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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버거 지음, 최민 옮김 / 열화당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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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유명 미술평론가인 John Berger의 책이다. 미술 작품, 유화, 광고 등 주로 눈으로 보는 문화에 있어 새로운 눈을 말해주고 있다. 앞부분은 주로, 그리고 다른 부분에도 벤야민의 흔적을 느낄 수 있는 책이다.


처음부터 그림이 나오고 평론 풍을 이야기는 시작한다. [평소에 다른 사람들을 관찰하는 방식, 즉 그들의 몸짓이나 얼굴 생김새, 더불어 행동방식, 사회 관습이나 의례 등등 여러 가지를 보고 얻은 경험에 비추어, 우리가 사람을 보는 방식과 프린스 할스가 인물을 보는 방식이 일치할 때 그의 묘사 방식을 우리가 받아들인다는 말이다. 이러한 일이 가능한 것은 사회관계나 도덕 규범이라는 측면에서, 아직은 할스가 살았던 사회와 어느 정도 유사한 성격을 지닌 사회 속에서 우리가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점 때문에 할스의 초상화들이 심리학이나 사회학의 절박함을 지닌 것으로 보이게 된다. 우리가 그림 속에 그려진 사람들이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을 강하게 갖는 것은, 유혹자로서의 화가의 솜씨 때문이 아니라 바로 이점 때문이다.] 무언가를 공감하려면 어느 정도 시대의 비슷함이 묶여질때 비로소 가능하다는 말인가?

내가 가장 익숙한 미술 단어인 원근법, 원근법의 관찰자는 잠시나마 신이 된다. 그를 둘러싼 모든 것을 자기를 향하도록 만든다. 그는 그렇게 자기가 보이는 모든 것의 주인이다. [원근법의 관습에 따르면 시각의 상호 작용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신에게는 타인들과 자신과의 관계를 생각할 필요가 없다. 신은 그 자신이 상황 전체이기 때문이다. 이 원근법의 내부 모순은 신과는 달리 단지 한 장소, 한 순간에만 존재하는 하나의 관찰자를 향해 현실의 모든 이미지가 정돈된다는 점에 있다.]


그리고 예술의 뒤에 도사리고 있는, 권력을 말한다. [미술이란 그것이 지닌 유일무이한 변함없는 권위를 통해 다른 형태의 권위를 정당화시켜 주는 역할을 한다. 미술은 불평등을 고상한 것으로 보이게 하고, 위계질서를 짜릿한 긴장감을 주는 것으로 만든다. 소위 국가의 문화유산이란 개념은 현대의 사회 시스템과 그것이 우선으로 중요시하는 것을 찬양하기 위해서 미술의 권위를 이용하는 것이다.] 한국의 전통 표현을 빌리면, 참으로 좌파스타일이시다. 하지만 이렇게 보는 눈을 가진 권위자가 있고 존중받는 그들을 보면, 한국과 시차가 언제쯤 극복될 것인가?

적어놓지 않으면 기억하기 힘든, 수많은 미술 작품이 있다. 그중 우유를 붓는 여인도 있다. [원작(얀 페르메이르<우유를 붓는 여인>)에는 그 그림에 대한 어떠한 정보를 통해서도 느낄 수 없는 침묵과 고요함이 있다. 심지어 벽에 걸린 복제물도 이 점에서 원작을 따라갈 수 없는데, 왜나햐면 원작이 지닌 침묵과 고요함이라는 것은 실제 물질 즉 물감에 스며 있어서, 보는 이는 그 물질성을 통해 화가의 몸짓이 남긴 흔적을 따라가 볼 수 있기 때문이다세잔이 화가의 입장에서 비슷한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세상의 삶에서 한 순간이 지나간다! 그 순간을 있는 그대로 그리고 나머지는 모두 잊어버리는 것! 바로 그 순간이 되고, 예민한 감광판이 되는 것우리가 본 것을 이미지로 남기고, 우리 시대 전에 나타났던 것들은 모두 잊어버리는 것…" 그림에 그려진 순간이 눈 앞에 바로 나타났을 때 그것을 어떻게 그리느냐 하는 것은 우리가 미술에서 무엇을 기대하고 있는가에 달려 있고, 그러한 기대는 우리가 복제를 통해서 체험한 그림들의 의미가 어떤 것이었느냐에 달려 있다.] 그리는 사람에게 그리려는 어떤 순간이 나타나고, 거기에 그 사람의 기대가 더해져서 나타나는데, 그 기대는 그동안 어떤 경험을 했고 그 경험의 의미가 어땠느냐에 의해 나타날 것이다라는 말인가?


