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적 시 읽기의 괴로움 - 사랑과 자유를 찾아가는 유쾌한 사유
강신주 지음 / 동녘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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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하나의 세계가 아니라 몇 백만의 세계, 인간의 눈동자와 지성과 거의 동수인 세계가 있고, 그것이 아침마다 깨어난다"(p.16)

 

 

 

 

<아치와 씨팍>은 적나라한 욕설과 폭력, 그리고 그로테스크함이 난무하는 성인용 애니메이션이었지만광기 어린 자본주의의 속성을 솜씨있게 반영한 수작(秀作)이기도 했다. 이 작품에서 가장 인상깊었던 것은 묘하게도 엑스트라급에 해당되는 보자기 갱단이 허겁지겁 하드를 먹는 장면이었는데, 이 모습은 마치 욕망과 물신주의에 마비된 현대인의 초상을 대변하는 듯했다. 이야기의 하드는 권력에의 종속, 중독적 탐닉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것을 너무 많이 먹으면 신체와 지능이 퇴화되는 부작용을 겪게 된다. 보자기 갱단은 하드에 중독돼 퇴화된 자들이다. 이들에게서는 더 이상 한 개인으로서의 특성을 찾아볼 수 없으며 오직 하드에 중독된 자로, 동일한 것을 추구하는 동일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보자기 갱단들이 아침에 깨어날 때에는 그저 단 하나의 세상, ‘하드의 세상이 시작될 뿐이다. 그렇다면 우리 개개인의 세계는 어떠할까? 이에 저자는 몇 백만 개의 세계가 아침마다 깨어난다는 프루스트의 문장과 대조해 잃어버린 자기만의 세계를 상기시킨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만의 세계를 잃어버리고 있습니다. 권력이나 자본 혹은 관습이 강요하는 공통된 색안경을 끼고 살아갑니다. 한마디로 말해 자기만의 제스처가 아니라 남의 제스처로 삶을 영위하고 있다는 겁니다.(p.16)

 

<철학적 시 읽기의 괴로움>은 그래서, 주체를 잃고 우매한 대중으로 한데 섞여버린 고귀한 개인의 가치를 불러들이라고 말한다. 권력이나 자본, 그리고 관습이라는 것에 저항해 자신이 느낀대로 올바른 목소리를 내라는 것이다. 책 속에 소개된 시인과 철학자들도 자기 고유의 목소리로 사회의 강요에 저항해 온 사람들이었다. 흐르는 물결에 쓸려가지 않고 그 자리에 꿋꿋하게 버틴다는 것은 힘겹고 괴로운 일, 철학적 시 읽기의 괴로움도 바로 여기에 있다. 하지만 시냇가의 물소리가 시원하고 아름다운 것은 작은 돌멩이 하나하나가 제자리를 지켜 존재의 소리를 내기 때문이니, 순리에 따른 아름다움이 이러하다면 우리도 돌멩이가 되어 봄직하다. 다만, 시인과 철학자들의 생각을 신봉하지 말고 그들을 통해 자신의 것을 발견하라는 것이 기억해야 할 저자의 뜻.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수영의 시를 만나면 우러르지 않을 수 없다. 사실 전작인 <철학적 시 읽기의 즐거움>편에서 나는 어떤 시 하나를 발견했는데, 그 시는 너무도 내 가슴을 울렸고 갑자기 콧등을 시큰하게 했으며 시인의 이름은 적혀있지 않았지만 그 시가 꼭 김수영의 시 같다는 느낌을 떠올리게 했다. 그런데 그 아래 저자의 설명을 읽어 보니 내 느낌대로 김수영의 시였다. 이처럼 누구의 시인지 알지 못해도, 그저 읽기만 해도 ''라는 사실을 독자가 직감할 수 있다는 것은 그가 자신만의 목소리를 울리는 발성법에 도통한 사람이라는 의미이다. 그래서 나는 이 책에서 저자가 김수영에 대해 좀 더 설명을 할애해 준 것이 너무도 기뻤고, 더불어 그의 맥을 이어갔던 신동엽 시인까지 소개해주어 한국의 근대시가 가지고 있었던 힘을 새삼 다시 보게 되었다. 만일 시와 철학을 통해 침묵으로 가라앉은 목소리의 열정을 틔워보고 싶다면 김수영신동엽의 시부터 찬찬히 음미해 보는 것도 좋을 듯 하다.

