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형의 집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48
헨릭 입센 지음, 안미란 옮김 / 민음사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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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 천장이라는 말은 아직도 여성의 권리가 남성에 비해 동등하지 못하고 개선할 부분이 많음을 대변해준다. 산업화, 근대화가 이미 많이 진행된 나라에서조차 유리 천장은 분명히 존재하고 있음은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다. 이렇게 보았을 때, 입센의 이 책이 당시의 사회라는 호수에 어느 정도 파문을 주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이 책을 통해서 소설가는 그 시대보다 더 앞을 바라보는 식견이나 직감을 갖고 그것을 표현해주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는 말을 절실하게 느끼게 해주었다.


안티고네 등 그리스 비극을 읽으면서 희곡 형태의 글을 몇번 보았지만, 그 느낌이나 감동은 소설의 형태와는 조금 거리가 있다. 어색함이라고 해야 할까? 소설 형식에 찌들어버린 내가 갖는 이야기의 전형성에 대한 집착이라고 해야 할까?


인형의 집의 주인공인 노라의 모습을 보면 현실의 여성이 아닌, 소설 속의 여성으로서 보기에 무언가 불안정한 모습이 있다. 그 불안정성이 입센의 의도인지, 아니면 희곡 형태로서의 색다름인지, 아니면 이야기를 보면서 앞뒤 관계 이야기의 형식 논리를 추구하는 우스운 나의 습성 중 어떤 것인지 잘 판단이 서지 않지만 분명 그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다시 맨 처음의 여성의 권리로 돌아와보면, 인류의 역사는 차별의 역사라고 보아도 될만한 짓거리를 예부터 지금까지 해오고 있다. , 지역, 피부, 지식, 종교 등 차이의 잣대는 많이 있다. 그리고 우리가 말하는 근대/현대는 이러한 차별의 극복을 가져가야 할 길로 놓고 있다. 그런데, 그 이분법의 극복은 그동안 기득권을 지닌 쪽과 같은 수준으로 다른 쪽을 끌어올리거나, 기득권쪽이 박애주의 등 이타심에 뿌리를 둔 양보 등의 형태로 나타남이 오늘날까지 인류가 답으로 해오고 있는 방법이다. 이제 이러한 차별의 역사도 그 나이테를 늘려가고 있으니 조금은 다른 방법으로 우리의 상상력과 세계를 보는 눈을 바꿔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싶다. 이 세상의 구성 요소를 두개의 극단화된 성격으로 구분해서 그 둘간의 투쟁이나 극복으로 답을 주는 식의 태고부터 가져온 생각이 아닌, 다면체로 그 구성 요소를 나눠봄은 어떨까? 분명 세상은 두개만으로 나누기에는 그 성격의 다양해보이기 때문이다. 이제는 노라도 이렇게 생각하지 않을까? 이야기가 옆으로 좀 새어나갔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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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리지널스 - 어떻게 순응하지 않는 사람들이 세상을 움직이는가
애덤 그랜트 지음, 홍지수 옮김 / 한국경제신문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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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을 보면서 스튜어트 다이아몬드 교수가 써서 한때 바람을 일으켰던 어떻게 원하는 것을 얻는가?’가 떠오른다. 원하는 것을 얻는다는 목적을 위해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한 다양한 방법, 그리고 그 방법을 입증하는 수많은 사례가 등장하는데, 이 책과 그 목적은 달라도 학생을 가르치면서 교수로서 진행했던 다양한 사례와 연구 성과가 아주 비슷하게 등장한다. 그리고 그 성과의 효과는 다양한 계량화를 통해 숫자로 그 권위/당위를 보여준다. 예를 들어 개척자정착자로 시장 참여자를 구분했을때 개척자와 정착자의 실패율의 차이와 평균 시장 점유율의 차이를 숫자로 보여준다. [신생 기업 조사 자료에 따르면 75%의 기업은 너무 일찍 규모를 확장해서 실패했다.] 또한 상식이나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내용에 대한 수많은 반증도 제공한다.[공동의 목표는 집단을 결속시키기 보다 오히려 분열시킨다]. 이렇게 숫자와 상식에 대한 반증 속에서 창조스러운 사람이 어떤 형태인지를 조금씩 정리해준다.[온건한 과격파란 전통과는 거리가 먼 가치를 믿고, 시류를 거스르는 아이디어에 대한 신념을 지니면서도, 주류인 대중에게 주는 충격을 줄이고, 호소력을 높이는 방향으로 그들의 믿음과 아이디어를 제시함으로써 그들의 과격한 성향을 완화시켜야 한다독창화된 아이디어를 실현하려면 때로는 자신의 아이디어가 듣는 사람에게 호소력을 발휘하도록 재구성할 필요가 있다]


