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바이, 엔젤 - 라루스가 살인 사건 야부키 가케루 시리즈
가사이 기요시 지음, 송태욱 옮김 / 현대문학 / 2014년 7월
평점 :
절판


유명 평론가의 소설 데뷔작이라는 정보 때문에 최신작으로 알고 읽었는데, 1974년에 집필된 작품인데다 탄생의 배경이 무척 독특하다는 점을 나중에야 알게 됐습니다. 좌익학생운동 도중 동지 12명을 집단 구타해 죽인 연합적군사건을 접한 작가 가사이 기요시는 1974년 파리로 건너가 혁명을 꿈꾸던 인간이 왜 학살을 저지르는가?’라는 문제를 추적하며 테러의 현상학이라는 책을 집필했고, 거의 동시에 바이바이 엔젤을 집필했다고 합니다.

목이 잘린 여인의 사체, 호텔방에서 폭사한 남자, 숲속의 여자 변사체 등 라루스 가문과 관련된 참혹한 연쇄살인을 다룬 전형적인 미스터리 탐정물이지만, 작가의 특이한 이력과 이야기의 역사적, 철학적 배경 때문에 바이바이 엔젤은 조금은 다른 카테고리로 분류되어야 할 작품으로 보였습니다.

 

라루스 가문에서 벌어진 살인사건을 수사하기 위해 모가르 경정과 바르베스 경감이 나섭니다. 그리고 모가르 경정의 딸인 나디아 역시 탐정 못잖은 의욕과 호기심으로 사건에 뛰어드는데, 나디아는 같은 수업을 들으며 알게 된 일본인 유학생 야부키 가케루에게 묘한 매력을 느낌과 동시에 살인사건 수사에 참여해줄 것을 요청합니다.

그런데 증거와 추론을 바탕으로 한 나디아의 정석 수사와 달리 가케루는 현상학적 본질직관이라는 독특한 수사기법을 구사합니다. 목이 잘린 여인의 변사체 이후 새로운 희생자까지 등장한 상황에서 나디아는 그동안의 추리를 바탕으로 자신 있게 진범을 지목하지만 가케루의 가차 없는 공격을 받곤 자신의 논리와 함께 무너지고 맙니다.

 

곳곳에서 고전의 냄새가 물씬 풍기지만 바이바이, 엔젤을 다른 작품들과 차별화시키는 가장 큰 특징은 어딘가 4차원스러운 탐정 역할을 맡은 일본인 유학생 야부키 가케루의 캐릭터입니다. 그를 묘사한 내용을 대략 편집해보면 음악, 미술, 철학, 역사 등에 걸쳐 방대한 지식을 갖추고 있지만 심문자의 화술, 미행을 따돌리는 기술, 마술사를 능가하는 손놀림 등 어딘가 수상쩍은 기질도 지닌 인물입니다. 매일 밤 권총을 관자놀이에 댄 채 명상에 잠기는 그는 현상학의 실천을 위해 극단적으로 단순한 생활과 하루 한 끼의 식사, 그리고 독서와 산책만으로 삶을 영위합니다. 자연히 친구도 없고, 연인도 없고, 여자에 대한 관심도 없습니다.

 

캐릭터만 놓고 보면 무척 흥미롭고 신선해 보이지만, 가케루의 철학적 스탠스이자 수사 기법인 현상학 때문에 읽는 내내 무척이나 당혹스러웠습니다. 작가 나름대로 쉽고 친절하게 현상학에 대해 누차 설명하고 있지만, 대학 1학년 때 끝없는 두통과 함께 무슨 소린지 전혀 이해하지 못했던 철학 개론처럼 현상학 관련 내용은 몇 번씩 되읽어가며 노력했음에도 피부에 잘 와 닿지 않았고, 그를 기반으로 한 가케루의 수사는 어딘가 신비주의 또는 예지자의 그것처럼 느껴졌습니다.

현상학은 난해한 기존 철학과 달리 본질직관을 통해서만이 진실에 다가갈 수 있다고 여깁니다. 예를 들면, ()의 정의를 모르는 어린아이도 그게 원이라는 걸 본질직관을 통해 직감적으로 이해할 수 있으며 그것이 사물을 인식하는 올바른 방법이라는 것입니다. 가케루는 탐정은 사건을 논리적으로 추리하는 게 아니라 직관하는 것이라고 말하며 전통적이고 교과서적인 나디아의 추리 방법을 정면으로 반박합니다. 말하자면, 사건을 개별적인 요소로 분해한 다음 이론적으로 재구성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유기적인 전체로 보면서 그 안에서 지렛대에 해당하는 것을 찾아낸다는 것입니다.

정리한다고 했지만 역시 어렵고 난해합니다. 번역자도 가케루는 현상학을 이용하여 사건을 추리하고 철학적인 주장을 펴는데 여기에서 독자의 호불호가 갈린다.”고 설명합니다. 물론 가케루의 현상학적 추리 방식에 대해 모르는 척 넘어가더라도 연쇄살인을 풀어가는 과정은 흥미롭고 재미있게 읽힙니다.

 

다만, 후반부에서 드러난 범행 동기와 진범의 실체는 꽤 커다란 위화감을 자아냈습니다. 자세한 언급은 어렵지만 사건과는 전혀 무관해 보였던 외적 요소들이 중요한 범행 동기로 밝혀지는데, 제가 느낀 위화감의 실체는 가케루의 현상학적 추리를 타당하게 만들기 위해, 또 작가의 사상적-철학적 입장을 피력하기 위해 무리하게 이야기를 짜맞췄다는 느낌이었습니다. 결론을 위해 과정을 작위적으로 설정했다는 느낌이랄까요? “추리소설이지만 범죄를 그린다기 보다는 사상을 그리기 위해 쓰였다는 느낌이 드는 것도 사실이라는 번역자의 설명이 충분히 이해되는 대목이었습니다.

 

철학적인 문장들이 번거로운 분들은 좀 어려운 문장이 나온다 싶으면 과감하게 패스하고 사건 해결의 과정에만 집중하실 것을 권유합니다. 이 작품의 핵심이자 미덕이 가케루와 현상학에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모든 것을 이해하려다 보면 오히려 미스터리의 매력까지 놓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야부키 가케루 시리즈가운데 걸작으로 꼽힌다는 서머 아포칼립스’(1981)가 곧 출간된다는데 가케루의 현상학적 추리가 독자들의 흥미를 계속 이끌어낼 수 있을지 궁금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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