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코, 여신의 영원
시바타 요시키 지음, 박춘상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14년 8월
평점 :
절판


(약간 상세한 줄거리와 캐릭터 소개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성애소설과 경찰소설의 조합이라는 홍보 카피를 보면서

호기심과 함께 도대체 어떻게 두 코드를 버무렸을까, 무척 궁금함이 일었습니다.

주인공이 10년차 경부보인 무라카미 리코라는 여경이라는 소개에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경찰소설의 근간인 사건은 들어본 적도 없는 충격적인 내용이었고,

성애소설의 근간인 연애는 전통적인 남녀관계를 완전히 전복시킨 채 진행됐으며,

그 수위는 꽤 높은 편이라 읽는 내내 복잡한(?) 심경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 ● ●

 

남성에 의한 남성 윤간 장면이 담긴 비디오테이프 사건을 수사하던 신주쿠 서의 리코는

안도 아키히코와 다카스 요시히사가 이끄는 본청 5계와의 합동수사를 지시받곤

그들과 얽혔던 2년 전의 끔찍한 악몽을 떠올립니다.

뛰어난 본청 여경이었지만, 상사와의 불륜 스캔들에 이어, 동료들로부터 끔찍한 집단폭행을

당한 무라카미 리코는 창녀라는 비난까지 받은 끝에 신주쿠 서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그들과 다시 얼굴을 맞대야 하는 현실이 괴로웠지만,

비디오테이프 사건이 살인, 유괴, 협박 등 점점 심상치 않은 사건으로 발전하면서

리코는 어쩔 수 없이 그들과의 공조 수사를 진행합니다.

하지만 여전히 자신을 2년 전의 나약하고 순종적인 리코로 기억하는 그들을 지켜보며

리코는 그녀만의 방식 - 그들을 정복하고 강간하는 - 으로 복수를 다짐합니다.

 

한편, 피해자들의 신분조차 알 수 없어 미로를 헤매던 경찰은

수사에 참여했던 형사가 피살되는 지경에까지 이르지만

몇몇 결정적인 제보와 극적으로 나타난 피해자의 진술을 통해

범행동기와 범인들의 실체 파악에 급진전을 보입니다.

그러나 리코에게 큰 위기가 몇 차례 찾아오는데, 동료 형사 살해범으로 오인받기도 하고,

자신들의 실체에 접근한 리코를 능욕, 살해하려는 범인들에게 습격을 당하기도 합니다.

위기를 벗어난 리코는 결국 피해자들의 공통점을 찾아내고 해결의 실마리를 잡는데,

마지막에 이르러 그녀 앞에 나타난 범인은 전혀 예상치도 못한 인물이었습니다.

 

● ● ●

 

경찰소설로서의 면모로 볼 때, 출발점이 된 사건은 무척 충격적이지만,

수사의 진행, 진범 찾기의 과정만 놓고 보면 조금은 평면적인 이야기입니다.

물론 결정적인 계기는 주인공 리코의 추리에 의해 완성되지만,

정체된 수사를 급진전 시킨 것은 대부분 의외의 제보들이었고,

조금 이른 타이밍에 대부분의 독자가 진범을 예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작품의 미덕은 그 과정 속에 무라카미 리코라는 한 여자의 파격적인 이야기,

즉 그녀의 성애와 성장이라는 이질적인 코드들을 잘 버무려놓았다는 점입니다.

리코에게는 과거와 현재를 통틀어 네 명의 연인이 있고, 그 중 한 명은 여자입니다.

과거의 연인 중 한 명은 본청 상사이자 유부남이었지만, 스캔들이 터지자 비겁하게 도망쳤고,

또 한 명은 청혼까지 했던 본청 동료지만, 리코에게 평생 잊히지 않을 상처만 남겼습니다.

현재의 남자 연인은 거칠지만 귀엽고, 쿨한 관계를 유지하는 5살 연하인 동료 경찰입니다.

현재의 여자 연인 역시 동료 경찰이지만, 양성애자인 그녀는 리코에게 푸근한 의지처입니다.