 

곧은 소리는 소리이다/곧은 소리는 곧은/소리를 부른다 - 김수영, <폭포>

 

자유를 위해서 비상하여본 일이 있는/사람이면 알지......어째서 자유에는/피의 냄새가 섞여 있는 가를.......혁명은/왜 고독해야 하는 것인가를 - 김수영, <푸른 하늘을>

 

일어서야지,/양말 신은 발톱 흉물 떨고 와/논밭 위에 세워논, 억지있으면/ 비벼 꺼야지,/열 번 부러져도 그 사랑/발은 다시 일으켜 세우기 위해 있는 것......쓰러진 폐허/함박눈도 쏟아지는데/어디서 나왔을까, 너는 또/뚜벅뚜벅 걸어오고 있다. 

- 신동엽, <>

 

이 책에서 신선했던 점은 여성들의 활약이 눈에 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소수에 해당하는 여성 시인들과 여성 철학자들을 예우하기 위함이 아니라 남성중심의 사회에서 우리 안에 억압되어 있는 여성성의 가치를 확인하고 철학이 가진 여성성을 통해 사회에 유용하게 적용하기 위함이라 생각한다. 특히 여성성, 박애, 포옹과 같은 주제는 남성철학자나 시인들을 통해서 느낄 수 없는 절박함과 짙은 감성이 담겨있다.

 

윗옷 모두 벗기운 채/맨살로 차가운 기계를 끌어안는다......누구에게나 있지만/여자의 것만 문제가 되어......세상의 아이들을 키운 비옥한 대자연의 구릉/다행히 내게도 두 개나 있어 좋았지만/오랜동안 진정나의 소유가 아니었다......맨살로 차가운 기계를 안고 서서/이 유방이 나의 것임을 뼈저리게 느낀다/맑은 달 속의 흑점을 찾아/축 늘어진 슬픈 유방을 촬영하며 

- 정희, <유방> (p.64-65)

 

문정희 시인이 가진 생각을 이리가레이의 철학으로 말한다면 '남성과 평등해져가고 있는 존재론적 차이의 회복'이다. 기존의 페미니즘이라고 하면 여성의 권리를 주장하고 여성도 남성과 동등한 능력을 발휘할 기회를 가져야 한다는 취지로 알려져 있지만 이리가레이는 이것이 생명의 중성화에 불과할 뿐, 진정한 여성성을 주장하는 것과는 다르다고 말해준다. 뿐만 아니라 여성적 감수성을 토대로 한 사회가 되지 않는다면 인류에게는 희망이 없다고 확신했다. 여기서 여성적 감수성을 토대로 한 사회란 여성우월주의나 있는 그대로의 여성성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는 여성이 가진 이물질을 포용하는 힘, 즉 타자를 이해하고 받아들여 공존하는 삶의 자세를 말하는 것이다. 마치 어머니가 타자인(생물학적으로는 이물질인) 아기를 태내에 품고 10달을 인내하는 것처럼.

 

철학적 시 읽기의 소주제는 사랑을 비롯, , 여성, 타자, 미디어, 자유, 역사, 대중문화 등과 같은 삶과 현실의 키워드들이다. 이 중에서도 사랑과 타자는 다양한 키워드 가운데 꾸준히 등장하면서 존재와 관계의 의미를 다양한 각도에서 바라보게 하는데, 이성복의 시와 라캉의 무의식을 통한 가부장적 가족질서의 극복, 한용운의 시와 바르트의 사랑(일반적인 사랑)을 통한 타자에 대한 감각 생성, 고정희의 시와 베이유의 해방신학를 통한 박애적 사랑과 타자와의 연대, 그리고 김행숙과 바흐친의 덮어주기를 통한 억압에서 일치로 변하는 타자 등이 나의 내면으로부터 시작해 긍정적인 관계로 접근해가는 사유의 단초들이 되어주고 있다. 한편, , 미디어, 자유, 역사, 대중문화와 같은 소주제에서는 세상이 개인을 억압하는 방식을 간파하고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을 예리하게 해주며 시와 철학에 나타난 저항정신을 통해 오늘날 우리가 가져야 할 현명한 자세를 다시금 돌이켜보게 한다.

