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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인수업 - 나를 넘어 나를 만나다
박찬국 지음 / 21세기북스 / 2014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인간의 역사가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오늘날의 우리도 하루 하루 아침에는
허덕이고 저녁에는 방전이 되어 살아가고 있다. 주중의 인생은 회사나 사회에 헌사하고 주말에는 그 헌사로
지친 몸과 마음을 달래기 위해 쉬느라 소중한 내 시간을 쓰게 된다. 그러다가 문득 내가 누구인지, 어떻게 살아야 할지, 지금 이렇게 사는게 과연 맞는지, 이렇게 나를 둘러싸고 내 인생의 앞길에 대해서 고민을 할때가 문득 생긴다. 이때, 우리가 많이 살펴보는 훈수 두는 아저씨의 한 부류가 철학자다. 그리고
글쓴 이는, (자기를 포함한 그 많은 철학자중에서) 니체를
선택한다. 그중에서, 니체의 그 유명한 ‘초인’을 빌려서 초인 수업이 이 책의 이름으로 지어져서 우리에게 자기를
드러내었다.
공자의 논어를 보면 나이 50을 넘으면, 그 유명한 지천명이라 했다. 글쓴 이는, 지천명을 보냈고, 철학을 공부한 어른으로서 자기의 삶을 뒤돌아보고
거기서 느낀 스스로의 교훈을 니체의 철학과 함께 뼈대삼아서 한마디 한마디를 풀어나간다. 잠시 글쓴 이의
삶을 뒤돌아보면, 중고등학교 시절의 사상에서 방황이 있었고, 대학교에
와서 맑시즘을 알면서 대안으로 삼아 추구했으나, 이 길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독일로 유학가서 니체를 만나면서 이게 진짜 길이었음을 깨닫고 지금까지 니체를 깊숙히 파고 있는 분이다. 이러한 여정에서 글쓴이가 자신의 방황, 이때 찾은 길찾기에서의 고민을
아주 자세히 쓰시지는 않아서 그런지 몰라도, 니체로 가는 이 방황의 과정은 어디선가 많이 본듯한 고민이다. 왜 이러한 분들은 맑스에 빠져있을 때 스스로가 찾은 길이 어느 정도인지가 궁금한지는 몰라도, 정말 그 사상의 깊이가 궁금할 때가 꽤 있다. 한국에서 인문학자로
길잡이의 자리에 오르려면, 거의 반드시 거쳐가야 하는 필수 과정인가도 싶다. 이런 박교수님의 젊은 날 초상이 니체를 통해 승화되었는지를 상상하며, 니체의
초인수업의 몇 가지를 살펴 보았다.
우리가 몰랐던 행복의 조건은, 장수나 안락한 삶이 아닌 ‘힘의 고양과 증대’다. 종종
니체와 연결되어 말해지는 ‘힘에의 의지’, 그리고 저항을
초극했다는 느낌 등이다. 니체 철학의 전체 맥락과는 조금 거리가 있더라도, 이런 식의 니체의 주장은, 모든 것을 개인에게 귀속시키는 오늘날의 (신자유주의 하) 자본주의와 유사한 성격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 약간의
거부감이 느껴지고 있다. 힘에의 의지를 풀어가는 방식이 오늘날 자본주의와 조금 다른 점도 있으나 시대를
앞선 니체의 정신이라고 해야 할까? 조금 씁쓸하면서 그의 앞서나감이 역시 중요 철학자는 다르구나 싶었다. 니체의 초인이란, 고귀하고 기품있는 인간으로 자신에 대한 강한 의지를
갖고 있으며 상황의 주인으로서 상황을 압도한다.
그렇다면 초인처럼 의미있게 살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할까? 낙타나
사자가 아닌, 아이처럼 삶을 유희처럼, 매순간 충만함을 느끼며
경쾌하게 살아야 한다고 말한다. 이처럼 정신력을 강화/고양할
때 세계는 다시 아름답게 보일 것이라며…더불어 위험하게 사는 것, 가혹한
시련은 나를 단련시키는 최고의 도구로써 운명애(운명을 자신이 성장하는 토대로 이용/승화하는 철학)와 진정한 행복(세계에
감사. 그것을 사랑함으로써 세계와 분열/대립을 넘어선 상태)에 이르게 한다. 마치, 상대를
이기기 위해 내 목을 내놓는 극단의 위험을 전술로 내미는 장수의 마음처럼 보인다.