 

이기적이고 남성우월주의자인 과거의 두 연인은 리코를 전혀 다른 여자로 성장시켰습니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 누군가와 결혼한다는 것을 완벽하게 부정하게 만들었고,

남자란 몸을 줘야 할상대가 아니라, 대등하게 쾌락을 나누는 파트너로 여기게 만들었으며,

심지어 자유로움과 편안함을 위해서라면 동성애까지 받아들이게 변화시켰습니다.

그보다 훨씬 앞선 유년시절, 리코는 고지식한 경찰이었던 아버지로부터

혹독한 육체적 훈련과 순종하는 여성성이라는 이중적인 가치관을 강요당하며 성장했습니다.

아울러 현재의 동성 연인인 마리의 남성관 역시 리코에게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마리에게 남자란 편리한 서바이벌 나이프 같은 존재다.

필요할 때 꺼내 필요한 부분만 쓴다. 필요 없을 때는 그냥 접어두면 그뿐.

그것이 위험한 흉기가 될 수도 있다는 걸 알면서도 가지고 논다.

몸을 섞으면 섞을수록 남자는 참 하찮은 것 같아.”

 

이런 변화와 성장을 이룬 그녀 앞에 2년 전의 악연들이 다시 나타났을 때,

리코는 또 한 단계 파격적인 행보를 걷기로 합니다.

과거의 연인들은 그들의 악행은 다 잊은 듯 또다시 리코의 몸과 마음을 탐합니다.

그리고 리코는 거짓말처럼, 조금은 이해가 안 될 정도로 그들을 맞이합니다.

하지만 거기엔 그들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리코만의 복수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지금의 리코는 그때의 리코를 경멸한다. 사랑한다는 뻔한 말에 휘둘려

남자의 성욕을 순순히 채워주는 편한 여자였던 자신이 진심으로 부끄러웠다.

2년 전의 내가 아냐. 그는 오늘 밤 내 소유물이 됐어. 나의 즐거움과 쾌락을 위해

그는 열심히 봉사해야 돼.” 리코는 웃고 싶어졌다. “나도 할 수 있지? 당신을 강간하는 것쯤!”

 

언뜻 쉽게 이해되지도, 공감하기도 어려운 심리입니다.

혼자만 살겠다고 자신을 버렸던, 또 끔찍한 기억만 남겼던 남자들과 다시 몸을 섞으면서

그를 통해 그들을 강간하고 정복하고 지배하겠다는 각오인데,

꽤 높은 수위의 에로틱한 묘사가 수반된 탓인지 중반까지는 뭐지?’라는 느낌이 강했습니다.

몸으로 남자를 받아들이는 그 순간, 그녀의 머릿속에 승리감으로 가득하다는 의미인데,

그럴 수도 있겠다싶으면서도 동시에 그럴 수 있을까?’라는 의문이 든 것도 사실입니다.

물론 후반부로 갈수록 점점 그녀의 선택에 대해 이해하게 됐고,

스스로 상처를 보듬고, 자신만의 삶을 찾아가는 그녀만의 방식에 약간은 동조할 수 있었지만,

왠지 리코가 자학하듯 자신을 극단으로 몰아세우는 것 같아 끝까지 마음이 착잡했습니다.

 

남성에게 정치적으로 성적으로 지배당하는 나약하고 갈대 같던 여성성을 버리고,

오히려 자신의 능력을 통해 그들을 지배하려는, 즉 남성을 지배하는 남성성을 획득함으로써

복수와 쾌락을 동시에 성취하려 했던 리코의 파격적인 이야기가 리코, 여신의 영원입니다.

만일 이 이야기가 한 페미니스트에 의한 단순하고 통쾌한 남자들에 대한 복수 이야기였다면

아마 재미있게 읽히긴 했어도, 딱히 기억에 남을 것이 없는 이야기가 됐을 것입니다.

독자에 따라 의견 차이가 많이 날 수도 있는 작품이지만,

어쨌든 성애소설과 경찰소설의 조합이라는 눈길을 끄는 홍보 카피는

제몫을 충분히 해냈다는 것이 저의 결론입니다.

일본에서 성모의 심연’, ‘월신의 얕은 꿈등 리코 시리즈가 꽤 좋은 성적을 냈다고 하는데,

이 작품이 호응을 얻어서 나머지 리코 시리즈도 읽어볼 기회를 얻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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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계 재판 - 사람이 아닌 자의 이야기 다카기 아키미쓰 걸작선 2
다카기 아키미쓰 지음, 김선영 옮김 / 검은숲 / 2014년 3월
평점 :
절판


파계 재판을 비롯 4권 정도 국내에 소개된 작가지만, 다카기 아키미쓰와는 첫 만남입니다.