이제 분석 대상을 집(가정)으로 눈을 돌려서 어떤 서열이 독창성향이 높을지를 들여다본다.[출생 서열이 낮은 사람들은 위험을 무릅쓰고 독창 아이디어를 수용하는 데 더 열린 자세를 지니고 있다] 서열이 낮은 아이가 이런 성향을 나타내는 건 유전보다는 맏이로 인함이 크다[맏이들은 동생을 상대로 규율을 만들고 권위를 행사하려 하기 때문에 동생들이 이에 반항할 여건이 조성한다.] 부모의 체력(?)도 중요하다.[부모들은 처음 자녀가 생기면 엄격하게 훈육을 하지만 갈수록 너그러워 진다자녀를 자유롭게 풀어주먼, 그 자유를 자신아니 다른 사람을 위험에 빠뜨리는 방식으로 반항하는 데 이용될 수도 있다.] 여기서 아이의 독창성을 키우기 위해 부모가 할 일 등으로 얘기가 넘어가는데, 내용의 주요 몸체로 느껴지지 않으면서도 눈길이 자꾸 가면서 나는 어떻게 적용해볼까 하는 생각을 꽤 오래 하게 만들었다.[행동이 아니라 성품을 강조하면, 사람들은 자신이 하는 선택을 달리 평가한다]


물론 독창성만을 전가의 보도로 말하지도 않는다.[독창성 만으로는 사람들의 호응을 얻을 수 없다. 경영진은 고객이 아이디어를 받아들이게 만들어야 하는데, 그러자면 경영진으로 하여금 그 아이디어가 팔리겠다고 생각하게 만들 무언가가 필요하다]

읽다 보면 글쓴이와 한 목소리를 내기에는 꺼림칙한 느낌을 종종 맞닥뜨린다. 가령 폴라로이드 사는 잘못된 가정 때문에 실패했다는 주장을 생각해보자. [회사 내에는 고객들은 반드시 찍은 사진의 하드 카피를 간직하고 싶어 한다는 공감대가 광범위하게 형성되어 있었고, 핵심 의사결정권자들은 이 가정에 의문을 제기하는 데 실패했다전형의 집단 사고의 사례다. 반론을 활성화시키지 않고 합의를 추구하는 경향 말이다.] 결국 이건 결과를 보고 판단하는 논리지, 결과가 안나왔는데 독창성이라면 모든 결과가 성공이라고 확신할 수 있을까?


기업 중에 나름 집단 사고를 떨쳐내는 시도를 사규화한, 아주 참신한 회사가 등장한다. [신입사원 연수에서 직원들은 회사가 표방하는 원칙을 배우면서 끊임없이 질문을 받는다. 그 원칙에 동의하는가?라고 말이다. 우리는 오랜 세월에 걸쳐 증명되어온 기준이 있다. 그 기준을 따르는지, 이의를 제기하든지, 더 나은 기준을 위해 싸우든지 선택해야 한다.라고 달리오와 함께 회사의 원칙을 설정한 Zack Wieder는 말한다…"인류의 가장 큰 비극은 사람들이 진실이 무엇인지 알아내기 위해 사려깊게 반박하지 못하는데서 초래된다" Dalio는 말하다.] 그런데 직장 생활을 꽤 해왔던 내가 보기에는 학교 교수님이 학교 연구소에서 머리속으로 연구한 듯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기업을 포함한 사회 생활에서 진실은 무엇일까? 때로는 진실이 내 주변 어딘가에 있지만, 때로는 진실과 거짓으로 구분해서 판단이 안되는 곳이 사람의 삶이다. 회사의 경영자가 되면, 이윤이란 잣대로 모든 걸 참과 거짓으로 모든 현상을 가를 수 있을까?

 

책의 내용을 정리하는데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걸렸다. 하나 하나의 사례를 보면 곱씹고 실제 내 삶에도 적용해보자는 생각을 들게 하는 내용이 꽤 많다.


