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빙과 ㅣ 고전부 시리즈
요네자와 호노부 지음, 권영주 옮김 / 엘릭시르 / 2013년 11월
평점 :
“안 해도 되는 일은 안 한다.”는 좌우명답게 애늙은이 같은 무심한 캐릭터인 오레키 호타로, 명가의 딸이며 우수한 성적을 자랑하지만 어딘가 신비함을 지닌 소녀 지탄다 에루, 호타로의 친구이자 어디로 튈지 모르는 특이한 박학다식 정보창고 후쿠베 사토시, 후쿠베를 좋아하는 조금은 다혈질인 도서위원 여학생 이바라 마야카 등 이런저런 사연으로 폐부(閉部) 직전의 고전부에 모인 된 4명의 가미야마 고교 1년생들.
‘빙과’는 33년 전인 1967년, 가미야마 고교에서 일어났던 사건을 추적하는 고전부 4인방의 활약이 주된 내용입니다. 이런저런 일에 끼어드는 것을 싫어하면서도 본능에 가까운 뛰어난 추리력을 지닌 오레키는 당시 사건의 중심에 있던 외삼촌의 행적을 알고 싶어 하는 지탄다에게 부탁을 받곤 나머지 고전부 멤버들과 함께 진실 찾기에 나섭니다.
“학원 청춘 미스터리는 가볍거나 치기 어린 애들 이야기”라는 편견은 버린 지 오래지만, 매번 새로운 학원 청춘 미스터리 작품을 집어들 때마다 여전히 주저되는 것은 사실입니다. ‘빙과’ 역시 서너 번을 들었다 놓았다를 반복했던 작품인데, 구로타케 요의 ‘그리고 숙청의 문을’처럼 피비린내라도 진동하거나 니시자와 야스히코의 ‘그녀가 죽은 밤’처럼 맥주를 즐기는 대학생이라도 등장한다면 모를까, 왠지 달달하긴 해도 미성숙해 보이는 고1들의 ‘고전부 시리즈’는 정말 쉽게 손이 가지 않았습니다. 책꽂이에 꽂힌 ‘빙과’를 보며 늘 숙제처럼 부담감을 갖고 있었는데, 긴 연휴 덕분에 작심하고 밀린 숙제 하듯 ‘빙과’를 꺼내 읽었습니다.
고백하자면, 기대감이 크지 않았던 탓인지 의외로 재미있고 유쾌한 책읽기가 됐습니다. 오레키의 시니컬한 태도는 기분 나쁘지 않은 매력을 지니고 있고, (해설을 보고 동감한 부분이지만) 어딘가 배배 꼬인 듯한 셜록 홈즈의 천재성까지 엿보여 고전부 멤버들뿐 아니라 독자들에게도 어필할 수 있는 폼 나는 주인공입니다. 그런 오레키에게 의지하는 보호본능을 자극하는 지탄다의 청초함도, 투닥거리면서도 이야기의 균형을 잡아주는 후쿠베와 이바라의 통통 튀는 건강함도 모두 고전부 이야기가 시리즈로 이어지게끔 만들어준 매력적인 캐릭터들입니다.
4인방이 고전부에 합류하는 계기가 된 초반 에피소드들은 평범한 일상 미스터리에 불과하고, 메인 사건이라는 것도 피 한 방울 등장하지 않는 ‘고1’다운 이야기지만, 이상하게 웃음과 호기심, 적절한 긴장감을 끌어내는 힘이 있었습니다. 이런 평범함과 ‘고1’다운 메인 사건 때문에 실망감을 느낀 서평들을 많이 접할 수 있었는데, 제 경우는 오히려 그 또래에 걸맞는 리얼한 에피소드들이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미야베 미유키의 ‘솔로몬의 위증’이 굉장히 깊은 인상을 남겨줬음에도 불구하고 마지막까지 “이 또래 아이들의 이야기가 맞나?”라는 의문을 갖게 했던 것에 비하면 ‘빙과’는 캐릭터와 에피소드 모두 현실감 있게 설정됐다는 뜻입니다.
‘빙과’는 그 또래에 어울리는 미스터리뿐 아니라 파릇파릇한 성장기를 들여다볼 수 있는 작품이기도 합니다. “안 해도 되는 일은 안 한다”는 좌우명 때문에 후쿠베에게 ‘회색’이라 불리던 오레키는 고전부에서 만난 의외의 친구들 덕분에 이런저런 일에 ‘참견’하기 시작하면서 자신이 정해놓은 규범에서 벗어나 ‘장밋빛’으로 삶의 색을 변화시키며 성장합니다. 다른 멤버들 역시 고전부 활동을 통해 조금씩 변화를 도모하곤 하는데, 앞으로 이어질 시리즈에서 어떤 성장과 변화를 겪을지 무척 궁금해지기도 했습니다.
33년 전의 진실 찾기 미스터리는 뭐랄까... 좀 부풀려 이야기하자면 억지스럽지 않은 경쾌한 서술트릭? 또는 해설에 언급된 것처럼, 문헌에 얽힌 비밀을 푸는 비블리오 미스터리? 아무튼, 사소해 보이는 단서들을 통해 가설을 세우고 추론을 거듭하면서 적잖은 즐거움과 의외성, 때론 독자들에게 “같이 한번 풀어보시지?”라는 메시지를 전합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기대가 크지 않았기에 만족감을 느낀 작품이었고, 당연히 이후의 ‘고전부 시리즈’에도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게 됐습니다. ‘빙과’를 포함하여 다섯 편이 일본에서 출간됐고 그중 세 편이 국내에 소개됐는데, 작가의 말대로라면 오레키가 졸업하기 전까지는 시리즈가 계속 이어질 예정이라니 앞으로 이어질 고전부의 유쾌한 이야기들을 계속 기대해볼 생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