제목도 뭔가 파격적인 것을 암시하는 것 같고, 부제가 사람이 아닌 자의 이야기라고 해서

굉장히 잔혹하거나, 예상외의 법조물이 아닐까 생각했었는데,

다 읽고 난 소감은, 두 가지 예상 모두 빗나갔거나 모두 맞았을 수도 있겠다는 것입니다.

흔히 말하는 잔혹함과는 거리가 멀지만, 주인공의 삶은 파란만장 이상의,

결코 돌이키고 싶지 않은 잔혹한 인연과 사건들로 점철되어 있습니다.

증인들의 진술을 상세히 소개하는 장면 외에는 작품 전체가 법정 내에서 이뤄진다는 점에서

예상외의 법조물이라는 기대가 전혀 엇나간 것은 아니었습니다.

 

● ● ●

 

무라타 가즈히코는 두 건의 살인과 두 건의 사체유기 혐의로 체포되어 법정에 섭니다.

불륜관계에 있던 도조 야스코의 남편 도조 겐지를 살해, 유기한 혐의와

그로부터 한 달 후 연인인 도조 야스코마저 살해, 유기한 혐의로 기소된 것입니다.

무라타는 도조 겐지의 사체유기는 인정하지만 나머지 세 건의 혐의는 모두 부인합니다.

그는 야스코의 부탁을 받아 그녀가 죽인 남편 겐지의 사체만 유기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야스코마저 죽은 상황에서 그의 말은 신빙성을 얻지 못합니다.

더구나 그의 과거 행적을 조사한 경찰과 아마노 검사는 그의 주장을 조금도 믿지 않습니다.

젊은 시절, 무라타는 극단의 공금을 유용했었고, 군대에서 3번이나 영창을 다녀왔으며,

친구에게 사기를 쳤던, 명백히 파렴치하고 음침한 과거를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주변 사람들에 따르면 최근의 무라타 역시 누구도 믿지 않는 어두운 캐릭터일 뿐입니다.

 

모든 정황이 무라타를 연쇄살인과 사체유기의 흉악범으로 지목하는 가운데

젊은 변호사 햐쿠타니 센이치로는 그와의 여러 차례의 인터뷰를 통해 무죄를 확신했고,

그가 시인한 한 건의 사체유기 외의 나머지 사건들의 진실을 캐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검사 쪽으로 일방적으로 흘러가던 법정의 분위기를

증인들에 대한 심문과 예상치 못한 증거자료 제출을 통해 조금씩 변화시킵니다.

결국 햐쿠타니의 히든카드는 몇 차례의 반전을 이끌어낸 끝에 무라타의 무죄를 입증합니다.

동시에, 연쇄살인의 진범을 공개 지목하여 법정 안을 충격에 빠뜨립니다.

 

● ● ●

 

햐쿠타니의 끈질긴 탐문과 자료수집, 멋진 변론과 심문은 물론,

그의 슈퍼 와이프(?) 아키코의 탐정을 방불케 하는 자료조사 등은

억울한 누명을 벗겨주는 히어로 변호사의 이야기를 탄탄하게 구축하고 있습니다.

하나같이 일그러진 욕망과 끝없는 탐욕으로 범벅이 된 채 무라타의 삶에 끼어든 뒤

그를 흔들고, 괴롭히고 왜곡한 끝에 흉악범임에 틀림없어!’라고 단정하게 만든

주변 인물들 역시 적절하게 잘 배치되고 쉽고 사실감 있게 표현돼서

법조물을 읽을 때의 재미 너무 몰입한 나머지 악당들에 대한 분노의 게이지가 쉴 새 없이

오르락내리락하고, 누명쓴 주인공에 대한 조바심과 안쓰러움이 요동치는 를 배가시킵니다.

 

하지만 책이나 드라마, 영화를 통해 다양한 법조물을 경험한 독자 입장에서

1961년에 집필된 이 작품의 개성이나 반전은 예상외의 법조물이라고 극찬하기엔

조금은 단선적이고 심플해 보이는 것이 사실입니다. 뭐랄까, 정직한 돌직구 같은 느낌?