근대에 자본주의가 자리잡으면서 발전원리로서 등장한
경쟁은, 그 기본 원리가 인류의 발전을 위한 수법으로 고안된 이상화된 툴일지는 모르나, 자본주의가 공고화되면서 ‘출발선이 다른 불공정한 경쟁’이 더욱 짙어지는 현실에서 단독의 개별 원리로서의 의미는 이제 퇴색되어 가야 한다고 보여진다. 아무튼 이러한 경쟁에 대해 니체는 긍정의 편에 손을 들어준다. [당신의
적을 경외하라], [경쟁은 투쟁은 만물의 아버지다], [경쟁없는
사회는 발전이 없다] 단, 경쟁과 투쟁은 모든 것을 남의
탓으로 돌리지 않고, 상대의 승리마저 축하할 수 있는 사랑의 투쟁으로 승화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 ‘승화’라는 말은 ‘승화의 철학’으로
발전한다. 즉, 바람직한 모양새를 갖춘 경쟁과 투쟁으로 ‘건강한 승부욕이 지배하는 사회’를 갖춰야 한다. 이 말에는 정말 100% 동의한다.
그런데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이 곳에 가능한 일일까?
신을 죽인 사람으로 불리는 니체는, 그리스도교를 종교와 거의 동등하게 언급하면서 ‘내적 세계에 안주’하고 ‘내면의 평화로 도피’하는 (에피쿠로스의 보다 진화된) 쾌락주의로 종교를 규정한다. [종교는 연약한 사람들이 만들어낸 허구다] 또한 종교는 무조건 극복
대상이 아닌, 사랑의 힘을 강화,고양시키는 고대 그리스/로마의 종교는 매우 긍정했다. (오히려 신성하게 보았다!). 즉, 인간의 잠재력을 강화하는데 기여하는지에 따라, (기독교가 붕괴한 현실에서) 새로운 이상이 필요했고, 그 자리에 초인이 들어온 것이다. 이때 초인은 예수와 카이사르가
결합된 사람을 가리킨다. 그리고 니체는 초인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나무처럼 살 것을 요구한다.
삶의 위대한 자극제로서 예술은 삶을 변화시켜, 세계와 우리의 삶이 살만한 것이며, 오직 예술을 통해서만 삶은 정당화된다. 바꿔 말하면, 인생을 예술로 만들라고 강조한다. 예술을 경험하면서 인간은 완전한 존재로서의 자기자신(미학의 제1진리와 제2진리)을 깨닫고, 아름다움에 대한 우리의 감정은 우리가 자신에게 느끼는 기쁨과 분리될 수 없음을 힘주어 말한다.
죽음에 대해서는,
죽음은 삶의 끝이 아니라 절정이며 나를 성숙시키는 최고의 기회이므로 자살은 반드시 나쁜 것이 아니고 자신의 삶을 최고로 승화시키는
수단이 될 수 있음을 말한다. [라서 삶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자유롭고 의식적으로 죽음을 선택해야 한다.]
이런 과정을 거쳐 나만의 꽃을 피우라고 한다. [그대는 그대 자신이어야 한다] 이렇게 될 때, 남의 시선에 사로잡힌 노예 상태를 극복할 수 있다.[ 사람들의 다양성을
이해하고 긍정스럽게 이용할 줄 알아야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거짓된
나를 극복하기 위해 보고 생각하는 법을 배우고[생각이나 감정보다 몸을 먼저 설득하라] 약점조차 눈부신 것으로 만들어야 할 것이다. 이때 초인은 자신을
통제/지배할 줄 아는 사람으로 다른 사람이 자신을 실현하는 데 도움을 주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니체의 입을 빌려 오늘날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에 대한 처세서로 등장한 이 책은, 니체를 통해 우리에게 이렇게 사는 방법도 있음을 알려주고 있다. 특히 나만의 꽃을 피우라는 말은, 요즘 내 스스로 깊이 고민하는
내용이라 정말 가슴에 와닿는다. 그리고, 지금까지 내가 생각하고
규정했던 정의에 대해서 아주 색다른 방법으로 다가서는 방법을 통해 니체라는 사람의 매력을 많이 음미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이제 니체가 쓴 책을 보면서 그의 생각에 직접 다가서 봐야 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