 

<철학적 시 읽기의 괴로움>을 전체적으로 관통하는 것은 포용과 저항, 보다 포괄적인 단어로 표현하면 사랑과 분노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들은 광란의 21세기에서 우리가 인간답게 살아가기 위해 추구해야 할 명제이기도 하다. 저자도 꾸준히 언급해 왔지만 철학에서 타자를 이해하고 타자와의 관계를 배워가는 것은 사랑을 실천하기 위함이다. 또한 분노를 추구한다고 하면 의아하게 들릴지는 모르겠지만 이것은 스테판 에셀의 <분노하라>와 맥을 같이 한다고 말할 수 있다. , 힘을 가진 자들에 대해, 그들의 부당함에 대해 정당한 분노의 목소리를 터뜨려야 한다는 것이다. 앞서간 시인과 철학자들이 사랑과 분노에 대한 발성법을 통해 자신만의 목소리를 만들어갔듯, 우리도 이 책을 악보 삼아 자신만의 발성법을 연습해 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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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작의 뒷모습 - 옥션에서 비엔날레까지 7개 현장에서 만난 현대미술의 은밀한 삶
세라 손튼 지음, 이대형.배수희 옮김 / 세미콜론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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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읽어본 바, 현대미술의 코드를 안내하는 책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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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작의 뒷모습 - 옥션에서 비엔날레까지 7개 현장에서 만난 현대미술의 은밀한 삶
세라 손튼 지음, 이대형.배수희 옮김 / 세미콜론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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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애하는 윌렘 드 쿠닝씨께

드 쿠닝씨, 안녕하세요? 저는 오래전부터 당신의 그림을 눈여겨 보았던 사람입니다. 제가 얼마 전 세라 손튼의 <걸작의 뒷모습>이라는 책을 읽었는데요, 거기 보니까 당신의 드로잉이 리먼 브라더스의 주식보다 더 안전한 자신이라는 놀라운 구절이 있더군요. 저는 미술작품을 살 만큼 큰 돈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약 10년전 구입한 당신의 작품집을 가지고 있어요. 혹시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그 책의 속지에 사인을 부탁드려도 될까요? 친필 사인본이라면 당신의 드로잉만은 못해도 미래에 상당히 가치있는 고서적이 되지 않을까 싶네요. 도움을 주실 수 있을지, 답변 기다리겠습니다.

물론 이런 이메일은 보내지도 않을 것이고 드 쿠닝 또한 읽어 보지도 않을 것이다(스펨메일함으로 클릭!). 하지만 요즘처럼 경제불안이 계속되고 물가가 헬륨 풍선처럼 두둥실 솟아 내려앉을 줄 모르는 상황이라면 이런 엉뚱한 상상도 해봄직 하다. 게다가 가혹한 경제상황에도 불구하고 미술계는 태풍의 눈처럼 조용하고 심지어 화기애애해 보이기까지 하니, 이곳은 과연 경제를 떠난 무릉도원인가 싶기도 했다.

저자에 따르면 2007년 크리스티 옥션은 경제침체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백만불이 넘는 작품을 793점이나 팔았다고 한다. 반대로 경기가 호조되어 투자할 곳이 많아지면 미술계는 오히려 한산해진다. 이러한 동향은 불투명성과 다양성을 특징으로 하는 미술계를 일반화하기에 아직 부족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제 미술 작품도 자산가치에 일조하는 '상품'으로 간주되고 있다는 점이다. 바야흐로 이젠 미술계의 신은 비너스가 아니라 마이더스인 것 같다. 아니, 어쩌면 비너스는 마이더스에게 고용되 월급을 받는지도 모르겠다.

미술계에서 미적인 이야기만 빼놓고 그 나머지를 쫓아가는 이 여행은 5개국 6도시를 횡단하며 7가지의 이야기들을 채집한다. 모두 각계의 전문가들과 직접 만나고 대화한 내용들을 담고 있어 무척 생생하고 현장감이 있다. 정작 7일이라는 짧은 일정동안 장거리 여행을 소화한 저자는 의외로 여유있었다고 말하지만 책을 읽는 독자는 가뜩이나 생소한 미술계의 뒷 이야기를 듣는데다 미술을 대하는 다양한 시선들이 등장하고 있어 긴장감을 놓을 수 없다. 그리고 알게 된다. 미술계에서 미적인 부분은 빙산의 일각이었다는 것을. 이것은 비록 예술로서의 미술에 대한 환상을 조금은 깨어놓긴 하지만 미술계를 움직이는 역동성의 모습이기에 관람객으로서 간과할 수 없는 부분일 것이다.