또한, 일본인, 그것도 패전 전후를 살아온 세대가 아니면 공감하기 힘든 설정이 등장하는데

문제는 이 설정이 재판의 기류를 크게 바꾸어 놓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는데다,

사람이 아닌 자의 이야기라는 부제의 숨은 뜻을 가리킬 정도로 중요한 설정이라는 점입니다.

(작품 초반에 얼핏 언급되긴 하지만, 그래도 스포일러가 될 수 있어 설명은 안하겠습니다)

조금은 형이상학적이거나 비과학적인 논리처럼 보이는 이 설정 덕분에

공감도는 갑자기 훅이 떨어지고, 그 지점부터는 쉽게 이야기를 따라가기 어려웠습니다.

작가는 나름 그 설정에 대해 여러 가지 사례를 들어 부연설명을 하고 있지만,

역시 외국 독자나 요즘 세대 독자들을 심정적으로 설득하기에는 역부족인 느낌이었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법정을 벗어나지 않고 있는 법정 미스터리 물이지만,

이 작품의 성격은 자신의 의지와 관계없이 태어날 때부터 일그러진 삶을 부여받았고,

그로 인해 예정된 불행한 인생경로를 살아온 한 남자의 휴먼스토리에 더 가깝습니다.

그의 선의는 타인들에 의해 악의적으로 이용당하거나 왜곡당했고,

그가 모든 것을 걸었던 사랑은 부메랑처럼 돌아와 그를 산산조각 냈습니다.

인생 후반부에 맞이한 위기는 평생 그를 외면하다가 딱 한번 찾아온 행운 덕분에 극복하지만,

그에게 남은 것은 누명을 벗은 승리의 기쁨만은 아닐 것입니다.

그래서인지 사건의 진상과 진범 찾기는 오히려 부차적인 서사라는 느낌이 강합니다.

돌직구 같은 고전을 좋아하는 독자에겐 흡입력이 강한 작품이 될 것이고,

이리저리 꼬이고,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복잡한 작품을 좋아하는 독자에겐

조금은 양념이 덜 들어간 심심한 독후감을 남길 수도 있는 작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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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바이, 엔젤 - 라루스가 살인 사건 야부키 가케루 시리즈
가사이 기요시 지음, 송태욱 옮김 / 현대문학 / 2014년 7월
평점 :
절판


유명 평론가의 소설 데뷔작이라는 정보 때문에 최근 작품으로 알고 읽었는데,

1974년에 집필된 작품인데다 탄생의 배경이 무척 독특하다는 점을 나중에야 알게 됐습니다.

좌익학생운동 중 동지 12명을 집단 구타해 죽인 연합적군사건을 접한 작가 가사이 기요시는

1974년 파리로 건너가 혁명을 꿈꾸던 인간이 왜 학살을 저지르는가?’라는 문제를 추적하며

테러의 현상학이라는 책을 집필했고, 거의 동시에 바이바이 엔젤을 집필했다고 합니다.

 

목이 잘린 여인의 사체, 호텔방에서 폭사한 남자, 숲속의 여자 변사체 등

라루스 가문과 관련된 참혹한 연쇄살인의 범인을 쫓는 전형적인 미스터리 탐정물이지만,

작가의 특이한 이력과 작품의 역사적, 철학적 배경 때문에

바이바이 엔젤은 조금은 다른 카테고리로 분류되어야 할 작품으로 보였습니다.

 

● ● ●

 

라루스 가문에 들이닥친 비극의 수사를 위해 모가르 경정과 바르베스 경감이 나섭니다.

그리고 사건에 연루된 마틸드, 앙투안의 친구이자 모가르 경정의 딸인 나디아 역시

탐정 못잖은 의욕과 호기심으로 사건에 뛰어듭니다.

한편 나디아는 리비에르 교수의 강의에서 알게 된 일본인 유학생 야부키 가케루에게

묘한 매력을 느낌과 동시에 라루스 가 살인사건 수사에 참여해줄 것을 요청합니다.

 

하지만 증거와 추론을 바탕으로 한 나디아의 정석 수사와는 다르게,

가케루는 현상학적 본질직관이라는 독특한 수사기법을 구사합니다.