다른 측면에서 이 책의 내용을 나의 잣대로 뜯어서 정리해보면 세가지로 요약하겠다. 첫째, 글쓴이는 수많은 사례와 그에 대해 분석을 담아냈다. 대부분 결과론에 기반한 해석이다. 그렇다면 이 해석을 바탕으로 기업이나 조직을 새로 시작하고, 혁신한다면 경쟁자나 기존 방식보다 생존율이 더 올라갈 것인가? 그건 아무도 보장하지 못한다. 이렇게 되면서 현장(기업)에서는 학교에서의 분석 결과가 현실과 동떨어졌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내용은 굳이 경영학에서만 나오는 논쟁꺼리 그 이상이다. 그렇다면 창업한 스타트업은 어떤 생각을 갖고 있을까? 거기에 어떤 규칙이 있을까? 결국 이렇게 되면 학교 교수님의 현장과 동떨어진 분석으로 취급되면서 순환논리로 빠져드느는 느낌이다. 둘째, 이 책의 내용도 가설의 하나일 뿐이다. 하나의 규칙이나 원리로 말하기에는, 아직 기업 경영이란 분야에는 그 어떤 만고불변의 진리가 없다. 기업 경영에 형이상학을 언급하기에는 아직 시간이 더 필요한걸까? 아니면 이런 철학을 운운할 차원이 아예 아닌 걸까? 셋째, 미국은 비즈니스 분야에 심리학이 상당히 많이 들어와있다. 개인과 집단, 기업과 산업처럼 개별 각론과 총론 차원에서 심리학이 경영의 분석 툴로 넘나들고 있는 것이다. 심리학의 특징은, 아직 그 권위에 대해 반박 논리가 들어가기에는 스스로의 전문성의 장벽을 아주 높게 구축하고 있다는 점이다. (TV나 일반 매체를 보면 어떤 개별 사안에 대해 심리학이 일종의 솔루션을 주면, 그 자체로 이미 이야기는 끝나게 된다. 그에 대한 추가 반론은 거의 없다.) 이제 심리학이 예전 서양철학에서 철학이 담당했던 메타 수준으로 자기 자리를 끌어올리려 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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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인수업 - 나를 넘어 나를 만나다
박찬국 지음 / 21세기북스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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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역사가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오늘날의 우리도 하루 하루 아침에는 허덕이고 저녁에는 방전이 되어 살아가고 있다. 주중의 인생은 회사나 사회에 헌사하고 주말에는 그 헌사로 지친 몸과 마음을 달래기 위해 쉬느라 소중한 내 시간을 쓰게 된다. 그러다가 문득 내가 누구인지, 어떻게 살아야 할지, 지금 이렇게 사는게 과연 맞는지, 이렇게 나를 둘러싸고 내 인생의 앞길에 대해서 고민을 할때가 문득 생긴다. 이때, 우리가 많이 살펴보는 훈수 두는 아저씨의 한 부류가 철학자다. 그리고 글쓴 이는, (자기를 포함한 그 많은 철학자중에서) 니체를 선택한다. 그중에서, 니체의 그 유명한 초인을 빌려서 초인 수업이 이 책의 이름으로 지어져서 우리에게 자기를 드러내었다.


공자의 논어를 보면 나이 50을 넘으면, 그 유명한 지천명이라 했다. 글쓴 이는, 지천명을 보냈고, 철학을 공부한 어른으로서 자기의 삶을 뒤돌아보고 거기서 느낀 스스로의 교훈을 니체의 철학과 함께 뼈대삼아서 한마디 한마디를 풀어나간다. 잠시 글쓴 이의 삶을 뒤돌아보면, 중고등학교 시절의 사상에서 방황이 있었고, 대학교에 와서 맑시즘을 알면서 대안으로 삼아 추구했으나, 이 길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독일로 유학가서 니체를 만나면서 이게 진짜 길이었음을 깨닫고 지금까지 니체를 깊숙히 파고 있는 분이다. 이러한 여정에서 글쓴이가 자신의 방황, 이때 찾은 길찾기에서의 고민을 아주 자세히 쓰시지는 않아서 그런지 몰라도, 니체로 가는 이 방황의 과정은 어디선가 많이 본듯한 고민이다. 왜 이러한 분들은 맑스에 빠져있을 때 스스로가 찾은 길이 어느 정도인지가 궁금한지는 몰라도, 정말 그 사상의 깊이가 궁금할 때가 꽤 있다. 한국에서 인문학자로 길잡이의 자리에 오르려면, 거의 반드시 거쳐가야 하는 필수 과정인가도 싶다. 이런 박교수님의 젊은 날 초상이 니체를 통해 승화되었는지를 상상하며, 니체의 초인수업의 몇 가지를 살펴 보았다.