그럼, 지금부터 5개국 6도시 7가지 이야기를 짤막하게 소개한다..........옥션 : 가장 먼저 방문한 곳은 미국 뉴욕의 크리스티 옥션이다. 가장 상업성이 짙은 미술계의 단면이며 미적인 안목 이외의 실력을 가진 대단한 프로들이 활약하는 곳이다. 이곳에서 회화, 조각, 사진 작품들은 재산, 자산, 품목으로 묘사된다. 좋은 바스키아 작품은 제작년도가 1982년인지 1983년인지 혹은 그림에 머리, 왕관, 빨간색이 들어가 있는가에 의해 결정된다. 좀 희안한 곳이 아닌가? 그러나 이들이 새로운 아티스트들과 그들이 작품을 보호하고 전문성에 의해 작품의 가치를 알아보는 주인을 찾아주는 일에는 매우 공정한 모습을 보인다. 그저 비싸게 팔고 톱뉴스를 만들어 내는데 혈안되어 있는 사람들은 아닌 것이다..........스튜디오 : 현대미술의 상업적인 측면들만 다룰 줄 알았는데 갑자기 LA 칼아츠(California Institute of Arts)의 비평수업이 이어져 잠시 놀랐다. 옥션에서처럼 명품에 스타일리시한 패션으로 휘감은 프로들은 간데 없고 헐렁한 티셔츠에 청바지 차림으로 수업 도중 샌드위치나 쥬스를 마시거나 토론에 참여하는 학생들, 자유로운 분위기의 수업풍경을 엿볼 수 있다. 비평수업을 소개하는 의도는 미술 비즈니스의 기본 언어를 배우는 곳을 보여주기 위함이었는데, 크릿(Crits,비평)이 실제적으로 미술 비즈니스를 염두에 두고 진행되는가에는 개인적으로 동의하기 힘들었다. 물론, 이 학생들 중 미술계의 좁은 문을 통과해 주목받는 스타 아티스트가 되는 사람은 극히 일부이며 나머지는 비싼 학비를 갚기 위해 뼈빠지게 고생하고 있다는 현실에는 공감하지만..........아트페어 : 다시 옥션과 유사한 긴박감이 흐르는 장소이다. 그러나 장소는 저 멀리 스위스로 이동해 왔다. 억만장자, 백만장자들이 인파를 이루고 문일 열리기만을 기다리는 구입경쟁의 장면. 바젤 공항보다 더 엄격한 통제. UN처럼 비상업적인 국제회의의 분위기를 가지고 있지만 사실상 엄청난 규모의 돈과 상품(작품)이 오가는 미술상업의 현장이다. 여기서는 신진 아티스트들의 작품이 꽤나 각광을 받는다. "40개 정도, 좋은 작품을 건진 것 같아요." 세상에, 한꺼번에 미술작품들을 40점이나 사다니. 이곳에서 작품을 구입하는 딜러들의 빠른 안목과 솜씨가 정말 놀라웠다. 아트페어에서의 교훈은? 막판 세일을 기다리지 마라..........미술 상 : 비행기를 타고 날아 런던 테이트 미술관으로 이동한다. 큐레이터들의 지적인 냄새가 물씬 풍겨오고 최신 미술계 기사를 장식하는 친숙한 이름들이 종종 눈에 뜨인다. 권위있는 터너상 답게 일정과 선정과정은 엄격하지만 결과적으로 선정된 작품은 경악을 자아낼 만큼 도발적이고 자유분방하다. 그러나 지금까지 이 상을 받은 여성 아티스트는 딱 2명이라는 점에서는 여타 남성위주의 미술 상과 다를 바 없는 결과이다. 또한 이 상의 후보작의 경우 작품값의 1/3이상, 수상작은 2배 이상 상승한다니, 미술 상의 권위가 미술 비즈니스에 미치는 영향 또한 대단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공정한 심사가 필요한데, 이에 관한 고민은 책 속에 자세히 나와 있다..........미술 잡지 : 쾌활하고 입심좋은 직원들이 정신없이 일에 몰두하고 있는 현장은 다시 미국 뉴욕에 위치한 잡지사 아트포럼이다. 전화소리도 간간히 들릴 듯 분주하다. 아트포럼은 우리나라의 월간미술 정도에 해당하는 잡지인데, 세계적으로도 널리 잘 알려져 있다. 적은 고료에도 불구하고 글을 기고하는 학자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수상 한 방으로 큰 돈을 버는 아티스트와 무척 대조되는 것을 느낄 수 있다(물론 이것은 무명 학자와 유명 아티스트를 비교한 것이 아니다). 그래서일까? 사람들은 미술잡지의 기획기사 같은 것이 난해하다고 불평하는 경우가 빈번하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사의 '진정성'을 추구하는 대표 소유주 토니 코너의 의지와 '한점의 오류도 없는' 기사에 집착하는 편집국장 제프 깁슨 같은 인물 덕에 오늘도 아트포럼은 그 명성을 유지하고 있다..........작가 스튜디오 : 이번에는 정말 멀리 갔다. 무라카미 다카시라는 일본 아티스트의 작업실이 있는 도쿄까지 갔으니까 말이다. 무라카미는 <오벌 붓다>라는 작품으로 유명한데 여기에 쏟아 부은 주물은 물론이고 제작비가 엄청나다고 한다. 일반적으로 아티스트의 작업실이라고 하면 잡동사니(주로 재료들)나 물감들이 너저분하게 널려 있고 조용하고 소박할 것이라 생각하지만 무라카미의 작업실은 고용된 직원들이 일하는 회사같다. 기본적으로는 예술작품을 생산하지만 그 외에 디자인이나 패션 브랜드에 관련된 일도 한다. 알고 보니 작업실이 일본에 세 군데나 있다. 좀 기묘한 분위기의 작업실이었다. 이런 작업실이 미래 우리 미술가들에게도 트렌드(?)가 될까? 순수 예술에만 집착하는 것이 아니라 대중문화, 디자인 산업 전반에 관여하는 기업같은 작업실 말이다..........비엔날레 : 비엔날레는 유명 미술관에서 개최하긴 하지만 진정한 비엔날레는 도시가 주체가 되어 국제적 차원에서 열리는 행사를 의미한다. 미술계의 비엔날레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비엔날레는 바로 베니스 국제 비엔날레이다. 여기에는 세계 각국의 아티스트들이 참여하며 국가별 부스로 운영된다. 사실 비엔날레에서는 예상했던 대로 성대한 파티와 개성있는 각국의 전시관으로 붐벼 가장 화려했음에도 큰 감흥은 없었다. 하지만 미술관과 비엔날레의 경계가 갈수록 모호해지고 있는 상황에 대해 저명한 큐레이터가 던진 한 말씀은 기억에 남는다. "비에날레는 원래 앞을 향해 나아가야 해요. 이는 이미 합의된 것, 검증된 것을 되풀이할 게 아니라 불안정한 것을 제도권 내에 가져오는 것을 의미해요."

