시즈카 두 소녀의 관계는 보는 입장에 따라
‘거래’라고도 할 수 있고, ‘연대’라고도 볼 수 있는데,
이 미묘한 차이가 이야기를 긴장감 있게 만드는 중요한 요소입니다.
표면상으로는 교차 살인 내지는 알리바이 조작 등의 거래적 요소가 강하지만,
두 소녀의 보이지 않는 감정적 교류에 주목하면 연대의 의미가 더 크게 보입니다.
한편, 물과 기름 같은 두 소녀의 연대를 묘사하기 위해
작가는 ‘원시인의 슬픔’이라는 옛이야기를 인용합니다.
원시인은 슬플 때는 가만히 있는대.
동굴 밖은 소중한 사람을 죽여 버린 커다란 곰이 있으니까.
나를 지키기 위해 숨죽인 채, 모든 욕구를 억누르며
그저 눈에 띄지 않도록 사는 거야.
아오이에게는 철없는 엄마와 주정뱅이 아빠가 동굴 밖의 곰이었고,
시즈카에게는 괴팍한 할아버지와 사촌오빠가 그런 존재였습니다.
어른들에게 속박당해야 하는 10대라는 생물학적 나이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런 두 소녀가 눈에 띄지 않게 숨어 사는 소극적인 삶 대신
좀더 적극적으로 동굴 밖의 곰을 물리치고 세상 밖으로 나가기 위해 생각해낸 것이
두 번의 방학에 걸친 두 차례의 살인이었던 것입니다.
아오이는 첫 번째 살인 이후의 자신의 삶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마음이 쨍그랑 소리를 내며 깨진 그날부터 (중략) 나는 인형 같다고 생각했다.”
“둘이 있으면 위험한 놀이를 하는 기분... 그러면서도 맛들이면 벗어나기 어려울 것 같은..”
딱히 어렵거나 현학적인 표현 없이도 아오이의 현실은 적나라하게 드러납니다.
맥락 없이 뚝 떼어놓은 문장들이라 잘 이해 안될 수도 있지만,
사쿠라바 가즈키의 ‘내 남자’에서도 그런 비슷한 느낌을 받은 기억이 납니다.
본인은 웃지 않으면서 남을 웃기는 개그맨의 연기가 최고의 웃음을 유발하듯,
간결하고 맑아 보이는 문장들로 표현되는 깊이를 알 수 없는 살의와 그것의 실천은
작심하고 동원한 잔혹한 단어와 문장들보다 훨씬 더 깊게 각인됩니다.
급작스런 (그리고 조금은 안이해보였던) 엔딩이 무척 아쉬웠는데,
살아남은 자들의 그 이후의 삶이 어떻게 흘러갔을지 무척 궁금해졌습니다.
그런 내상과 트라우마를 지닌 채 온전한 삶을 누릴 수 있을지 염려되기도 했구요.
짧고 읽기 쉬운 문장들이라 조금 성급하게 읽힐 수 있는 작품인데,
혹시 이 작품을 읽을 독자라면 꼭꼭 씹어가며(?) 읽어보실 것을 권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