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코, 여신의 영원
시바타 요시키 지음, 박춘상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14년 8월
평점 :
절판


(약간 상세한 줄거리와 캐릭터 소개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성애소설과 경찰소설의 조합이라는 홍보 카피를 보면서

호기심과 함께 도대체 어떻게 두 코드를 버무렸을까, 무척 궁금함이 일었습니다.

주인공이 10년차 경부보인 무라카미 리코라는 여경이라는 소개에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경찰소설의 근간인 사건은 들어본 적도 없는 충격적인 내용이었고,

성애소설의 근간인 연애는 전통적인 남녀관계를 완전히 전복시킨 채 진행됐으며,

그 수위는 꽤 높은 편이라 읽는 내내 복잡한(?) 심경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 ● ●

 

남성에 의한 남성 윤간 장면이 담긴 비디오테이프 사건을 수사하던 신주쿠 서의 리코는

안도 아키히코와 다카스 요시히사가 이끄는 본청 5계와의 합동수사를 지시받곤

그들과 얽혔던 2년 전의 끔찍한 악몽을 떠올립니다.

뛰어난 본청 여경이었지만, 상사와의 불륜 스캔들에 이어, 동료들로부터 끔찍한 집단폭행을

당한 무라카미 리코는 창녀라는 비난까지 받은 끝에 신주쿠 서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그들과 다시 얼굴을 맞대야 하는 현실이 괴로웠지만,

비디오테이프 사건이 살인, 유괴, 협박 등 점점 심상치 않은 사건으로 발전하면서

리코는 어쩔 수 없이 그들과의 공조 수사를 진행합니다.

하지만 여전히 자신을 2년 전의 나약하고 순종적인 리코로 기억하는 그들을 지켜보며

리코는 그녀만의 방식 - 그들을 정복하고 강간하는 - 으로 복수를 다짐합니다.

 

한편, 피해자들의 신분조차 알 수 없어 미로를 헤매던 경찰은

수사에 참여했던 형사가 피살되는 지경에까지 이르지만

몇몇 결정적인 제보와 극적으로 나타난 피해자의 진술을 통해

범행동기와 범인들의 실체 파악에 급진전을 보입니다.

그러나 리코에게 큰 위기가 몇 차례 찾아오는데, 동료 형사 살해범으로 오인받기도 하고,

자신들의 실체에 접근한 리코를 능욕, 살해하려는 범인들에게 습격을 당하기도 합니다.

위기를 벗어난 리코는 결국 피해자들의 공통점을 찾아내고 해결의 실마리를 잡는데,

마지막에 이르러 그녀 앞에 나타난 범인은 전혀 예상치도 못한 인물이었습니다.

 

● ● ●

 

경찰소설로서의 면모로 볼 때, 출발점이 된 사건은 무척 충격적이지만,

수사의 진행, 진범 찾기의 과정만 놓고 보면 조금은 평면적인 이야기입니다.

물론 결정적인 계기는 주인공 리코의 추리에 의해 완성되지만,

정체된 수사를 급진전 시킨 것은 대부분 의외의 제보들이었고,

조금 이른 타이밍에 대부분의 독자가 진범을 예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작품의 미덕은 그 과정 속에 무라카미 리코라는 한 여자의 파격적인 이야기,

즉 그녀의 성애와 성장이라는 이질적인 코드들을 잘 버무려놓았다는 점입니다.

리코에게는 과거와 현재를 통틀어 네 명의 연인이 있고, 그 중 한 명은 여자입니다.

과거의 연인 중 한 명은 본청 상사이자 유부남이었지만, 스캔들이 터지자 비겁하게 도망쳤고,

또 한 명은 청혼까지 했던 본청 동료지만, 리코에게 평생 잊히지 않을 상처만 남겼습니다.

현재의 남자 연인은 거칠지만 귀엽고, 쿨한 관계를 유지하는 5살 연하인 동료 경찰입니다.

현재의 여자 연인 역시 동료 경찰이지만, 양성애자인 그녀는 리코에게 푸근한 의지처입니다.