긴 여행이 끝났다. 아니, 짧은 여행인데 정말 많은 이야기가 있었다. 걸작의 '뒷모습'이라고 하기에 상업주의에 물든 미술계를 속속들이 파헤칠 것 같았지만 의외로 그들이 미술계를 뒷받침하고 있는 신념이나 직업적 윤리에 대해 더 많은 것을 배웠다. 그리고 미적인 이야기는 없었지만 모두 미적 가치에 대해서는 누구보다도 확고한 견해와 안목를 가지고 있었다. 그들의 이야기에 따르면 이제 '명화'라고 불리는 작품들은 더이상 구매할 것이 없다고 한다. 그래서 가치있는 현대 미술 작품을 발굴하고 이슈화시키는 것이 그들에게 남겨진 미션이 될 수 있다. 따라서 이제는 미술작품의 구매를 최상류층이나 향유할 수 있는 귀족적 취향의 전유물로 볼 것이 아니라 좋은 작품들의 보급과 작품대 대중과의 소통이라는 측면에서 다시 조명해 나가야 할 것이다. 이 작업에 관람객인 대중들의 관심이 모아질 때 마이더스도 비너스를 착취하는 부당 권력이 아니라 문화적 풍요로움을 관장하는 훌륭한 일꾼이 되리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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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마감] 9기 신간평가단 마지막 도서를 발송했습니다.

어느덧 신간평가단 9기 활동이 끝나고 또 이렇게 마감 페이퍼를 씁니다. 정말 세월이 어찌 흐르는지 6개월이 순식간에 사라졌네요. 그동안 매달 5권씩 추천을 했고, 제 경우 12권 중 8권이나 원했던 책을 읽어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꼭 추천한 책이 아니더라도 대체적으로 맘에 들어 더이상 바랄 것이 없었습니다.