우리가 몰랐던 행복의 조건은, 장수나 안락한 삶이 아닌 힘의 고양과 증대. 종종 니체와 연결되어 말해지는 힘에의 의지’, 그리고 저항을 초극했다는 느낌 등이다. 니체 철학의 전체 맥락과는 조금 거리가 있더라도, 이런 식의 니체의 주장은, 모든 것을 개인에게 귀속시키는 오늘날의 (신자유주의 하) 자본주의와 유사한 성격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 약간의 거부감이 느껴지고 있다. 힘에의 의지를 풀어가는 방식이 오늘날 자본주의와 조금 다른 점도 있으나 시대를 앞선 니체의 정신이라고 해야 할까? 조금 씁쓸하면서 그의 앞서나감이 역시 중요 철학자는 다르구나 싶었다. 니체의 초인이란, 고귀하고 기품있는 인간으로 자신에 대한 강한 의지를 갖고 있으며 상황의 주인으로서 상황을 압도한다.


그렇다면 초인처럼 의미있게 살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할까? 낙타나 사자가 아닌, 아이처럼 삶을 유희처럼, 매순간 충만함을 느끼며 경쾌하게 살아야 한다고 말한다. 이처럼 정신력을 강화/고양할 때 세계는 다시 아름답게 보일 것이라며더불어 위험하게 사는 것, 가혹한 시련은 나를 단련시키는 최고의 도구로써 운명애(운명을 자신이 성장하는 토대로 이용/승화하는 철학)와 진정한 행복(세계에 감사. 그것을 사랑함으로써 세계와 분열/대립을 넘어선 상태)에 이르게 한다. 마치, 상대를 이기기 위해 내 목을 내놓는 극단의 위험을 전술로 내미는 장수의 마음처럼 보인다.


근대에 자본주의가 자리잡으면서 발전원리로서 등장한 경쟁은, 그 기본 원리가 인류의 발전을 위한 수법으로 고안된 이상화된 툴일지는 모르나, 자본주의가 공고화되면서 출발선이 다른 불공정한 경쟁이 더욱 짙어지는 현실에서 단독의 개별 원리로서의 의미는 이제 퇴색되어 가야 한다고 보여진다. 아무튼 이러한 경쟁에 대해 니체는 긍정의 편에 손을 들어준다. [당신의 적을 경외하라], [경쟁은 투쟁은 만물의 아버지다], [경쟁없는 사회는 발전이 없다] , 경쟁과 투쟁은 모든 것을 남의 탓으로 돌리지 않고, 상대의 승리마저 축하할 수 있는 사랑의 투쟁으로 승화되어야 한다. 그리고, 승화라는 말은 승화의 철학으로 발전한다. , 바람직한 모양새를 갖춘 경쟁과 투쟁으로 건강한 승부욕이 지배하는 사회를 갖춰야 한다. 이 말에는 정말 100% 동의한다. 그런데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이 곳에 가능한 일일까?


신을 죽인 사람으로 불리는 니체는, 그리스도교를 종교와 거의 동등하게 언급하면서 내적 세계에 안주하고 내면의 평화로 도피하는 (에피쿠로스의 보다 진화된) 쾌락주의로 종교를 규정한다. [종교는 연약한 사람들이 만들어낸 허구다] 또한 종교는 무조건 극복 대상이 아닌, 사랑의 힘을 강화,고양시키는 고대 그리스/로마의 종교는 매우 긍정했다. (오히려 신성하게 보았다!). , 인간의 잠재력을 강화하는데 기여하는지에 따라, (기독교가 붕괴한 현실에서) 새로운 이상이 필요했고, 그 자리에 초인이 들어온 것이다. 이때 초인은 예수와 카이사르가 결합된 사람을 가리킨다. 그리고 니체는 초인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나무처럼 살 것을 요구한다.


삶의 위대한 자극제로서 예술은 삶을 변화시켜, 세계와 우리의 삶이 살만한 것이며, 오직 예술을 통해서만 삶은 정당화된다. 바꿔 말하면, 인생을 예술로 만들라고 강조한다. 예술을 경험하면서 인간은 완전한 존재로서의 자기자신(미학의 제1진리와 제2진리)을 깨닫고, 아름다움에 대한 우리의 감정은 우리가 자신에게 느끼는 기쁨과 분리될 수 없음을 힘주어 말한다.