기존 혹은 전통이라고 묶어왔던 시대와 구별하는 현대 미술의 특징이 나온다. [현대의 복제 기술이 해낸 것은 예술의 권위를 파괴하고 예술을 그 어떤 보호영역으로부터 떼어낸 일이다. 역사상 처음으로 예술 이미지가 순간이고, 도처에 존재하고, 실체가 없으며, 어디서나 얻을 수 있고, 무가치하며, 자유로운 것이 되었다. 이제 예술 이미지는 마치 언어처럼 우리 주위를 둘러 싸고 있다. 예술 이미지는 삶의 주류에 합류했는데, 이제 예술 자체의 힘만으로는 더 이상 삶을 지배할 수 없게 된 것이다.] 벤야민의 느낌을 풍기는 글로 보인다. 예술, 그림 그 자체가 그 동안 가졌던 권위는 현대의 복제 기술로 극복되었다. 전에는 이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그림을 갖고 있음이 의미하는 권력, 힘이라는 말이 가지는 가치가, 하나밖에 없는 그림과 닮은 꼴들이 나타나서 그 힘이 무너진 것이다. 그건 현대 기술의 업적이나, 그 뒤에 숨어있는, 현대 사회와 기술이 갖는 교묘한 메타포-이제 이런 것들을 갖고 있으니 그 옛날 이루지 못한 상층부로의 진입이 가능하게 되었다는 달콤한 뱀의 목소리-앞에서 우리는 이브가, 아담이 되었다. [과거의 예술은 더 이상 과거의 형태로 존재하지 않는다. 권위는 사라지고, 그 자리에 이미지의 언어가 들어섰다. 이제 중요한 것은 그 언어를 누가 어떤 목적으로 사용하는가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질문은 복제본의 저작권 문제, 미술 매체와 출반사의 소유권 문제, 공공 미술관이나 박물관의 정책 같은 문제로 이어진다. 이런 문제들은 극히 작은 전문성이 높은 문제인 것처럼 보이는데, 이 책의 목적 중 하나는 현재의 위기가 훨씬 광범위하다는 것을 보여 주는 데 있다.스스로의 과거와 단절된 개인이나 계급은 역사 속에서 자신의 위치를 찾을 수 있는 개인이나 계급에 비해, 선택이나 행동을 함에 있어 훨씬 덜 자유롭다. 바로 그 점이 과거의 예술 전체가 이제 정치 문제가 된 이유이다.] 새로운 세력이 기존 세력이 갖고 있는 힘의 구도 속에서 자기의 새로운(그리고 보다 나아진) 모습을 가져가기가 정말 어렵다는 말일지


미술 속에 나타나는 여인들로 넘어가보자. [여자로 태어난다는 것은 주어진 한정된 공간에서, 남자들의 보호관리 아래 태어난다는 것을 의미했다. 여자들의 사회 존재는 이렇게 제한된 공간 안에서 보호, 관리를 받으며 그 여자들 나름대로 살아남으려고 머리쓰고 애쓴 결과로 이룩된 겻이다. 그러나 그 대가를 치르기 위해 여자의 자아는 찢겨 두 갈래로 갈라진다. 즉 여자는 거의 계속해서 스스로를 늘 감시하고 감독해야 한다는 말이다. 스스로 갖고 있는 자신의 이미지는 항상 그녀를 뒤따라 다닌다. 방을 가로질러 갈 때, 또는 아버지가 사망하여 울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머릿속에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아주 어린 시절부터 그녀는 자기 자신을 끊임없이 감시하도록 교육받고 설득당해 왔던 것이다. 그리하여 결국 여자는 한 여자로서의 정체성이 이렇게 감시하는 부분과 감시당하는 부분이라는, 서로 분명히 구별되는 두 구성요소로 이루어져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 여자는 자기 존재의 모든 면과 자기가 하는 모든 행동을 늘 감시해야 한다.왜냐하면 여자가 타인에게 어떻게 보이느냐 하는 것이, 그녀 인생의 성공 여부가 걸려 있는 가장 중요한 사항이라고 보통 생각되기 때문이다. 한 여자가 자기 스스로의 존재를 맞이하여 갖는 생각은 이렇게 타인에게 평가받는 자기라는 감정으로 대체된다.] 현실에서 여자들의 모습을 보면서 왜 그러는지 궁금할 때가 수두룩한데, 이론으로 이 글에 대해서는 100% 공감한다. 그 말은 다음의 구절로 더 잘 요약이 된다. [이야기를 단순화하면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남자는 행동하고 여자는 자신의 모습을 보여준다. 남자는 여자를 본다. 대부분의 남자들과 여자들 사이의 관계는 이런 식으로 결정된다. 여자는 남자가 보는 그녀 자신을 관찰한다. 여자 자신 속의 감시자는 남성이다. 그리고 감시당하는 것은 여성이다. 그리하여 여자는 자신을 대상으로 바꿔 놓는다. 특히 시선의 대상으로…] 그렇다면 남자, 여자로 태어났다는 그 말미암음이 감시자와 스스로 감시받는 자의  구도를 만든 근본 원인일까?