목이 잘린 여인의 변사체 이후 새로운 희생자까지 등장한 상황에서

나디아는 그동안의 추리를 바탕으로 자신 있게 진범을 지목하지만

여러 사람 앞에서 가케루의 가차 없는 공격을 받으며 자신의 논리와 함께 무너지고 맙니다.

네 번째 희생자까지 등장한 다음에야 가케루는 나디아에게 사건의 진상을 밝힙니다.

그리고, 예상치 못한 범행 동기와 진범이 드러남과 동시에 마지막 희생자가 등장합니다.

 

● ● ●

 

곳곳에서 고전의 냄새가 물씬 풍기는 작품이지만

바이바이 엔젤을 다른 작품과 차별화시키는 가장 큰 특징은

어딘가 4차원스러운 일본인 유학생이자 탐정 역할을 맡은 야부키 가케루의 캐릭터입니다.

 

작품에서 언급된 그에 대한 묘사를 간단하게 편집해보면,

음악, 미술, 철학, 종교, 역사 등에 걸쳐 방대한 지식을 갖추고 있지만,

훈련된 심문자의 화술, 미행을 따돌리는 기술, 마술사를 능가하는 손놀림 등

어딘가 수상쩍은 기질을 갖고 있을 뿐만 아니라

얼굴은 투탕카멘의 황금마스크 같은 인상을 가진 청년입니다.

매일 밤 권총을 관자놀이에 댄 채 명상에 잠기는 그는 현상학의 실천을 위해

극단적으로 단순한 생활과 하루 한 끼의 식사, 그리고 독서, 산책만으로 삶을 영위합니다.

자연히 친구도 없고, 연인도 없고, 여자에 대한 관심도 없으며,

좀 과장해서 표현한 나디아의 독설에 따르면 타인이란 그저 성가시기만 한 존재라고 느끼고,

핵전쟁으로 단 한 사람만 살아남았을 때 비로소 마음이 평온해질 수 있는 인물입니다.

 

캐릭터만 놓고 보면 무척 흥미롭고 신선한 매력 덩어리 탐정이지만,

그의 철학적 스탠스이자 수사 기법인 현상학 때문에 읽는 내내 무척이나 당혹스러웠습니다.

작가 나름대로 쉽고 친절하게 현상학에 대해 누차 설명하고 있지만,

대학 1학년 때 끝없는 두통을 감수하면서도 무슨 소린지 이해하지 못했던 철학 개론처럼

현상학 관련 내용은 몇 번씩 되읽어가며 노력했음에도 피부에 잘 와 닿지 않았고,

그를 기반으로 한 가케루의 수사는 어딘가 신비주의 또는 예지자의 그것처럼 느껴졌습니다.

 

현상학은 난해하기만 한 기존 철학과 달리 진리는 생활세계 안에 있다고 주장하며

본질직관을 통해서만이 진실에 다가갈 수 있다고 여깁니다.

예를 들면, ()의 정의를 모르는 어린아이도 그게 원이라는 걸 본질직관을 통해

직감적으로 이해할 수 있으며, 그것이 사물을 인식하는 올바른 방법이라는 것입니다.

가케루는 탐정은 사건을 논리적으로 추리하는 게 아니라 직관하는 것이라고 말하며

전통적이고 교과서적인 나디아의 추리 방법을 정면으로 반박합니다.

말하자면, 사건을 개별적인 요소로 분해한 다음 이론적인 재구성에 골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유기적인 전체로 보면서 그 안에서 지렛대에 해당하는 것을 찾아낸다는 것입니다.

 

역시 어렵지요...?^^

번역자 역시 가케루는 현상학을 이용하여 사건을 추리하고 철학적인 주장을 펴는데

여기에서 독자의 호불호가 갈린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물론 가케루의 현상학적 추리 방식에 대해 모르는 척 넘어가더라도

연쇄살인을 풀어가는 과정은 흥미롭고 재미있게 읽힙니다.

 

다만, 후반부에서 드러난 범행 동기와 진범의 실체는 약간의 위화감을 자아냈습니다.