죽음에 대해서는, 죽음은 삶의 끝이 아니라 절정이며 나를 성숙시키는 최고의 기회이므로 자살은 반드시 나쁜 것이 아니고 자신의 삶을 최고로 승화시키는 수단이 될 수 있음을 말한다. [라서 삶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자유롭고 의식적으로 죽음을 선택해야 한다.]

이런 과정을 거쳐 나만의 꽃을 피우라고 한다. [그대는 그대 자신이어야 한다] 이렇게 될 때, 남의 시선에 사로잡힌 노예 상태를 극복할 수 있다.[ 사람들의 다양성을 이해하고 긍정스럽게 이용할 줄 알아야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거짓된 나를 극복하기 위해 보고 생각하는 법을 배우고[생각이나 감정보다 몸을 먼저 설득하라] 약점조차 눈부신 것으로 만들어야 할 것이다. 이때 초인은 자신을 통제/지배할 줄 아는 사람으로 다른 사람이 자신을 실현하는 데 도움을 주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니체의 입을 빌려 오늘날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에 대한 처세서로 등장한 이 책은, 니체를 통해 우리에게 이렇게 사는 방법도 있음을 알려주고 있다. 특히 나만의 꽃을 피우라는 말은, 요즘 내 스스로 깊이 고민하는 내용이라 정말 가슴에 와닿는다. 그리고, 지금까지 내가 생각하고 규정했던 정의에 대해서 아주 색다른 방법으로 다가서는 방법을 통해 니체라는 사람의 매력을 많이 음미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이제 니체가 쓴 책을 보면서 그의 생각에 직접 다가서 봐야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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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의 문 - 2016년 제40회 이상문학상 작품집
김경욱 외 지음 / 문학사상사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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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가의 눈을 갖지 못한 나는 대상으로 선정된 작가의 두 편 소설보다 김탁환 님의 글에 더 눈이 갔다. 내가 좀 더 알고 있기 때문이라는, 내 맘속에 기울어지게 서 있는 판단의 기둥도 얼마간의 역할을 했겠지만, 무엇보다 그 내용을 보고 나서 내린 결정임을 스스로에게 말해두고 싶다.


머리가 명석했던 막내 외삼촌은 명문 고등학교에 입학하고 몸이 안좋아져서 학교를 떠나게 되고, 외할아버지의 앵두밭에서 농사를 짓고 하늘의 별을 보고 앵두와 말을 하고 밤에는 책을 보며 세상을 살아간다. 그런 치숙과 소통을 시작하면서 글쓴이는 외삼촌과 때로는 가깝고, 때로는 먼 사이가 된다. 그리고 그러한 밀물과 썰물같은 관계의 흐름 속에서 시간은 흐르고, 두 사람의 나이테는 각각 다른 형태를 갖춰 나간다. 맨 처음 치숙을 만났을 때 두 사람이 갖는 글이나 세상에 대한 내공은 시간이 가면서 점차 줄어들었다(고 글쓴이는 생각한다.) 하지만 맨 첫글에 적혀 있듯 치숙은 쓰고 읽고 보는 사람이었다. 니체가 강조한, 나를 극복하기 위해 갖출 그 세가지를 모두 갖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끼니를 잇듯 번갈아 셋을 오갔다. 앵두의 시간이라고도 불렀다]


누군가 무언가를 이뤘을 때, 많건 적건 스스로가 아닌 다른 누구에게 빚진 것이 많다. 이름하자면 서로 주체성이라고 해야할까? 인간은 사회 동물이라고 해야 할까? 의도하지 않았으나, 김탁환 선생님에게는 치숙이라는 분이 오늘날의 김탁환이라는 그릇을 만드는데 중요한 도움을 주셨다. 남들이 보는 세속의 성공을 비록 이루지 못한 사람이더라도 누구나가 그런 사람, 그런 일이 있을 것이다.


앵두 나무 밑 평상에 누워, 높고 푸른 하늘을 바라보며 시원한 바람을 즐기는 모습, 여기까지는 누구나가 할 수 있겠지만, 이제 앵두나무와 말을 하고 돌과 인사를 하는 그 지경에 까지 이른 모습은 상상만으로도 부럽고, 그렇게 하지 못하는 내 지금이 아쉽다.