<차이콥스키, 그 삶과 음악>
가장 기억에 남는 책
은 <차이콥스키, 그 삶과 음악>입니다. 음악에 관한 책들은 상대적으로 적게 출간되고 간혹 마주치게 되더라도 클래식 입문서나 예술기행과 병행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 책은 한 작곡가에 집중해서 좀 더 음악을 깊이 이해할 수 있도록 정말 잘 만들었더군요. 음악을 전공하신 분들께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일반 대중인 저로서는 음악에 대해 이처럼 구체적이고 친절하게 이끌어 주는 책은 처음 봅니다. 이건 이 책을 구상한 기획력이라 생각되는데요, 한 사람으로서의 차이콥스키, 한 음악가로서의 차이콥스키를 잘 보여주었고, 그의 음악적 궤적과 해석, 그리고 관련된 지식까지 두루두루 잘 갖춰 놓았습니다. 대체적으로 자신이 추천한 책이 아닌 경우 받아보고 감탄까지 하게 되는 경우는 드문데요, 이 책은 선례를 깨고 저의 사랑을 듬뿍 받은 책이랍니다. 한창 여름에 읽은 책이라 시원하게 냉방된 방에서 음악 틀고, 아이스크림까지 먹으며 무척 즐겁게 읽은 책이기도 합니다.




내맘대로 베스트는 정말 추려내기 힘들어요. 다들 좋은 책이었고, 감흥도 비슷비슷해서 순위 매기기가  참 그렇네요. 그래서 그냥 가나다 순으로 적어봅니다. <차이콥스키, 그 삶과 음악>도 베스트에 들긴 하지만 위에 기억에 남는 책에 별도로 택했기에 더 많은 책을 꼽고 싶어 여기서는 뺐어요.

<민화, 무명 화가들의 반란>
민화에 대해 체계적으로 잘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그냥 우리의 대표 민화를 소개하고 감상의 포인트나 관련 지식을 서술한 것이 아니라 다른 나라의 민화나 우리나라 궁중화, 문인화와 비교해 가면서 설명해 준 것이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민화속의 사람이나 동물의 모습이 너무 순진하고 재밌어서 막 웃으며 그림을 보았던 기억도 나네요.


<사유속의 영화>
이 책은 처음 접하는 영화 이론에 대한 책이라 두 번 하고도 포스트잇을 찝어 놓은 것까지 합해 반쯤 더 읽었습니다. 가장 시간을 많이 들여 읽은 책이지요. 100% 다 이해했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영화에서 생명을 끄집어 내고 세포를 끊임없이 재생시켜 가는 과정을 지켜보는 것이 참 즐거웠습니다.




<사진 철학의 풍경들>
마음이 참 고요해지는 책이었습니다. 암실에 들어가 어둠 속에서 필름을 감는 느낌, 더듬더듬 거리는 느낌인데 매우 아늑하더군요. 덕분에 사진함에 대해 가장 기본적인 것들을 다시 돌이켜 볼 수 있어 좋았습니다. 분명 수업시간에 들었던 이야기들이 적지 않은데(물론 이것은 교양과목으로 들은 것입니다), 이렇게 철학과 함께 엮어 놓으니 문득 새롭고 더 묵직하게 들립니다.



<지혜로 지은 집, 한국 건축>
한국건축에 대한 책들은 주로 한옥이나 궁궐, 사찰에 대한 책인데 전공서적 아니면 지어지는 과정이나 세부에 대해 언급하는 경우는 드뭅니다. 물론 이 책도 거의 전공서적에 가까운 내용이고 구성 또한 그렇습니다. 하지만 과학적인 축조방식에 대해 심도있게 설명해 주어서 정말 새로운 사실들을 많이 알게 되었네요. 조금만 더 대중적으로 다가갈 수 있게 엮었더라면 많은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었을 것 같습니다.



<진중권의 서양미술사:모더니즘편>
현대미술의 한계에 대해 배운 적은 있지만 이렇게 그 한계로부터 출발해 역으로 습격한 책은 처음입니다. 미학의 눈으로 보았다지만 의외로 작가나 작품, 역사적 배경이 꼼꼼하게 설명되어 있어 매우 드라마틱한 소설을 읽은 것 같은 느낌까지 들었습니다(그렇다고 미학적인 내용이 생각보다 덜했다는 뜻은 아닙니다). 마지막에 나가는 글에서 키치에 대한 운을 띄웠고 다음번에는 동시대 미술을 다룰 예정이라니, 다음 책도 기대가 됩니다.