자세한 언급은 어렵지만, 사건과는 전혀 무관해 보였던 유럽의 정치적, 역사적 상황이

갑자기 범행 동기의 중요한 요소로 등장하면서 적잖은 분량에 걸쳐 상세히 묘사되는데,

제가 느낀 위화감의 실체는 가케루의 현상학적 추리를 타당하게 만들기 위해,

또 작가의 사상적-철학적 입장을 피력하기 위해 조금은 억지스럽게 이야기를 짜맞췄다

느낌이었습니다. 결론을 위해 과정을 작위적으로 설정했다는 느낌이랄까요?

추리소설이지만 범죄를 그린다기 보다는 사상을 그리기 위해 쓰였다는 느낌이

드는 것도 사실이라는 번역자의 설명이 충분히 이해되는 대목이었습니다.

 

철학적인 문장들이 번거로운 분들은 좀 어려운 문장이 나온다 싶으면

과감하게 패스하고 사건 해결의 과정에만 집중하실 것을 권유합니다.

이 작품의 핵심이자 미덕이 가케루와 현상학의 매력에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모든 것을 이해하고 읽으려다 보면 오히려 미스터리의 미덕까지 놓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야부키 가케루 시리즈 가운데 걸작으로 꼽힌다는 서머 아포칼립스’(1981)가 곧 출간된다는데

가케루의 현상학적 추리가 독자들의 흥미를 계속 이끌어낼 수 있을지 궁금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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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착의 론도 오리하라 이치 도착 시리즈 1
오리하라 이치 지음, 권일영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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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이 작품을 비롯한 도착 시리즈는 서술트릭의 대표작으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작가의 명성이나 작품의 유명세에도 불구하고 단지 서술트릭이라는 이유 때문에

그동안 계속 손을 댈까, 말까 고민했던 것이 사실입니다.

굳이 따지자면 8:2 정도로 재미보다는 실망한 경험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번역하신 권일영 님(뚜벅이 님)도 후기를 통해 서술트릭은 (중략) 대성공과 대실패,

두 가지 결과만 얻을 수 있는 위험한 길이라고 표현하신 것처럼

재미있게 읽힌 작품은 결과를 알고도 몇 번씩 다시 보고 싶어지는 반면,

그렇지 않은 경우엔 이 무슨 말장난?’이라는 불쾌감만 남게 됩니다.

서술트릭의 국대급인 우타노 쇼고의 벚꽃 지는 계절에 그대를 그리워하네

(이해 못할 분들이 많으시겠지만) 제겐 후자의 대표적인 경우였습니다.

 

아무튼...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된 호기심에, 또 실망할 때 실망하더라도 일단 읽어보자는 마음에

시리즈의 첫 편인 도착의 론도를 집어 들게 됐습니다.

 

● ● ●

 

갖은 고생 끝에 완성한 작품을 월간추리 신인상에 응모하려던 야마모토 야스오는

친구인 기도 아키라의 어이없는 실수로 응모작을 도둑맞습니다.

억울하지만 다시 집필을 시작해 마감일 직전 원고를 완성하지만,

이번에는 괴한의 습격을 받는 일까지 벌어집니다.

결국 그해 신인상은 시라토리 쇼라는 사람에게 돌아갔는데,

문제는 당선작이 자신이 썼던 것과 제목은 물론 내용까지 똑같았다는 점입니다.

여기저기 억울함을 호소해보지만 누구도 귀기울여주지 않습니다.

 

결국 야마모토는 자신의 작품을 도작(盜作)’한 시라토리 쇼를 응징하기로 마음먹습니다.

그의 정신을 피폐하게 만들고, 그가 획득한 고급아파트와 여자까지 빼앗을 작정입니다.

뜻대로 모든 일이 잘 풀려갈 무렵 그는 두 번째 습격을 당하게 되지만,

자신의 작품을 도작한 것은 물론 두 번씩이나 자신을 습격했던 범인을 잡는데 성공합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벌어졌던 두 건의 살인사건 역시 해결됩니다.

하지만...

그 이후 밝혀진 진실은 앞서 서술됐던 모든 이야기를 전부 뒤엎을 정도로 충격적입니다.

제목 그대로 모든 것이 도착(倒錯)의 론도였음이 드러납니다.

 

● ● ●

 

도착(倒錯)

1. 뒤바뀌어 거꾸로 됨.