[화가가 벌거벗은 여성을 그린 이유는 벌거벗은 여자를 바라보는 것이 즐거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자의 손에 거울을 쥐어주고 그림 제목을 허영이라고 붙임으로써, 사시상 자신의 즐거움 때문에 벌거벗은 여자를 그려 놓고는 이를 도덕상 비난하는 시늉을 하는 것이다.] 이제 누드로 들어간다. 남자로서 흥미가 가는 그림의 형식이다. 그리고 여기도 남자의 보기, 그것도 즐겁고 보기가 개입한다. 그런데 그 즐거움을 즐거움이라 하지 않고, 여자로 인해 나타나는, 어쩔 수 없이 보는 즐거움으로 꼬아서 이야기한다. [누드를 그린 보통의 유럽 유화에서 주인공은 절대로 그림 속에 등장하지 않는다. 주인공은 그림 앞에 있는 관객이며, 남자로 상정된다. 모든 것이 그를 향하고, 모든 것이 그가 거기에 있는 결과인 것처럼 보여야 한다. 그림 속 인물이 누드가 되는 것은 그를 위해서이다. 그러나 그는 분명히 낯선 사람이고, 여전히 옷을 걸치고 있다.] 처음에서 누드까지 보면 거의 니체의 힘에의 의지가 유럽의 그림세계를 지배한 담론의 압축이라고 여겨 진다. 철저하게 권력을 움켜진 남성이 그림의 담론 세계를 지배한다. [유럽의 누드 예술 형식에서 화가와 관객은 보통 남자이며 대상으로 취급받는 인물은 보통 여자다. 이런 불평등한 관계는 우리 문화에 아주 깊히 각인되어 있어 지금까지도 많은 여자들의 의식을 형성한다. 남자들이 여자에게 요구하는 것을 여자 스스로도 자신에게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도 남자들이 여자를 보는 것과 마찬가지로 자신들의 여성성을 살펴본다.] 이런 내용은, 이 책의 제목인 다르게 보기의 취지와 달리, 주류와 같게 보기로 보인다.


자산으로서 그림의 의미는 자본주의에서 가장 중요한 덕목이랄까? [레비 스트로스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물건의 소유자 입장에서나 심지어 그것을 구경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다 같이 이렇게 탐욕스럽게 물건을 소유하려는 욕망을 노골화시켜 드러내는 것이, 서구문명의 미술에서 가장 두드러진 특색 가운데 하나로 생각된다."] 근대화의 특징 중 하나인 개인의 재산을 보호하는 유산은 그림에서도 명확하게 나타난다. [레비 스트로스는 또다시 그림 컬렉션이 수집가의 자존심과 자기애를 확인해주는 방식에 대해 이야기한다.. "르네상스 시기의 예술가에게 회화는 앎의 도구였을 수도 있지만 또한 소유의 수단이기도 했다. 르네상스 회화를 이야기할 때, 우리는 피렌체와 그 밖의 지역에 어마어마한 부가 쌓여 있었기 때문에 그런 회화가 가능했다는 점, 그리고 부유한 이탈리아 상인들은 화가들을 일종의 대리인으로 봤다는 사실을 잊어는 안된다. 대리인으로서 화가들은 이탈리아 상인들로 하여금 자신들이 세상의 아름다운 것과 욕망의 대상이 되는 것들을 모두 소유하고 있다는 확신을 가질 수 있게 해 주었다. 피렌체의 궁전에 쌓인 그림들은 하나의 소우주를 대변하고, 그 소우주 안에서 독점 소유주는 예술가 덕분에 쉽게 손이 닿을 수 있는 곳에, 그리고 가능한 한 가장 현실의 형태로, 자신과 관련이 있는 세상의 모든 면모를 재창조할 수 있었다."] 이 세상 그 어떤 것도 자본과 이미 연계되어 있었다.


앞서 얘기와 조금 다른 말이지만 서구의 고급 담론에 엮인 분야에 공통으로 검토할 내용이 있다. [대략 열여섯 살때부터 전통이 요구하는 바에 따라 이에 적합한 작업 방식을 공부했던 도제나 학생이 예외의 화가가 되려면, 자기 나름의 독자 시각이 중요함을 깨닫고 전통 관습이 요구하는 것으로부터 벗어나 자신의 독특한 시각을 키워 나가야만 한다. 혼자 힘으로 자기가 이제까지 배워온 예술의 규범에 맞서야만 하는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화가로서의 시각을 거부하는 화가로 스스로를 생각해야만 한다. 이 말의 의미는 그동안 그 누구도 예측할 수 없었던 어떤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얼마나 큰 노력이 필요한지는 렘브란트의 자화상 두점을 보면 짐작해 볼 수 있다.] 이게 유럽에서 미술 뿐 아니라 주요 학문의 학풍이 아닐까?


