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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과 함께 읽는 잃어버린 시절을 찾아서
에릭 카펠리스 엮음, 이형식 옮김 / 까치 / 2008년 12월
평점 :
품절
마르셀 프루스트 7부(한글 번역 11권, 펭귄판 영어번역본은 6권) 시리즈 소설은 계속 동경의 대상이다. 프랑스어로 된 쉽고 짧은 글들은 읽을 수 있어 한 번쯤 번역되지 않은 글을 봐야지 하고 있지만 작심하고 그 불어 원서를 보기란 멀어 보인다. 대안으로 한글번역과 영문 번역을 뒤적여 왔다. 시간을 들이면 단락만의 의미는 어렵지 않다(프루스트가 의도한 모든 상세함을 음미하지는 않지만 글의 전개에 필요한 요소는 충분히 알아 볼 수 있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한글번역과 영문번역 모두 이런 요소는 만족시킨다. 그정도 읽어내면 그 다음이 문제다. 이때 프루스트의 글을 해석하고 주석하고 비평한 쟁쟁한 사람들의 도움을 받을 수 있지만, 그런 사람들은 빈틈없이 자신의 글쓰기 인생을 살아가기 때문에 많은 도움을 받기 어렵다.
보통 여기서 많이 손을 놓는 듯 보인다(실제로 프루스트의 책을 읽은 내 주변 사람들의 입에서 그 너머 내용은 잘 듣지 못했다). 그런데 내 경우는 본래 참을성은 좀 있는 편이지만 하여튼 손을 놓을 생각이 계속 안들었다. 이 근사하고 예쁜 그림책이 나왔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 한번 시도해 볼때가 됐구나하는 동기부여가 생겼다. 혹시 이 책이 그 책들을 읽는데 큰 도움이 되지 않을까 즐거운 상상을 하면서 주문버튼을 눌렀다.
그림책은 거의 내 취향이었다. 양장본에 한장한장 빠닥빠닥한 종이질에 표지 그림도 훌륭하고 이 겉표지를 들춰보면 아무 글자 없는 흰색 앞뒤커버가 중간에만 까만 색으로 제목을 박아넣고. 책 어디를 펼처도 한페이지는 그림 한페이지는 소설글귀--원 소설에 나오는 글자의 홍수에 비하면 동네산책같은 구성에 저절로 콧노래가 나온다.
앞의 쟁쟁한 전문가들에 비하면 본문 해독에 도움을 주는 그림들이지만 그래도 단락 읽기를 넘어서는데는 크게 도움이 되진 않는 거 같다. 그림이 상징으로 작용했거나 큰 흐름을 설명했다기보다 프루스트의 언어 중 그림을 언급한 부분을 모아 놓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림의 가치가 제각각이다. 그림을 통해 저자의 미적인 탐구를 일부 시각적으로 확인할 수 있지만 아니 어쩌면 어떤 그림은 큰 역할을 했겠지만 아무튼 모르면 모르는데로 그 그림은 이러리라하는 짐작으로 작가의 의도를 예측하는 감상법도 큰 흉은 되지 않으리라 생각한다. 물론 그런 예측 후에 확인작업이 병행되면 바람직하겠지만, 다른 문화권에서 다른 시각적인 사유를 하는 독자에게는 한계이면서 동시에 좀 더 색다른 해석을 가질 수 있는 영역으로 보인다. 말하자면 그림들은 지독히 민속적인 어휘다.
7부 시리즈를 시도하기위해서는 결국 원점으로 되돌아 가야 한다. 단락을 읽는 수동적인 독자를 벗어나서 단락을 쓰는 저자를 상상하는 적극적인 독자로 출발해야 한다.
몇 가지 전략은 있다. 시리즈 전 범위에서 접근해보도록 한다. 7부를 관통하는 접근법을 찾아 봐야 한다. 상투적이지만 프루스트는 미의 수집가였다. 이걸 나침반으로 삼아 각 제목을 시작으로 음미해볼 필요가 있다.
덧붙여서 얼마전 경향신문 책 소개란에 스노비즘 소책자가 언급되었다. 우리말 번역어인 속물이 무식하고 욕심많은 부정적인 뉘앙스를 주는데 비하여 프랑스어 스노비즘은 다소 달랐다--부정적이지 않으면서 지적인 허영심을 향하는 사람들.
저 속물이 여기 그림을 바라보는 시선을 그림으로 확인하면서 그런 민속적인 어휘를 바라보는 평범한 사람들의 시선을, 글자로 이루어진 어휘를 음미하는 과정과 달리, 함께 엮어넣은 그림을 감상할 수 있음이 좋다. 사진기 노출계에 맺힌 사진이 아니라 그 시대사람이 뇌안에서 재구성한 일상이라 즐겁다. 그럴만한 그림을 그만큼이나 끌어왔다는게 재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