2. 본능이나 감정 또는 덕성의 이상으로 사회나 도덕에 어그러진 행동을 나타냄.

 

론도(rondo)

1. 원무곡을 가리키며, 원무 또는 그 노래를 이르는 말.

2. 주제와 삽입부를 사이에 두고 되풀이되면서 나타나는 음악의 한 형식

 

좀 억지스럽긴 하지만, ‘도착론도두 단어를 조합하여 해석하면,

뒤바뀌고 거꾸로 된, 그것도 도덕적으로 잘못된 행동들이 원을 그리듯 되풀이 됨입니다.

특이한 제목이지만, 또 이만큼 내용을 함축적으로 잘 대변하는 제목도 드뭅니다.

인물도, 사건도, 이야기도 모두 도착과 론도의 회오리 속에 갇혀있어

독자로서는 마지막 페이지에 이르러서야 원래의 올바른 상태, 즉 진실과 마주할 수 있습니다.

코에 걸면 코걸이 식의 해석일 수도 있지만,

목차만 봐도 뭔가 뒤바뀌거나 잘못된, 그리고 되풀이되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프롤로그   도작의 발견

1          도작의 진행

2          도착의 진행

3          도착의 도작

에필로그   도작과 도착

(참고로, 도작(盜作)과 도착(倒錯)은 도사쿠(とうさく)라는 같은 발음을 갖고 있습니다.)

 

다시 한 번 번역자의 이야기를 인용하자면,

작가와 한바탕 숨바꼭질을 하며 즐긴다면 번역자는 이를 작가가 작품의 바탕에 깔아놓은 유희정신이라고 표현했는데 도착 시리즈의 맛을 제대로 느낄 수 있다고 했습니다.

오리하라 이치가 열심히 뒤바꿔놓고, 거꾸로 놓고, 되풀이 시켜놓은 것을

숨바꼭질 하듯 열심히, , 즐기면서 찾아내거나 발견하라는 뜻이 아닐까요?

 

문장은 참 쉽습니다. 인물과 사건에 대한 묘사도 불필요하게 꼬아놓지 않아서

몇 시간이면 마지막 페이지까지 달릴 수 있습니다.

이야기는 심플하면서도 계속 변곡점을 만들어내고 있어 지루하지 않고

다음에 이어질 상황을 궁금하게 만듭니다.

다만, 마지막에 밝혀지는 도착의 론도의 진실에 관해서는 의견이 엇갈릴 수 있습니다.

작가가 파놓은 함정에 대한 기대치에 따라 감탄할 수도, 실망감을 느낄 수도 있습니다.

특히 마지막 론도는 어지러울 정도로 되풀이의 횟수와 속도가 빨라서

감탄사가 나오기도 전에 그동안 벌어졌던 도착을 하나씩 따져 물어야 했고,

그러다 보니 제 맛을 느끼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비유하자면, 얻어맞긴 맞았는데, 어디를 얼마나 세게 맞았는지 파악하느라

얻어맞은 충격을 제대로 느낄 수 없는 상태?

 

우려했던(?) 만큼 오리하라 이치의 서술트릭이 실망감을 주진 않았지만,

혹시나 했던 기대만큼 만족시켜주지 못한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도착의 의미도 대략 이해가 됐고, 어느 정도 패턴을 읽었다 생각하니,

후속작인 도착의 사각이나 도착의 귀결에서는 왠지 작가의 함정과 트릭을

읽는 중에 미리 눈치 챌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무모한(?) 생각을 해봅니다.

물론 99% 실패하겠지만, 그래도 도전해볼 만한 가치는 있지 않을까요?^^

 

(이어서 이 작품의 중요한 모티브였던 윌리엄 아이리시의 환상의 여인을 읽을 생각입니다.

고전 명작임에도 아직 읽어보지 못 했는데, ‘도착의 론도를 보고 나니 안 읽을 수가 없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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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의 노랫소리 - 제6회 일본추리서스펜스대상 수상작
텐도 아라타 지음 / 문학동네 / 2005년 11월
평점 :
절판


사랑과 가족에게 상처받은 채 고독하게 살아가는 세 사람의 일그러진 삶을 그린 작품입니다.