40년 전에 쓰여진 책의 내용이라 보면, 아직 광고가 스스로의 독자성을 갖지 못한 상태에서 그 삶의 길을 앞서의 그림 문화에서 많이 따왔다는 말로 들린다.[유화와 광고 사이에는 특별한 작품의 인용 이상의 훨씬 더 깊은 연속성이 있다. 광고는 굉장히 많은 부분을 유화라는 언어 형식에 의존하고 있다. 그것은 같은 것에 대해 같은 목소리로 얘기한다. 때때로 우리 눈에는 유화의 언어와 광고의 언어가 매우 비슷하게 보여서, 마치 온갖 이미지 중 거의 동일한 이미지를 나란히 늘어놓고 '찾았다'하고 외치는 게임이라도 할 수 있을 것처럼 여겨진다.]


[광고가 르네상스 이후 유럽의 시각 예술을 대신한다는 생각은 잘못이다. 그 시각예술이 마지막으로 소멸해가는 형태가 광고인 것이다. 본질상 광고는 무언가에 대한 향수다. 그것은 과거를 미래에 팔아야만 한다. 광고는 광고 자체가 요구하는 기준을 스스로 채울 수 없다. 게다가 광고가 가치의 기준으로 삼는 것은 모두 복고와 전통에 근거를 둔다. 광고가 단순히 당대의 언어만을 사용한다면 그것은 확신과 신용을 모두 잃게 될 것이다.] 버거씨는 광고가, 앞서 내가 해석한 시기의 문제가 아니라 그 자체가 기생의 성격으로 굳혀서 말한다. (유화)이 없이 스스로 살아갈 수 없는…[광고의 목적은 광고를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어딘가 자기의 현재 생활방식이 만족스럽지 못한 느낌을 갖도록 만드는 데 있다. 사회의 일반 생활방식에 대해서가 아니라, 그 사회 안에서의 자신의 개인 생활방식에 대해 불만을 느끼도록 만드는 것이다. 광고에서는, 만일 광고하는 물품을 누군가가 구입한다면 그 사람의 생활이 보다 나아질 것이라고 얘기한다. 광고는 그 사람의 현재 상태가 아닌, 그보다 더 나은 다른 상태를 제시한다.] 이거 진짜 이상한 형태의 기생충을 떠올리게 한다. 기생충이 뇌로 들어가, 그 사람의 머리를 이상하게 뒤틀고 지금과는 다른 몸짓을 하게 계속 뒤에서 조종하는, 영화나 만화속의 외계인이랄까? 그런 측면에서 버거씨의 이런 해석은, 이성주의의 흔적이 아직은 남아있어 보인다. 현대의 광고는 그 자체로서가 아니라 다른 대상을 포획해서 그 사람을 바꾸려는, 아주 이상한 그 무엇일 뿐이라는…[광고에 의하면 현재란 불충분하다고 단정짓고 얘기된다. 유화는 영원히 남는 기록이라고 생각되어 왔다. 그림이 그 소유자에게 주는 기쁨 중 하나는 그것이 자신의 현재 이미지를 미래의 후손에게 전해줄 수 있다는 생각이다. 따라서 유화는 자연히 현재 시제로 그려져 있다. 화가는 실제에서건 혹은 상상에서건 자기가 보는 것을 그렸다. 반면에 순간의 쓰임새 때문에 만들어진 광고의 이미지는 미래 시제만을 사용할 뿐이다. 이것으로 당신은 장차 이성의 인기를 한 몸에 모을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당신의 관계는 이제 한결 행복하고 빛나는 것이 될 것이다.] 시뮬라르크를 떠올리게 한다.

[의미없는 노동시간의 연속으로 이루어진 끝없는 현재는 꿈속에서 미래에 의해서 상쇄돼 버린다. 이 미래의 꿈 속에서 노동하는 순간의 피동성은 상상의 행동에 의해 대치된다. 백일몽 속에서 피동의 남녀 노동자는 능동의 소비자로 바뀐다. 노동하는 자아는 소비하는 자아를 선망하는 것이다.] 결국 앞서 말한 장치와 의도는, 과거보다 나아졌다고 착각하고 있는 노동계급에게 앞으로 더 나아질거라는 환상을 계속 던져주고, 그 환상을 소비에서 찾도록 유도한다는 말인듯 싶다.

마지막으로 이책을 압축하면 바로 이것이다! [광고는 소비를 민주주의의 대체물로 만들어냈다.]

 

이 책을 마무리하자면, 벤야민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함이 슬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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