'우리는 어디에서 왔고, 무엇이며, 어디로 가는가?' 치숙이 글쓴이에게 넘긴 평생 써왔고[간절한 질문만이 하찮은 이야기를 경건한 소설로 끌어올리는 법이라고…] 글쓴이를 위해 건네준 글[“너한테 도움이 되라고 줬지”]의 제목이자, 내가 느끼고 생각하는 영원한 주제 중 일부이기도 하다.


이글 말고도 이 책에 담긴 다른 소설을 보면, 아버지나 가족(특히 아이)의 잃어버림, 죽음에 대한 내용들이 나온다. 이 시대 아버지의 의미.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넘어서려 할 때 높은 곳 어딘가에서 지켜보는 거대한 팔루스일 수도 있고, 회사에서 기죽고 사회에서 사오정이나 오륙도니 하면서 지탄받는 아버지일수도, 돈을 벌지 못하면 가족들로부터도 내몰리는 그런 존재가 아버지일 수도 있다. 여기 소설에서 나오는 아버지들은 어떤 아버지일까?

가족의 상실, 세월호 사건은 정말 우리에게 큰 파문이었다. 아직 극복하지 못하고 있고, 언제 극복할지 엄두도 안난다.


이 책을 보면서 몇가지 주제에 대해 깊은 생각을 할 수 있는 뜻깊은 기회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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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카 와오의 짧고 놀라운 삶
주노 디아스 지음, 권상미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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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해 전에 원서를 사놓고 몇페이지 읽고 나서 그만 둔 책을, 우리 글로 나온 책이 있길래 반갑게 다시 만나게 되었다.


이 책을 보면서, 나의 대학교 시절이 떠올랐다. 도미니카 출신의 미국 이민자가 8~90년대 대학교 다닐 때 감성이 나와 크게 다르지 않아서 감정 이입을 많이 할 수 있는 책이었다. 책읽기, 짝사랑, (젊은 청춘으로서) 고민, 거친 시대 상황 등은 비록 단어 하나 하나를 그대로 한국에서 대학생이었던 나와 오스카 와오를 그대로 대비시키기는 어렵지만, 단어의 뜻을 보다 넓게 본다면 나또한 그 소설에 포함된다는 의도로 적은 말이다. 내 쟝르는 사이언스 오페라나 만화가 아닌 소설과 사회과학이었고, 대학시절 내 짝사랑은 몇 명이었으려나..오스카보다는 훨씬 적다. 1990년대 초반 당시의 거칠고 성긴 정치와 사회에 대해 (다른 학생들처럼) 고민은 많이 해봤다.


도미니카, 그리고 아이티의 역사나 사회 현실은 그리 크게 알려져있지 않다. 그나마 아이티는 앞서 큰 지진이 나면서, 그리고 그전에 슈발리에 대통령에 대한 기사를 보면서 조금이나마 지식이 있었지만 도미니카는 프로야구 용병들을 배출하는 카리브 국가 정도가 내 앎의 끝이었다. 거기에 트루히요라는 미치광이 독재자가 30년 이상 국가를 흔들고 그렇게 변태 짓거리를 하고, 온 나라가 그 놈의 죽음 전까지 뒤흔들림을 당하고만 살았는지 몰랐다. 그렇게 암울한 시대 속에서 오스카 와오 집안의 비극이 오스카의 할아버지부터 시작되고, (옮긴 이의 말처럼) 그 비극은 아직도 끝나지 않고 지금까지 흘러가고 있는가 싶다.


자본주의 밑에서, 소설도 하나의 상품이다. 소설을 쓰는 사람은 그걸로 먹고 산다. 그러려면 무엇보다 사람들(소비자)의 관심과 맞아떨어지는 공감대가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이민자의 국가인 미국에는 도미니카, 푸에르토리코, 아이티 출신의 이민자가 많고, 그 이외에도 스팽글리쉬를 쓰는 히스패닉이 그 나라 인구의 꽤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어, 주요 소비자로 역할을 해줄 수 있을 것이겠지만, 한국에서 이 책이 얼마나 읽힐지는 모르겠다. 내가 크게 고민할 바가 아닐 수도 있으나, 우리에게 문화의 다양성은 분명 지금보다 많이 키울 필요성이 커보인다. 그러한 관점에서, 미국이나 유럽이 아닌 다른 문화권을 이해하는 방법으로 이 책이 읽히면 어떨까 생각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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