 

이기적이고 남성우월주의자인 과거의 두 연인은 리코를 전혀 다른 여자로 성장시켰습니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 누군가와 결혼한다는 것을 완벽하게 부정하게 만들었고,

남자란 몸을 줘야 할상대가 아니라, 대등하게 쾌락을 나누는 파트너로 여기게 만들었으며,

심지어 자유로움과 편안함을 위해서라면 동성애까지 받아들이게 변화시켰습니다.

그보다 훨씬 앞선 유년시절, 리코는 고지식한 경찰이었던 아버지로부터

혹독한 육체적 훈련과 순종하는 여성성이라는 이중적인 가치관을 강요당하며 성장했습니다.

아울러 현재의 동성 연인인 마리의 남성관 역시 리코에게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마리에게 남자란 편리한 서바이벌 나이프 같은 존재다.

필요할 때 꺼내 필요한 부분만 쓴다. 필요 없을 때는 그냥 접어두면 그뿐.

그것이 위험한 흉기가 될 수도 있다는 걸 알면서도 가지고 논다.

몸을 섞으면 섞을수록 남자는 참 하찮은 것 같아.”

 

이런 변화와 성장을 이룬 그녀 앞에 2년 전의 악연들이 다시 나타났을 때,

리코는 또 한 단계 파격적인 행보를 걷기로 합니다.

과거의 연인들은 그들의 악행은 다 잊은 듯 또다시 리코의 몸과 마음을 탐합니다.

그리고 리코는 거짓말처럼, 조금은 이해가 안 될 정도로 그들을 맞이합니다.

하지만 거기엔 그들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리코만의 복수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지금의 리코는 그때의 리코를 경멸한다. 사랑한다는 뻔한 말에 휘둘려

남자의 성욕을 순순히 채워주는 편한 여자였던 자신이 진심으로 부끄러웠다.

2년 전의 내가 아냐. 그는 오늘 밤 내 소유물이 됐어. 나의 즐거움과 쾌락을 위해

그는 열심히 봉사해야 돼.” 리코는 웃고 싶어졌다. “나도 할 수 있지? 당신을 강간하는 것쯤!”

 

언뜻 쉽게 이해되지도, 공감하기도 어려운 심리입니다.

혼자만 살겠다고 자신을 버렸던, 또 끔찍한 기억만 남겼던 남자들과 다시 몸을 섞으면서

그를 통해 그들을 강간하고 정복하고 지배하겠다는 각오인데,

꽤 높은 수위의 에로틱한 묘사가 수반된 탓인지 중반까지는 뭐지?’라는 느낌이 강했습니다.

몸으로 남자를 받아들이는 그 순간, 그녀의 머릿속에 승리감으로 가득하다는 의미인데,

그럴 수도 있겠다싶으면서도 동시에 그럴 수 있을까?’라는 의문이 든 것도 사실입니다.

물론 후반부로 갈수록 점점 그녀의 선택에 대해 이해하게 됐고,

스스로 상처를 보듬고, 자신만의 삶을 찾아가는 그녀만의 방식에 약간은 동조할 수 있었지만,

왠지 리코가 자학하듯 자신을 극단으로 몰아세우는 것 같아 끝까지 마음이 착잡했습니다.

 

남성에게 정치적으로 성적으로 지배당하는 나약하고 갈대 같던 여성성을 버리고,

오히려 자신의 능력을 통해 그들을 지배하려는, 즉 남성을 지배하는 남성성을 획득함으로써

복수와 쾌락을 동시에 성취하려 했던 리코의 파격적인 이야기가 리코, 여신의 영원입니다.

만일 이 이야기가 한 페미니스트에 의한 단순하고 통쾌한 남자들에 대한 복수 이야기였다면

아마 재미있게 읽히긴 했어도, 딱히 기억에 남을 것이 없는 이야기가 됐을 것입니다.

독자에 따라 의견 차이가 많이 날 수도 있는 작품이지만,

어쨌든 성애소설과 경찰소설의 조합이라는 눈길을 끄는 홍보 카피는

제몫을 충분히 해냈다는 것이 저의 결론입니다.

일본에서 성모의 심연’, ‘월신의 얕은 꿈등 리코 시리즈가 꽤 좋은 성적을 냈다고 하는데,

이 작품이 호응을 얻어서 나머지 리코 시리즈도 읽어볼 기회를 얻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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