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을 다루는 것과 언어를 다루는 것은 너무나 넓은 범위일 수 밖에 없다. 하지만 마음에서 언어가 어떻게 자리잡았을까하는 궁금증에 대답을 잘 시작할 수 있는 방법 중 하나가, 언어의 지칭이론을 둘러싼 논의일 것이다. 언어의 지칭이론은 언어의 의미론 방식 중 하나인데, 지칭대상과 지칭어 사이나 여러 관계를 통해 언어의 지칭이 얼마만큼 어떤 '의미'를 가지는 지를 설명한다. 이 지점에서 그 '의미'에 상관없이 언어의 지칭성은, 마음과 대비되어 보인다. 마음에 대한 탐구의 역사는 데카르트의 심신이원론부터도 한참이지만, 마음 특유의 주관성이 일으키는 여러 어려움때문에, 앞의 언어의 지칭성과는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접근해야 했다. 마음은 언어에서처럼 지칭할수 있는 직접적인 수단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하나의 심적상태를 지칭할 수단이 쉽지 않은 것이다.
그 이름도 유명한 행동주의와 기능주의는, 그런 비지칭적인 마음의 성질때문에 등장하고, 그 명맥이 계속 이어져 온것 같다. 김재권의 <심리철학>에서 처음 행동주의와 기능주의를 접했을때는, 흔히 저자의 본격적인 주장에 앞서 과거의 유물을 간략히 다루는 줄 알았다가, 지칭이론에 관한 책을 보다가 단순한 논의들이 아니구나 싶었다. 이병덕의 <표상의 언어에서 추론의 언어로>은, 언어표현의미론의 두 방식을 대비하여 설명하는데, 지칭이론을 대표적인 상향식(bottom up)으로, 벽돌쌓기로 비유한다. 확실한 벽돌들을 생성해 확고한 의미론을 만드는 방식이다.
행동주의는 탄생배경에서부터 마음의 주관성을 배격함을 기치로 일어났다. 주관적인 부분을 배제하고 외부로 드러난 행위만가지고 마음을 다루는 방식이다. 시작은 이렇지만, 관련된 논의가 진전되면서, 그렇게 단순하게만 볼 관점은 아니게 된다. Gilbert Ryle <The Concept of Mind>, Daniel Dennett <Consciousness explained> 처럼, 처음 보면(조금은 달라지지만 몇번봐도) 전체를 관통하는 주장없이, 그때그때 대응만을 모아놓아, 순간순간 반짝임은 보이지만, 조금은 산만해 보이는 책들이, 행동주의자들의 방식이다. 마음의 비지칭성을 떠올리면, 행동주의도 어느정도 설득력을 갖춘 입장이라는 점을 인정할 수 밖에 없지만, 일반독자가 큰 그림을 그리기 어려운 것은 당연한 결과다. 몇몇 진화심리론자의 글쓰기 방식도 유사하게 보인다. 아마도 진화의 방식이 행동주의를 닮았기 때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