이상, 신간평가단 마지막 페이퍼를 마치구요, 그동안 함께 할 수 있어 정말 즐거웠습니다. 다만, 아쉬운 점이 있다면 제가 마감 날짜를 잘 못 지켰다는점...ㅠ.ㅠ 마지막에는 꼭 지키리라 안간힘을 썼는데 또 주말을 빌고 있네요.

모두 수고 많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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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명화가들의 반란, 민화 정병모 교수의 민화읽기 1
정병모 지음 / 다할미디어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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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론, 책이란게 손보다는 발로 완성된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옛날 책이지만 이중환의 <택리지>를 볼 때가 그랬고, 그 맥을 이은 신정일의 <신 택리지>에서도 그랬으며, 널리 알려진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이렇게 몇 십년을, 혹은 평생을 바쳐가며 발로 찾고, 경험하고, 채집해 온 이야기들에는 지력과 상상력으로만은 엮어낼 수 없는 특별한 힘이 있다. 고매한 것으로 치면 영-혼-육의 순으로 나열된다는데, 이런 책에서 만큼은 육의 지극함이 영의 위치를 뛰어넘고도 남음이 있다. 

<무명화가들의 반란, 민화>도 발을 통해 완성된 책이다. 저자는 지난 10여년간 우리 민화가 있는 곳이라면 어디라도 주저않고 발길을 재촉했으며 국내는 물론 해외 각지에 흩어져 있는 민화들을 모아 무명화가들의 얼을 이 책에 담았다. 일반적으로 민화는 평범한 사람들이 그린 격조 낮은 속화라고 알려져 있고 대표적인 작품 몇 점 외에는 접할 기회가 흔치 않지만 실상 옛 시대에는 그림 수요의 90%를 담당할 만큼 제작이 빈번했으며 현재 남아있는 작품들도 예상 밖으로 다양하고 수량도 많았다. 이처럼 그 시대의 대중문화를 담당했던 민화가 다시금 주목을 받는 까닭은 민화가 가진 상상력과 추상성의 힘 때문이다. 현대미술에 필적할 만큼 대담한 추상성과 자유분방한 상상력을 펼치는 민화는 오늘날의 관점에서 그 가치가 더욱 빛을 발하며, 해외에서는 벌써 여러 차례 민화 전시회를 열기도 했다. 그동안 '격식', '품위', '고급'이라는 잣대로 폄하되었던 무명화가들의 설움이 드디어 위안을 얻고 진가를 인정받기 시작한 것이다.

궁중화나 문인화에 비해 민화가 가진 특성은 소박하고, 단순하고, 평면적이라는 점이다. 그런데 이것은 우리 민화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전반적인 민화가 갖는 특성이며, 우리 민화의 경우 보다 고요하고 내적인 충실성을 갖춘 것이 두드러진다. 같은 모란이라 할지라도 우리 민화 속의 모란은 단아하고 고요한 자태를 가지고 있으며 향기 없는 모란 곁에 나비 한 쌍을 하늘거리게 하는 상상력과 수석의 깔끔한 기하학적 패턴이 돗보인다. 반면 우리나라 궁중화 속의 모란은 만개의 절정에 달해있는 모습이고 수석도 패턴보다는 있는 그대로의 윤곽을 묘사했다. 또한 가급적 화려하게 장식하기 위해 여백없이 화면을 가득 메우고, 자연의 순리에 따라 상상의 나비를 불러 오는 일은 없었다. 마지막으로 중국 민화의 모란을 보면 민화로서의 순진함이나 상상력은 돗보이지만 우리 민화의 고요함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이며 강렬한 색채와 패턴에 보다 집중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물론 우리나라의 민화도 장식적이고 패턴에 집중된 작품들이 있지만 색채의 활용이나 사물을 바라보는 시각에서는 확연한 차이가 있음이 전달되 온다. 