틀에 박힌 여자의 삶을 강요하는 가족들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13살에 겪은 끔찍한 기억에서 도망치기 위해 경찰이 되어 홀로 살아가는 아사야마 후키,

자신이 좋아하는 음악을 하기 위해 학교는 물론 가족과도 절연한 채

편의점 알바로 생계를 꾸려가며 고독의 노랫소리에 파묻혀 사는 요시카와 준페이,

그리고 불행한 가족사와 억압되고 왜곡된 성장기를 거친 끝에

완벽한 사랑으로 이뤄진 완벽한 가족을 꿈꾸며 잔혹한 연쇄살인마가 돼버린 마쓰다 다카시.

 

절도 수사팀의 후키는 편의점 연쇄강도 사건을 수사하던 중 준페이를 만납니다.

가족은 물론 친구조차 없는 혼자라는 공통점,

그리고 고독한 삶을 원하지만, 고독한 삶 때문에 끊임없이 고통스러워한다는 공통점이

두 사람 사이에 묘한 기류를 흐르게 만듭니다.

한편 자신의 의지와 관계없이 불행한 가족사로 인해 고독한 삶을 부여받은 다카시는

완벽한 사랑과 이해로 충만한 가족을 만들기 위해 그에 걸맞는 여자를 찾아 나섭니다.

납치된 여자들에게 자신의 가족사가 담긴 비디오를 보여주며 고문과 세뇌를 가하지만

모두 그의 완벽한 가족의 마지막 퍼즐이 되기를 거부하다가 처참하게 죽어갑니다.

그리고 그가 점찍은 최상의 가족 후보는 바로 여경찰 아사야마 후키였습니다.

 

● ● ●

 

그리 편하게 읽히는 작품은 아닙니다.

가족은 인간의 안식처이지만, 모든 욕망과 억압의 씨앗이 뿌려지는 곳이기도 하다.”라는

옮긴이의 말처럼, 작품 속에 등장하는 가족들은 하나같이 굴절된 모습을 갖고 있습니다.

폭압적이거나, 기성의 가치관을 강요하거나, 행복해질 수 없는 태생적 한계를 갖고 있습니다.

그런 환경에서 태어나고 성장한 세 주인공의 과거와 현재는 불행의 순도가 너무 높아

아무리 픽션이라고 해도 지켜보는 것 자체가 부담스럽습니다.

피해자의 신체를 고깃덩어리처럼 훼손하는 다카시의 범행은

잔혹한 사이코패스 물을 좋아하는 취향에도 불구하고 너무 끔찍해보입니다.

 

하지만 무엇보다 책읽기를 힘들게 했던 것은 고독에 대한 지나친 강조였습니다.

그들의 고독이 드리운 그늘은 너무 짙었고, 때론 자학에 가까울 정도로 보기 불편했습니다.

더구나 그 묘사의 양이 필요 이상으로 너무 방대하다 보니,

어떤 지점에 이르러서는 현실감은 떨어지고 작위적인 느낌만 남게 됩니다.

물론 이들의 고독이 불행한 가족사가 남긴 트라우마라는 점,

, 고독한 삶으로 인해 서로 악연 또는 인연을 맺게 된다는 점은 충분히 이해되지만,

그것이 과한 나머지 이 사람들, 그저 철없는 어른들일 뿐이네라는 생각까지 들게 만듭니다.

 

후키의 집요한 탐문과 준페이의 활약에 힘입은 사건의 해결 과정이라든가,

후반부에 밝혀지는 몇 가지 진실들 - 후키의 삶을 고통스럽게 만들었던 유년의 악몽이라든가

다카시가 희생자들에게 보여준 가족 비디오 속의 비밀,

그리고 다카시의 어머니가 그의 뇌리에 박아 넣은 괴물 같은 유산 등은

이 작품이 추리서스펜스 대상 수상작임을 보여주는 반증이자 미덕들입니다.

 

독자에게 강요하듯 동어반복적으로 묘사된 고독에 대한 지나친 강조만 아니었다면

수작으로 기억될 작품이었을 텐데, 라는 아쉬움이 진하게 남았습니다.

텐도 아라타의 작품으로는 애도하는 사람이후 두 번째 읽은 작품이었는데,

가족사냥이라든가 영원의 아이같은 그의 대표작이

초기작인 고독의 노랫소리의 아쉬움을 덜어줄 수 있기를 기대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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