민화를 주제별로 구분하면 책거리, 문자도, 까치와 호랑이, 용, 십장생도 등으로 나눌 수 있다. 이 중 일반적으로 친근하고 익숙한 것은 책거리, 그리고 까치와 호랑이 정도를 들 수 있겠는데, 너무나 다채로운 작품들을 감상하다 보면 그동안 익숙하다 느꼈던 책거리, 까치와 호랑이라도 마냥 새롭기만 하다. 우리나라의 모든 까치와 모든 호랑이를 모아놓은 듯 갖은 표정과 몸짓을 취하고 있는 까치와 호랑이도 인상깊었지만 가장 흥미롭고 변화의 폭이 넓었던 것은 책거리였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며 '양반들의 전유물인 책거리 그림이 어째서 민화일까?'라는 의문이 문득 떠올랐는데, 이 책은 친절하게도 질문의 실마리가 될 상세한 설명을 아끼지 않는다. 양반도 아닌 민화 화가들이 책이 잔뜩 쌓여있는 책거리를 그리게 된 까닭은 일차적으로 주문에 의해서였다. 사실 책거리는 궁중에서 학문을 장려하기 위해 제작된 적도 있으며, 양반집에서는 기복(과거 급제, 건강 등)과 장식을 위해 선호하기도 했다. 그런데 이러한 책거리에 묘한 장난기가 섞이며 풍자와 해학이 가해져 책거리는 사랑받는 민화의 주제로 거듭나게 된 것이다. 특히 책거리들 사이에 살포시 얹혀있는 여인의 옷은 얼핏보면 별 것 아닌 것 같아 보이지만 전후 상황을 떠올려 본다면 상당히 과감하고 해학적인 그림임에 틀림이 없다(대체 선비는 먹을 갈다 말고 여인과 뭘 하고 있는 것일까? 은근한 에로티시즘의 극치이다). 현재 외국인들에게 가장 사랑받는 민화는 책과 장식물이 럭셔리하게 가득 채워진 책거리 민화라는데, 그들이 수집하고자 하는 품위있는 책거리보다는 이 묘하기 짝이 없는 상상적인 책거리가 훨씬 특별하게 다가온다.



책에 실린 민화들을 감상하다 보면 혹시 민화는 당시 만화가 아니었을까 싶을 정도로 묘사에 독특한 점이 있다. 어떤 그림은 후세의 누군가가 민화에다 만화로 낙서해 놓은 것같은 착각이 들 정도이다. 인물들의 형태나 눈맵시에서는 현대의 만화에서 나타나는 풍부한 감정이 돗보이고, 스르르 사라질 듯한 용은 애니메이션의 한 장면을 보는 듯 상상력이 넘쳐난다(앨리스의 체셔 고양이 같지 않은가!). 또한 호랑이 그림은 부숭부숭한 털만 가지런히 정리한다면 박수동의 고인돌 만화에 삽입해도 별로 무리가 없을 듯하다. 이처럼 그림의 단순화에 있어 파격적이고 예측불가했던 그림이 민화라니, 정말 놀랍기만 하다.



우리 민화가 주목을 받게 되면서 국내외의 많은 미술연구가들과 미술가들이 민화에 관한 찬사의 정의를 내려왔었다. '평범한 사람들의 비범한 예술', '자연의 꿈', '추상적 환상'. 어느 하나 우리 민화를 얘기하는데 손색없는 아름다운 표현들이다. 그런데 민화 전문가 김철순은 민화가 '누나의 자수'와 같다는 신선한 정의를 내리고 있어 그 이유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민화는 현재, 현세의 아름답고 환상적인 꿈으로 보았다. 여기서의 꿈은 이룰 수 없는, 바랄 수 없는 것에 걸어보는 기대가 아니다. 어린이들이 누나의 자수를 들여다보듯 이 세상을 아름답게 본 어른들의 꿈이 바로 한국 민화의 꿈이었다. 그들의 인생과 자연 자체가 큰 꿈이고 예술이 바로 꿈이라고 믿고 있어서 사람과 인생 자체를 아름다운 꿈으로 표현했다."(p.26)

참 신기한 일이다. 비록 민화를 그린 화가가 무명이라 할지라도 대부분이 남자였음에는 틀림이 없는데 어째서 '누나의 자수'와 같은 여성적인 물건과 비교했을까? 이에 대해 저자는 장식용이었던 민화가 갖는 평면적 패턴을 들어 설명하는데, 민화 느낌은 형태의 단순화와 패턴화를 추구할 수 밖에 없었던 자수의 특성과 유사하다고 한다. 하지만 이러한 학문적 설명에도 불구하고 김철순의 설명에는 그 이상의 것이 있다. 바로 삶과 꿈과 예술이 잇닿는 아름다운 경지이다. 이것은 어떤 한계를 초월하여 그림에서 금시조가 날아오르는 득도(得道)와는 또 다른 차원이다. 춤으로 치면 흥겨운 몸짓 하나가 악사들의 악기에 소리를 오르게 하고, 한 사람 두 사람 모여들어 마침내는 커다란 무리가 공감하는 경지. 그 자유롭고도 강렬한 미의 본능이 바로 민화의 힘이자 민중의 힘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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